노동의 희망을 노래한 시인, 송경동

[이원재의 예술,대화] “시인은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

시인이라...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자 직업이지만 참으로 낯설고 어색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이 살벌한 무한경쟁 시대에서, 이 분주하고 어수선한 한국 사회에서 시인은 부조화 그 자체가 아니던가. 나 역시 송경동 시인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을 하던 어느 날, 홍대 앞 클럽 빵에서 그의 시가 귓속에 울려 퍼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가 특유의 느릿하고 어눌한 목소리로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그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의 일부분)를 낭독하는 순간, 나는 너무나 오래 동안 내 삶에서 ‘시’를 빼앗긴 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울했다. 욕망은 물론이고 낭만과 추억조차 수탈당해야 하는 이 살벌한 자본주의에서, 나 자신의 시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불쑥 솟았다. “서정에도 계급성이 있”는 시대지만, 내 감성을 스스로 착취하는 삶을 조금은 더 경계하기로 결심했다.

송경동 시인은 인터뷰 내내 희망의 버스에서부터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투철한 계급성을 진심으로 드러냈지만, 나는 이 인터뷰를 읽은 그 누군가가 오랫동안 애써 잊고 살았던 자신의 낭만과 서정을 되돌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송경동이 시라는 동지와 함께 시대를 역행하며 살아가는 이유이며,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 모두의 또 다른, 중요한 복수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맙고 미인한 선배, 김진숙”

이원재 최근 가장 집중하고 있는 ‘희망의 버스’부터 이야기해보자. 희망의 버스를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참고로 이건 연예인들이 영화개봉 앞두고 토크쇼에 나오는 것처럼 희망의 버스를 홍보하라는 질문이다.(웃음) 물론 이 인터뷰가 나갈 때면 두 번째 희망의 버스를 마치고 난 이후겠지만.

송경동 희망의 버스는 처음에 우리 주변에 힘들게 살고 있는 해고노동자들이라도 마음의 위안이나 따뜻함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랬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문화제,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문화제, 발레오공조코리아 노조의 프랑스대사관 앞 농성, 재능교육 노동자들... 너무도 힘들어 하고 답이 안보여 간혹 절망스러워하기도 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을 가질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김진숙 선배는 그 크레인 위에서 얼마나 힘들까, 외롭고 힘들게 답이 없는 싸움을 몇 개월째 하고 있는데, 어떻게든 연대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상황이 절망스럽지만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희망을 만들어 보자, 우리의 희망을 얘기하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을 해보자, 그런 마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희망의 버스를 제안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참여하면서 1차 희망의 버스의 규모가 커졌다. 결정적으로는 한진중공업 담벼락을 그 많은 사람들이 넘으면서 해방감도 느꼈고 그런 사람들의 의지와 연대에 감동되었던 것 같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희망이라는 게 있는 현실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것을 꿈꿔보는 것이기 때문에 갔다 온 지 3일 만에 다시 2차 희망의 버스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185일째 되는 날 185대의 희망의 버스를 구성해보자는 꿈과 희망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게 사람들 마음에 잘 전달되었는지, 사회각계가 나서고 있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이하 비없세) 카페에 평범한 사람들조차 가족단위로 모이고 있다. 요청해서 만난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김진숙도 구하고 한진노동자들도 보호하자며, 2차 희망의 버스에 모이는 사회연대의 마음을 함께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원재 두 번째 희망의 버스를 통해서 김진숙 씨가 함께 내려올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지금 김진숙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송경동 무엇보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김진숙 선배는 지금 절망과 패배감, 좌절 속에서 체념 할지도 모르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지키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당하고 비정규직이나 도시빈민이 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항거하고 그것에 질문을 던지고, 그 구조조정을 막아서는 보루로서의 의미가 있다. 85호 크레인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진숙이라는 사람의 삶 자체가 빈농의 딸로 18세에 미싱공으로 시작해 시내버스안내양으로 살다가 25세에 조선소 여성용접공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해방이후 수 십년 동안 겪었던 노동자의 수난사이자 저항사이다. 그런 전형적인 삶을 살아온 그가 한국사회에 그 엄청난 문제를 던지는 것이다. 김진숙 선배는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거쳐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을 모두 건거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결의하고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도 그런 투쟁을 던지면서 흔들리지 않고 품위를 지키면서 크레인 위에서 상추씨를 뿌려서 키워 먹겠다는 그런 언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과정에 어려움이 많은 걸로 아는데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고 사람의 품위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에 고맙고도 미안하다. 또한 수고하셨다는 말, 끝까지 최선을 다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고 싶다. (과거에) 결정적인 국면에서 저들에게 이용당하거나 포기하거나 7, 8부 능선에서 무너졌던 일이 많았는데, 끝까지 존엄과 새로운 정신을 지키기 위해 굴하지 말고 지켜주셨으면 좋겠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시인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이원재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해보자. 송경동은 시인이다. 시인으로서 시가 죽었다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꼭 노동시나 비판적인 시까지는 아니라도 시 자체가 존재하기 힘든 시대에서 시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송경동 시인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특히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겠나. 현실에 대한 얘기는 많이 안한다. 아직 오지 않은 것, 덜 밝혀진 것, 용기나 이런 걸 얘기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인 역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중 한 사람인데, 험악한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사는 한 사람일거고. 어쩌다 보니 꿈을 꾸는 시인이 되었다.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여러 문제들은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문화 때문인데,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살기 힘들게 만든다. 이런 시대다 보니 꿈을 꾸는 시인으로서는 진정한 게 어떤 것인가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인도 일반노동자와 같다. 노동자가 같이 써야 할 재화나 물자를 생산해 주는 것처럼, 시인도 노동자와 같은데 물질은 아니지만 꿈과 상상력과 진지한 마음과 나를 드러내서 모순을 보여주고 보고해주는 사람이다. 사회적 노동에 포함되어 있는 한 사람이다. 노동자, 농민, 광부 모두가 소중한 것을 정성스럽게 만들듯이 시인도 물질은 아니지만 또 다른 삶에 필요한 정신과 상상력을 왜곡되지 않게 생산하는 사람 아닐까 싶다.



이원재 시는 비약의 언어다. 추상성을 특징으로 하는 장르이고. 하지만 송경동의 시는 매우 구체적이며 오히려 시적 정의를 더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굳이 시를 자신의 무기로, 시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송경동 어려서는 악동이고 문제아였는데 중학교 때 여선생님이 ‘봄비’라는 주제로 시를 써봐라 했다. 학교 숙제로 시를 써서 갔는데 그 선생님이 학생들 많은데서 나를 칭찬해 주셨다. 부모님들이 힘들고 일이 많아 잘 돌봐주지 못했는데, 어려서 귀여움도 돌봄도 못 받았지만 선생님의 칭찬 한번이 굉장히 기뻤다. 그래서 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를 좋아했다. 관계나 상황이 시인을 만들어 줬다고나 할까... 나중에 현장 생활하고 소년원에도 갔다 오고 그 후에 건설 일용직 노동자로 살았으니까... 그 삶들이 힘들었는데 글 쓰는 건 돈 없어도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는 거더라. 그 과정에 그늘지고 힘들었는데 소외의식도 있고... 그래서 내 안에 할 이야기가 많이 쌓였다.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서도 뭔가를 얘기해 보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글을 통해서 내가 해보고 싶은 얘기, 겪었던 사람 얘기도 해보고 싶고, 노동의 쳇바퀴가 아니라 가끔 나를 돌아보고 세계와 관계에 대해 고민도 해보고 싶은 게 사람인데 그런 게 자연스럽게 모여서 시인되었다.


“시란, 현실을 넘어가는 다른 세계의 꿈을 말하는 것”

이원재 시인으로 살아가는 게 더구나 노동시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송경동 외롭기는 하다. 모든 가치 기준이 자본주의인 현실에서 다른 꿈 얘기하고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외롭고 힘들다. 그렇지만 이럴 때 그런 게 더 필요치 않나.

시는 추상적이라고 했는데... 1980년 초중반에 박노해가 ‘노동의 새벽’ 같은 시를 썼는데, 거기에는 고도의 추상이 들어가 있다. 금기시되는 노동자라는 사회적 계급을 얘기하고 노동해방의 꿈을 이야기하는 고도의 추상성이다. 시가 어렵고 고도의 추상이라는 것은 독해가 되냐 안되냐, 혹은 멀리 있는 무언가의 이야기냐가 아니라 현실을 넘어가는 다른 세계의 꿈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거나 꼬여있거나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전시대의 김수영 같은 시인은 최소한의 시민정신과 독재시대를 얘기했던 것이고, 신동엽 시인은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시를 통해 발굴했다. 역사에 묻혀 있던 것을 끄집어내는 것, 이게 시의 추상이지 뜬구름 잡거나 독해가 안되는 무엇, 언어가 어려운 것이 시의 추상성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의 시도 그런 추상에 도달하고 싶다. 사회관계 속에서 인간의 꿈이 어떤 것인가를 얘기해 보고 싶다.



이원재 평화로운 시대라면 어떤 시를 쓰고 싶나? 개인적으로 낭만적인 사랑시도 잘 쓴다고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송경동 인간은 사랑의 마음, 연민, 연대의 마음을 갖고 있다. 기쁨과 환희, 눈물 이런 것들이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부분인데 그 모든 시를 써보고 싶다. 진정한 눈물, 환희, 살아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쓰고 싶다. 아프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를 넘어서는 시를 써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내 시에서 투쟁이나 해방과 같은 그런 단어는 잘 안 쓴다. 구로노동자문학회 때부터 근 20년 넘게 노동자 문예운동을 하고 있지만 혁명이라는 단어는 거의 쓰지 않았다. 두 번째 시집에 혁명이라는 단어가 딱 한번 시 제목에 들어갔다. 하지만 혁명에 대해서 교조적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함부로 얘기하지 못했던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꿈에 대해 스스로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자신 있게 써볼 수 있을 때가 왔으면 좋겠다. 아직도 부족하다. 함부로 안 쓴다. 과정에 있는 나의 모순들을 쓰고 싶다. 그럴듯한 얘기가 아니라 내적 모순이나 부족한 부분, 자기 모순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아픔을 거쳐서 정화하고 나아가고... 그런 시들을 쓰고 싶다.



  이원재 문화연대 활동가
이원재 2009년 12월 30일에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라는 시집을 냈다. 그리고 그 시집이 참 많은 주목을 받았다. 평단의 평가도 좋았고, 제6회 김진균상과 제12회 천상병 시문학상도 수상했다. 개인적으로도 놀랐다. 아.. 송경동이 시인 맞구나(웃음). 개인적으로도 그 시집을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서정에도 계급성이 있다”라는 시가 참 좋았다. 스스로 이 시집에서 제일 아끼는 시나 구절은 무엇인가?

송경동 다 좋은데..(웃음) 개인적으로 ‘셔터가 내려진 날’이 좋고,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도 기억에 남는 시다. 힘들 때였는데 인터넷에서 붕어빵 아저씨가 새벽에 일을 나갔다가 목을 매달았다는 고 이근재 열사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고, 시를 쓰게 되었다. 나중에 보니까 사람들이 그 시를 읽고 고양시청 홈페이지를 다운시켜 버렸고, 전노련이 고양시청 정문을 뜯고 치열하게 싸웠다. 감동적이었다. 나의 호소는, 이근재 선생 영전에 바치는 것이지만 내 삶도 가난한 삶이었던 나의 마음도 같이 바쳐서 썼던 시였다. 평범한 우리들에 대한 아픔, 그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힘이 되고 기억에 남는다.

뉴코아 이랜드 투쟁이 300일째 되던 집회에서 읽었던 시가 있는데, 1년이 지난 후에 이랜드 아주머니가 수첩을 보여줬는데 그 시를 받아서 쓰셨더라. 여러 사람들이 수첩에 시를 옮겨 적고 힘들 때마다 시 읽고 힘 받았다고 하더라. 그때 뭉클했다.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해서 이야기 한 ‘꿈의 공장을 찾아서’, 나는 이 시 한편을 위해 근 3년에 걸쳐 연대하고 고민했던 시간들이 배여 있어서 내게 특별하다. 기륭전자의 ‘너희는 고립되었다’, 이것도 한편의 시지만 5년 가까이 수많은 일들이 그 속에 있었다. 국회농성을 2번이나 해보고, 망루 쌓다 잡혀가고, 포클레인 두 번 올라가고, 떨어져 발도 다치고 이런 세월들이 시에 있으니 각별하다.



보수 문단에서는 시인으로 인정 안해...
좋은 시인의 삶이란 사회의 제사장 같은 역할


이원재 시인으로서 사람들이 시보다는 송경동이라는 운동가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서운하지는 않았나? 한국 사회에서 사회참여적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보다 운동이 먼저 인식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 같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은 그와는 다르게 현실 운동과 거리두기를 안하고 있고, 시인보다는 노동운동가나 문화운동가로 인식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송경동 어떻게 보면 그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보수문단에서는 나를 시인으로 인정 안한다. 주변에 진보적 문화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 나에게 시와 문학에 집중하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좋은 뜻으로 했겠지만 일종의 위협이라고 생각됐다. “그렇게 살면 시인으로 안 봐준다, 적당히 해라, 찍힌다, 청탁도 못받게 된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실제 요 근래까지 시인으로 인정을 안 해 줬다. “얘는 전문시위꾼이지...” 가까운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굉장히 위축된다. 문단의 흐름 속에서는 나에게 현실과 거리두기를 하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학인의 삶은 그게 아니었다. 과거에 좋은 문학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이발소마다 있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푸쉬킨은 러시아 짜르 체제를 물리치기 위해 한 때는 노농적위대로 죽창도 들었던, 농민군에 서서 전투적인 시를 썼던 사람이다. 세계적인 시인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적인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는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그의 시가 160개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그 사람도 칠레와 중남미에서 혁명운동에 동참했고, 칠레 공산당 당원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탄광노동자 앞에서 시를 읽고 독재에 맞선 전사가 되기도 한 실천적 문학인이 있다. 음풍농월, 유유자적하는 언어기술자가 되는 삶을 쫓지 않았다. 시인도 한명의 노동자로 생각했을 뿐, 시인이 노동자보다 더 그럴듯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인의 삶이란 사회의 제사장 같은 역할, 당대 삶에 동참해서 사랑이든, 투쟁이든 뭐든 구체적으로 참여하면서 시대의 꿈과 위로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걸 시라는 형식으로 보고해주고 그걸 통해 사회의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거나 진전시키는 촉매역할을 해야 한다. 그걸 하려면 그 사람들의 삶과 투쟁에 자기 몸이 가 있어야 한다. 시인의 역할이 노동자에 비해 존중받으려면 그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게 전형이고 정답이라는 건 아니지만, 다른 표현양식도 있겠지만, 이 길을 선택했고 지금도 (문단에서) 배제 당하거나 소외당해도 그건 나의 영광이고 기쁨이다. 서운해 할 건 아니다.



이원재 최근 평택, 용산 등을 경험하면서 문화운동이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였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성과와 아쉬움을 말한다면?

송경동 평택에서 문화예술 단위의 독자적인 자기실천과 사회연대를 하게 되어 기뻤다. 그 전에도 있었지만 사회적 전선이 되는 곳에 문화예술인이 참여해서 도구처럼 쓰임을 당하는 게 아니라 독자적인 조직력과 의지와 마음을 가지고 했던 평택이 좋았다. 스스로도 돌아보게 되고. 운동들이 딱딱해지면서 확장될 수 없을 때인데 문화예술인들이 자기역할을 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시각으로 풀 수 있는지, 사회와 어떤 관계가 필요한지 그런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문화예술운동과 예술이 각자를 위해서 굉장히 소중한 공간이 되었던 과정이 평택이다. 그것을 통해 각자의 상상력과 꿈을 얻게 되었다. 그런 흐름이 다행스럽게 한미FTA반대투쟁, 기륭전자 노동자와의 연대, 용산이라는 작은 꼬뮌을 만들었던 일, 아픔을 딛고 사회에 대한 꿈을 만들어 보는 경험 등에서 함께 연대하고 많은 일들을 해본 게 소중하게 이어져 두리반까지 간 것이고, 희망의 버스 전에 거제도 대우조선과 한진중공업에서 문화예술인들의 자발적인 연대가 희망의 버스로 이어졌다.

사업내용에서도 문화예술인들의 헌신적이고 발랄하고 참신한 사업내용들이 좋았다. 풍요롭게 느끼며 참여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참여하는 문화예술인들도 자긍심을 갖고 본인의 문화예술 활동방향에 대한 고민도 하게 돼서 좋았다. 문화예술계 전체로 보면 작은 문화예술인들일 수 도 있지만 평택 대추리, 기륭, 용산, 콜트콜텍 등 다양한 실험과 헌신 등이 일상적인 문화예술진영에도 소중한 질문을 보태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원재 그런 활동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없나?

송경동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가 있는 거 같다. 자본에 의해 일상이 도구화되고 자본의 문화 우위가 대세인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면화 되고, 사소한 일상 속에 그런 기조와 가치관들이 폭넓게 깔려 있다 보니, 그런 공간들에서 생산한 호소, 질문, 노력, 헌신 등이 더 넓은 저변으로 형성되기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현 단계 운동의 한계, 세계 진보운동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 사람들의 조건과 한계에 같이 있는 거고 지난 몇 년간 노력 했어도 그 주체들과 사회문화연대운동의 저변이 넓어지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최소한의 문화적 전선을 지키며 노력하는 현실에 우선은 만족하고 꺾이지 않고 잘 가다보면 사회변화의 지점과 물리면서 폭발적으로 대중화되고 저변이 넓어지는 시점이 올 것이다. 점점 많아지고 있다. 두리반에서 초동단계지만 자율문학가협회도 구성되고, 사진 쪽에서는 변화를 바라는 사진가 모임으로 가고, 어린이 동화작가들에서는 사회연대의 선이 되어서 비정규노동자들을 위한 동화집을 기획단 꾸려서 비없세와 사업을 할 계획이다. 잡지형태의 동화책을 만들 것이다. ‘더 작가’라는 어린이책 작가모임도 350여명의 작가들이 모여 있다. 문학 쪽도 두리반연대, 강정마을 연대, 2차 희망버스 등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실종되었던 사회연대 문화운동도 살아나고 있다. 미술도 파견미술가 모임 주체들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탁해야 했던 관계였지만 지금은 그들 스스로가 움직이고 있다. 조금씩 주체가 늘어나고 그런 측면이 큰 성과라고 본다.



“진일보한 사회에 대한 꿈...반자본 의식과 정신, 실천들이 서야
20년간 단절된 대중과의 간극이 좁혀질 것”


이원재 도발적인 질문을 하나 해보면, 오히려 문화운동 자체에 대한 고민과 질문은 질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 아닌가? 평택, 용산 등에서 문화예술이 많은 역할 했다는데 동의하지만 최근 문화운동 자체는 얼마나 진화 했는지 묻고 싶다. 기존 단체는 많이 약해지거나 제도화 되고, 반면 자율적 개인이나 소그룹 모임이 많이 생겼지만 얼마만큼 사회적인 차원에서 힘차게 진행되고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쉽게 “그렇다”라고 답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송경동 80년대에 노동자 민중문화운동은 굉장했다. 구로만 해도 16개 지역에 지역 노동문학회가 있었다. 90년대 들어서 문화연대 등이 역할을 많이 했다. 대중 속에서 진보적 담론을 형성하고, 네트워크 가지고 정부정책에 대한 견제를 해 나갈 정도로 문화운동이 저력이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깨졌다. 의제, 전선, 일상문화 속에서 대응 주체, 네트워크 등이 많이 깨져있다. 그게 우리의 한계라고 본다. 문화연대를 중심으로 정부나 국가에 대해 개입하면서 “문화사회 전체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그런 힘이 왜 약화될 수밖에 없을까?”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유연한 탄압,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장 속에서 전투적 민주주의의 상상력과 그런 문화운동을 잃어버렸던 반성도 필요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탄압에 의해서 깨진 것보다도 꿈, 전망을 상실한 것 아니냐고 본다. 조금씩의 진전도 큰 의미는 없어 보이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진일보한 사회에 대한 꿈을 다시 꿔야 한다. 반자본의 의식과 정신, 실천들이 서야 스스로도 어떤 걸 넘어설 수 있다고 본다. 그 전망들이 상실되면서 일상적으로 생존을 위한 수준에서 대응이 이루어지다 보니 탄압도 탄압이지만 스스로의 꿈도 약해진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꿈, 현실 한국사회에 만연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꿈과 의지, 주체들을 만들어 내야, 그런 네트워크가 세워지지 않는 한 과거와 같은 힘 있는 문화운동이 활성화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문화도 과거엔 좋은 의미로 문화노동자 개념으로 썼지만 수많은 문화예술인 자체가 자본주의에 포획된 노동자에 가깝다. 문학 쪽만 하더라도 거대 출판자본의 힘이나 입김에 자유롭지 못해서 생계를 위한 글쓰기를 하고 있고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지 아닌가 싶다.



이원재 송경동 시인과 함께하는 예술인, 문화운동가들은 대부분 리얼리즘에 기반한 작업을 한다. 물론 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이고, 어쩌면 오히려 시대역행적이어서 더욱 더 가치있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좀 더 동시대적이고 실험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나? 특히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송경동 리얼리즘에 대한 정신은 형식미학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리얼리즘의 개념은 현실을 단순히 모사하는 단계를 넘어 묻혀 있는 현실과 막혀 있는 부분을 폭로하고 고발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꿈과 상상력을 포현하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리얼리즘이 아닌 것이다. 시대 정서에 대해서 예민하고 긴밀히 소통할 수 있는 소통양식에 열려 있어야 하고, 당대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본다. 그걸 못하면 리얼리즘이 아니라 보수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원재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형식을 넘어 태도의 문제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80년대식 현장 문예운동의 다른 버전이 아니냐는 비판을 이야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성의 부재를 자주 지적하지 않나.

송경동 서서히 이루어져 갈 거다. 약간은 고답적이고 더디고 세련되지 못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시대의 본질에 접근해 있는 진정성이 확인이 되면 어떤 시대든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그 사람들의 문화생산물로 조금씩 인정받게 될 것이다.

또한 대중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십 수년간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분단이후에 민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을 가져왔다. 그걸 넘어서기 위한 사회적 주체로는 70년대 민중문화운동, 탈춤 같은 민중개념에 대한 발견이 있었고 저변을 만들어 갔다. 그 당시도 모더니티한 문화양식도 많았지만 어찌 보면 구태의연한 민중적 개념이 발굴되면서 큰 사회적 힘이 되었다.

그 이후에 민중이라는 불특정한 개념 속에서 다음 세계로 넘어가지 못한 채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이 이어져 계급사회에서 노동계급에 주목하고 사회적 주체를 호명해 가기 시작했던 거다. 계급문화운동까지 해봤으나 거기서 단절되고 막혔던 것이다. 십 수년간 그 경험과 실천이 단절되었다. 전체로서 계급, 자본문제는 90년대 초반까지 달성했다면 거기서 나아가서 개인의 해방들을 고민하고 주체들이 단단해지고, 나아가 계급이 머릿수로만 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이 발전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기본적인 계급의식을 넘어 인간해방의 정신이나 개개인의 삶에 대한 존중과 존엄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가야 하는데, 사회주의 붕괴라는 전 세계적인 단절과 전망의 상실 등으로 인해 더 이상의 사회적 진전이 막혔다. 근 20년을 까먹은 셈이다. 그걸 다시 이으려니 힘든 것이다. 단절없이 잘 이어졌으면 풍요롭고 풍부하고 다양한 것을 획득 했겠지만 한번 꺾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다시 그걸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모방하는 듯이 보이고 유아적인 단계에 머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역사적 진전의 맥을 다시 이어보려는 과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들에게만 왜 투박하냐는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단절의 시간을 왜 방기 했는지에 대해 반성하고 더 치열한 고민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15일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희망의 버스' 탄압 규탄 기자회견에서 송경동 시인이 2차 희망의 버스 185대를 제안하고 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나는 느린 사람, 잘 지르지 못한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해 느리지만 계속 가겠다.“


이원재 송경동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불같은 실천력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게 말해서 실천력이지 정확하게 표현하면 “저지르는”거다.(웃음) 저지르기로 치자면 달인의 경지라고 본다. 일단 저질러서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하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웃음) 앞으로 뭘 저지를 계획인가? 뭘 저지르고 싶나?

송경동 비없세 상근자로 있다. 희망의 버스도 그 과정에서 하게 된 거고. 그걸로 모인 사회연대의 힘과 꿈을 모아서 비정규노동체제에 대해 균열을 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진숙을 구출하기 위한 투쟁을 넘어 전체 900만의 비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될까 두려워 자본의 노예가 되어가는 정규직의 삶이 해방으로 진전하기 위해서는 비정규노동체제에 균열을 내는 게 필요하다. 실제로 물러날 곳도 없다. 쌍용차 노동자 1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어 가는데 이건 일종의 경고다. 무한 착취 속에서 수탈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경고. 거기에 맞춰 한걸음 더 진전을 위해 내년 연말까지 한국사회에서도 비정규노동체제에 균열을 내는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매주 금요일 촛불문화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100만 행진, 비정규직없는세상 사회협약제정 운동을 내년 연말까지 진행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나는 사실 잘 못 저지른다.(웃음) 다 몇 년씩 한 사업이다. 파견미술팀과는 평택 대추리 전에 쌀 개방 반대 농민들 싸움 때부터 시작해서 6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는데 신뢰를 쌓기 까지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저질러서 되는 시간이 아니다. 하나하나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했고 한발 나가기 위해 많은 것을 같이 해야 했다. 저지르는 스타일이 아니라 조금씩 얘기해서 만나가는 사람이다.(웃음)



인터뷰/정리_이원재 문화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상상력과 지구력의 힘을 믿는다. “새로운 시대를 겨누어 변함없이 날카로운 질문과 실천을 던지는 노장을 꿈꾼다.
녹취_민중언론 참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