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아버지 죽여 놓고 아들까지 정리해고”

[인터뷰] 노동자는 정리해고를 자본가는 부와 권력을 대물림 하다


명예퇴직을 하면 계약직으로 고용을 보장하겠다

김주익, 곽재규 두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2003년, 회사의 명예퇴직 압박에 시달리던 49세 노동자 김춘봉 씨가 있었다. 스물여섯 살에 입사해 두 아이를 키우며 23년 세월을 한진중공업에서 일한 그는 더 이상 출근하지 말라는 회사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회사 관리자는 명예퇴직을 하더라도 촉탁계약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공장이 돌아가는 한 김 씨의 고용을 정년까지 보장해주겠다고도 했다.

갈등하던 김 씨는 불안했지만 결국 회사의 말을 믿고 말았다.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 시달리며 명퇴권고를 받았다. 그 당시 관리부장 김OO, 노무차장 이OO 두 사람이 나에게 수없이 권고하였다... 나는 이곳 현장에서 작업 중 다리를 다쳐 병원생활을 10개월 하였다. 그 후 노동부로부터 9급이라는 산재등급을 받았다. 회사 노무팀에서 나에게 이러한 제안이 들어왔다. 산재보상보다는 명퇴를 하고 돈이 좀 작더라도 마산공장 운영할 때까지 촉탁근무를 해주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권하였다. 나 역시 많은 생각 끝에 촉탁근무를 하기로 하고 명퇴를 하였다.”(고(故김춘봉 씨 유서 중에서)

믿지 말았어야 했다
촉탁계약 만료일에 치러진 장례식


김 씨가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던 회사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년이 지난 2004년 한진중공업은 그가 하던 일을 외주화 할 계획을 추진했고, 나중에야 이를 알게 된 김 씨는 계속 고용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지만 한진중공업은 차갑게 돌아섰다.

“절대 못나간다.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고 수차 이야기를 하고... 부탁도 하고, 애원도 해보았지만 모두 허사다.”

“24년간 이 회사를 위하여 몸과 청춘을 받쳤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렇게 밖으로 쫒게나게 되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미워할 수도 없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정말로 죽이고 싶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해도 좋다 말인가.”(故김춘봉 씨 유서 중에서)


21일째 집에도 가지 않은 채 공장에서 먹고 자며 농성을 했던 김씨는 12월 27일 아침 도장공장 계단 난간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됐다. 그리고 촉탁직 계약 만료일인 12월 31일 치러진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쉰 살의 생을 마감했다.

“꼭 이렇게 하여야만 회사는 정신을 차리는지... 지금 밖에서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있다. 꼭 그 사항이 이루어지길 간곡히 원하고 싶다. 그렇게 하여야만 나 같은 사람도 인간 대접 받을 수 있지... 한진 중공업에서도 비정규직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 현재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직은 좋은 대우를 해주겠지.”(故김춘봉 씨 유서 중에서)

  버지 김춘봉 씨는 비정규직으로 고용을 보장해준다던 회사를 믿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안았고 결국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고 김춘봉 씨와 그가 작성한 유서. [출처: 민주노총]

‘조선소에서 기술이라도 익히면 나중에 먹고 살지 않겠나’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 비정규직으로 재입사, 계약해지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진 아버지의 운명이 이번엔 그 아들 김지훈 씨(31세)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지훈 씨는 아버지 김춘봉 씨의 권유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조선소 하청업체에 취업해 일해 왔다. 아버지 김 씨는 아들이 어차피 밤에 학교를 가니까 낮에는 ‘조선소에 다니면서 기술이라도 익히면 나중에 먹고 살 수는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는 처음에 한진중공업 마산공장(전 코리아타고마)에서 일을 하셨는데,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일했지만 그렇게 해서 손에 쥐는 월급으로는 네 식구 생활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렸을 때 어머니가 포장마차를 했었어요.”

그때부터 한진, 대우, 삼성 등 대그룹 조선소의 하청업체를 전전하던 아들 지훈 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2005년 한진중공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아버지가 명예퇴직을 한 것도 그 뒤 비정규직으로 일을 해왔던 것도 모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알았어요. 아버지가 가족에게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셔서... 그렇게 갑자기 닥친 일이라 장례식을 어떻게 치렀는지도 기억이 없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인 회사에 왜 너까지 가냐. 다른데서 일하면 되지 왜 하필 한진중공업에 다시 들어가냐’고 반대가 심했지만 하청업체만 계속 전전하던 제게는 아무래도 안정적인 정규직이 더 좋겠다 싶어 들어갔죠.”


대물림 한 조선소 노동자의 삶과 정리해고
“노동자들을 자르지 못해서 이렇게 안달이 난 회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소 노동자로 살아왔던 지훈 씨는 스물다섯 살이던 해 아버지가 다녔던 한진중공업에 입사했지만 6년 뒤 그를 찾아온 것은 또 다시 정리해고였다. 결국 두 부자는 조선소 노동자의 삶과 회사의 정리해고를 대물림 한 셈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버지 김 씨는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을 한 뒤 비정규직으로 살았지만, 아들 지훈 씨는 회사의 강요와 압박에도 희망퇴직을 하지 않고 정리해고 철회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홧김에 그만 둘까 했었는데... 85호 크레인에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희망퇴직을 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구조조정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죽여 놓고 나까지 정리해고 하는 한진중공업이 너무 기분이 나빴어요.”

“조남호는 경영인이 아니에요. 경영을 하려면 공장에서 일하는 전체 노동자들도 같이 생각해야 하는데 오로지 자기 이익밖에 몰라요.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년을 주기로 계속 노동자들을 자르지 못해서 이렇게 안달이 난 회사가 도대체 어디 있나. 아무리 자본주의 나라라고 해도 이건 아니죠. 재벌 나라도 아니고... 회사가 어려우면 임원들도 임금삭감하고 경영정상화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해야 할 판에 수주는 안 하고 오히려 배당금 잔치에 임원들 연봉을 억 단위로 올려준다는 것이 말이 되요? 수주를 못 했다고 하는데 그럼 노동자가 뛰어다니면서 수주를 따와야 하는 거에요? 조남호 회장 아들이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을 가지고 노동자만 죽어라 잡아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죠. 그럼 아예 우리 노동자 보고 경영을 하라고 하지...”


‘그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우습고 불가사의했겠습니까’

전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은 장남(조양호)에게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을 차남(조남호)에게 한진중공업과 건설부분을 삼남(조수호)에게 해운업(한진해운)을 막내(조강호)에겐 금융업(메리츠 증권) 전반을 물려줬다. 그리고 차남 조남호 회장의 아들(조원국, 33세)은 현재 한진중공업 상무로 있다.

해고는 안 된다며 200일 넘게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 씨는 2003년 김주익 씨의 죽음을 추모하며 말했었다.

“애비 잘 만난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 조강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 책봉 받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그들이 보기에 한 달 100만 원을 벌겠다고 숨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순이익 수백 억이 나고 주식만 가지고 있으면 수십 억이 배당금으로 저절로 굴러들어 오는데, 2년치 임금 7만 5,000원을 올리겠다고 크레인까지 기어올라 간 그 사내가 얼마나 불가사의했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지훈 씨는 회사에서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집으로 “‘혹 일거리가 많아 사람이 부족해도 신입사원을 뽑으면 뽑았지 당신들은 절대 다시 안 뽑는다. 정리해고는 절대 철회되지 않을테니 희망퇴직을 하라’는 내용의 통신문을 보냈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지훈 씨는 담담했지만 연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렇게 한진중공업은 구조조정으로 죽어간 아버지로 하여금 조선소 노동자의 삶과 해고를 그의 아들에게 대물림 하게 했다. 이 거짓말 같은 현실에 지훈 씨는 아무 생각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봐야 속만 아리다”는 것이다.

‘말해봐야 뭐 하나’ 싶었을까. 여전히 떠올리기 버거운 기억이자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그 현실이 힘겹지 않느냐는 질문에 영도조선조 앞 작은 골목에 앉은 그는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듯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구조조정으로 비정규직이 됐지만 그렇게라도 일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와 어릴 때부터 아버지 말씀을 따라 기술을 배워 밥벌이를 하고자 했던 아들, 이 부자의 얄궂은 운명이 그렇게 대를 이어 반복되고 있었다. (기사제휴=미디어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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