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기업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인터뷰] 작업복 고집하는 유성기업 여성노동자들

웃다 울다, 인터뷰 내내 그랬다. 두 번 터진 울음은 아이와 유성기업 공장 복귀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대목에서였다. ‘잘못한 것 없이’ 공장 밖으로 쫓겨난 것도 억울한데, 회사와의 싸움으로 아이를 돌보지 못한 죄책감에 울었다. 투쟁이 터지자마자 공장으로 복귀한 동료들을 생각하니 그 배신감에 ‘사람이 화나고 억울한 건 못 참잖아요’하고 또 울었다.

자동차부품 피스톤링이 출고되기 전 불량품을 검사하는 일(검사과)을 하며 7년, 많게는 16년을 근무한 유성기업 아산공장 여성 노동자들. 매일 공장으로 출근하던 김수연(32세, 11년 근무) 씨, 김윤기(32세 11년 근무) 씨, 이미선(34세, 11년 근무) 씨, 이화연(29세, 7년 근무) 씨, 장경아(30세, 12년 근무) 씨가 웃고 울며 농성장으로 출근한 지 벌써 석 달이다.

그래도 웃다

이들은 죽어라고 작업복을 입고 농성한다.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남성 조합원들 중에서도 작업복을 입고 농성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체로 지독한 무더위에 반팔 반바지 차림이다. 농성에 참여하는 11명의 여성 조합원들은 한결 같이 작업복 차림이다. 상의만 바뀔 뿐이다.

“작업복이 편해요. 또 공장으로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데 바로 출근해야죠(웃음). 중요한 건 작업복 입고 투쟁하는 게 원칙이니까. 미처 반팔도 준비하지 못하고 쫓겨났기도 했고. 더워서 위에는 아무거나 입어도 바지는 꼭 작업복을 입어요. 투쟁의 원칙이잖아요.”


유성기업 작업복과 작업복이 만났는데, 유독 ‘사내 커플’이 많았다. 인터뷰한 5명 중 4명이 직장 동료와 결혼했다. 피스톤링과 20대 청춘을 보낸 이들은 이곳에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어떻게 만났냐고 묻자 여기저기서 이말 저말 나오고, 하하하 웃음이 터진다.

“매일 공장에 갇혀 있었으니까 만날 수 있는 남자들이 거기서 거기였죠. 회사를 이런 촌구석에 박아 놓으니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있나(웃음).”

“퇴근하고 술 마시면서 스트레스 풀다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지 뭐. 오빠들이 ‘밥 사 줄게~’하더라고(웃음).”


남편들도 공장으로 개별 복귀하지 않고 같이 농성한다. 그러다보니 둘 다 임금을 받지 못한다. 노는 날이 같아 ‘쉴 때 같이 쉴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합법 파업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부부에게 석 달 동안 임금을 주지 않으니 생활고가 만만치 않다. 사내 커플이 아닌 미선 씨만 남편이 월급을 받는데, ‘남편이 벌긴 하는데 다음 달부터는...’하며 말을 흐린다. 못 가진 자가 생활고를 해결하는 일은 그 어디나 비슷하다.

‘저는 마이너스 통장요’, ‘아이 적금 모아둔 거 깨서 써요’, ‘청약 적금 깼어요’, ‘돈 없다고 하니까 친정 엄마가 얼마 주더라고’, ‘신랑이 다쳐서 보험금 200만원 나왔는데 그걸로 카드값 메웠어요’

이명박 대통령의 유성기업 노동자 연봉 7천만 원 발언은 결국 거짓말로 밝혀졌지만, 그래도 ‘정규직이고 근속년수가 높으니까 고액 연봉을 받겠지’하고 기대하는 건 금물이다.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고, 주택 담보 대출을 갚으려면 빠듯하다.

“제가 근속년수 7년인데 작년에 잔업을 조금 많이 해서 세금 안 떼고 연봉 3천7백만 원 받았어요. 연말 정산 쫙 뽑아서 세금 뗀 거 보니까 실제 한 3천만 원 받았나 봐요. 그것도 잔업을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저보다 오래 근무한 언니들도 얼마 못 받아요. 근속 수당이 뭐 얼마나 된다고.”

  농성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머리카락이 짧아지는 등 노동자들의 모습도 조금씩 변했다. 열악한 조건에서 투쟁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

미안해... 직장폐쇄의 충격

미쳐버리는 줄 알았단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윤기 씨가 네 살배기 아들 생일을 잊어버렸다. 농성하면서 시어머니가 종종 아이를 돌봐줬는데, 전화해서 ‘미역국 끊여놨으니까 먹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단다. 울면서 ‘너무 너무 미안해서’라는 말만 되뇌였다.

“하나도 못 챙겨줬어요. 나 그때 너무 미안했어요. 시어머니한테도 너무 미안한데, 투쟁은 해야 하니까. 최근 아이가 갑자기 성격이 예민하고 과격해졌어요. 남자애고 그 나이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주위에서 말하지만 갑자기 성격이 확 변하니까 내가 놀라서... 그때는 애를 막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며 울었어요.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기도 하지만 아이에게 잘 해 줄 수 없다는 게... 남편도 많이 미안해했죠.”

수연 씨도 아이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대체로 육아문제와 살림은 전적으로 여성이 책임지다 보니 일할 때도, 투쟁할 때도 이삼중의 고통이 엄습한다. 지난 5월 24일 경찰병력이 투입해 전 조합원을 공장에서 끌고나오고, 연행해 경찰서에 갇히자 이 부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올 수도, 맡길 때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 맡길 곳이 없어서 그때만 생각하면...”하고 말문을 열자마자 벌써 눈시울이 붉어지는 수연 씨를 보며 동료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나는 그나마 어머니가 가까이 사니까. 수연이는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전화통 붙들고 신랑 누나한테 전화해, 친정아버지에게 전화해, 동생한테 전화해... 결국 경기도 이천에 사는 신랑 누나가 데리러 온다고 하니까 한 숨 쉬더라고요.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올 시간인데 다른 사람이 데리러 오거나 어린이집서 기다려야 하니까 애들도 놀라고 당황스럽고. 매일 그 시간에 데리러 왔던 엄마인데...”

아이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어 항상 미안해도 남들 사는 것만큼 살려면, 혹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맞벌이를 해야 한다. 종일반에 아이를 맡기기도 하는데, 이들은 ‘애도 야간에 맡기는 거죠’하며 웃는다.

“잔업 2시간 더 하면 저녁 7시 30분에 끝나니까. 종일반에 들어가면 10만원 더 내는 데 그것도 되는 어린이 집이 있고, 안 되는 곳도 있고요. 구조상 잔업을 안 하면 월급이 적고, 잔업을 해야 생활하는 게 좀 나으니까. 결혼하고 나서는 누가 봐주지 않는 이상 개인 시간을 갖기 어렵죠. 아이들 데리고 어느 집에 모여 맥주라도 한 잔 마시고 집에 가면 밤 10시고. 회사 안에 어린이집 등 복지 차원에서 필요한데. 예전에 여성들이 요구하기도 했는데 남성 중심 사업장이라 잘 안 되더라고요. 반대하는 사람도 꽤 있고요.”

그래도 지금 제일 힘든 건 ‘직장폐쇄 그 자체’란다. 활달한 화연 씨는 ‘이상하게 아무 것도 안 해도 피곤하다’며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했다. 예전에는 아이에게 ‘어디 갈까?’, ‘뭐 해 줄까?’ 묻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는데, 무기력해진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 윤기 씨도 지난 5월 18일 회사가 일방적으로 직장폐쇄를 하면서 ‘충격’을 받았고, 경찰병력 투입으로 공장에서 쫓겨난 뒤 극도로 예민해졌다. 한 번은 남편에게 짜증을 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놀랐다’고 했다. 미선 씨도 다른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과 많이 다퉜다.

“직장폐쇄 자체가 너무 충격이었죠. 우리가 다시 일주일 동안 공장안에 있었을 때는 희망이 보였다가 경찰병력에 쫓겨났을 때는 절망이었죠. 남편은 조합원들의 투쟁이 옳은 건 아는데 현실적으로 봤을 때 이렇게 싸우다가 잘리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했죠. 저는 노조가 있어서 여태껏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노조를 배신하고 개별 복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어요. 여자들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알아서 회사 그만 두는 게 관례인데. 그리고 나 자신만 보고 싸우는 게 아니라 내 아이도 이렇게 노동자가 안 되란 법이 어디 있어요? 나중에 남편에게 1년만 시간을 주고 나 믿어달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개별 복귀 제일 적은 검사과

형광등 밑에 앉아 눈으로 피스톤링 불량품을 검사하고, 마킹, 포장하는 일을 하는 이들은 대다수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까 오랫동안 형광등 아래서 일하면서 시력이 급속하게 나빠졌다고 하더니 어깨, 목, 허리, 손목 등 줄줄이 나왔다.

경아 씨는 근골격계 질환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 동료들과 집단으로 싸워 결국 근골격계 질환을 직업병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지금, 회사는 ‘직장폐쇄를 이유’로 경아 씨 남편의 산업재해 연장 신청을 거부했다. 공격적 직장폐쇄는 불법일 뿐만 아니라 이 둘은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2003~4년 금속노조에서 근골격계 질환 투쟁을 했고, 산업재해로 인정이 안 돼서 많이 싸웠죠. 그때 유성기업에서만 100여명이 집단적으로 산업재해 신청을 했고, 근로복지공단 가서 죽치고 앉아 투쟁해서 승리했죠. 지금 주조과에서 일하는 남편이 허리 디스크로 2월 24일 수술했는데, 그것도 5월에서야 산업재해로 인정됐죠. 아직도 아파 연장 신청을 했는데 회사가 직장폐쇄라 연장이 안 된다고 했답니다.”

더욱이 경아 씨 남편은 용역경비에게 맞아 두개골이 함몰되기도 했다. 그는 용역경비원의 폭력성에 몸서리를 쳤다.

“6월 22일 아침에 남편 친구가 ‘00 굿모닝 병원 갔어요’라고 말해서 알았어요. 그때 회사가 물량 반출한다고 용역경비 동원해 조합원 22명이 집단 폭행당했잖아요. 피를 많이 흘린 남편이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고 병원에 입원해 있더라고요. 남편은 괜찮다고 웃고 있고. 아이들이 아빠를 굉장히 좋아하는 데... 붕대를 푸르고 나서야 아이들을 아빠한테 데리고 갔죠.”

  6월 22일 용역경비원이 노동자들을 집단 폭행해 2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고된 노동과 회사의 잔인함에 분노해도, 동료들과 함께 한 회사 생활이 그립다. 누가 ‘검사과는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말하니까 다들 ‘맞다’고 대꾸했다. 친구보다 가깝고,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동료들이었다. 얼굴만, 아니 눈빛만 봐도 기분을 아는 사이란다.

“서로 보면 기분까지 알죠.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요. 남자 여자 섞여 있는 데도요. 특히 다른 과와 다르게 일하는 곳이 창고처럼 뻥 뚫려 있어서 일하는 거, 뭐하는 거 다 보여요. 맛있는 거 싸오면 다 같이 먹고, 얘기하고.”

“휴일 빼고 항상 보는 얼굴이니까요. 주말에 만나서 아이들 데리고 만나서 밥도 먹고요. 회사 가면 친구 만나는 느낌? 친한 언니 만나는 느낌이예요.”


그래서 그런지 유독 검사과만 개별 복귀율이 적다. 투쟁 초반 경찰병력에게 끌려나온 뒤 몇 명 복귀하더니 오랜 기간 복귀하는 사람 없이 농성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초반에 3명 복귀한 뒤 단 한 명도 복귀하지 않고 있다. 왜 일까.

“누가 검사과는 28%로 복귀율이 가장 낮다고 했는데... 가족 같은 부서 분위기도 있지만 남아 있는 이유는 딱 하나죠. 노조가 살아야 우리 노동자도 산다는 것을 아니까. 그걸 아니까 농성하면서 개별 복귀 하지 않고 남아 있는 거고. 복귀한 사람들은 그걸 모르니까 복귀한 거죠. 아니, 알아도 자기들과 노조는 상관없다고 생각해버리는 거죠.”

“여자는 아이 낳으면 그날 퇴사 하고 갔어요. 결혼하면 회사 못 다녔죠. 우리의 힘으로 만든 노조의 힘으로 우리의 권리를 찾아가는 데, 배신하면 안 되죠. 우리는 육아휴직도 1년 있어요. 노조가 우리에게 절실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아니까 우리는 더 남아있는 거죠.”

“노조 없이 개별 복귀한 다는 것 자체가 결국 공장으로 못 들어간다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노조가 들어가는 날 우리도 들어간다, 다 같이 들어간다는 한 마음으로 있는 거죠.”


소중한 것일수록 지켜야

사람이 미워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 순간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기억에서 잊혀져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개별 복귀자에 대한 지금 이들의 생각이 그렇다.

“처음에는 배신감에 흥분하고. 돌 지경이었는데, 직장폐쇄가 길어지면서... 이해한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한다는 게 아니라, 시간 지나니까 잊혀요. 어차피 안 볼 사람들이고, 공장으로 들어가도 서로 모르는 척 할 사람들이고, 말 섞을 일도 없는 투명 인간들.”

“다른 과는 농성 중간에 복귀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 과는 처음부터 배신하고 몇 명 들어간 뒤 복귀한 사람이 없었죠. 적어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복귀한 사람들이 있는데, 초반 복귀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도 갖지 않는, 뼛속까지 이기적인 사람들이죠.”


특히 출산 휴가 중인 동료 두 명이 떠오르자 개별 복귀자의 모습이 겹쳐진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회사의 직장폐쇄, 그 하루 전날 휴가 간 동료는 출산을 바로 앞두고 공장 앞에 와서 안절부절 못했다.

“배불러서 공장 앞에 와서 울고불고. ‘00씨 저러다 애 큰일 나요. 빨리 집에 가요’하면서 돌려보내기를 몇 번을 했는지.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우리가 여기 남은 이유는...’하고 말하면서 눈물이 터졌다. 회사와는 어차피 싸워야 하지만 동료들과는 쉽게 그럴 수 없다. 미움이 커도 동료이듯,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지켜야 하는 게 있다.

“솔직히 우리가 지금 돈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차피 개별 복귀한 사람들은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한 거잖아요. 이 세상 돈 없으면 못 살고, 돈 없으면 무시당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거 세상사람 다 알아요. 그거 모르는 사람 있나요? 그래도 우리가 여기 남은 이유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최소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노조가 있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으니까. 그걸 버리고, 몇 십 년 같이 일한 동료를 버리고 갔다는 게 나는 정말...”

“우리가 남아 있는 이유는 노조 지키는 것 하나 때문이에요. 그 생각하면 개별 복귀할 생각 안 들어요. 복귀한 사람들은 동료만 버린 게 아니라 다 버린 거예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는 것. 그걸 버린 거예요.”


오랜 기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누가 회사쪽과 가까운 사람인지, 누가 민주적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데 앞장서는지, 누가 자신을 낮추고 모두를 위한 목소리는 내는지, 누가 묵묵히 민주노조의 원칙을 고집하는지. 오후 5시 30분이면 아이를 데리러 어김없이 농성장에서 어린이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이들은 말한다.

“유성기업 유시영 사장이 만든 어용노조. 거기 들어간 사람들 명단 보고 ‘우리가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그쪽이 희망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안하지 않아요. 우리는 일괄 복귀 할 거예요.” (기사제휴=미디어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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