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된 아들 몫까지, 80년 인생 건 해군기지 반대 싸움

[인터뷰] 강동균 마을회장 어머니, 고병현 씨

1600일 이상 이어져 온 강정마을 해군기지 투쟁. 마을 주민들 모두가 이 세월동안을 가슴 졸이며 살아왔겠지만, 누구보다도 이 시간을 고통스럽게 견디어내야 했던 사람이 있다.

여든을 앞둔 강정마을 주민 고병현 할머니는, 정부도 국민도 외면했던 해군기지 저지 투쟁을 힘들게 이끌어나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봐 왔다. 마을을 지키겠다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군과 경찰, 정부라는 거대 권력과 싸워나가는 아들 곁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 8월 24일, 고 씨의 아들인 강동균 강정마을회장이 연행, 구속되면서 그는 매일밤 잠을 이루는 것조차 죄스러워졌다. 그의 혼자 힘으로는 아들의 석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절망도 했다. ‘아무리 인터뷰를 해도 바뀌는 것이 없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한 것 역시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결국 몇 번의 인터뷰 고사 끝에, 고 할머니는 다시 한스러운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매번 이야기를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 이야기들. 할머니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고된 고동, 삶과 싸워왔던 긴 세월을 포함해 이제는 권력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80년 세월의 기록이다.


“동균이가 꼭 해내겠다고 했어. 꼭 해낼 꺼야”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또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겼습니다. 조금만 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다면 우리의 앞날에는 영원한 평화가 기다릴 것입니다. 주민 여러분! 활동가 여러분! 힘내십시오”
- 2011. 8. 28. 강동균 마을회장 옥중 편지 中

뜨거운 여름날이었던 8월 24일, 강정 마을을 이끌었던 강동균 강동마을 회장이 경찰에 기습 연행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구속된 강 회장은 벌써 두 달째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그 사이 계절은 바뀌어 제주도에도 쌀쌀한 바람이 분다. 한 계절이 넘어가는 사이, 강 회장의 어머니 고 할머니는 아직 아들의 목소리 한 번을 들어보지 못했다. 강 회장이 할머니의 면회를 한사코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면회 못했어. 다들 면회를 가는데 나만 못 갔어. 아들 얼굴이 보고 싶어서 계속 면회 가려고 했는데, 아들이 어머니를 데려오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대. 아무도 나를 데려가지 않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면회 가면, 아들도 울고 나도 울 거니까. 그러니까 아들도 사람들한테 나를 데려오지 말라고 한 거지. 사람들도 걱정이 되니까 나를 안 데려 가는 거고. 그래도 보고 싶지. 너무너무 보고 싶지.

아들 잡혀간 뒤로는 아들 생각만 하면 기가 막혀서 살 수가 없어. 너무 억울해서 가슴에 막 피가 맺히는 기분이야. 밤에 잠도 안와. 이 집에 젊은 활동가들한테 방을 내줬는데, 새벽 3시에도 들어오고 그래. 방에 누워서 그 애들 다 들어오는 소리 들어야 그래도 잠이 와. 내가 일을 하니까, 잠이라도 자야 일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일 억지로 잠드느라 힘들어.”



사실 고 할머니는 3년 전부터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산 적이 없었다. 그의 아들이 강정마을회의 회장을 맡은 직후부터다. 평생 고된 삶과 싸워왔던 고 할머니에게 ‘국가권력’은 너무 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 상황에서 아들이 강정마을회의 우두머리로 국가권력에 맞서겠다고 나서자 겁이 더럭 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주 4.3항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 ‘국가권력’이란 곧 두려움이었다. 이에 맞서는 아들을 보며 온갖 부정적인 상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수 없이 아들이 회장직을 맡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몇 년간, 아들의 안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아왔다.

“아들이 부락의 마을회장을 맡고 3~4개월 동안은 정말 매일 잠을 못 잘 정도로 힘들었어. 아들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집 앞에 세워져 있으면 잠을 자는데, 없으면 잠이 안 오는 거야. 매일 밤 의례회관으로, 마을회관으로, 마을 곳곳으로 아들을 찾으러 다녔어. 마을회관에 가면 아들이 앉아 있어. 얼마나 반갑고 맘이 놓이는지... 아들은 나보고 ‘어머니 왜 오셨어요’ 이렇게 물어.

나는 매일 아들한테 ‘혼자 있지 마라. 누가 널 칼로 찌르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소리를 했어. 자꾸 그런 걱정이 드는 거야. 해군기지 반대를 이끄는 회장인데, 누가 죽이기라도 하면 어떡해. 사람들한테도 가서 내 아들 마을회장 못하게 하라고 부탁하기도 했지. 근데 결국 하고야 말았잖아.”


고 할머니의 만류에도, 강동균 회장은 3년 여간 강정마을회를 이끌어왔다. 사실상 할머니 역시 아들의 성격상, 아무리 말려도 결국은 해 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마을사람들과 평화활동가들은 큰 키와 좋은 체격, 우렁찬 목소리로 억세게도 해군기지 반대를 외치던 강동균 마을회장을 ‘캡틴’으로 기억하게 됐다.

“우리 시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엄청 억세놨다고. 근데 동균이가 그 할아버지를 똑 닮았어. 주민들 동의도 없이 해군기지가 막 생긴다니까 그냥 뛰어들어버리는 폼새가 그래. 아무리 내가 말려도 안 되잖아. 이제 봐. 감옥에서 나오면 분명 또 뛰어들 꺼야. 동균이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꼭 해내겠다고. 그 애가 꼭 해내겠다고 했으니까 해낼 꺼야.”

노동자, 농민의 일터 빼앗은 해군기지

매일 힘든 노동을 하는 고 할머니는 저녁때 ‘녹초’가 되기 때문에 인터뷰가 힘들 것 같다고 부탁해 왔다. 때문에 인터뷰를 위해 고 할머니 댁에 방문한 시각은 오전 7시. 아직 무거운 눈꺼풀이 채 떼어지기도 전이다.

지난밤의 피곤이 가시기도 전이지만, 할머니는 어느 틈에 준비한 노란 귤 한 바구니를 권한다. 바구니 속에서 귤 하나를 집어 들자, 할머니는 큼지막하게 생긴 게 훨씬 달고 맛있다며 다른 귤을 손에 쥐어준다. 할머니가 어제 하루 종일 남의 귤밭을 돌아다니며 힘들게 따온 귤들이다.

“내가 매일 일을 나가. 요즘은 귤밭에서 귤을 따고 있어. 대략 새벽 6시부터 밭에서 일을 시작하면 오후 5시쯤 일이 끝나. 남의 밭에서 귤을 따는 거라, 밭이 어디냐에 따라 일 나가는 시간도 달라. 쫌 멀다 싶으면, 새벽 5시 전에 나가서 오후 7시 넘어서 들어오지.

일하면서 점심시간은 40분이고, 쉬는 시간은 따로 없어. 그렇게 일해서 일당 5만원 받아. 돈이 적지 않냐고? 작아도 할 수 없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이것마저 안하면 나는 생계가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하루도 쉴 수가 없어. 귤 농사 끝나면, 이제 낑깡철(금귤)이 오고, 그리고 마늘 심고, 배추, 무, 당근 등등 일할 것은 철철이 나와.

일하면서 힘든거? 내가 11년 전에 교통사고가 났었어. 그 때 몸의 반이 마비가 됐었는데, 그 후유증이 힘들어. 일하면서 안 아픈 곳이 없지.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집에 오면 그야말로 녹초가 돼.”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일상은 고단함이다. 전원생활의 풍요로움이나 여유로운 일상은 도시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하다. 특히나 고 할머니처럼 농사를 지을 자신의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더욱 팍팍하다. 그들이 남의 밭을 갈고, 그 곳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된 노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옛 말로 남의 땅을 ‘소작’ 받아 농사를 짓는다. 고 할머니처럼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아예 귤 따는 작업 등 ‘알바’로 생계를 유지한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돈 걱정을 평생 동안 업보처럼 달고 살아야 한다.

신기하게도, 마을에 ‘해군기지’라는 국책사업이 들어오면서, 이들의 삶은 더욱 각박하게 됐다. 이미 동북아 평화위협, 생태계와 문화재 파괴 등의 우려를 낳고 있는 해군기지 사업이, 사실상 자기 땅도 갖지 못한 이들의 생계까지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까지는 남의 토지를 빌어서 농사를 지었어. 아들도 마찬가지고. 우리 땅이 없으니까. 근데 올해부터는 몸이 아파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사실 몸도 몸인데, 해군기지 들어온다는 뒤부터 남의 땅 빌어서 농사짓기도 시원찮아. 잉여 토지가 많지 않거든. 원래 강정이 굉장히 조그만 동네야. 서쪽으로는 월평, 그리고 도순, 큰 내 쪽으로는 법환에 둘러싸여 땅이 많지 않은 곳이지.

가뜩이나 땅이 없는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면서, 남의 땅을 빌어서 농사를 지을 곳도 마땅찮게 됐어. 할 수 없이 사람들도 위미나 모술포로 나가서 돈을 벌게 되는 거야. 나처럼 일손 거들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졌어. 그래도 해군기지 들어오기 전에는 농토가 있으니, 마을 하우스 돌아다니면서 일손 도우면서 일하기 수월했지. 근데 이제는 돈을 벌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사람들은 새벽부터 일할 데를 찾아 제주도 전체를 돌아다니게 됐어. 일당 5만원 씩 벌려고 차타고 1~2시간 외지로 나가야 하는 거지. 여기서부터 2시간 거리를 가려면 새벽 5시도 못돼서 나와야 해. 얼마나 힘든지 몰라.”


80년 인생의 흔적 강정마을,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할머니의 싸움


할머니는 80평생 이 곳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은 육지로 시집을 가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열여덟에 이 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곱디고운 나이로 새색시가 됐지만, 얼마 안 가 남편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철부지의 세 아이와,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뱃속의 아이를 남겨둔 채였다.

할머니는 당시를 떠올리며 ‘산다는데 기가 막힌 세월이었다’고 회상했다. 시댁식구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낮에는 아이들을 줄줄이 업고 나와 밭일을 했다. 집에서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고 할머니는 밭에 이불을 들고 나와 네 귀퉁이를 막대로 받쳐놓고 그 밑에서 아이 넷을 키웠다.

매일 일상과 씨름하며 살아온 만큼, 동네 곳곳이 웬수 같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자녀들이 다 제 갈 길을 찾아 가면서, 인생의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해군기지’라는 산이 또 다시 할머니의 평탄해지려는 길을 가로막았다. 지금까지 고단한 삶과 사투를 벌여온 할머니는, 이제 마을을 지키기 위해 또 다시 나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해군기지 들어온다고 처음 그랬을 때, 나는 사실 긴가민가했어. 그게 그렇게 쉽게 결정 날 지도 몰랐고. 찬성 주민들 여든 몇 명만 투표 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됐잖아. 내 아들이 해군기지 반대에 뛰어들고 나서도 나는 사실 확신이 잘 안 섰어. 찬성측 주민들은 해군기지가 유치는 너무 좋은 일이라며 반드시 들여와야 한다고 말하고, 반대측은 해군기지가 들어오면 살아나갈 수 없다고 얘기하잖아.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하도 답답해서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결심했어. 그리고 자식들도 아무도 모르게 국민학교 친구가 사는 부산으로 갔어. 친구한테 해군기지 좀 구경시켜 달라고 했지. 무작정 친구랑 해군기지에 가서 거기 사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나 이것저것 물었어. 먼저 해군기지 주변은 좀 깨끗하냐 물었지. 그러니까 하는 말이 ‘어디서 견학을 온다고 하면, 용역 100여 명을 동원해서 한 번 청소하지, 그렇지 않으면 청소를 잘 안 해서 살 수가 없다’ 더라고.

또 술집 같은 곳이 많이 생겨놔서 밤에 민간인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없고, 불빛이 너무 환해 농사를 지을 수도 없대. 그 할머니도 집을 팔고 나가고 싶은데 누가 집을 사지도 않는다더라고. 돈 있는 사람들은 집을 구해서 나가는데, 돈 없는 사람들은 그 곳에서 살 수밖에 없대. 그 할머니한테 우리 동네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려 한다고 말하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막으라고 그랬어. 그때 보고 듣고 생각이 많이 들었지. 우리 마을이 물 좋고 땅 좋은 일강정인데, 지금껏 편안하고 조용한 부락으로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잘 살아왔는데,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 지켜야겠다, 하고.”



고 할머니와의 인터뷰 바로 전날, 해군은 구럼비 바위에 시험발파를 강행했다. 한바탕 충돌과 연행이 일어난 뒤라 마을 분위기도 흉흉하던 차였다. 고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걱정스런 한숨을 내쉰다. 싫은 기억이든 좋은 추억이든, 여든 평생의 희로애락이 곳곳에 묻어있는 마을이기에 귀퉁이가 조금만 잘려나가도 안타까움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너무 가슴이 아팠어. 내가 태어나서 여태껏 여기서 살았는데 그 땅을 그렇게 폭파시켜 놨으니...구럼비 바위나 할망물은 평범한 곳이 아니야. 특히 할망물에는 아무거나 살지도 않아. 거기 안에 새우가 사는데, 옛날부터 임산부들이 아플 때 그 새우 딱 세 개만 먹으면 병이 나았어. 근데 이 지경까지 됐으니, 어떤 벌을 받으려고...”

할머니는 구럼비 시험발파 당시, 그 날도 외지에 있는 귤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맘에 걸리는 듯하다. 연행되는 활동가들을 보며 안쓰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고 할머니는 일을 끝내는 짬짬이 해군기지 반대와 관련한 모든 일정에 참여한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도 매일 8시 촛불 문화제에 빠지는 법이 없다. 얼마 전, 서귀포 시내에서 진행한 3보 1배 역시 간신히 시간을 내 참석하기도 했다.

아들의 투쟁과 할머니의 투쟁이 각각 4년. 그 동안 그들의 활동을 단련시킨 것은 사람들과의 교감이며 연대다. 무엇보다 모자는 결국 해군기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촛불집회 같은 데는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나가야해. 원래 초반에는 마을사람들 200명도 나오고 그랬어. 근데 공사 시작하고 나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80명 정도밖에 안 나오잖아. 너무 지친거야. 실망하기도 했겠지. 여기 와서 활동하는 육지 사람들 없었다면 우린 정말 끝났을지도 몰라.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이 더 많이 얘기하고 뭉쳐져야 해. 힘도 많이 내야하고. 그런 면에서 사람들한테 힘을 주는 육지 활동가들이 고마워. 연행되는 것 보면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고 그래. 지금 내 소원은 다른 건 없어. 그냥 해군기지 나가고 예전처럼 평화로운 강정에서 살고 싶은 거야. 내가 땅도 없고 뭣도 없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강정에서 남은 인생 살고 싶어. 지금 사람들이 모이고 바라는 만큼, 꼭 그렇게 되겠지만.”
(미디어충청, 참세상 합동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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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지 , 강정마을 , 구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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