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빛나는 밤, 김진숙의 청춘 이야기

"추위와 더위보다 힘든 건 평상심을 유지하는 일"

11월 1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오른지 300일째다. 이날 희망버스 기획단에서 진행한 희망의 라디오 <달이 빛나는 밤에>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초대를 받았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박성미 감독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대화가 오후 10시 20분부터 50분 동안 이어졌다.

  크레인 고공 농성 300일째 [출처: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김진숙 지도위원은 그동안 많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왔다. 이날은 김진숙 지도위원은 박성미 감독과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청춘에 대해 “이십대부터 삼심대까지를 청춘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기억이 없다. 내가 생각하면 청춘이라고 할 시간이 단 하루라도 없었다. 누구처럼 연애를 해본 것도 아니고, 캠퍼스에서 누워서 하늘을 쳐다본 것도 없었고. 늘 노동을 하고, 스물여섯 부터는 빼앗긴 노동을 위해 싸우고...”라며 소회했다.

희망버스와 함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의 연대세력인 ‘날라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우리가 결연하게 운동을 해 왔잖아요. 비장하게. 그 때 문화도 그랬잖아요. 고공 농성도 아주 비장하잖아요. 날라리들이 오기 전에는 굉장히 비장했었고. 그 동안의 특성과 문화에 굉장히 크게 지배받았었는데, 그 때 날라리들을 보면서 내 삶에 강한 충격”이었다면서 “저렇게 운동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날라리들은 비정규직도 있고, 대부분이 조직되지 않은 이들이다. 그동안 민주노총이 조직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사람들이 결국은 날라리들이었다”며 “민주노총에 오지도 않았고, 거리감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을 우리한테 맞춰가려고 했다. 다가가서 이해하는 노력들은 안했던 것 같다”며 크레인 농성 후 희망버스와 트위터를 통해 만난 사람을 말하기도 했다.

오후 11시 10분경 대화가 끝났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전화통화를 하는 동안 웃음을 잃지 않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오른지 301일째인 내일도 오전 6시부터 희망의 라디오는 이어진다.

다음은 희망의 라디오에서 박성미 감독과 김진숙 지도위원이 나눈 이야기다.


-오늘은 그동안 인터뷰 하면서 한진 상황에 대해 실컷 이야기 하셨을 테니까 달이 빛나는 밤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달이 떠 있나요?

약간 반달. 망원경으로 달을 보니까 실제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뭐가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 같고.

-제가 트위터를 보다가 이런 글을 봤어요. ‘내가 본 가장 빛나는 청춘은 쉰을 갓 넘긴 여성노동자다‘는 글. 누구를 말하는지도 알겠고. 정말 청춘이라는 건 나이가 들어서도, 어떤 환경에 서도, 정신이 청춘이라고 생각해요. 김 지도님을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김 지도님이 가장 빛나는 청춘이 아닐까.

보통 이십대부터 삼심대까지를 청춘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기억이 없어요. 스물한 살 때 한진중에 입사해서, 철판에 깔려서 병원에 입원하고, 손바닥 깔려서 입원하고, 맨날 잔업하고... 그 때는 새벽별 보고 들어가서 새벽별 보고 나가는 거니까. 집이 좀 멀어서 통근버스 타고 가면 3시간 걸렸다. 그 때 라면, 안성탕면 끓여먹고. 보일러를 석유보일러 썼는데, 그을음이 많이 나오고 오래 걸리니까, 배가 너무 고프니까 석유보일러 못 기다리고. 등산 할 때 쓰는 버너에다가 코펠에 라면 2개씩 먹고 자고. 새벽에 5시 15분 통근버스타고 나와야 되고.

그렇게 5년을 한진중 다니다가, 26살에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고, 대공분실 가고, 출근투쟁하고, 유치장가고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30대에 징역살고 수배당하고 하면서 보냈다. 내가 생각하면 청춘이라고 할 시간이 단 하루라도 없었다. 누구처럼 연애를 해본 것도 아니고, 캠퍼스에서 누워서 하늘을 쳐다본 것도 없었고. 맨날 노동을 하고, 스물여섯 부터는 빼앗긴 노동을 위해 싸우고.

한 번은 대학가서 대학생들을 만났서 질문을 받았는데, 청춘으로 돌아가면 뭘 하고 싶냐고 묻더라고. 그 때 화를 확 내면서 저는 절대 청춘으로 안 돌아간다고. 내가 왜 20대로 돌아가냐고. 그러고 나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청춘, 20대하고 내가 기억하는 청춘하고는 굉장히 다르니까. 나한테는 청춘이 좀 아프지. 내가 못 겪은 시절에 대한 부러움. 다시 살아보고 싶은 부러움. 나는 5~60대 사람들하고는 앉아서 할 이야기가 없더라구. 젊은 친구들하고는 편안하고 잘 맞고. 내가 아직 성장을 잘 못한 것 같애.

-그래서 사실상 청춘 아닐까 싶네요. 그 때 당시 청춘을 아예 생각을 못하고 사신 거네요. 아니면 이미지라도 있었나요.

뭐 부럽죠. 일요일 같은 때 출근하다보면 신호등이 멈출 때가 있잖아요. 옆에 이렇게 쳐다보면 내 또래의 아이들이 빨간 옷 입고 모자 쓰고 자기네들끼리 깔깔깔 거리며 노는게 보여요. 출근 시간 짧은 시간에 내가 고개를 확 돌리고. 나는 그런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 때는 잔업을 정말 무식하게 했어요. 토요일에도 일하고 일요일에도 일하고.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 공장이 끔찍했다. 맨날 일하고 잔업하고. 철야를 4~5번해야 했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아이들 놀러가고 하는 거 보면...

그런거에 굉장히 민감했던것 같애. 그런거에 대해서 빨리빨리 포기해야 하는데. 나이가 젊어서 그랬겠지. 포기가 안되고 상처가 되더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해야 되요. 시간이 좀 남거나 잔업을 안 하거나. 이 공장에서 잔업을 안 할때까 비가 올 때 라든가, 감전사고도 많고 미끄러지기도 하니까. 비가 엄청 쏟아지면 용접봉이 안 녹아서 작업을 못해요. 그러면 퇴근하고. 맹휴하고. 맹휴라고 해요. 그런 시간들을 오히려 못 버티는 거에요. 자꾸 생각하게 되고. 남는 시간을 그렇게 하게 되니까.

-일하실 때 같은 또래 친구들이 있었나요.

나는 그 때는 개인적으로 친구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 공장에 들어와서는 다 남자들이었고. 남자들이라고 하면 언어도 다르고, 관심도 다르고. 웃고 떠들고 농담 따먹기 하고는 하지만. 남자들은 야구이야기 하고, 대부분이 여자이야기 하다보니까. 친구들이 전혀 없었어요. 하여튼, 외로움. 외롭다 생각을 안해야 하니까. 여기서도 그래요. 사람들이 뭐가 힘드냐. 추운게 힘드냐 더운게 힘드냐 그러는데. 감정을 관리하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일이 제일 힘든 일이고. 제일 어렵다. 그 때도 그랬던 것 같다. 한 번 어떤 생각을 시작하면 펄펄 끓을 때까지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감정을 관리 한다는게 상당히 어려운데, 트위터를 보면서도 김 지도님이 감정을 관리하는 모습. 젊은 친구들하고도 트위터에서 너무나 활발히 이야기를 잘 하시잖아요. 사실은 저도 그래서 빛나는 청춘이라고 느꼈거든요. 아무튼 잠시 끊고, 음악 듣고 다시 초대 손님과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였습니다. 너무나 정직하게 사랑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저는 지도님 보면서 사랑이란 단어를 많이 떠올렸어요. 연애나 그런 걸 떠나서 정말 폭 넓은 사랑에 대한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사실 궁금했던게 날라리들이 처음 갔을 때 그 이후로 김지도님 트위터 분위기가 많이 바꼈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저희들은 노동운동이라든가 이런게 잘 안 맞을 줄 알았어요. 노동운동 하시는 분들은 많이 공부를 하시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날라리들이 김 지도님 보러가고. 어떤 분은 이런 표현을 썼어요. 적색 노동운동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좋게 보는 시선도 있고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는데. 김 지도님이 좋게 보셨다는게 좋았어요. 낯선 존재들인데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그 때 김여진님이 쓰신 칼럼에 그런게 있었잖아요. 나는 내 삶을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날라리였다. 아주 공감을 했어요. 신나더라구요. 아주 신났어. 그 때 운동이 굉장히 달랐죠. 그거에 대해 트위터에서 논란이 뜨거웠고. 그 전에는 우리가 결연하게 운동을 해 왔잖아요. 비장하게. 그 때 문화도 그랬잖아요. 고공 농성도 아주 비장하잖아요. 날라리들이 오기 전에는 굉장히 비장했었고. 그 동안의 특성과 문화에 굉장히 크게 지배받았었는데, 그 때 날라리들을 보면서 내 삶에 강한 충격이었어요.

그동안 내가 30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하면서 봐왔던 사람들과 종이 다른 사람들을 봤는데, 상당히 편하고 웃으면서. 운동이 이렇게 처절하고 비장하고. 그런 현실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것들이 지속적으로 관계들을 가능하게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날라리들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저는 비장했을 거에요. 그게 전환이 됐다. 다른 각도로 임하게 된 것 같다. 저도 그동안에는 사람들을 경직되게 보는 시선이 있었어요. 저는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만 봤다. 민주노총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이 바뀌기도 하고. 노조를 만들고 새로운 사람이 와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있던 사람을 채워놓는 과정이었어요.

날라리들을 보면서는 저렇게 운동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걸 느꼈어. 트위터로 봤었죠. 홍대 투쟁하는 걸 굉장히 열심히 봤었다. 저도 트위터에 썼는데, 날라리들도 다양하잖아요. 비정규직도 있고, 대부분이 조직되지 않은. 그동안 민주노총이 조직할려고 그렇게 애를 쓴 사람들이 결국은 날라리들이었다. 민주노총에 오지도 않았고, 거리감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을. 우리한테 맞춰가려고 했지, 그들한테 다가가서 이해하는 노력들은 안했던 것 같다. 다가가서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그게 너무너무 좋더라고. 발랄하고 경쾌해지는 느낌들이 좋더라고요.

-저희도 그렇게 될지 몰랐는데, 김지도님도 날라리 입니까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그게 편하고. 나도 이제 비장한거 싫어요.

-사실은 딜레마가 있었다고 해야하나. 저나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어찌보면 자본의 혜택을 잘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었거든요. 노동을 잘 모르던. 정체성은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 그런데 김지도님을 좋아하면서 친구가 됐던 것 같아요. 이런 딜레마를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안 해보셨나요.

나는 날라리들이 너무나도 신기했던게, 평상시에 나 같으면 트위터에 오가는 그런 대화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쓸데없는 소리들을 지껄이냐면서 흘려 듣지도 않았을텐데. 자기네들끼리 오고가는 대화들을 듣게 되고. 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나. 여기서는 생각할 시간이 많으니까 듣게 되는 거에요.

특히 심야에 오고가는 대화를 보면서 이 사람들이 그냥 뻘소리들을 하는게 아니구나. 스스로 통찰도 하게 되고. 놀랬던게 강정에 일이 있으니까 강정에 가고, 명동 마리에 일이 생기면 쫓아가고. 대부분의 날라리들이 일상에서 연대하면서 살아가는 거에요. 제가 노동운동을 30년 가까이 하면서도 사실 그렇게 못 살았거든요. 처음에는 그랬지만, 투쟁이 만들어지면 쫓아가고 하면서 살아가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걸 못 했던것 같아요. 의무감에서 하지. 기본적인 인성, 인간에 대한 경외심, 이런 상황들에 대한 의문. 작은 것까지도 세심하게 보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는 친구고.

트위터상에 오고가는 뻘소리들만 봤으면 왕싸가지다 그런 생각했을 텐데. 트위터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특성들을 파악하게 되고. 날라리처럼 하면서도 생각이 깊구나, 그냥 내 뱉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무수하게 생각하고 평상시 철학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저도 날라리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사유가 깊어지고. 그 전에도 인간관계가 많았지만. 대부분 다 의무감에 의한. 실제 고민이 생겼을 때 털어놓을 사람이 없고. 안으로 삭히고.

-굉장히 많은 길이 열린 셈이네요.

그렇죠. 저한테는 고공농성을 하게 되면서 300일 크레인에 올라와서. 많은 사람들이 90% 이상 했던 이야기가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3종 세트였던 것 같아요. 그런 것 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처절함 이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내면의 눈이 생긴, 나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람에 대해서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이게 고공농성이 없었으면 평생 경상도 사람이었을 거에요. 나한테는 고공농성이 뜻 깊은 시간들이에요. 단순히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김지도님과 맞팔을 하려면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거군요. 밤이 깊어서 달도 없어지는데. 다음 프로그램이 달도 없는 밤에 인데. 그래서 이제, 음악을 들으면서 어디서도 다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어찌보면 300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서. 김 지도님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서 정말 기쁩니다. 달이 떠 있으면 달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잠에 드시구요. 곧 또 영도로 찾아 뵙겠습니다.

안 기다려도 올꺼란 걸 아니까.

-김진숙 지도위원님과 대화 잘 나눴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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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 김진숙 , 희망의라디오 , 박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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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1

    김진숙 저 돼지만 내려오면 되는거재
    냅둬
    이번달 월급도 1000만원 을위해 투쟁해야지

    1년하면 월급통장에는 1억2천정도 찍히겟지
    5개월이니 5천정도 밖에 안되었재 아직

  • ***

    날라리라 쓰고 리버럴이라 읽는다

  • 300

    하루속히 해결될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
    모두 복직하고, 무사히 내려오도록..

  • 오봉산

    사실 내려오고 싶은 맘 굴뚝같어도 오로지 체면때문에... 진퇴양난 아닐까? 아마 어느 누구도 저렇게 미련맞게시리 다시는 안 올라갈것임. 그나저나 먹을것과 배설하는건 어찌 해결하는지 딱할 뿐. 아프면 아프다는 핑계로 어느 누가 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