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이행사에 대한 여성적 보충

[새책]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갈무리, 2011.11)

시공간이 변질될 때, 누락되는 신체가 있다. 그러나 이 누락된 신체야말로 시공간을 떠받치는 기계다. <캘리번과 마녀>는 기계화된 신체의 서사적 권리를 노래하는 책이다.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특히 자본주의 이행기 여성의 역사를 밝혀냄으로써, 자본주의 시초축적의 기존 논리를 보충하려 한다. 그는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에 특히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를 첨가한다. 노동 계급 내부에서의 차이화와 분할에 따라 남성과 여성은 각각 생산 기계와 재생산 기계가 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최초의 기계는 증기엔진이나 시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신체였던 것이다(218).” 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서 시공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에 따라 신체가 어떻게 기계화되고 기계가 종국적으로 어디에 설치되는지 읽어내야 한다. 이는 저자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넘어서기를 희망하는 독해다.

한 공간, 16세기 잉글랜드, 인클로저 혹은 토지의 사유화. 토지, 즉 공간이 질적으로 변경됨에 따라 공동경작, 자치, 자급의 주체는 생산수단과 분리된 생산자로, 나아가 개별 근로 계약에 종속된 생산기계로 변했다. 그러나 여성은 임신 육아, 물리적 약세 등의 이유로 이주노동자라는 삶의 방식을 택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근로 계약의 당사자가 되기 어려웠다. 주된 場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상업 공간에서 여성은 배제됐다. 게다가 여성은 화폐관계에 더해 사회관계마저 빼앗겼다. 예를 들어 공유지, 즉 여성 “사회생활의 중심지...남자들과 다른 여자들만의 관점을 형성해 나갔던 곳(115)”에 울타리가 둘러쳐졌다. 요컨대 무산계급 여성은 같은 계급의 남성과 달리 임금을 받을 수도, 고유한 사회생활을 전개해 나갈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여성의 활동은 재생산 노동에 국한되었고, 여성의 생활공간은 “임금 가부장제” 아래 가정으로 축소되었다. 곧이어 여성은 재생산 기계가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국가가 더 많은 인구, 더 많은 노동력을 열망했고, 정책적 법적으로 여성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은 재생산 활동에 대한 주체성마저 상실했다. 여성의 활동은 비노동으로 정의되었고, 그 노동자로서의 지위는 은폐됐다(157). 재생산이 자본주의의 주름 운동에 본질적임을 전제한다면, 여성은 마치 ‘전체’처럼 보이는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비전체’로서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책의 전반부에서 그 은폐에 이르기까지 공적 영역, 사적 영역을 막론하고 여성을 겨냥한 광범위한 규제와 견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며, 자본주의 이행기 누락된 신체로서의 여성상을 정립한다.

이제 감행되는 신체의 기계화는 보다 미묘한 작업이다. 여성을 공간적으로 축출한 데 이어 그 시간의 내밀한 질감까지 변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창출은 대립과 갈등에 기초하므로 기계라는 개념의 설치에도 대립물이 필요했다.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그 대립물은 신비성과 신체성이었다. 그리고 양자는 '마녀'라는 상징에서 만났다. 그러므로 마녀사냥은 광기의 신경질적 발로쯤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종래 시공간에 존재하던 나름의 논리에 반하는 기계적 합리성의 폭력적 침입이었으며, “정치적 기획(246)”이었다. 물론 폭력은 그 자체로 이미 문제적이지만, 그 선정성에 매혹당해서는 폭력의 진정한 효과를 살필 수 없다. 그래서 페데리치는 폭력성 그 자체를 넘어선, 폭력성의 "벡터(222)"를 그려낸다.

먼저 신비성, 그러니까 마법이나 예언 등. 마법은 페데리치의 지적대로 "노동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수단(210)"을 의미했다. 이것은 인간의 물리력은 물론이거니와 시간을 건너뛰는 것이기도 하다. 마법에서는 마치 개미의 궤적 같은 연속적 시간 개념이 부정됐다. 이러한 시간의 도약은 예언에서 더 분명해진다. 예언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선취하는 행위였다. 이렇듯 마법과 예언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러나 서로 뗄 수 없는 방식으로 비선형적 시간의 언어를 구사하며, 균질적 반복적인 시간의 리듬을 방해하고 때로는 그것을 초월했다. 즉 임노동의 일과를 방해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필요한 것은 게으르거나 요동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잘 훈육된 기계였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자신이 이미 누락시킨 여성을 기계화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미 자본주의는 여성을 축출한 것이 아닌가? 저자에 따르면 사정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떠받치는 신체야말로 더욱 온전하게 자신과 동기화되기를 요구하며, 그것이 위협적으로 잔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특히 여성이 가지는 유혹의 힘은 남성의 책임감과 이성적 능력을 마비시키고 욕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됐다. 자본주의가 여성의 신체를 기계화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피임 출산 등 재생산과 관련한 여성의 통제력을 제한하는 데서 출발하여 여성의 性스러움(sexuality)을 중화시킴으로써 완수될 수 있었다. “여성이 남성을 도덕적으로 (...) 재정적으로 파탄내지 못하게 하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없애버려야 한다(283).” 이는 곧 신체성의 부정이다. 그 중에서도 재생산과 관련되지 않은 여성의 성은 더 강하게 부정되어야 했다. 출산 능력이 없는 여성의 성생활은 혐오스럽게 여겨졌다. 이런 식으로 “마녀사냥은 여성들로부터 신체를 박탈했다(272).”

마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길쭉한 빗자루를 타고 방종하게 행동하는 늙은 마녀는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부정적 신비성을 내포하는 도상인 동시에 여성의 비생산적 성생활에 대한 혐오감이 집약된 아이콘이었다. 그러니까 마녀 사냥은 여성이라는 성에 융합된 신비성과 신체성을 부정하고 절삭하는 움직임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외연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내포의 측면에서도 폭력적이었다. 이를 통해 여성은 이제 위험하지 않은 존재, 길들여진 존재로서, 노동 아닌 노동으로 생산을 떠받치는 재생산 기계가 되었다. 이러한 재생산 기계로의 전락은 여성의 활동 공간 축소와 어우러져, 여성이 이를테면 자본주의적 기체 같은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위의 모든 것을 보여준 뒤에 저자는 마녀 사냥의 사례가 공간적으로는 식민지에서도 시간적으로는 지구화가 횡행하는 오늘날에도 발견됨을 말하며, 조심스럽게 논리의 보편화를 꿈꾸려 한다. 이는 크게 그릇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성과 마녀 사냥에 주목하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방법론은 자본주의의 이행과 관련한 논의에 질료적 외부를 도입함으로써 본질적 변경을 가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자본주의의 출현은 역사적 진보의 계기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공간 속에서 신체=기계가 겪는 황량함은 역사적 진보에 수반하는 부작용이나 다음 단계를 향한 계기 따위로 치부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바로 피폐한 삶과 강요된 분할의 시작이며, 그것들은 자본주의에 내속하는 작용 내지 효과 그 자체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의 장점처럼 보이는 것과 단점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유보적 접속사를 사용할 수 없다. 둘은 구별 불가능한 하나이며, 그 사이에 개재하는 접속사는 동시성과 인과를 한꺼번에 표현해야 한다. <캘리번과 마녀>는 그러한 접속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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