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해고자 “쌍용차 왜 그렇게 죽어갔는지 알 것 같다”

[인터뷰] 한진중공업 타결 이후를 사는 해고자들

지난 11월 10일. 한진중공업 노사협상이 타결되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309일, 사수대는 137일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85호 크레인은 철거됐다. 그러나 여전히 85호 크레인 아래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2012년 말까지 재고용과 생계지원금 2000만원을 골자로 하는 권고안을 받아들인 후,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과 공허함을 견디고 있는 해고자들이다.

한 달 여가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아기의 성탄을 나흘 앞두고 두 명의 한진중공업 해고자를 만났다. 여전히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인 이용대 씨와 신성훈 씨. 희망버스 이후 ‘용대 아저씨’로 알려진 이용대 씨는 후배이자 동료와 함께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국의 사업장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이용대 씨는 누구보다 한진중공업 복직 투쟁에 충실했던 '싸움꾼'의 모습이 익숙했지만 사실 그는 크레인 위에 있을 때 스스로도 가장 멋있었다는 크레인 기사였다. 협상이 이뤄지고 난 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아침이면 작업복을 입고 자연스레 85호 크레인이 있던 자리로 출근을 한다. 그러나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다. 그저 자리를 지키다가 우연히 동료들을 만나면 술 한 잔 하는 것이 그의 일과다.

기자와 만났을 때, 이용대 씨는 어두운 얼굴로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왜 그렇게 죽어갔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정리해고 철폐’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던 그였다. 다섯 번의 희망버스를 맞을 때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정리해고가 철폐될 수 있도록 목숨을 다해 싸울 것”을 외쳤던 그는 최종 협상안을 아직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긴 싸움을 준비했지만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분노, 공허함과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12월 14일부터 동료인 신성훈 씨와 전국의 투쟁 현장 방문길에 올랐다. 협상 전부터 이 싸움이 잘되든 못되는 함께 전국 여행을 하자는 약속을 했던 터였고, 희망버스에 올랐던 고마운 이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스스로를 추슬러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성공회대에서 특강을 했던 다음 날, 서울에서 이용대 씨와 신성훈 씨를 만났다. 여전히 한진중공업 마크가 선명한 파란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전국의 투쟁 중인 사업장을 돌아보고 있는 이용대 씨와 신성훈 씨. 이날 인터뷰 후에는 쌍용자동차 동료들을 만나러 떠났다.

‘정리해고 철회’라는 목표를 목전에서 포기해야 했던 비애
‘타결’'이 모든 것을 끝낸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용대 씨와 신성훈 씨는 우선 김주익, 곽재규 열사가 잠들어있는 묘역에 들러 술한잔으로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갔던 곳이 비정규직화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영남대의료원이었다. 이용대씨는 영남대의료원 노조 사무국장이 3년 7개월간의 싸움 끝에 대법원에서 복직 판결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자괴감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사실 나는 이 싸움이 내년 총선, 대법원까지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한진중공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중요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었던 협상안이 뒤집혔고, 우리는 결국 행정소송 취하에 동의하는 ‘항복문서’에 서명을 한 것이다. 너무나 부끄럽다. 그 협상안을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가졌던 심적인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용대 씨는 2009년부터 이어진 싸움에서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 죽음마저 생각할 때, 희망버스를 만났고, 그것이 자신을 살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희망으로 끝까지 정리해고를 철회시킬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이야기해왔다.

그는 이 싸움이 최소한 총선까지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김진숙 지도위원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그런데 어느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협상안이 던져졌고, 그것은 정리해고철폐 투쟁위원회(정투위) 내부에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이용대씨는 처음 정동영 의원, 조남호 회장,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함께 이야기했던 권고안은 최종 내용과 달랐다고 말했다. 정동영 의원이 원직 복직, 회사 측의 소송 취하, 학자금 지원 등을 보장하는 권고안을 들고 왔을 때, 이용대씨와 정동영 의원은 한시간 반 가량 논의를 했고, 그 정도라면 합의할 수 있다고 판단해 나머지 해고자들, 김진숙 지도위원과도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그런데, 마지막 한진중공업 이재용 사장을 비롯한 사측과 민주노총 측, 노조 지부장 등이 만난 협상 테이블에서 내용이 바뀐 채 돌아왔다.

노조 측의 행정소송 취하를 조건으로 복직이 아닌 재입사, 학자금 지원 조항도 없어졌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벌금과 민사소송도 취하가 아닌 최소화 등으로 바뀌었다. 복직이 아닌 재입사는 20~30년간 쌓였던 연적차가 소멸되는 것이었다. 그나마 재입사와 생활지원금 2천 만 원 지급은 2012년 말까지인데, 이는 회사 사정을 들어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는 것이고, 2천 만 원 지급도 4회에 걸쳐 나눠 지급하기로 했다.

“학자금 지급, 연적차...이것이 전체적으로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근속을 해 온 우리들로서는 당장 절박한 일이고, 그동안 일했던 흔적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해고자들을 배제하고 협상에 임한 이들은 당장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입장보다는 정치권도, 노조 지부나 민주노총도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성과를 내겠다는 것, 임단협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만 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고작 행정소송을 취하하면서까지 2천 만 원을 나눠 받기위해 싸운 것인가?”

  지난 12월 14일 이용대 씨와 신성훈 씨는 전국 투어에 앞서 김주익, 곽재규 열사에게 '잘 다녀오겠노라'인사를 하러 찾았다.

이용대 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1월 10일 조합원들의 합의 결정에도,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을 내려올 때도 그곳에 있지 않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합의안을 받아들고 마지막까지 싸울 생각을 했다. 94명의 해고자 중에서 이틀 동안 6명을 제외한 모두가 서명했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들만이라도 모아서 대법원까지 가보자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이 서명한 상황에서 패소하거나 기각당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듣고 포기 아닌 포기를 해야 했다. 그리고 서명 기한 마지막 날, 1초도 걸리지 않는 서명을 하기 전, 이용대 씨는 한 시간도 넘게 문서를 쥐고 보고 또 보다가 서명을 했다. 어떻게든 결정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용대 씨는 그 문서를 ‘항복 문서’라고 불렀다.

“서명하는 날, 정신 못차리게 술을 마셨다. 4월까지만 가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겪은 갈등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데 학자금이나 연적차를 두고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계속 크레인 위에 올라가있으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사람 목숨을 담보로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돈 때문에 우리가 지금껏 싸운 것이라고, 사람 목숨을 놓고 흥정하고 있다고 매도당할 것이 아닌가?”

이용대 씨는 인터뷰에 응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이 회사 측에는 빌미를 줄 수도 있고, 정투위 쪽에 배신감을 줄 수도 있지만, 알리고 싶다고 했다.

“협상이 타결된 후, 사람들이 나를 보면 축하한다고 말한다. 힘든 과정이 끝났고, 김 지도위원이 살았고, 그동안 고생했다는 의미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는 축하할 일이 아니라 통탄할 일이다. 1차부터 5차 희망버스가 있기까지 항상 말했던 것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집회를 가도 더 이상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 모든 말이 허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진숙 위원이 살아서 내려왔다는 것만 이야기될 뿐, 정투위 내부의 갈등과 해고자 개인들의 힘겨움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는다. 누워서 침뱉기가 될줄 알지만, 한 단면이나 전체적인 것만 논하는 것, 포장하는 것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한 아버지의 자리
일하던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 바라는 것은 그것 뿐


“아빠는 집에 왜 왔어요?”

이용대 씨가 머물 곳이 없기는 가정도 마찬가지다. 2년여 밖에서 싸우는 동안, 집에서도 그는 이방인이 되었다. 결근한 번 하지 않고 12년 간 일해서 겨우 마련한 집도 생활비 대출을 받는 바람에 날릴 위기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모든 해고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이번에 둘째 아이가 대학에 붙은 것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상황이라고 했다. 학비 걱정에 오히려 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제 아이들 둘이 대학생이 됐고 막내는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뒷바라지에 대한 걱정이 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생존권, 일해서 먹고 살겠다는 것뿐이다. 내가 본래 일하던 자리에 되돌려놔 달라는 것이 그렇게 큰 요구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산재를 낸 적도 결근을 한 적도 없다. 왜 그런 내가 해고를 당하고 또 재입사를 해야 하나. 내년까지 재입사를 시키겠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없다. 앞으로 남은 11개월이 암담할 뿐이다. 무엇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협상 후, 한 해고자가 회사측에 생활지원금을 받으러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한진중공업 측은 해고자에게 더 이상 작업복을 입고 다니면서 회사 이미지를 실추 시키거나, 회사에 누를 끼친다면 재입사 시키지 않겠다고 하면서 각서에 도장을 찍고, 작업복과 출입증을 반납하라고 요구했다. 노조는 이에 항의하고 협상 내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다시 행동에 돌입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나서야 지급된 것이 2천 만원 중 1차 지급분이었다.

이미 몇 곳의 투쟁현장을 돌아본 그는 “전국이 전쟁터 같다”고 말했다. 모르고 있을 뿐 전국 곳곳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고, 그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희망버스를 통해서, 또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줬던 이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어 했다.

“우리를 도와줬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해야 하지만, 현실이 여의치 않다. 죽음의 절망에 빠져있던 우리들에게 그분들은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 같았다. 그 동아줄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평생 못 잊을 것이고, 살면서 갚을 것이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나 역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우선적으로 그곳에 달려갈 것이다. 우리가 만든 희망을 절대로 잊지 말고 앞으로도 연대의 끈을 놓지 말기를, 더 어렵고 힘든 곳으로 희망버스가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준 희망버스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사는 멋진 노동자가 될 것이다”

함께 했던 신성훈 씨는 김주익 열사가 죽었을 때,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드라이아이스를 크레인위로 올려 보냈고, 이번에는 김진숙 지도위원과 방문자들 사이의 소통창구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살았다는 것에 무엇보다 큰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신성훈 씨는 “한진중공업의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일로 정리해고 철회의 시작을 삼는 것이 목표였다. 비록 그 목표까지 이루지 못했고, 이제는 재입사를 보장할 수 없고 입사 후에도 순환휴직 등을 걱정해야 할 테지만, 그때까지 연대와 투쟁은 계속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1차 희망버스에서 이용대 씨는 이렇게 절규했다. "우리의 절박함을 아는가. 이렇게 왔다가 그냥 돌아가고 말 것이라면 지금 당장 돌아가라" 희망버스가 오기 전, 해고자들은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컸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이후 희망버스는 계속되었고 더 커져갔다. 희망버스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해고자도, 참가자도 모르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이용대 씨와 신성훈 씨는 또 차에 올라 평택 쌍용자동차로 향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을 때,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많이 두려운 듯 했다. 그러나 담담히 또 다른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살인을 부르는 정리해고제를 철회시키는 큰 산이 남아있으며, 희망을 선동한 죄로 갇혀있는 송경동 시인을 구해야 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후 상황도 지켜볼 일이다. 무엇보다 94명의 재입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똑똑히 주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94명 해고자들의 ‘지금 이 시간’이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제도, 법, 파업, 투쟁, 타결만 보던 눈을 돌려,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의 고통, 마음의 상처를 돌봐야 한다는 천금같은 가르침을 얻었다.

또 다른 희망버스는 쌍용으로, 콜트콜텍으로, 강정으로,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달려가야 하지만, 여전히 부산 영도에서도 시동을 켜고 있어야 한다. 그 희망버스는 이제 쉼터가 되고, 치유자가 되고, 말벗이 되고, 버팀목과 지팡이가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 희망버스는 수없이 복제되고, 진화하고, 더 커져야 한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타결’이라는 단어에는 ‘또 다른 일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훨씬 깊다. 곧 오실 아기 예수님을 우리 안에 품어 모시는 일이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사제휴=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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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진조합원

    이용대는 더이상 거짓으로 정리해고싸움을 호도하지마라. 그는 한진투쟁역사에서 배신의 역사를 써내려온 배신자이다. 뒤집혀있다니 정투위동지들과 같이 호흡하지않고 늘 혼자만의 싸움을 한것이 투사란 말인가? 거짓으로 점철된 노조활동은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늘 인기발언으로 투쟁을 하였으며..

  • 용대아제 혹시 노숙 해봣는지요 그레인 앝에서 노속하는것 못봣는데요. 편안한 밴 차량 안에서 주무신다고 고생 했습니다. 동료들부터 챙겨라 인간아! 자신만 투사인척 거짓으로 말하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