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쌍용차 비정규직 공장으로 돌아가는 해"

[인터뷰] 서맹섭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지회장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 맞선 77일 옥쇄파업에 19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함께 투쟁했다. 이후 노사 합의, 일명 8.6 합의를 하면서 회사는 비정규직 19명을 그해 10월 1일부로 복직시킨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한 명도 복직하지 못했다. 19명 중 8명은 복직을 포기하고 떠났다. 오히려 회사는 지난 2009년 9월 이후 신규로비정규직 50여명 채용해 복직을 기다리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샀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이하 쌍용차비지회)는 8.6 합의 이행을 요구하며 3년간 회사정문, 인도대사관, 법정관리인 이었던 이유일 박영태 사장의 자택, 쌍용차 수도권 영업소 등에서 1인 시위 집회를 반복적으로 진행했다.

  원유철 한나라당 국회의원 사무실 앞에 설치되어 있는 쌍용차비정규직지회의 천막농성장

그러던 중 지난 10월 24일부터 평택지역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원유철 의원과 민주통합당 정장선 의원의 사무실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8.6 합의 당시 중재를 섰던 이 두 명의 국회의원에게 책임을 묻고 복직 이행을 위해 직접 나서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2011년 마지막 날 아침, 한나라당 원유철 국회의원 사무실 앞에서 천막농성 중인 서맹섭 쌍용차비지회장으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슴 시린 설움을 들어보았다.

09년 옥쇄파업서 중요한 것, ‘원하청 공동투쟁’

2004년 쌍용차가 상하이차에 인수된 이후 구조조정을 이유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08년 10월 22일 쌍용차비지회가 만들어지게 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희망퇴직을 내용으로 한 전환배치 계획이 발표된다. 그때부터 쌍용차비지회의 투쟁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서맹섭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지회장

“2005년 당시 1700명이었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2008년에는 640여 명 밖에 남지 않았어요. 노조 설립 당시 모두가 ‘정말 이렇게 되서는 안된다. 나가라고 해서 나간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어요. 그러한 것들이 노조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것같아요.”

“공장 본관에 쳐들어가서 싸우고, 현장에 들어가서 조직화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더니 순식간에 노조 가입자 수가 늘어났죠. 곧바로 탄압도 심해지면서, 이거라도 줄게 받고 나가라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 졌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망퇴직을 막기위해 노력했지만 쌍용차에 들어온 많은 비정규직들이 인맥으로 틀어온 사람이 많아 쉽게 막을 수가 없었어요.”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정리해고 안이 발표되어 분위기가 좋지 않은 가운데 쌍용차지부의 2기 집행부로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부가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때 ‘원하청 공동투쟁’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적은 수이지만 19명이 옥쇄파업에 함께 했고, 공장 굴뚝에서 진행 된 고공농성에도 서맹섭 쌍용차비지회장(당시 부지회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는 너무 절박했어요. 모든 것을 해봤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굴뚝에 올라가는 것 뿐이다고 판단했죠. 그래서 준비를 하고 4월 초에 고공농성을 시작하려했는데 킨텍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모터쇼에서 경찰에게 강제연행 되는 바람에 계획이 연기됐어요.”

“그러다가 5월에 쌍용차지부에서 고공농성에 대한 제안이 왔죠. 우리가 당연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고,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함께 올라갔어요. 남아 있는 비정규직 동지들 공장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이유 없이 쫓겨났던 사람들 다시 일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올라갔어요. 정말 살고 싶었고 절박했어요.”


  지난 2009년 5월 13일 쌍용차지부와 쌍용차비지회는 굴뚝 고공 농성에 돌입했다. 당시 김을래 부지부장, 정비지회 김봉민 부지회장,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부지회장(현 쌍용차비지회장)이 굴뚝에 올라 갔다.

"회사, 민주노조가 다시 들어오는 것 두려워해"

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77일간의 옥쇄파업을 거쳐 8.6 합의로 끝이 났다. 하지만 노사가 합의한 내용을 회사가 이행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그해 9월부터 신규채용이 바로 시작되었고 ,이중에는 ‘희망퇴직’을 신청해 공장에서 쫓겨났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용차비지회의 11명의 노동자들은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서 지회장은 회사가 민주노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남은 11명을 복직시키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공장안에는 민주노조가 없어지고 기업노조가 생겨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눈치뿐만이 아니라 기업노조를 보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가지고 공장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장 꺼려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77일간 파업을 함께 했다고 강성이라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것이기도 하고요.”

“공장은 지금 야간생산은 하지 않고 주간생산만 하면서 2004, 2005년도 수준의 생산을 하고 있어요. 3000명 노동자가 줄었는데 이정도의 생산량을 맞춘다는 것은 노동 강도가 그만큼 세다고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는 주간2교대와 같은 방식이나, 업무형태 변경을 통해 모든 해고자가 다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2009년 당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 외에 기술유출 문제도 논란이 있었다. 한국 정부가 기술유출을 적극적으로 막았으면 정리해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정부와 회사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노동자들만 대량 해고 되었다. 이제 쌍용차비지회는 노사합의당사자, 중재단, 비지회가 참가하는 복직협의기구를 구성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복직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지만, 국회의원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혀 고민을 하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저희에게 국회의원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묻기도 하지만 저희는 국회의원의 힘이 그 당사자 개인의 힘이라고 보지 않아요. 이렇게 텐트를 치고 지역 시민들에게 알려나가면서 국회의원을 압박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희망텐트촌’이 시작되면서 따로 하지 말고 함께 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기도 한데 우리는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고 있어요. 우리만 살기위해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텐트촌’보다 먼저 계획을 확정한 것이기에 이곳에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지부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함께 고민하고 실천할 것이예요.”


뛰어난 활동가도 아니고 노동운동가도 아니었던, 단지 순수하게 일만했던 사람들이 정리해고라는 억울함에 한이 맺혀 노동조합을 시작했담다. 하지만 해고자 아닌 해고자가 되어 4번의 겨울을 맞이했고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회사와 아무런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서 지회장은 인터뷰를 마치며 2012년에는 반드시 지금의 투쟁을 끝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다가오는 2012년은 모두 힘들지 않고 희망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고, 기필코 공장으로 돌아가는 해로 만들어야죠. 새해는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고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쌍용차비지회가 한발 더 전진하는 모습을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보여 줄 것입니다.” (기사제휴=미디어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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