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지배의 정치, 대의 정치를 어찌할 것인가

[진보논평] 선거와 마르크스의 귀환(?)

받아주시오, 나의 이 모든 노래들을
당신 발 밑에서 애정을 갈구하는
내 마음의 노래들을

아, 할 수만 있다면
이 노래가 그대에게 전해져
그대의 굳은 마음에 미동이라도 일게 하였으면

-Karl Marx-


또 다시 선거의 계절이 다가왔다. 정치는 없고 정치인만 있으며 지역은 없고 지역구만 있다. 요즘에는 재보궐선거로 인하여 거의 해마다 선거를 치르기 때문에 선거가 다소 식상하고 습관화 되었지만, 대중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그것은 대중이 선거제도를 통해서만이 자신들의 욕망을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기존 제도정치에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새로운 정치를 통해서 찾으려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지배는 불가피한가

우리는 선거를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비유하는데, 이는 선거참여를 통해서 자신의 이익과 의견을 대변해줄 대표자를 선출하여 간접적으로 민주주의가 발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선거는 ‘소수 지배의 꽃’이며 ‘과두제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수인민의 지배’이며 ‘자기통치의 실현’인 민주주의가 선거를 통해서 구현되기 어렵고 권력의 주체인 대중이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자들이 권력의 주체가 되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대의제를 운영하고 있다. 즉 부르주아 정치의 특징인 대의제는 소수지배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면서 권력을 소수가 독점하는 현상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과두제의 원칙과 목적은 소유에 있다고 했다. 과두제는 “재산의 평가를 기준으로 하는 체제로서, 부자만 지배하고 가난한 자는 정부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제도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과두제는 공동체의 이익이 아니라 부자들의 이익만을 좇는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고귀한 엘리트의 지배’를 최고의 체제로 설정했다.

가라타니 고진(Karatani Kojin)은 어떤 시스템에서도 권력의 중심인 엘리트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무작위성(제비뽑기)을 도입해 중심의 고정화를 방지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지젝(Slavoj zizek)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보수주의자들의 칼 같은 책임감을 배우자고 했는데, 이는 정확히 플라톤의 엘리트주의가 말하는 ‘고귀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지젝의 모델인 바디우(A. Badiou)에게서도 동일하다. 오늘날 좌파이론의 최전선에 서있는 이들이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힌 대중 대신 다시 사도바울, 로베스피에르, 레닌, 마오, 체 게바라를 호출하고 있는 이유다.

진정한 코뮤니즘 사회 역시도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가지고 신적폭력을 행사하는’ 고귀한 리더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이들의 철학적 전략은 플라톤 만큼이나 ‘현실적’이다.

권력의 주체는 대중이라는 상식

여기서 한국의 노동정치는 역사적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와 1:99의 사회로 인하여 자본주의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면서 마르크스의 귀환을 반겼던 대중들이 현실적 규정력에 압도당한 것이다.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이며,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한 중장기적인 전망보다는 감성적인 판단에 기초한 단기적인 전망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 안철수, 문재인, 나꼼수 등은 중요한 필요조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나름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에게는 KBS/MBC파업, 희망광장, 제주 해군기지건설보다는 야권연대에 더욱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에게 “MB의 악마화와 반MB의 신화화”가 절대명제이자 진리이기 때문이다. 즉 대중에게 이명박 정권의 악마화는 무엇보다 “소수 지배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과 연결된 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최근의 공천과정에서 나타난 야당의 줄서기, 나눠먹기, 계파 안배, 여론조사 조작에 대해서 금방 혐오감을 느낀 다수 대중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등 6명의 민주교육감이나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에 암묵적/명시적 동의와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기대치를 저버렸다고 발 빠르게 돌아선 것이다. 물론 이들은 가변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코드에만 맞으면 언제든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다.

한국에서의 선거는 블랙홀과 같아서 선거철에는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다. 또한 선거철에는 대중을 배제하고 제도정당들간의 쟁투만 치열하게 전개되다 보니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느 정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지배세력들은 대중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강요하거나 선택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선거제도는 제도권 정당과 일반 대중에게 커다란 고민과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제도정당들의 경우 당연히 권력획득이 목적이기 때문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으며, 대중은 누가 권력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대의제에서 선거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요식행위 그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렵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며 현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선거는 대의제에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피통치자의 유일무이한 심판 수단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시민의 주권을 자신들에게로 옮겨오기 위한 고도의 술수를 쓰는 것이고 대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뽑은 정치인과 대통령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정치인들의 음모(?)였다. 이 음모는 고대에도 있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음모를 파헤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 또한 계속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듣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도 정치는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메가 파워급 회오리인 것이다. 그래서 대중은 정치인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대중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고, 정치인의 권력은 대중에게서 나온 힘이라는 사실, 대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대중들은 아직까지 좌파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민주노조운동이 무너진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며 당분간 회복 불능이다. 분명 마르크스는 옳았지만 그가 귀환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