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 죽음의 불평등에 대하여

[쌍용차 연속기고](4) “아빠는 나한테 신나는 사람”

“아빠는 나한테 신나는 사람이야.” 며칠 전 대한문 분향소 앞에서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고동민 조합원이 세 아이의 아빠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는 이 말을 차마 맺지 못했습니다. 불쑥 차오른 눈물을 참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껌 딱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아빠를 따르는 아이를 떼어놓고 분향소에 나와 지내니, 아마도 눈물이 맺힌 게 처음은 아닐 겁니다. 그래도 그는 아이의 말대로 ‘신나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털어내려고 금세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돌리더군요. 저는 그게 속상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눈물을 삼키고 삼켜 가둔 그 몸들은 얼마나 무거울까요.


고동민 조합원의 이야기 때문인지 문득 아빠 생각이 났습니다. 간암 진단을 받고 석 달 만에 돌아가셨지요. 헤어질 준비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상주 자리에 앉아 조문객들을 맞는 삼남매는 눈물보다 웃음이 많았습니다. 영정 사진을 보며, 저 깊고 진한 속눈썹을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남겨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렸고, 가끔 밤낚시를 가서 낚아왔던 물고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신춘문예에 응모한다며 몇 번씩 우리에게 읽혔던 동화를 기억해낼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예고된 죽음은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몸 안에 갇힌 눈물의 무게는 바로 그 예고된 죽음의 무게였습니다. 다만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약 없이 예고된 죽음. 해고는 살인이니까. 그래서 저는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참 싫습니다.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다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이제 제발 그만, 이라고 절규할 때면 마치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진실임을 확인시켜주기나 하려는 듯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어느 순간부터 우리를 내리누르기 시작한 절망은, 정리해고를 막지 못했고 아직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우리를 겨냥하기도 했습니다. ‘호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죽음이 더 많다는 걸 압니다. 어떤 죽음들에 직면했을 때, 내가 그때 이랬더라면, 이라는 후회를 털어내는 건 그리 쉽지 않습니다. 후회는 그저 아쉽거나 안타까운 것으로 희미하게 사라져갈 수도 있지만, 통한으로 남거나 헤어날 수 없는 미안함으로 쌓이기도 합니다. 스물 두 겹으로 겹겹이 쌓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말 해고가 사람을 죽이나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죽습니다. 다만 우리는 죽음의 불평등을 문제 삼아야 합니다. 자본이 요구하는 속도를 쫓아가지 못해 몸이 바스라지고, 자본이 흡입시키는 유기용제를 마시다가 생명이 녹아갑니다. 하고 싶은 말을 제때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다가 몸이 타고 차별이 사람들을 거리에서 병원 문턱에서 죽게 만듭니다. 누군가는 살아가다가 죽을 수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죽어가다가 죽습니다. 죽음의 불평등은 ‘죽어감’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루아침에 ‘사람’을 ‘자르는’ 것에 경영‘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야만은, 어떤 나라에서는, 정리해고를 하면서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는 세련됨으로도 변장하더군요. 우리가 죽음을 막기 위해 싸울 것이 아니라 죽어감에 맞서 싸워야 할 이유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이후 사람들은 너도나도 핵의 위험에 대해 말했지요. 사고가 나면 큰일 난다고. 하지만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미 ‘사고’ 안에 있었습니다. 사회적 죽음이 우리의 눈을 붙들 때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놓인 죽어감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현실 말입니다. 해고와 살인의 인과 관계가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해고되는 순간 확인하게 되는 것은 미래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죽어온 시간들,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해온 시간들입니다. 그래서 기약 없이 예고된 죽음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만의 문제도, 해고자들만의 문제도 아닌,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몫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해고가 살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며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불평등에 맞서, 그 아슬아슬한 말에 자신의 삶을 걸고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이 시대 인권의 외침이고, 이 싸움이 인권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쌍용자동차 문제를 해결하고 정리해고 제도를 철폐하자는 이 싸움은, 우리 모두가 ‘사람’으로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싸움입니다. 죽음을 막기 위한 싸움이기보다, 죽음에 저마다의 이유를 돌려주기 위한 싸움입니다.


스물 두 명이라는 숫자로 불리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아빠는 나한테 신나는 사람이야.” 스물 두 명의 노동자들도, ‘누군가한테 어떤 사람’이었을 겁니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누군가한테’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숫자를 세야 하나요. 대한문 분향소에 있는 고 이윤형 님의 영정 그림을 볼 때면 제 눈은 그의 입가에서 멈추곤 합니다. “음, 그런데...” 그가 하려던 말이 입가에 맺혀 있는 것만 같아서요. 뭔가 말을 돌리고 싶은 것 같은데, 그 말이 뭘까. 그가 ‘그런데’ 뒤에 잇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요? 그게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5월 19일 범국민대회에서 그 질문을 향해 우리를 던져보면 어떨까요?

쌍용자동차 얘기를 할 때마다 ‘죽음’이 떨어지지 않는 게 못내 싫지만, 저도 결국 이런 글을 쓰고 말았네요. 아마도 이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 모두 ‘죽음’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을 예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당신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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