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문, 그리고 던져진 진실

[봉당풍경](3) 누가 이들의 죽음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가

토끼 같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동의 고단함을 인내하며 평생을 살아온 가장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 가장들은 몇 대 후손까지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피땀으로 일군 다른 가장들의 삶의 터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미 자식에게 더 말할 것 없이 좋은 것을 먹였고, 최고의 안락한 집을 준 지 오래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이들은 다른 가장의 삶의 터전을 무참하게 짓밟는 것일까?

서로 다른 이 두 형태의 가장들이 우리 사회에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두 형태의 가장들은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생존을 위해 노력했던 어떤 가장들이 맞이했던 ‘처참한 죽음’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자유로울 수 없다.

49세 윤용헌씨, 51세 이성수씨, 54세 한대성씨, 58세 양회성씨, 72세 이상림씨, 그리고 31세 김남훈 경장. 3년 만에 고인들의 존함을 불러본다. 그들의 억울했을 죽음의 순간과 그들을 잃고 용산참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아 죽음이상의 형벌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유가족들을 우리는 떠올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 안고 있는 무거운 진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까지 방기했기 때문이다. TV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됐던 용산 남일당 망루의 모습을 봤음에도 어느새 그 기억을 잊었기 때문이다.


2009년 1월 20일 영하3도, 새벽 6시 30분부터 경찰들은 30여 명의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을 진압하기 위해 용산 남일당 건물을 포위한 채 물대포를 약 한 시간 동안 쏘았다. 농성자 대부분은 그들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망루에 올랐다. 농성자들에게 지급됐던 불공정한 보상에 대해 보호해주는 공무원도 경찰도 정치인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농성자들은 사유재산을 무단 점검, 침해했다는 이유로 용역에게 구타당하고, 경찰에게 범죄자로 취급되었다.

지급된 보상비로는 생계를 꾸려가기 막막했던 이들에게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넣은 것은 삼성과 대림 그리고 국가공권력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전 준비도 없이 긴급하게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경찰은 망루에 오른 농성자들을 이미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1월 새벽의 추위 속에서 물대포를 한 시간 동안 쏠 수 있었고, 특공대를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민권이 18세기에 소유권에서 시작됐다지만,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사회권이 달성되면서 균형이 맞춰지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은 18세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말았다. 즉 인간에게 천부인권으로 부여되는 모든 권리 중에서 소유권 보호를 위해 국가는 어떤 폭력을 사용해도 가능하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우리들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경찰특공대는 대터러작전을 위해서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창설되었다. 그런데 90년도 이후 경찰특공대는 대학가 시위, 노조 파업, 조계사 분규에도 투입되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파업하는 노조조합원이, 그리고 망루에 오른 철거민이 사회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인가?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국가가 특정 지배계급의 목적을 위해 시민들을 ‘용공세력’, ‘간첩’ 등으로 분류하고 공권력을 투입했을 때 발생하는 비극을 우리는 목격했고,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인류를 선도한다는 국가에서 또 다시 그들이 보호했어야만 했던 시민들에게 공권력을 투입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경찰특공대는 컨테이너박스를 공중으로 올려 공격했고 얼마 걸리지 않아 ‘완벽하게’ 진압했다고 보고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몇몇 소방대원들은 특공대원들이 역시 다르다고 영화를 보는 듯 했다고 칭찬을 하기도 했단다. 국가와 언론은 도대체 망루에 오른 철거민들에게 어떤 가면을 씌워 놓았던 것일까? 그들이 가족이고 친구였다면 같은 시민의 입장에서 특공대원들의 활약에 그런 칭찬은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농성자와 자신을 분리시킨 것은 명령에만 의존해야하는 조직의 특수성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상황을 판단하고 사고하는 것은 공무원, 경찰, 군인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이전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대통령이 국민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도 그들은 판단하지 말고 실행해야 한다. 화재가 발생했고 5명의 철거민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죽어서 망루를 내려왔다.

망루 안에 사람이 있었다. 삶의 터전을 잃어 가족을 부양해야 할 가장이 있었고 인생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31살의 경찰이 있었다. 그들을 죽게 한 국가 명령자나 삼성과 대림은 그 곳에 없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같은 시민들을 분류하고 역할을 쥐어 준다. 이에 어떤 가장은 테러리스트가 되고, 어떤 가장은 국가에 충성하는 경찰공무원이 되서,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른 채 이승과 결별해야 했다.


“진압경찰이 옥상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크레인을 통해 내렸을 때 망루가 지어진 옥상으로 건너가야 했었다. 출입문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막힌 문이었고, 하나는 농성자들에게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열린 문이었다. 그 문 중 어디로 들어가야 진입할 수 있는지 경찰 특공대도 몰랐다. 대단히 우발적이고 아무런 준비가 없이 투입된 것에 대해 철렁했었다.”

홍지유 감독은 용산참사의 25시간을 기록한 다큐영화의 제목을 정한 이유를 여기서 찾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특공대원들은 투입되기 이전에 투입될 지형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용산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긴급하게 아무 준비 없이 용산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또한 정권이 날아가고도 남을법한 사건이 국가와 보수언론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농성자들만이 기소됐고 이들 중 7명은 형을 살고 있다. 국가와 자본은 여기서 자신감을 얻어 똑같은 방법으로 쌍용차 파업노동자들을 진압했고, 강정마을까지 그들의 세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어떤 논리를 내세워도 국가가 공권력을 투입해서 국민을 살인하는 것 역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적인 심판이 진행되지 않을 경우 법적인 쟁점으로 사안이 희석되고, 더디게 오랜 법정 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진실의 문에는 발화의 원인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 두 개의 문을 통해 던져진 진실을 이제 우리 사회는 규명해야 할 것이다. 국민을 죽인 책임자가 밝혀지고 처벌되지 않은 채, 시민권을 논한다는 것은 몫이 없는 자들에 대한 배제를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3년 동안 방치되었던 진실에 대해 우리는 아프지만 드러내고, 힘겹지만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 오늘도 땀 흘려 일하는 모든 가장들에게 “아빠! 힘내세요!”라고, 당신의 땀을 그 누구도 쉽게 짓밟을 수 없을 거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