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새책] “벌거벗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 감시사회”

정보는 과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어떤 경구를 패러디했던 구호가 횡행했던 적이 있었다. “정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원본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는 카피본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던 일종의 계시는 도대체 “진리”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려주지 않으며, 그 진리의 수용자 내지 수혜자가 될 “너희”가 누구인지 명백히 규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유”라니! 카피본 역시 “정보”의 범주는 어디까지이며 도대체 “자유롭게” 될 “너희”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존 페리 바를로(John Perry Barlow)가 천명했던 “재산, 표현, 정체성, 운동, 맥락에 관한 법적인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 그런 세계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시공간 안에 온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론자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가 없으므로 물리적 강제력을 통해 질서를 만들 수 없다”고 선언되었던 사이버스페이스는 오히려 오프라인의 육체들로 하여금 물리적 강제력을 도모하기 위한 기제를 찾아 헤매는 시공간이 되어버렸다.

정보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는 시공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막을 올렸으나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보면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암울함이 그림자처럼 엉켜있다. 그건 어쩌면 과잉된 낙관이 가져올 필연적 실망일 수도 있지만, 정보사회에 대한 희망이 ‘사회’에 대한 구조와 결착된 것이 아니라 오롯이 ‘개인’의 욕망에 치중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가진자, 돈을 가진 자는 물론, 순전히 하나의 점(dot)으로 웹을 항해하는 개인들까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온라인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만 전망의 지평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자본에게까지 평등하게 자신의 능력을 제공했다. 마치 공기와 물처럼.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국가권력과 자본은 공기와 물을 돈으로 전환시켰듯이 자원으로서의 온라인을 잉여창출의 원자재로 이용하는 재능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해방감을 만끽하며 웹서핑을 하는 그 순간에도, 나의 클릭질 한 번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기관과 기업의 어느 데이터베이스에선가 저장되고 분류되며 활용된다. 공공연히 말 한마디, 아니 자판 한 부분을 잘못 건드려 웹상에 족적이 남으면 기관과 기업은 물론이려니와 ‘네티즌 수사대’에 의한 신상털기로 한 순간에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권력에 도전하거나 이윤창출에 방해가 되거나 혹은 통념에 어긋난다는 이유가 성립하면, 온라인은 해방의 공간이기는커녕 사지를 찢는 거열대가 되어버린다.

관계의 형성이 언제나 평등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기에, 균형을 위한 견제는 이루어진 모든 관계가 종료되기 전까지 하염없이 지속된다. 아니, 이것은 도리어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당위로 진전되는데, 왜냐하면 견제의 소실로 인한 균형의 파괴는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관계를 예정하기 때문이다. 무기평등의 원칙이 깨진 곳에 남는 것은 지배와 복종. “자유”로워야 할 “정보”의 공유는 그 질과 양의 편향이 발생하는 동시에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를 가른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조차 균형은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결국 거듭 견제를 통한 균형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할 것인가?

따라서 “정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희망의 선언의 이면에는 거두절미하고 “정보를 획득하라!”는 명령이 도사리고 있다. 다시 조심스레 이 선언을 풀어보면 “정보를 획득하라. 그러면 자유가 주어질 것이다. 정보를 획득하지 못하면 자유는 없으리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명령이 개별적인 참여자들에게는 거의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보를 획득하여 이를 이용하는 사람은 물론 자신의 정보가 타인에 의해 수집되고 관리되고 이용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까지 이 힘의 관계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권력, 자본, 개인의 삼위일체가 만들어낸 정보 디스토피아

이 의식되지 않고 있는 상태를 재조명하고, 그럼으로써 끊임없이 의식하고 의심하며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들이 한데 모여 “감시사회(한홍구, 최철웅, 엄기호, 홍성수, 한상희 공저. 2012. 철수와 영희)”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들은 국가권력, 자본 그리고 개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수 없는 “감시”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일그러진 욕망의 형태가 어떻게 현출되고 있는지를 밝힌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역외자의 입장으로 볼 때는 재미있을 수 있겠지만, 그 논의들의 한 가운데에 나를 집어넣으면 어쩐지 을씨년스러워지는 감정을 지울 수가 없다.

음산해지는 느낌의 한 축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내가 감시당하고 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 다른 한 축에는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내가 감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자괴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러한 현실 자체가 내가 살아가는 모습일 뿐이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화된 조건이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도 쓸데없이 감시당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사람들이 받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감시사회”는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며 주제를 풀어나간다. 국가권력의 감시, 특히 한국사회에서 그것이 어떤 목적과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피고 나면(한홍구, 제1강 현대사를 통해 바라본 감시의 추억) 국가권력이 아닌 자본 및 개인이 편리함이라는 미명 하에 어떻게 감시의 망에 결합되는지를(최철웅, 제2강 편리함 뒤에 숨은 감시의 그늘)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시형태들이 왜 사회적으로 승인되는지 혹은 더 나가 주체들이 왜 스스로 자신에 대한 감시를 허용하게 되는지, 더불어 왜 예외가 일상이 되고 개인이 이를 승인하는지를 살피고(엄기호, 제3강 불안이 감시를 부른다) 전도된 가치체계가 결국 법체계의 왜곡을 낳는 현상에 대한 법적 분석 및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법사회학적 이해가(홍성수, 제4강 일상적 감시를 의심하라)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감시의 도구가 되고 있는 주민등록번호 및 이 번호와 관련된 정부의 의도, 그리고 과도한 정보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현상에 대한 폭로가(한상희, 감시 없는 세상 꿈꾸기) 전개된다.

제1강이 주로 국가권력의 국민감시에 천착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면, 제2강과 제3강은 자본 및 개인에 의한 감시의 여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런데 사실 국가권력에 의한 감시체제나 자본 혹은 개인에 의한 감시체제는 동일한 기제 속에서 이루어진다. 언제나 행위의 표면은 스스로의 당위를 구성하고 있다. 안전, 안심, 안정은 인류가 리바이어선에게 스스로의 자유를 일정부분 담보로 잡히던 그 순간부터의 염원이었고, 권력이나 자본은 바로 이 염원을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장악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 세 가지 안(安)자 돌림의 이상들에 더해진 +α는 편리함이리라.

반면 안전, 안심, 안정 그리고 편리함의 이면에 숨은 욕망의 본질은 더 많은 권력이며 더 많은 이윤이다. 개인에 의한 감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욕망은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권력이며 이윤에 다름 아니다. “디지털 혁명의 미래”에서 고든 벨과 짐 겜멜이 디지털 사회의 특징으로 ‘완전한 기억’을 거론한 바, 결국 사이버스페이스에 남겨진 나에 대한 ‘완전한 기억’들은 누군가에겐 권력과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완전한’ 밑거름이 될 터이다. 이러한 권력의 위계가 가지는 위험성은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다. 권력과 자본이 상호 공모를 통해 이 위험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개인은 개인대로 권력이나 자본이 만들어놓은 틀거리를 자신의 도구로 활용하기를 중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내부의 상서롭지 못한 질서체계를 이 책의 제4강이 설명한다면 제5강은 주민등록과 관련한 이 공고한 공모체계의 일단을 엿보게 만든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강의록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현상들이 사실은 정보의 재편과 독점, 이를 통한 이해관철이라는 주체의 욕망이 초래하는 감시가 다른 세상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일이었고 일일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것에 있다. 한홍구 교수는 국가권력의 감시와 통제는 그것이 군부독재 등 과거의 권위주의정권 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민간인 사찰은 민주화된 시대라고 해서 권력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한다. 이러한 권력의 오만방자함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민이 국가를 감시해야 하고 단도리해야 한다는 결론은 민주화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그 중요성이 정비례하여 높아진다.

자본의 정보독점 혹은 개인의 정보수집 역시 마찬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소비자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애초부터 자본의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자본의 정보수집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 기능의 수행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은 소비자의 욕망을 창출하여 전혀 다른 이윤의 동기를 형성하고자 하며, 그리하여 자본의 정보수집은 소비자가 스스로 원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데까지 그 기능의 유용성을 확대한다. 그리고 소비자이자 정보주체인 개인은 계약을 통해 편리함과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스스럼없이 교환한다. 더 나가 개인은 그 편리함을 이용하여 자신 외의 타인들의 상태를 들여다보고자 욕망한다. 최철웅의 설명은 건조하지만 그 내용은 나를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모순적 상황에 올려놓는다.

실질적인 사례를 통해 친숙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전개되는 설명을 통해 엄기호는 민주주의의 요청이 오히려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게 되는 상황, 즉 정부와 자본에 대한 투명성의 요청이 강해질수록 그 반대편에서 개인의 영역이 잠식되는 모순을 보여준다. 더불어 소극적 자유로서의 프라이버시권이 특히 현대사회에 들어와 일종의 재산권으로 변질됨으로써 벌어지는 웃지 못 할 상황을 상기시킨다. 엄기호의 강의 말미에 조심스레 던지는 어떤 의구심, 즉 “우리는 어쩌면 타자의 악마화 현상에 스스로 완전히 매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오래되었으면서도 낯선 각성(128쪽)은 적대적 대상을 설정함으로써 손쉽게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천박함에 대한 질타일지도 모르겠다.

프라이버시권의 역사에서부터 현대적 프라이버시의 위기, 그리고 이와 관련된 법적인 문제를 설명하는 홍성수의 강의는, 짧은 강의 분량으로는 소화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소재를 들어 ‘감시’의 문제를 분석한다. 홍성수는 특히 CCTV의 예를 통해 우리가 접하는 감시의 기술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비교하면서, 획일화된 비판이나 편향된 옹호를 피하고 그 안에서 프라이버시권을 지킬 수 있는 법적 가능성을 도모하고 있어 흥미를 준다. 법학자의 입으로 듣는 “프라이버시는 다른 여러 가지 자유와 권리의 전제”(141쪽) 또는 “프라이버시는 …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178쪽)라는 설명은 사회적 혹은 경제적 관점이 아닌 제도적 관점에서 프라이버시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에 대한 단초를 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수집되고 분류된 정보는 바로 그러한 체계적 관리구조로 인하여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현상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러한 왜곡이 매우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과도한 정보수집체계가 가지는 필연적 특성이라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국가의 복지행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개인들의 정보이지만, 그 정보들로 인하여 오히려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삶이 파괴되어버리는 현상이 실재하고 있음을 한상희의 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상희는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정교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는 눈”이라고(201쪽) 단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삶을 보는 눈”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강의를 통해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는 감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일단 접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강연이라는 형식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강연자(즉 저자)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들이 강연 중 제시하고 있는 여러 대안들이 사실 똑 부러지는 확실한 방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 강연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확산일로에 있는 감시의 문제가 몇몇 전문가의 견해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동시에,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대안, 처음으로 돌아가기

장구한 세월 동안 오프라인에서 벌어졌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된다. 비록 지금까지 경과된 모든 상황 속에서 제반조건의 나침반이 절망적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더라도 여전히 온라인에 긍정적 가능성과 상실할 수 없는 가치가 남아 있다는 사람들은, 제국의 첨단 미국에서 추진되고 있는 온라인 저작권 침해 금지 법안(SOPA)과 지식재산권 보호 법안(PIPA)에 반대하면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을 잇는 ‘인터넷 자유 선언(Declaration of Internet Freedom)’을 준비한다. 새로운 점령(occupy)이 가능할지 여부는 아직 확정적이지 않지만, 온라인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이 문제로 계속 요동칠 것만은 분명하다.

정보사회가 가지고 온 현실의 편리함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의 부작용을 실감하거나 혹은 우려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한 편리함을 유지하는 동시에 종말론적 미래상을 승인할 수 없는 사람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어져야 할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이나 ‘인터넷 자유 선언’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감시사회’의 강연자들이 주장하는 바, 매우 기초적이고 단순한 그 해결책들, 너무나 소박한 그 대안들을 곰곰이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무섭도록 진화하는 기술을 쫓아가는 데에 정신이 팔려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어야 할 원칙과 원리들을 철지난 구태의 한 부분으로 치부한 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은 중요하지가 않죠. 우리를 가장 안타깝고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프라이버시는 내 것이니까 쓰려면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우리 존재양식이 바뀌어버렸기 때문이죠. ‘내면’이라는 개념은 이른바 근대가 출발하면서부터 만들어진 것인데 만약 구경거리 사회가 고착된다면 그때는 이미 근대가 아닌 다른 시대를 사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귀농한다거나 삶을 디디지털라이즈(dedigitalize)해버리게 되는 거죠. 내 프라이버시가 드러나는 것을 아무에게도 동의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겁니다. 구경거리 사회에 대한 대응은 결국 개인적인 결단으로 모여요. 이것 말고는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123쪽)

어쩌면 암울한 미래에 대한 묵시록적 예언일지도 모르겠으나, 길게 인용한 엄기호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는 스스로를 구경거리로 내놓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게 된 우리의 욕망이 빚은 참담한 현실에 대한 반추를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면’이 사라진 시대의 귀결은 ‘감시사회’의 문제가 “개인적인 결단”으로밖에 해소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감시사회’를 읽는 모든 독자들이 다 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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