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사태와 좌파의 혁신

[진보논평] 희망의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올림픽 기간에는 많은 이슈들이 묻히기 마련인데, 최근 티아라 사태가 잠시 올림픽을 잊게 만들었다. 통진당 사태 역시 티아라 못지않게 폭발적이다. 최소한 운동진영에서 만큼은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다. 폭풍흡입 수준이다. 운동진영에서는 통진당 때문에 뭘 해도 이슈가 안 되거나 덜 된다.

통진당과 함께 파산한 진보정치

그런 통합진보당이 이석기, 김재연 두 의원의 제명 안 부결로 인해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당장 탈당은 어렵지만 혁신파를 중심으로 재창당이 불가피해졌으며, 탈당하고 있는 당원들이 줄을 잇는 등 당 내외 혼란이 상당히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사태를 진즉 예상했던 입장에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겠지만 통진당 내외부의 지지층들은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고픈 욕망이 있던 게다.

아마 의원총회에서 제명 안이 통과되면 당을 재정비해서 대중적 진보정당으로서의 검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또 하나의 반증인 것이다. 비록 구당권파의 패권으로 인해 통진당에게 사망선고를 내렸지만 결국 정치는 사람의 행위와 다양한 관계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나름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대중들은 혁신파에게 통진당의 혁신을 기대했던 것일까? 아님 구당권파의 자정노력과 상식을 믿었던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상식’이 당내 패권주의 종식과 민주주의 회복을 일컫는 것도 상식이다. 구당권파가 ‘가해자로 몰린 억울함’을 근거로 ‘당원 중심주의’와 ‘다수결 원칙’을 문제 해결 방식으로 내세웠지만, 이 또한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이제 국참당계와 진보신당 탈당파 등 신주류가 더 이상 통진당에 남아 있을 명분과 실리는 모두 사라졌다. 남아있어 봤자 구당권파와 동귀어진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 야권연대도 불투명해 졌고, 이정희의 복귀나 유시민, 심상정의 대선 전략도 타격을 입게 되었다. 물론 구당권파가 ‘통진당 하나로’를 기치로 해서 강기갑 대표 체제를 중심으로 내부 단결과 단합을 호소하고 있고, 국참당이 안고 온 8억 원의 부채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뿐이다.

통진당 사태는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방식과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의 문제가 그 핵심이다. 대중들이 원했던 것은 상식과 최소한의 민주주의였다. 그런데 통진당에는 세 가지 종류의 상식이 있다. 그것은 야권연대는 불가피한 대세라는 것, 통진당이 ‘유일한’ 진보정당이라는 것, 대중보다는 당원과 소통하겠다는 것 등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이들이 진보정치세력이라는 사실과 함께 진보정치가 몰상식하고 비민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더불어 이들이 모든 진보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집단이 되었다. 이렇게 이들은 진보정치와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 그리고 진보운동이 그 동안 쌓아올린 여러 가지 성과들을 오로지 자신들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 한순간에 붕괴시켰다.

진보정치 위기의 시대에 진보를 볼모로 한 자신들의 조직 사수가 결국 진보정치를 파산상태로 만들었다. 진보정치는 권력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또는 일 정파의 권력 소유가 진보정치의 위기를 가중시킨 것이다. 이처럼 구당권파의 권력과 조직에 대한 ‘유일성’ 판타지는 여성을 오직 성적욕망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현대의 포르노그라피를 닮았다. 불완전하고 모순된 인간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불경한 짓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통진당내 일부에서는 두 의원의 사퇴나 제명이 통진당 혁신의 핵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면 타당하지만 그것이 진보정치의 혁신은 아니다. 태생적으로 ‘우경화’된 통진당의 혁신은 국민비호감으로 전락한 두 의원의 제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소아병적이다. 두 사람을 내치지 못했다고 해서 진보정치가 절단 나거나 미래가 절망적인 것도 아니다. 태생적으로 자유주의 세력과의 선택적 친화력을 보였던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통진당의 탄생은 오히려 올바른 선택으로 보인다. 이제야 제 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그들에게 과도한 기대와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진보정당으로 새롭게 혁신을 하려면 진보정치가 지향할 급진성, 좌파적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연대에 대한 원칙과 실천의지가 공식화되어야 한다. 혁신은 그런 것이다. 민족주의는 자본주의를 공고히 해왔고 파시즘의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교훈을 얻었다. 이러한 교훈을 불식시키기 위한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과 연대하면서 의존해왔던 진보좌파야말로 어떻게 자기 혁신을 할 것인지가 향후 진보정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이번 통진당 사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노동정치와 진보정치의 위기가 대중화 사회화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도 소나기를 피하듯 잠시 피신했다가 다시 등장하여 호객행위 하듯이 대중들에게 표를 구걸하는 일갈을 토하면 대중들은 한번쯤 눈을 감고 다시 선택해 주었다. 그것은 보수세력이 매우 심각한 수준의 부도덕한 집단이기 때문에 진보세력을 그래도 대안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보세력은 그 동안 보수세력들의 도덕 불감증과 윤리의식 부재로 인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대중들은 빠르게 진화하면서 진보정치의 부도덕성에 대해서 가차 없이 단죄를 내리며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이 진보정치에게는 커다란 위기로 다가온 것이다.

진보정치의 위기는 97년 이후 해마다 반복되어 새삼스럽진 않지만 이번 위기는 그 동안의 위기가 축적되어 총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전의 위기와 성격이 다르다. 대중들은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중적이다. 보수세력의 비민주성과 부도덕성에 대해서 질타하지만 그들의 민생해결 능력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인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진보세력에 대해서는 보수세력보다 나은 도덕성과 민생문제 해결 능력을 원하기 때문에 가혹한 비판과 함께 배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가 진보정치에게는 대중들로부터 더욱 배제되고 고립되고 소외되는 위험한 위기가 된 것이다.

지금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혁신

따라서 이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좌파정치운동 내지 좌파정당의 출현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 좌파가 대선에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역규정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좌파가 바닥을 드러낸 마당에 과도하게 따지지 말자. 사전에 기존 좌파정치의 실패에 대한 엄밀한 평가와 반성이 필요하다. 좌파 상호간 최소한의 품위와 예의도 지켜야 한다. 무능함과 과오에 대한 자기 반성과 인정 그리고 미안함에 대해 솔직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제대로 목도하는 것이다. 역대 정권이 일관성 있게 찬성했다고 해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한 안철수에 대한 비판적지지 현상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이건 뭐지? 현재 대권후보 중 가장 선하고 인간적이고 능력있고 겸손하다고 평가받는 안철수에 대한 지지는 이명박을 지지했던 사회심리적 메카니즘과 동일한 현상이다. 이제 안철수는 현상이 아니라 흐름이고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안철수는 대선 정국의 중심이고 야권연대를 주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좌파는 안철수에 대한 전술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안철수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안철수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안철수의 무엇에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왜 좌파는 안 되는지를 들여다 볼 일이다. 그래서 좌파들이 대선 이후를 모색하려면 대선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에게 필요한 것이 많다. 새로움이 절박하고 쇄신과 혁신이 넘쳐나는 시대다. 좌파에게도 새로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착각하지 마라, 새롭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좌파단체 상호간 좀 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자. 그것이 혁신이다.

좌파에게도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대중과 함께하는 스토리가 필요한 것이다. 좌파의 위기가 정치와 일상이 분리됨으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기에 스토리가 더더욱 절실하다. 그래야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이든 노동자 계급정당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혁신이다.

새로운 패러다임도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지역, 생태, 여성을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이자 패러다임이라고 말하지만 이에 걸맞은 내용과 전략이 부재하다. 단기적 중장기적 계획과 전망을 모색하는 구체적인 지도를 그려야 한다. 이것이 혁신이다.

좌파는 실종된 노동정치를 복원시키고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사회를 지향하는 좌파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정치는 신념과 이념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관심, 배려, 사랑, 의리 등이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필요조건이다. 무엇보다 좌파에게 필요한 요소들이다.

결국 좌파는 또 다시 자기혁신을 반복해서 자기 스스로 요구해야 한다. 먼저 전선을 재편하고 사회변혁 과정에 대한 좌파 나름의 실질적인 실천계획을 마련해 가야 한다. 앞으로 계급투쟁 지형의 상당한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파의 기본프레임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한 세부적 기획에 대한 좌파진영의 합의와 실천이 필수적이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대중에게 안겨주는 것, 바로 이것이 욕망의 정치를 넘어선 ‘희망의 정치’이자 ‘힐링의 정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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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보정치

    모두가 통합진보당이 어렵다고 할때
    기둥이 썩어 통합진보당이 주저 앉는다 하며
    무리지어 보따리를 싸서 탈당을 준비 할때
    우리는 진보정치를 다시 세울수 있고
    그 힘으로 정권교체를 할수 있다고 화합을 말하는 분
    분명하게 결이 보이지 않습니까?
    통합진보당 당원들과 국민들은 진보정치 야권연대의 힘 정권교체가 보입니다.
    너도나도 통합진보당 지도자들이 사망선고를 하고 떠날때....
    오히려 통합진보당으로
    진보정치 야권연대 정권교체 벽돌을 지고 오시는 분!

  • 김병훈

    지금도 현실 인식 못하고 진보정치가 대권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어이없을 따름입니다. 자기 앞가림 하나 못하고 민주주의의 기본인 절차적 정당성 조차 지키지 못한 진보세력이 무슨 대권에 대해 할말이 있는지 전혀 공감가지 않네요. 구시대적인 계급이니 전선을 가다듬느니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마시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십시오. 지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데 무슨 혁신은 혁신입니다. 그냥 역사의 퇴물로 남으시고 새로운 세력들이 규합해 시대에 맞는 진보적 가치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나아보이네요. 최루탄 던지는 식의 진보는 이제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듯 합니다.

  • 청솔

    많은 글을 쓰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철새들의 행진에는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통합진보당은 철새의 온상입니다. 비민주적인 당이다.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통합진보당으로 철새처럼 어려울때 항상 도망같다. 기대할 수 없는 당이다. 며칠 있다가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면 변명이나 늘어놓고 하면 갈길이 먼제 언제 갈것인가 책임지는 놈은 한 놈도 없고 변명으로 일관하여 비생산적인 싸움만 하고 있을 것이 뻔한데 통탄할 노릇이다. 투쟁 !!!!

  • 현장

    그야말로 자기 앞가림 못하고 사물구분 못하고 자기혁신할 생각은 안하고 실력도 없으면서 노동자들 내몰았다가 꽁무니 빼고.. ( 주체주의자들은 그래도 책임질려고하는데 이것들은 항상 꽁무니 )진보당 헐뜻기에 환장한 좌파가 무슨 혁신을 이야기 할까 현장에서 니들이 무슨 짓 하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언고 생각해봐라

  • 진보는 개주라

    제대로된 정치 한번 해봅시다 지금까지 진보정치는 정치가 아닙니다 명망가들의 혀놀림에 손놀림에 따라다닌 정치는 정치가 아닙니다.몸대주고 돈대주는 정치가 아니라 인민이 정치에 주인으로 나서는 정치를 만들어야합니다.스탈린식의 당독재는 파산해야합니다.

  • 푸쉬킨

    아직도 스탈린 타령인가? 혹시 이북의 정치가 스탈린식인줄 안다면? 그야 말로 무식의 극치이자 소아병이다 김일성주석이 소련의 잘못된 정치와 얼마나 싸웠는지 알까 ? 기본적으로는 서로 칭찬도하고 도움도주는 국제주의적 입장이었지만 대국주의와 소련식(스탈린식) 경제건설방향과 정치에 반대 하였으며 이후 쿠바 미사일위기 (흐루시쵸프) 때에는 체게바라와 함꼐 소련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세계 혁명의 길을 제시한게 김일석주석이고 북의 정치 이다 이후에도 쭉 그렇고 제발 엉터리역사 CIA 공작 , 파쇼언론이 주어주는대로의 역사 ,좌파인척하면서 실은 궤변인 역사를 믿지말고 세계 현실을 객관적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고하여야 참세상이 보인다. 이래도 못알아듣는다면

    쇠귀에 경읽기요
    쥐귀에 맑스주의 읽기일 것이다

  • 운중거사

    좌파의 혁신이라? 자본주의적 조직 형태인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노조와 정당이라는 근대적 도식으로 과연 좌파의 혁신이 가능한가요? 현재 좌파의 위기는 자본주의(근대)의 위기와 과연 동떨어진 현상인가요? 그럼에도 좌파의 위기를 자본주의적(근대적) 조직 형태인 노조와 정당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맑스가 뒤늦게 깨달았듯 자본주의적(근대적) 국가형태를 통해서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맑스가 불길하게 예언했듯 자본주의적(근대적) 국가권력에 집착한 결과가 결국 소련의 패망을 불러왔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뭔가 배워야 하지 않나요? 현재 좌파의 문제는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아무리 혁신을 외쳐본 들, 자본주의적 노조와 정당체제를 벗어날 수 없는 한 결국 자본주의적 혁신(?)을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케인즈주의가 역사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지 않나요? 자본주의적 철학과 방법의 관점에서 아무리 실용적으로 혁신을 외쳐본 들, 결과는 결국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요? 노조와 정당이라는 조직형태는 관념적으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좌파조직을 만든다 하더라도 결국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에 같힌 조직형태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적 조직형태에 지나지 않는 노조와 정당이 아닌 새로운 조직형태를 모색하지 않는 한 좌파의 위기는 극복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이미 노조와 정당의 한계가 역사적 실천을 통해 검증된 이상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조직형태(이것이 낡은 도식적인 사회주의적 모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를 모색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볼 때 합리적이지 않은가요? 좀 황당한가요? 새로운 이론은 역사적으로 항상 기존의 담론을 뛰어넘는 발랄한 발상 속에서 나오지 않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