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가치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

[기고] 강신준의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1)” 에 대하여

[출처: 경향신문 캡처]

1.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을 바꾼 것이 생산과 소비가 교환으로 분리된 때문이라고?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을 바꾼 것은 폭력적 수탈에 의한 노동자와 생산의 외적 조건의 분리 때문이다!

강 교수는 네 번째 글의 부제를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을 바꾼 교환, 그 가치의 양적 단위는 노동”이라고 붙였다. 그러므로 이 부분부터 비판하기로 하겠다.
강 교수는 “마르크스는 이들[‘개미와 베짱이’]2)의 운명을 바꾼 것이 생산과 소비가 교환으로 분리된 때문이라고 얘기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생산과 소비의 분리 즉 상품교환 때문에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말하기는커녕, 지배계급의 폭력적 수탈로 인한 노동자와 생산의 외적 조건의 분리 때문에 노동하는 사람이 가난한 노동빈곤층(working poor)으로 전락했음을 낱낱이 폭로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이 바뀌는 문제는 <자본>「제8편 이른바 원시적 축적3)」에서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조금 길지만, 이 제8편 27~31장에 걸쳐 서술된 원시적 축적에 관한 내용을 압축하고 있는 26장에서 주요 부분을 발췌해 옮겨 보겠다.4)(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제목은 필자가 붙였다. 번역은 마르크스가 직접 전면적으로 개정한 불어판을 전거로 했다.5))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기만성

이 원시적 축적이 정치경제학에서 하는 역할은 신학에서 원죄가 하는 역할과 거의 같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아담이 지혜의 사과를 깨문 그때부터 비로소 세상에 죄라는 것이 출현했다. ...
그와 마찬가지로, 옛날 옛적에, 그것도 매우 까마득한 옛날에, 사회가 두 진영으로 저절로 나누어진 때가 있었다. 한편에는 부지런하고, 머리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절약하는 습관을 타고난 엘리뜨(선량善良)들6)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아침에서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술잔치를 벌이는 한 무리의 불한당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당연한 이치로 한쪽은 재부를 점점 더 축적한 반면, 다른 한쪽은 오래지 않아 모든 재부를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다수의 빈곤, 끝도 쉼도 없는 노동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자기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 먹고살아야 하는 막대한 다수 대중의 빈곤과, 소수의 풍요,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의 과실은 모두 거두어들이는 소수 특권층의 풍요로 사회가 양분되었다는 것이다.

신학상의 죄 즉 원죄의 역사에 대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찌하여 인간이 자신의 이마에 땀을 흘려서 자신의 빵을 벌도록 주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면에, 경제적인 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하여 주님의 이 지상명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즉 어째서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서도 잘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줌으로써 [원죄 이야기가 지닌] 애석한 빈틈7)을 메워 준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린애 말장난 같은 이 진부한 이야기들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 우리에게 되풀이하고 있다. ...
하지만, 현실 역사의 연대기에서는 소유는 언제나 정복이라든가, 노예화라든가, 무력에 의한 노략질이라든가, 난폭한 폭력의 창궐 같은 것들을 수반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의 자기만족적인 입문서에서는 이와 반대로 예로부터 언제나 목가(牧歌)가 지배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서 정의와 노동 이외에 다른 치부수단은 결코 없었다. 단, 금년은 예외로 하고! 그런데 원시적 축적의 수단과 방법은 실은, 뭇사람들이 바랄 모든 것들 가운데, 목가적인 것만 제외한 모두 다였다.

원시적 축적의 비밀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공식적인 관계는 순전히 상업적인 성격의 관계다. 전자가 주인의 역할을 하고 후자가 하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계약 덕분인데, 이 계약에 의해 하인은 주인에게 고용되어 있으며, 그런 고용-피고용 관계에 따라 전자의 지배를 받는다. 그 뿐 아니라 이 계약에 의해 하인은 자기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에 대해 일체의 소유권을 포기한다. 그러면 임금노동자는 어째서 이런 밑지는 거래를 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의 몸이 지닌 힘, 잠재능력의 상태에 있는 노동, 즉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반면, 이 노동능력에 형체를 부여하는 데 [즉 노동으로 구체화하여 지출되게 하는 데] 필요한 외적 조건들 일체, 노동의 유용한 실행에 필요한 소재와 도구, 노동력을 유지하고 그 능력을 생산 활동으로 전환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양식을 자유로이 사용 또는 처분할 권능, 그 모두를 주인 측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의 밑바탕에는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철저한 분리가 존재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일단 자리를 잡자마자 이 분리는 점점 더 큰 규모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전자 즉 생산수단의 분리가 후자 즉 자본주의 체제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에, 전자 없이는 후자가 확립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계가 세상에 출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생산수단들이 이미 확실하게 생산자들로부터 박탈, 분리되어 있고, - 이 직접생산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실현하고자 이 생산수단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 그리고 이 생산수단들은 이미 상품 생산자들에 의해 횡령당한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 바로 이 횡령한 상품생산자들이 타인노동의 착취에 입각하여 이익을 얻으려고 그 직접생산자들을 고용한다. 노동이 그것의 외적 조건으로부터 분리되게 하는 이 역사적 운동, 그것이 바로 ‘원시적’이라고 불리는 - 왜 이렇게 불리느냐 하면, 그 운동은 부르주아 세계의 선사(先史)시대 또는 전사(前史)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 축적의 숨은 비밀이다.

원시적 축적의 역사적 과정

자본주의 경제 질서는 봉건제 경제 질서의 뱃속에서 태어났다. 봉건 질서의 해체는 자본주의 질서의 구성요소들을 해방시켰다.
노동자에 대해서, 즉 직접생산자에 대해서 말하자면, 자신의 몸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는 무엇보다 먼저 경작지에 묶여 있는 상태 또는 다른 사람에게 봉신(封臣)으로서 인격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상태를 끝장내야 했다. 그 노동자는 또 그들의 장인(匠人), 그들의 동업(同業)단체, 그들의 도제(徒弟)법 등으로 이루어진 그 동업조합 체제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시장과 만나면 그곳이 어디든지 자신의 상품을 가지고 가는, 자기 노동8)의 [보다 정확히 말해서 자기 노동의 생산물의] 자유로운 판매자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독립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킨 그 역사적 운동은 농노 제도와 산업상의 위계 제도9)로부터의 생산자의 해방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그 해방된 자유민은 자신의 모든 생산수단과 구세계 질서에 의해 제공된 모든 생활보장을 박탈당한 뒤에만 자기 자신의 판매자10)로 된다. 이들에 대한 수탈의 역사는 멋대로 추측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인류의 연대기에 지워지지 않는 피와 불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임금노동자의 발생과 자본가의 발생을 동시에 포괄하는 이 발전과정 전체가 노동자의 예속의 출발점을 이룬다. 이것이 이룩한 진보는 노예화의 형태를 변화시킨 데, 봉건적 착취로부터 자본주의적 착취로의 전환을 일으킨 데 있다. 이 전환의 경과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너무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 생산의 첫 번째 밑그림이 일찍부터 지중해의 몇몇 도시들에서 그려졌지만, 자본주의 시대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
원시적 축적의 역사 속에서, 자본가계급이 계급형성의 길로 전진함에 있어 지렛대 역할을 했던 혁명들은 모두가 다 획기적이다. 그 가운데도 특히 거대한 수의 대중으로부터 그들이 지닌 생산수단과 전통적 생활수단을 박탈하면서, 그들을 불시에 노동시장에 몰아낸 혁명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사태 진전 전체의 기초, 그것은 바로 경작 농민에 대한 [토지] 수탈이다.


나아가 <자본> 1권의 제일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장은, 불어판에서, 원시적 축적의 내용을 이렇게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축적양식,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기노동에 근거한 사적 소유의 소멸을 전제로 하고 있다.11) 그리고 그 소멸의 기초는 바로 노동자12)에 대한 [토지와 생산수단의] 수탈이다.”13)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 노동자에 대한 수탈에 있음을 - 생산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폭력에 의해 분리당한 데 있음을 거듭 분명하게 밝히고 또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어마어마한 운명의 전환이 어떻게 교환과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인지, 생산과 소비의 분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인지 어이가 없다.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정면으로 반대될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일부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폭력적인 원시적 축적이 아니라 독립 소생산자들의 양극분해에 의해 자본가계급과 임금노동자계급이 생겨났다는 이론을 내놓고 있으나, 이는 앞의 <자본> 1권 26장에서 인용한 부분에서 보았듯이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 자신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변호론을 자본주의 출생의 역사에까지 확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

2. 자본주의의 본질이 상품교환이라고? 고유한 특성이, 모순이 아니라 차이가 본질이라고?

강 교수는 “상품은 교환되는 물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품이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왜 본질인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더미’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고. 그리고 “이 말은 뒤집으면 자본주의가 아닌 곳에서는 부의 기본형태가 상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라고.

강 교수의 이론을 요약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 = 부의 기본형태가 상품인 사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여러 속성이나 특징 가운데 다른 사물과 달리 유일하게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특징이 그 사물의 본질이라는 것이고, 자본주의만이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특징이 곧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착취하는 잉여가치 생산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적 형태 - 부의 형태가 아니라 생산의 형태 - 로서, 자본주의가 아닌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째서 이처럼 산 노동이 죽은 노동을 지배·착취하는 속성이나 특징은 자본주의의 본질이 되지 못하는가?

이처럼 자본주의의 본질이 상품교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용 그 자체에서도 틀렸을 뿐더러 그런 주장을 이끌어내는 방법론에서도 틀렸다. 어느 사물이 자기만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나 특징은 그 사물의 고유한 특성이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현상과 쌍을 이루는 범주로서, 그 사물이 변화, 발전, 이행하는 현상까지 좌우하는 내재적, 규정적 성질이다. 그런데도 강 교수처럼 어떤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차이가 본질이라면 수많은 현상들이 본질로 될 것이다. 왜 유독 상품교환만이 본질이겠는가? 자유민주주의는 왜 본질이 아니겠는가? 인류역사상 자유민주주의는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지배적인 국가형태가 되고 있지 않은가?

사물을 고정된 상태에 머무는 것으로서 보는 형이상학의 관점이 아니라 변화·발전·이행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보는 변증법의 관점을 가진다면,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에서 찾아야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들의 차이에서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3. 사용가치는 인간의 여러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사물이 아니라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물이다!

강 교수는 “상품은 ... 인간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적 존재 ... 사용가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한 흐름인 한계효용학파에서 상품을 정의할 때 쓰는 용어법이다. 한계효용학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변호론적 경제학의 <자본> 이후 버전으로서, 자본주의 생산이 발달하면서 상품이 사적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고 또 만족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는 현상을 포착하고, 이것을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주된 요인으로 주장한 것이다.14) 그 이론은 상품의 가치가 생산과정이 아니라 시장의 교환과정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고 본 점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 개개인의 심리인 욕망과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욕망-만족감으로서의 효용(사람들의 객관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유용성이 아니라!)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파산한 지 오래다. 그런데도 마르크스 연구자라는 사람이 상품이 욕망충족 수단이라는 한계효용학파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가치를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사용가치를 그렇게 정의하지 않았다. 그는 상품이 사용가치와 가치 두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먼저 사용가치에 대해, “자신의 여러 속성으로 인간의 여러 필요를 충족시키는 외적 대상 즉 사물”(un object extérieur, une chose qui par ses properiètés satisfait des besoins humains)이라고 했다. 즉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물이라고 했지 욕망을 충족 또는 만족시키는 사물이라고 하지 않았다.15) 마르크스는 그 필요가 위(胃)에서 나오든 환상에서 나오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것을 욕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필요라고 해서 생리적 필요에 한정될 이유는 없고 생리적이든 심리적이든 또 다른 어떤 연원을 갖든 인간의 필요면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16) 당연한 이치로 이 필요는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변화한다.

4. 교환되지 않는 물건을 상품과 구별하여 현물이라고 부른다?

강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환되지 않는 물건을 상품과 구별하여 현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상품과 현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용가치는 현물이나 상품이나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는 성질입니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상품에만 고유한 특성이 아닙니다. 상품만의 고유한 특성은 교환가치에 있습니다. 현물은 교환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 말들 역시 뒤죽박죽이다. 첫째, 현물이란 무엇이고 사용가치란 무엇인지 그 왜곡을 폭로할 필요가 있다. 사용가치란 “상품 자체의 물리적 속성에 근거한 유용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유용성은 물리적 속성에 의해 제약받고 있으며, 상품체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다음 백과사전) “그러므로 철, 밀, 금강석 같은 상품체 자체가 하나의 사용가치다.”(<자본>) 이와 같이 사용가치는 강 교수 말처럼 상품과 현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질이 아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상품체인 현물이 곧 사용가치이다.

둘째, 현물은 교환되지 않는 것이고 상품은 교환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현물이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면, 상품은 가치물(가치라는 사회적 실재를 가진 사회적 사물)인 동시에 현물이기도 한데, 어떻게 교환될 수 있는가? 현물은 멈추어 있고 가치만 분리되어 교환된다는 이야기인가? 세상에 그런 교환이 어디에 있는가? 아마도 화폐교환만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상품화폐는 그렇게 교환될 수 없고 상징화폐(불환지폐나 전자화폐 같은)만이 그렇게 교환될 수 있을 것이다.

강 교수는 앞에서 사용가치 = 효용성(유용한 사물 즉 현물이 아니고 단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질일 뿐인)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낸 다음, 이제 교환되지 않는 물건(비교환가치) = 현물, 교환되는 물건(교환가치) = 상품이라는 등식을 또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등식 아래서는 상품의 이중성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상품은 오직 교환가치이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질 즉 효용성을 가지고 있을 뿐(그는 이것을 사용가치라고 말한다.) 현물을 가지고 있지 않게 된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현물이 곧 사용가치이므로, 강 교수는 상품은 현물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결국 상품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 사용가치를 부인하고 있다. 그가 보는 상품은 상품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인 교환가치 그 자체일 뿐이다. 이렇게 상품에만 고유한 교환가치를 상품의 유일한 기본속성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는 상품에만 고유하지 않고 다른 생산물들에도 공통된 속성인 현물성을 부인하고, 그럼으로써 상품의 사용가치성 - 그가 사용가치라고 말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효용성이다. - 과 상품의 이중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러고도 강 교수가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는 <자본> 1장 1절에서부터 마르크스를 부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상품이 사회적 형태인 가치형태17)와 그것의 물적 소재인 현물(실물)형태의 이중적 형태를 가진다는 것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을 뿐더러, 부의 사회적 형태가 가치형태 이외의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잘못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사용가치는 그 부(富)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든 부의 물적 소재를 이룬다.”라고 말하고 있다.18) 그리고,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를 예로 들면서 “다양한 노동과 그 생산물들은 [가치형성 과정으로서의 노동과 그 결과로서의 가치생산물이 아니라] 현물적인 부역과 공납[가치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으로 나타난다.19) [봉건사회에서는] 노동의 현물적 형태, 그것의 개별성 - 상품생산에서와 같은 그것의 일반성과 추상적 성격이 아니라 - 이 또한 그것의 사회적 형태다.”20)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물형태가 사용가치인 동시에 부역이나 공납 등의 사회적 형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때 부역이나 공납은 하나의 사회적 형태이지만 상품처럼 가치라는 일반적, 추상적 형태를 지니지 않고 그냥 현물의 형태를 가지는 사회적 형태이다. 그러므로 부역이나 공납은 상품, 화폐나 자본처럼 사물들을 매개로 한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아니다.21) 오히려 봉건적 지대 수취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사회적 속성을 가진 자연적 사물 즉 현물(보다 쉬운 우리말로 천연물)이다.

5. 가치론의 세 가지 교훈이 “문제는 착취관계가 아니라 교환관계”라고?

하나.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사용가치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교환가치의 출발점이라고?
즉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 타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토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뜻을 살짝 연장하면 자본주의의 변혁과제는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보다 성숙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변증법이 일러주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자본주의의 첫 번째 본질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봉건사회가 자본주의에 의해 타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토대라는 주장은 과연 역사적 사실인가? 이것은 마치 일제 식민지 통치가 오늘날의 남한 자본주의의 토대라는 말처럼 들린다. 일제 식민지 통치가 타파되지 않고 오늘날 남한의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었듯이, 봉건제 질서(앙시앙 레짐)가 타파되지 않고 서구 자본주의가 꽃필 수 없었다. 18~19세기에 서구의 많은 나라들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 봉건제를 타파하는 부르주아 혁명이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혁명들이 봉건제의 정치 질서를 타파하는 것을 통해 그 경제 질서를 타파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꽃피기는커녕 성립하기조차 힘들었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변혁과제가 자본주의를 보다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반복해서 비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의 명언들만은 기억을 위해 옮겨두자.
“요컨대 세상을 확 바꾸는 그런 변화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당장의 견디기 힘든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진리인 것을요!”
그러나 친일파들과 그 후손들은 지금도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고 하면서, 만약 그렇게 세상이 확 바뀔 줄 알았다면 왜 끝까지 친일을 했겠느냐고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변명하고 있다. 그들이 대개 새누리당인데, 그들에게 가서 세상이 확 바뀌는 변화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물어보기 바란다.

둘. 교환이 자본주의의 자연법칙이라는 것만 말하는 것은 역사가 없는 짝퉁 유물론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교환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는 이미 그 자체 ‘사회’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교환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환은 이처럼 두 사람 사이의 관계, 즉 사회적 관계를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하며, 이 사회적 관계는 자본주의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 즉 자연법칙입니다. 유물론에서 인간의 의지를 지배한다고 하는 바로 그 자연법칙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두 번째 본질입니다.”

이 말들은 궤변이다. 요술이다. 그는 첫째, 교환은 사회를 전제로 하고, 둘째, 자본주의는 교환을 전제로 하므로, 셋째 교환은 자본주의의 자연법칙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의 사실이 셋째의 결론을 도출할 아무런 필연성도 없다. 자본주의가 교환을 전제로 하고 교환은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면, 결국 자본주의는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는 이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근거로 그냥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즉 교환관계가 자연법칙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교환관계가 자연법칙이라는 주장을 들이밀기 위해 그런 요술을 부리는 대신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특정한 사회적 관계 즉 생산관계를 전제로 하고, 그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교환관계를 필수적인 한 계기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는 상품교환의 법칙 즉 가치법칙이 자연법칙처럼 관철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쉽고 명쾌한가? 그러나 어쩐 일인지 강 교수는 이 생산관계를 입에 올리기를 극구 기피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자연법칙을 말하려면 반드시 생산관계를 규제하는 법칙을 말해야 하고, 가치법칙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현상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법칙인 잉여가치법칙 또한 자연법칙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보다 중요하게는 그 현상들의 변화의 법칙, 발전의 법칙 및 이행의 법칙들에 대해서도 자연법칙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22) 그래야 진정한 마르크스 연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런 유물론이라야 진정한 유물론 즉 역사유물론이 될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강 교수의 유물론은 역사가 없는 유물론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회주의가 붕괴한 직후 “역사는 끝났다”고 말한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떠올리게 된다.

셋. 양적 비교가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자본주의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사회적 관계는 양적 비교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세 번째 본질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양적 비교는 원시인들에게도 있었다.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원시인들은 사용가치가 서로 다른 생산물들을 일정한 양적 비율관계에 따라 교환하였다. 원시인들은 교환하려는 생산물의 양적 비율을 가격이 아니라 노동시간에 기초하여 규정하였다.”23)

자본주의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이런 양적 비교 자체가 아니라 그 양적 비교를 직접적으로 노동량으로 비교하지 않고 상품의 교환가치로 표현하여 비교한다는 점이다.(이 교환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이 가격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상품관계가 전면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수많은 종류의 상품들 간의 복잡한 교환비율 결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4)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은 양적 비교 자체가 아니라 양적 비교 즉 상품교환을 통한 질적 지배와 예속이다. 자본은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양적으로 비교하여 가치대로 구입한다. 그러나 그 이후 그 노동력의 가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 이상으로 공짜의 부불노동을 시키고 그것을 자기가 차지함으로써 잉여노동의 착취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 잉여노동, 잉여가치 착취를 실현하고 확대하는 과정에서 상품교환 관계를 일반화시킨다. 그러므로 여러 교환형태 가운데 상품교환이 지배적으로 된다는 점이 아니라, 이 상품교환의 형식을 통해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점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이런 본질을 은폐하면서 강 교수는 교환과 양적 비교가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그러한 왜곡의 결과,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게 된 양적 비교는 나로부터 타인을 밀어내는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가져왔고 이런 모든 전통적 원리[이웃에게 동냥젖 나누어 주기 같은]는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푸근한 전통사회가 이런 야박한 자본주의로 바뀐 것은 사회발전의 필연적 법칙이고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변증법이 알려주는 해법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미래로의 전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라고 결론짓는다. 모든 전통적 미덕 - 상품교환에 의거하지 않는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관계들 - 이 사라진 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강 교수의 주장은 도그마일 뿐이다. 우리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을 통해서 그런 미덕을 되돌릴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노동에 근거한 자본주의적 소유로부터 자기노동에 근거한 노동자의 소유를 복구할 수 있다. 다만 이제는 사적 소유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인 집합적 노동의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적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25)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차별과 배제의 원리만이 지배적으로 된 것이 아니다. 지배와 착취와 억압의 원리,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하고 박탈당하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26)의 원리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차별과 배제는 이 착취와 억압의 부속물들이다. 지배, 착취와 억압이 없어지면 그러한 악덕이 지배적으로 되어야 할 필요도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악덕을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자본주의 질서 아래서는 그것들을 결코 없앨 수 없다. 자본주의 지배와 착취가 그것들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27)

6. 가치가 교환가치의 양적 단위라고?28)

마르크스는 교환가치를 가치의 “불가결한(the only 또는 the necessary) 표현양식 또는 현상형태”29)라고 했다. 그러면서 가치는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실재30)라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강 교수는 가치가 교환가치의 양적 단위라는 것인가?

가치가 교환가치의 양적 단위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교환가치의 양적 비교와 측정은 두 개의 상품 간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환가치란 다름 아닌 상품들 간의 상대적인 가치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대비교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두 개의 상품 안에 공통된 그 무엇이 존재하다는 것이 드러난다.31)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상품의 가치다. 그 가치의 실체는 추상적 인간노동 즉 인간노동 일반이고, 그 크기는 노동시간이다. 그러나 어느 상품의 가치나 가치량은 그 상품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생산을 사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가치는 노동과정에서 형성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얼마의 노동을 대표하는지는 교환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판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교환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판정한다는 것은 한 상품의 가치는 가치의 화신인 화폐로(‘돈’으로!) 표현되고32) 그 크기는 자신과 교환되는 화폐의 양으로(가격으로!) 표현됨을 말한다. 이렇게 가치와 가치량을 화폐와 화폐량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화폐의 도량단위와 도량표준이 존재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가치론의 줄거리이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교환가치의 양적 단위라고 말하는 것은 가치와 교환가치의 관계 - 가치가 갑(甲)이고 교환가치가 을(乙)인 - 를 뒤집어서 가치를 교환가치의 양적 척도인 것처럼, 교환가치가 갑(甲)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마치 쇠의 양을 측정하는 사회적 척도가 무게이고 밀의 양을 측정하는 사회적 척도가 부피이듯이, 가치를 교환가치의 양을 측정하는 척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어느 상품의 교환가치 크기를 재는 양적 단위나 척도가 아니다. 가치관계는 생산관계로서 교환관계의 이면 내지 심층에 존재하고 있으며, 교환관계와 교환가치를 규제하는 사회적 관계로서 실재한다. 그런데 상품교환 관계가 일반화된 상태에서는 가치는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없고, 교환가치라는 형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환가치는 직접적으로 가치에 의해서 양적으로 측정될 수는 없고, 단지 다른 교환가치, 즉 가치의 화신인 화폐와 비교해서, 화폐를 양적 단위로 해서 측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강 교수는 왜 가치가 교환가치의 양적 단위라고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왜곡하는 것일까? 가치 대신 교환가치를 하나의 사회적 실재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교환가치가 가치의 표현양식이나 현상형태가 아니라 독립적인 하나의 사회적 실재(마르크스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가치를 독립적인 사회적, 객관적 실재라고 했다!)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런 이유로, 교환가치가 표현하고 있는 하나의 사회적 실재인 가치를(교환가치는 가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환가치를 측정하는 양적 단위 즉 척도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는 <자본>의 문장을 왜곡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간단한 기하학적 실례를 가지고 이것을 설명해 보자. 다각형의 면적을 결정하고 비교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삼각형으로 분해한다. 또 그 삼각형 자체를 그 외견상의 형상과는 전혀 다른 표현 즉 밑변과 높이의 곱의 1/2로 환원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품들의 교환가치도 하나의 공통적인 것 - [1쿼터의 밀이나 x킬로그램의 철 등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어떤 양을 대표(또는 표현: représenter/불어)한다 - 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 공통된 그 무엇은 상품의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기타의 자연적 속성일 수 없다. ... 만약 상품체의 사용가치를 무시하면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속성, 즉 그것이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만 남는다.... 노동생산물은 그들에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로서 가치, 상품가치다. 우리는 이미 상품들이 교환될 때 그들의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만약 우리가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해버린다면, 남는 것은 위에서 규정된 바와 같은 상품의 가치뿐이다. 따라서 상품의 교환관계 또는 교환가치에서 나타나는 공통인자는 바로 상품의 가치다. 우리는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교환가치야말로 가치를 나타내는 불가결한 표현양식 또는 현상형태임을 보게 될 것이다.”33)


이 문장은 교환가치가 가치의 어떤 양을 대표 또는 표현한다고 말하고 있지, 어디에서도 가치가 교환가치의 크기를 재는 척도, 도량단위, 측정단위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가치량이 쌀이나 가축 등 교환가치를 대표하는 어떤 하나의 현물의 양으로 전환34)되어 서로 비교됨으로써 측정되고 있다. “상품들의 가치는 여러 가지 크기의 상상적인 금량으로, 즉 상품체의 다종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금량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양으로 전환되고 있다. 상품들의 가치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금량으로서 서로 비교되고 측정된다. 그리고 기술상의 이유로 어떤 고정된 금량을 그것들의 도량단위로 삼을 필요성이 발생한다. 이 도량단위 자체는 또다시 그 세부단위로 분할됨으로써 도량표준으로 발전한다.”35)

  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의 관계

7. 교환가치가 곧 사용가치라고?

그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마구 섞어서 부른다. 그는 “두 사용가치 사이의 교환비율에도 단위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 기준은 비교하는 두 사용가치에 공통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라고 자문하고는 “교환가치에 나타나는 공통요소는 상품의 가치이다.”라고 자답하고 있다. 자문하는 앞 문장에서는 ‘비교하는 두 사용가치에 공통된 것’이라고 하고 바로 그 다음 자답하는 문장에서는 ‘교환가치에 나타나는 공통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8.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이 사용가치의 가치 크기를 결정한다고?

이어서 그는 가치의 크기를 결정하는 문제를 사용가치의 가치 크기를 결정하는 문제로 둔갑시키고 있다. 그는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어떤 사용가치의 가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 즉 그 사용가치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뿐이다.(1권 93쪽/강신준 역)”

그러나 불어판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36)
“한 물품의 가치량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노동량, 다시 말해서 그 물품을 생산하는 데 해당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시간이다.”

강 교수는 상품이나 물품의 가치 크기라고 말하지 않고 사용가치의 가치 크기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 물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용가치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37) 상품으로 생산된 노동생산물은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두 요소를 가진다. 그 둘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나는 모든 사회에 공통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 관계에 의한 규정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시·공간적으로 특정한 관계인 사회적 형태에 의한 규정이다. 그러기에 <자본> 제1장 제1절의 제목이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의 실체와 가치의 크기)’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강 교수 말처럼 사용가치가 주어가 되어 자신의 가치 크기를 갖는다면 상품의 두 요소라는 말은 없어져야 하며, 이 절의 제목은 ‘상품 즉 사용가치: 사용가치의 가치와 그 크기)’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38)

9. 가치가 인간노동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아담 스미스이지 마르크스가 아니라고?

가치가 인간노동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맞지만, 그들은 노동의 이중성을 밝히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의 노동과정 안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의 측면과 가치를 생산하는 추상적 인간노동의 측면이 이중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밝히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및 가치의 개념에서 끊임없이 동요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전파 경제학은 생산물의 가치로 나타나는 노동과 생산물의 사용가치로 나타나는 노동을 어디에서도 뚜렷하게 의식적으로 구별하지 못하였다. 고전파 경제학이 실제로 이러한 구별을 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때에는 노동을 질적 측면에서, 또 어떤 때는 양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노동을 단순히 양적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그것들의 질적 동일성 또는 동등성을, 따라서 각종 노동의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의 환원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리카도 자신도 이처럼 두 개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이중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가치와 부(富) 두 개를 구별하는 성질들」이라는 장 전체에 걸쳐서 세이(J. B. Say)와 같은 시시한 사람들의 시시한 주장을 꼼꼼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39)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말하려면, 마르크스가 가치가 인간노동이라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피상적인 지식을 비판하고 가치의 실체가 구체적 유용노동과 구별되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고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밝혔다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

10. 사용가치의 가치 크기를 결정하는 노동의 양은 ‘사회적 평균노동’이라고?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냥 인간노동이 아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에는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노동이 들어 있다. 그 가운데 추상적 인간노동이 가치의 실체이다.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그냥 인간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고전파 경제학으로 후퇴시키는 것이다. 가치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사용가치 생산노동과 가치생산노동이 구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별을 전제로 하고서, 어느 한 종류의 상품에 들어 있는 이 추상적 인간노동의 양이 얼마인지 그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그 종류의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이 경우 개개의 상품은 그것이 속한 종류의 평균적 표본으로서 간주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숙련도와 노동강도를 가지고 주어진 사회적 환경에 비추어 정상적인 생산조건 하에서 실행되는 모든 노동들이 그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로 하는 노동시간이다.”40)

그런데 강 교수는 아무렇게나 ‘사용가치의 가치 크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용가치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사용가치를 낳는 노동이나 가치를 낳는 노동의 성격이 똑같다는 이야기이다. 이 둘을 두루 섞어서 고전파 경제학자들처럼 그냥 인간노동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의 질은 무시된다. 그리고 오직 량적 크기만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생산의 사적 수행이라는 생산관계도 무시된다. 그리고 오직 교환관계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멋진 신세계다!

11. 사회적 평균은 시장에서 경쟁으로 가격이 같아지는 것이라고?

<자본> 1권에서는 마르크스는 아직 경쟁을 도입하지 않았다.(3권에 가서 비로소 도입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해 경쟁, 특히 하나의 관념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 완전경쟁을 전제로 도입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시장에서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가격은 여러 가격들의 평균적인 수준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면 이때 평균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격들의 산술평균일까, 그 가격들이 대표하고 있는 상품의 수량까지 감안한 가중평균일까? 아니면 중앙값(메디안)일까? 그 평균화 과정은 특정 상품이 화폐로 고정되는 과정처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사회적 과정’일 것이다.41) 거기에는 경쟁도 작용하지만 담합도 작용할 것이다. 자본은 “서로 싸우는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자본들 상호간에 무한한 경쟁만이 있다면 평균화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어느 하나로 수렴이 되겠는가? 다른 한편, 제도적 요인과 관습적 요인도 평균화 과정에 개입할 것이다. 나아가 과거의 생산 제 조건만이 아니라 미래의 재생산의 제 조건도 개입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부분에서 르 트로느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일한 종류의 생산물 전체는 본래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는 바, 그것의 가격은 개별적인 조건과는 관계없이 전체적으로 결정된다.” 이때 전체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어쨌든 우여곡절을 거쳐 하나의 지배적인 가격이 성립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마르크스는 복잡노동이 단순노동으로 환원된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경쟁으로 그렇게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론 단순한 평균적 노동 자체도 나라가 다르고 문화의 발전단계가 다르면 그 성격도 달라지지만, 일정한 사회에서는 이미 주어져 있다. 보다 복잡한 노동은 단순한 노동이 강화된 것, 또는 몇 배로 된 단순노동으로 간주될 뿐이며, 그리하여 적은 양의 복잡노동이 보다 많은 양의 단순노동과 동등하게 간주된다. 이와 같은 환산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경험이 보여주는 바이다. 어떤 노동이 아무리 복잡한 노동의 생산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치를 통해 단순노동의 생산물과 동등하게 되며, 따라서 단순노동의 일정한 양을 표시할 뿐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이 그 측정 단위로서의 단순노동으로 환원되는 비율은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 의해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결정되며, 따라서 생산자들에게는 관습에 의해 주어진 것 같이 보인다.”42)


12.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 낸다고?

강 교수는 시장경쟁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는 데서 더 나아가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 낸다며, 그것이 가치가 빚어내는 변증법의 요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의 앞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을 반복하지 않겠다. 사회적 평균을 거스르려는 이건희 회장의 노력은 부정·비리를 총동원한 특권적 세력관계와 특혜적 이윤의 추구 즉 비평균화이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적 평균의 추구가 전혀 아니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 내는 것은 사회 평균화가 아니라 사회 양극화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또 자본들 사이에서 독점적 지위이지 다수 자본들 사이의 평균화도 아니고, 독점이지 공정한 경쟁도 아니며, 따라서 그가 만들어내는 것은 독점가격과 독점이윤이지 평균가격과 평균이윤이 아니다. 그로 인해 평균가격과 평균이윤을 만들어내는 가치법칙은 재벌의 독점에 의해 심하게 저지되고 있으며, 그래서 대자본과 중소자본 사이의 동반성장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이윤을 다루는 부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건희 회장의 노력이 사회적 평균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니 두고 봐야겠지만, 그가 사회의 평균화를 만들어 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소비자를 수탈하며 중소기업의 이윤을 쥐어짜고 있다. 그런데 내 이익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경쟁을 빚고, 그 경쟁의 결과로 본의 아니게 사회적 평균이 만들어진다니, 강 교수는 현대판 벤담인가? 더구나 이것이 가치가 빚어내는 변증법의 요술이라니 입이 딱 벌어질 따름이다!


* 주

1) <자본> 1권 제1편 1장 1절의 제목이다. 불어판의 제목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다시 정확하게 말해서 가치(가치의 실체와 가치의 크기)

2) 이하에서[ ]는 필자의 첨가를 표시함.

3)‘primitive accumulation’은 ‘시초축적’으로보다 ‘원시적 축적’으로 옮기는 것이 올바르다. 그 이유는, 이 장에서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듯이, 이 국면은 자본주의에 접어든 이후의 시초(initial, first) 단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성립 이전 시기인 전사(前史)또는 선사(先史) (영어로 prehistoric) 국면이고, 자본주의의 기초를 축성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부터’가 아니라 ‘이 단계를 거침으로써’, 그리고 ‘그것과 나란히’가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해서’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이 들어서고 확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성립 이후에도 이 때 이루어진 ‘직접생산자로부터의 토지와 생산수단에 대한 폭력적 수탈’과 그로 인한 직접생산자의 프롤레타리아트화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초로서 계속 유지·확대되고 심화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본> 1권 제7편 25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계를 이렇게 ‘원시적 축적’으로 보지 않고 ‘시초축적’이라고 잘못 파악할 경우, 봉건제 해체 이후 등장한 독립 소생산으로부터 자본주의 생산으로의 이행을 단절적 변화가 아니라, 소생산자의 양극분해에 의한, 연속적 변화로 그릇 이해되게 된다. 독립 소생산자에 대한 폭력적 수탈이 아니라 소생산자가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로 자연발생적으로 양극분해 되기 시작한 것이 자본주의의 시초로 간주되고, 또 그런 양극분해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립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4) 지금 국내에 번역, 출판되어 있는 <자본> 1권의 8편은 1867년에 발간된 첫 판인 독어판 1판의 「원시적 축적」에 관한 부분(26~32장)과 「근대 식민이론」에 대한 부분(33장)을 하나의 편 안에 포괄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부인 예니 마르크스는 첫 판 발행 직후 제네바에 있는 마르크스의 전우 요한 필리프 베커(브러시 제조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당신이 마르크스의 저서를 이미 갖고 계신다면, 그리고 저와 마찬가지로 첫 부분의 변증법적 이치를 읽느라 고생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자본의 「원시적 축적」에 대한 부분과 「근대 식민이론」에 관한 부분을 맨 먼저 읽어보시라고 권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에 관한 소설 형 전기인 『프로메테우스 6』, 갈리나 I. 세레브랴코바 지음/김석희 옮김(들녘), 365쪽을 보시오.

5) <자본>의 불어판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불어판 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단 [불어판 번역의] 교열작업에 착수하였을 때, 나는 원본(독일어 제2판)도 개정하여 어떤 논의는 간략하게 하고, 어떤 논의는 보충하며 역사적 또는 통계적 자료를 추가하고 비판적 주석을 붙이는 등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이 불어판에 어떤 문장상의 결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본과는 독립적인 과학적 가치를 가지므로, 독일판을 읽는 독자들도 이 불어판을 참조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라고 불어판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독어판 2판 후기에서도 마르크스는 이 불어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마르크스가 불어판을 내면서 독어판에 대해 어떤 곳은 근본적으로 개작하고, 또 어떤 곳은 문장을 고치고, 또 어떤 곳은 우연적인 착오를 면밀하게 제거하는 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6) 이하에서 파란 글자로 강조한 것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 한 필자의 강조임.

7) 원죄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현실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므로 그 이론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허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애석한’ 빈틈이라고 마르크스는 비꼬는 투로 표현하고 있다.

8) 독어판과 영어 번역판에는 노동력이라고 되어 있으나, 불어판에는 노동으로 고쳐져 있다. 내용상으로도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이 맞다.

9) 주인(master), 직인(journeyman), 도제(apprenticeship)로 구성된 위계 제도를 말한다.

10)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자, 즉 임금노동자.

11) 여기서 말하는 사적 소유는 노동생산물에 대한 사적 소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외적 조건으로서의 토지 및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말한다. 예를 들면 ‘경자유전’의 원칙에 근거한 사적 소유 같은 것이다.

12) 불어로는 travailleur로서 넓은 의미의 노동자 즉 산업노동자, 수공업자, 농민 등 직접생산자를 뜻한다. 여기서는 독립 소생산자, 더 정확하게 말해서 독립 자영농민을 말한다. 노동자계급을 말할 때는 classe ouvrière를 쓴다.

13) 제일 마지막 장의 제목은「근대 식민이론」이다. 마르크스는 불어판에서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을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도록 위와 같이 고쳤다. 독어판에서는 “ ...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기노동에 근거하는 사적 소유의 소멸 즉 노동자의 수탈을 기본조건으로 삼고 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자기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의 소멸 = 노동자의 수탈 = 자본주의적 소유의 기본조건이다. 그러나 불어판에서는 자기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의 소멸이 자본주의적 소유의 기본조건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라고 되어 있으며, 그 소멸이 곧 노동자의 수탈이 아니라 그 소멸의 기초가 노동자의 수탈이라고 그 연관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14)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어떤 특정한 물건의 효용 또는 유용성을 표시하는 것을 사용가치라고 했다. 그런데 제본스, 맹거 등 한계효용가치론자들에 이르면서 효용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바의 “인간에게 필요한 객관적 유용성”으로부터 “인간의 주관적 심리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정도”로 그 뜻이 변화되었다.

15) <자본> 1장 1절 첫 번째 쪽에서 마르크스는 분명히 ‘욕망’이 아니라 ‘필요’라고 표현했다. 이 단어는 독어판에서 Bedürfnis, 불어판에서 besoin로 되어 있고, 엥겔스가 서문을 쓴 영어판에서는 want로 번역되어 있는 바, 그 모두 필요를 뜻한다. 쿠바에서 번역된 스페인어 판에서도 “satisfacer necesidades humanas”라고 하여 ‘욕망’이 아니라 ‘필요’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16)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니콜라스 바본을 주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N. 바본이 사용한 욕망이라는 단어는 취하지 않고 필요라는 단어만 취했다. 그러나 N. 바본은 “욕망은 필요를 전제로 한다”고 말하여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필요’를 주관적인 심리인 ‘욕망’으로 대치하고 있다.(『보다 가벼운 신화폐 주조에 대한 논술: 로크의 고찰에 대한 대답』,런던, 1696. 참조. <자본> 1권 1장 1절의 주2에서 재인용.) 더구나 마르크스가 <자본> 1권 제1편에서 N. 바본의 주장을 여덟 차례나 인용하고 있지만, 이는 그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여 그렇게 인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N. 바본은 중상주의 시대의 대표적 이론가로서 상품의 가치를 주관적인 심리인 욕망과 교환과정에서 도출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론가이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경제학의 발전에서 가지는 긍정적인 면과 더불어 그 잘못을 보여주는 사례로서도 <자본> 1권 제1편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주장한 존 로크는 많이 인용되지 않았지만, 때때로 긍정적인 맥락에서 인용되고 있다. 예컨대 “물건의 자연적 가치(natural worth)는 그것이 인간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든가 편의에 이바지하는 데 적합하다는 점에 있다.”(『이자 인하의 결과들에 관한 몇 가지 고찰』, 1691. 참조. <자본> 1권 1장 1절 주4에서 재인용) 마르크스가 선행 이론가들의 글을 인용할 때 어떤 취지를 가지고 인용했는지는 <자본> 1권 독어판 3판 서문을 보시오. “다른 경제학자들의 이론적 견해가 인용되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 이러한 인용들은 오직 본문에 대한 부수적 주석, 경제학의 역사에서 빌어온 주석에 불과하며, 경제이론 분야에서 달성한 몇 개의 중요한 진보의 연대와 창시자를 확정해 준다.”

17) 여기서 가치형태라고 말하는 것은 “가치라는 형태”를 의미하며, 가치의 현상형태 즉 교환가치 형태인 상품-형태, 화폐-형태 등과는 다른 의미다. 그래서 불어로 'form de la valeur'이 아니고 'form de valeur'이다.

18) <자본> 1권 1장 1절. 본문에서 인용한 글에 뒤이어 마르크스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우리가 고찰하는 사회형태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용가치는 동시에 교환가치의 물적 담지자다.”

19) “상품들은 주변의 약소민족들이나 힘없는 주변도시들이 지배자에게 바치는 공물의 형태로 대도시에 유입되기도 했다.” 『서기 1000년의 세계』, 프란츠 요제프 브뤽게마이어 외(이동준 역), 이마고, 397쪽.

20) <자본> 1권 1장 4절.

21) “이에 반하여, 가치형태와 노동생산물의 가치관계[이 속에서 상품형태가 나타난다]는 상품의 물리적 성질과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관계는 지금은 사람들의 눈에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관계는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 1권 92쪽. “화폐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관계다.”<철학의 빈곤> 85쪽. “중금주의의 환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화폐형태가 귀금속에 새겨 넣은 물신적 성격으로부터다. 그 중금주의에게는 금과 은은, 그것들이 화폐로서 역할할 때, 생산자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기묘한 사회적 속성을 가진 자연적 대상(natural objets)으로 인식되었다.” <자본> 1권 1장 4절 영어판. “물건의 화폐형태는 물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외적인 것이고, 물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인간관계의 현상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x량의 상품 A =y량의 상품 B 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표현으로부터 아는 바와 같이, 다른 대상의 가치량을 표현하는 대상은 이러한 관계와 독립적으로, 현물(자연물)에서 끄집어낸 사회적 속성으로서 자신의 등가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잘못된 외관이 확립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그 과정은, 일반적 등가형태가 하나의 특정 개별 상품에 배타적으로 고정되거나 화폐형태로 결정될 때 완성된다. [그런데 외관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 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 여기에 화폐의 신비성이 있다.” <자본> 1권 2장.

22) <자본> 1권 독어판 2판 후기 중에서 <자본>에 대한 러시아인 논평자 카우프만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카우프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조사하고 있는 현상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상들의 일정한 형태가 주어진 역사적 시기와 상호 관련을 가지는 경우 그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현상들의 변화의 법칙, 현상들의 발전의 법칙, 즉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의 이행의 법칙, 상호관계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질서로의 이행의 법칙이다.”

23) 윤해숙, 「(북한) 교환영역에서의 ‘가치법칙’과 ‘등가성의 법칙’ 해석」참조. 자본주의 이전에 나라 간 또는 공동체 간의 선물교환도 일정하게는 노동에 대한 양적 비교를 하였다.

24) “직접적 생산물교환에서는 각 상품은 그 상품의 소유자에게는 직접적 교환수단으로 되며, 그 상품의 비소유자에게는, 상품이 그에게 사용가치로 되는 한, 등가물로 된다. 그러므로 교환되는 물건은 아직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나 교환자의 개인적 필요와는 관계없는 가치형태를 가지지 못한다. 이러한 가치형태의 필요성은 교환과정에 들어오는 상품의 수와 다양성이 증가함에 따라 발전한다. 문제와 그 해결의 수단은 동시에 생겨난다. 상품소유자들이 그들 자신의 물품을 여러 가지 다른 물품과 교환하고 비교하는 상거래는, 상품소유자들의 여러 가지 상품들이 하나의 제3의 상품종류와 교환되고 가치로서 비교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 제3의 상품은 기타의 여러 상품의 등가물로 됨으로써, 비록 좁은 범위 안에서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또는 사회적인 등가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한다.” <자본> 1권, 2장.

25) <자본> 1권 32장.

26) 전태일의 첫 번째 수기 마무리 글 중에서.

27) 차별과 배제는 인간 상호간의 상품적 관계에 따른 인간 소외의 표현이다. 이 관계는 자본의 지배·착취관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예속, 소외, 비인간화 등으로부터의 보편적 인간해방은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해방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사적 소유에 대한 소외된 노동의 관계로부터, 사적 소유 등등으로부터의, 노예제로부터의 사회의 해방은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러한 표현은 마치 노동자의 해방만이 중요한 것처럼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해방 속에 보편적 인간해방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해방 속에 보편적 인간해방이 들어 있는 이유는 인간의 노예제 전체가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노예제 관계가 이 관계의 변용들과 귀결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 박종철출판사, 279-280쪽.) (강조는 원문).

28) “상이한 물건들의 크기는 동일한 단위로 환원된 뒤에야 비로소 양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 ... 동일한 단위로 표현되었을 때에만 그 물건들의 크기는 공통분모를 가지며 따라서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20미터의 아마포 = 1개의 저고리 ... 그러한 비율의 존재 자체는 가치량으로서는 아마포와 저고리가 동일한 단위의 표현들이며 동일한 성질을 가진 물건들이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고 있다.” 이때 동일한 단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가치라는 질적으로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그 가치를 양적으로 측정하는 동일한 도량단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도량단위라면 일주일, 하루, 한 시간 같은 시간의 길이가 가치의 양적 단위이다. <자본> 1권 1장 3절 A. 단순한 가치형태 2. 상대적 가치형태.

29) <자본> 1권 1장 1절.

30) <자본> 1권 1장 3절.

31) “상품의 교환관계 또는 교환가치에서 나타나는 공통인자가 바로 상품의 가치다.”(<자본> 1권 1장 1절)

32) “화폐가 가치의 척도인 것은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이기 때문이고, 가격의 도량표준인 것은 고정된 금속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 “금의 금속적 현물형태가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형태 즉 모든 인간노동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화신으로 되는 것”, “화폐는 유통수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개별적 화신, 교환가치의 독립적 존재형태, 일반적 상품으로서 등장하는 것”(이상 <자본> 1권 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을 보시오.

33) <자본> 1권, 11장 1절. 불어판에서는 제일 뒷 문장은 삭제되어 있다.

34) 반면, 어느 양의 교환가치는 어느 양의 가치로 환원된다.

35) <자본> 1권 3장. 마르크스는 가치형태에 대해 논하면서 ‘단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다. 그러나 교환가치는 이 동일한 질적 단위의 표현들로서만 서로 양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치는 교환가치의 질적 단위이지 양적 단위가 아니다.

36) “C'est donc seulement le quantum de travail, ou temps de travail nécessaire, dans une société donné, à la production d'un article qui en détermine la quantité de valeur." <자본> 1권, 불어판 44쪽.(강조는 원문)

37) 독어판에는 물품(article)이나 상품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사용가치 또는 유용한 물건”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불어판에서는 그런 표현들이 여기저기서 삭제되어 있다. 마르크스가 불어판을 내면서 오류를 바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38) 마르크스가 ‘사용가치의 가치’라는 표현을 쓴 곳이 있었다. 그러나 불어판에서는 이런 표현은 대부분 삭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용가치의 가치’라고 표현한 경우에도 가치가 사용가치에 속한다(belong to)는 뜻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가치는 물체에 응고되어 있을 뿐 따로 자신의 자연적 존재를 가지지 않으며, 자연적 존재인 사용가치에 체현되어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즉 ‘사용가치에 체현되어 있는 가치’라는 뜻이다.

39) <자본> 1권 1장 4절 주33.

40) "Le temps socialement nécessaire à la production des marchandises est celui qu'exige tout travail, exécuté avec le degré moyen d'habileté et d'intencité et dans des conditions qui, par rapport au milieu social donné, sont normales." <자본> 1권, 불어판 44쪽.

41) “상품 소유자들은 본능적으로 상품본성의 법칙들에 순응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인 다른 하나의 상품과 대비시킴으로써만 자기들의 상품을 서로 가치로서, 따라서 상품으로서 관계 맺을 수 있다. 우리는 상품의 분석을 통해 이 결과를 얻은 바 있다. 그러나 오직 사회적 행위만이 일정한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상품의 사회적 행동이 자신들의 가치를 모두 표시하는 특수한 상품을 분리해 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선발된 상품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등가형태로 된다. 사회적 과정에 의해 일반적 등가물은 이 선발된 상품의 독자적인 사회적 기능으로 된다. 그리하여 상품이 화폐로 된다. ... 화폐는 종류가 다른 노동생산물이 실제로 서로 동등시되고 따라서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자본> 1권 2장.

42) <자본> 1권 1장 2절
태그

마르크스 , 자본 , 자본론 , 강신준 , 사용가치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승호(경제학 박사)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지나가다

    1. 교환관계(가치법칙)와 노자관계(잉여가치법칙)가 모두 자본주의의 본질인데, 각 논의가 너무 한 쪽만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물론 강신준 선생님의 경우, 자본주의 비판의 의미에서의 교환관계 분석을 전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2. 박승호 선생님이 노자관계를 주로 강조하기 때문에, 그래서 교환관계의 일반화가 자본주의의 특성이라는 것을 덜 강조하기 때문에, 오히려 단순상품생산사회가 역사적으로 실제했다는 뉘앙스의 주장으로 (잘못) 흐르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3. 신문 칼럼에서 축약적이고 불분명한 서술이 어쩔 수 없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면, 진의를 파악하고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강신준 선생님의 칼럼만이 아니라 해설서 등을 포함해서 논의하고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그것도 상품화폐는 그렇게 교환될 수 없고 상징화폐(불환지폐나 전자화폐 같은)만이 그렇게 교환될 수 있을 것이다." -> "상품화폐"가 아니라 "화폐상품"이라고 써야 하는데, 오타가 난 것 같습니다.

    5. 긴 글 잘 읽었습니다.

  • 노동자

    강신준은 교환관계를 강조하고 박승호는 생산관계를 강조했다...고 도식화하면
    이는 은연중에 강신준을 면피시켜주는 말이 되지요
    '자본주의의 본질은 교환관계'라고 마르크스는 말한 적 없고, 그것은 생산관계 계급투쟁을 직시하는 것을 회피하는 데 써먹힙니다

  • 노동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성숙을, 이를 위한 개혁노선을 주창했다'고 강신준은 말했는데
    즉 마르크스는 혁명을 반대하고 개혁을 주창했다는 말인데 이런 날조가 어디 있나요
    '교환이 핵심'이라는 말은 바로 이것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이것도 맑스의 날조라는 말입니다

  • camomilehongjo

    박승호교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절도하지 말라!박승호교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진에게 팔아넘기지 말라!!

  • camomilehongjo

    전진타도!!

  • camomilehongjo

    경제학박사가 웬 정치질을 하는가? 박승호 물러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