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산 유출 인근 노동자 여전히 조업 중

[르포] 예견된 사고에 안전조치 없어... “대피명령 없었다”


8일 오전 정부가 구미 불산가스 누출현장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누출사고가 일어난 지 12일 만이다. 농작물 고사, 공장 건물 훼손, 인근 주민과 구미 4산업단지 노동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가운데 뒤늦은 대처가 아니냐는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

사고 당일(9월 27일) 구미 4산단 현장을 찾았을 때만 해도 이만큼 피해가 커질거라 예측하지 못했다. 경찰, 소방인력을 비롯해 300여 명이 투입돼 사고 현장을 수습 중이었다. 목이 막히고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별 탈 없을 것이라 여겼던 기자만 불산의 위험성을 간과한 것이 아니었다.

  휴브글로벌 인근 공장. 불산으로 금속성 물질은 온통 녹이 슬었다.

  사고 발생 인근 공장 주변 식물이 말라 죽어 있다.

휴브글로벌 인근 공장 노동자 “대피명령도 없었다”
고통 호소해도 정상 업무 중인 공장들...“노동부, 휴업 조치해야”


사고가 발생한 ㈜휴브글로벌 인근 M공장의 노동자 김 모(52)씨는 “사고가 일어나고도 공단 내에 어떤 대피명령도 없었다. 뿌연 연기에 목이 막혀서 일하던 사람들끼리 밖으로 나가자고 해서 대피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그는 “경찰도 불산에 대해 몰랐던 것 같다. 물을 마구 뿌려댔는데 그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된 것 같다”며 초기 대처의 미흡점을 지적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박 모(44)씨는 “사고 다음날은 정전 탓에 조업을 못했지만, 연휴가 끝난 2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공장 뒤편 식물이 다 말라죽고 공장 벽면 알루미늄 이 온통 부식됐다”며 “지금도 일하면서 가슴팍이 답답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사고현장과 50m떨어진 K업체 사장 송 모(56씨는 “알루미늄이 다 부식돼 피해액이 1억 5천만원이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밖에 있었는데, 직원들이 공장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며 “임신한 직원도 있었다. 접근을 금지당하다 6시께 직접 차를 몰고 들어가 직원들을 밖으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단 내에서 대피 명령을 아무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구미시장은 다 청소했다고 하는데 석회를 이용해 청소한 적은 없다. 물로 씻어낸 것도 우리가 직접 소방서에 요청을 할 때만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을 만난 건 5일 오후께였다. 당일 오전부터 정부의 재난조사단이 조사 활동을 시작했다. 말라죽은 농작물과 고통을 호소하는 주민들의 이주대책 요구에 “사람은 안전하다”던 조사단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 이들은 없었다.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고 이후 인근 공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업 중이었다. 노동부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7일 오전까지 한국산업단지공단 대경권본부에 접수된 피해상황 자료를 보면 77개사가 177억 1천만원의 피해를 입었고, 노동자 1,359명이 고통을 호소하며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디피엠테크 노동자는 병원에 입원치료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공단 내 조경수 17,906그루가 불산에 피해를 입고 차량도 1천여 대 이상 피해를 입었다.

[출처: 한국산업단지공단 대경권본부]

피해를 신고한 업체 대부분은 사고현장으로부터 1km 범위에 밀집해 있지만, 최대 2.25km 떨어진 업체도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나 불산 누출의 피해가 생각보다 광범위한 것으로 확인됐다.

7일 저녁 민주당 장하나 의원은 사고현장 옆 공장인 아사히글라스를 방문해 노동자들의 피해실태를 알아보려했다. 하지만 출입하지 못했다. 노동부 직원이 막아선 것이다.

이에 심상정 의원은 “마을주민 뿐만 아니라 주변 업체 노동자의 건강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인근 업체 노동자에 대한 건강검진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근접 업체에 대한 업무중지명령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산 취급 관리 실태 위험천만
안전교육은 유인물에 서명하는 것으로 대체, 노동자 안전은 뒷전


이번 불산가스 누출로 불산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졌다. 민주노총 구미지부는 성명서를 통해 “불산가스 누출은 우연히 벌어진 사고가 아니”라며 “노동부가 해온 부실관리와 감독에 비추어보면 이런 사고가 벌어지지 않은 게 이상할 지경”이라며 노동부의 무책임함을 비판했다.

불산을 취급하는 ㈜KEC의 노동자들이 전한 불산의 관리 실태는 위험천만했다. 불산을 10년 동안 취급했다는 김 모씨는 “안전교육은 회사가 나눠주는 유인물에 서명하는 것으로 대체해왔으며 보호장비도 개인에게 지급된 것이 아니라 공용으로 비치된 것이 태반”이라며 “유해물질로 다친 경우에도 물로 세척하거나 개인이 알아서 진료를 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안전교육을 실시하는 관리자들도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 작업할 땐 숨이 콱콱 막혀왔다. 한 동료는 불산이 손끝에 묻어 손톱이 빠지기도 했다”며 “위험물질이라는 걸 알면서도 회사가 지시한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하면 안 되니 안전수칙을 지켜가며 작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금속노조 KEC지회에 따르면 반도체 공정에서 불산은 필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안전조치와 대피요령에 대한 교육도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 구미지부는 “문제가 생기면 노동자들이 보호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고,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데 문제는 노동자의 안전보다 생산성에 몰두한 회사”라고 비판하며 노동부의 관리감독 부실을 지적했다.(기사제휴=뉴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