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노숙인 인권 권고... 인권단체 “가만히 있는 게 최선”

‘음주금지구역-지정병원 제정’, 오히려 노숙인 쫓아내

국가인권위원회가 “노숙인의 주거, 건강권을 보장하라”며 각 광역지자체와 정부부처에 ‘노숙인 인권개선 정책권고’를 발표했다. 그러나 인권위의 이 정책권고가 오히려 노숙인의 인권상황을 후퇴시킬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이번 정책권고는 지난해 1월, 인권위 전원회의에서 부결된 정책권고안의 후속조처라는 점에서 노숙인 인권에 대처하는 인권위의 시각이 갈수록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도 일고있다.

국가인권위는 지난 5일, 노숙인 인권개선 정책권고를 발표하며 “<노숙인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노숙인의 주거, 일자리, 의료 및 노숙인에 대한 인식과 관련한 정책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각 광역지자체에 “노숙인의 음주행위에 대하여 지정된 장소에서 하도록 권장하는 등 무분별한 음주행위에 대한 계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하라고 권고했다. 보건복지부에도 “국공립 병원 등이 없는 지역의 경우, 민간 의료 기관을 ‘노숙인 지정병원’으로 운영”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정작 노숙인들과 인권단체들은 인권위 권고가 “노숙인 인권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숙인을 통제하는데 사용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울역 노숙인 강제퇴거방침 철회/공공역사 홈리스지원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서울역 공대위)는 6일 성명을 발표해 “인권위의 권고는 노숙인에 대한 관리와 집단적 차별을 주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인권위가 지자체에 권고한 소위 ‘음주금지구역’은 “술 마시는 노숙인들로 인해 노숙인들의 이미지가 안 좋으니 술 마시는 모습을 감추라고 권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서울역에서 내몰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또 다른 게토를 만들고 노숙인들을 가둬두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철도안전법을 근거로 한 서울역 노숙인 퇴거조치, 지하철역사 통로 심야시간 폐쇄, 서울시의 노숙자율금지구역지정 등 서울역 야간노숙 금지조치 이후 노숙인들은 운신의 폭이 극히 좁아졌다. 최근에는 지자체마다 공원, 정류장 등을 ‘음주청정지역’으로 지정하는 조례가 속속 제정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12개구에서 ‘음주청정지역’을 두는 조례가 제정됐다. 서울역 공대위는 이번 인권위 권고가 자칫 전국적인 ‘노숙금지구역’의 대량 지정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전망했다.

서울역 공대위는 “노숙은 알코올 중독이라는 원인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노숙인들의 알콜의존성향은 노숙장기화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공대위는 노숙인들의 알콜의존에 대한 대책은 중독질환 치료를 위한 의료지원체계를 강화하고, 지역기반 알코올 질환관리대책(알코올상담센터의 확대 설치 등)이 마련되도록 유도하는 방향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위 권고도 치료 재활대책 미흡을 지적하고 이에 대처하는 방향에서 이뤄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노숙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음주를 허용하는 장소가 없는 상황에서 역주변 등 음주금지구역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것을 지자체들은 노숙금지구역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인권위의 정책권고는 이밖에도 “노숙인들의 인권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실효성 없는 방안만 내놓고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인권위가 노숙인 의료권을 보장하겠다며 보건복지부에 노숙인 지정병원을 운영하라고 한 권고도 정작 노숙인들에게는 “하나마나한 조치”라는 것이다. 노숙인 지정병원은 국공립병원으로 주로 3차 의료기관이다. 노숙인들에게는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또한 노숙인들이 지정병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노숙인 1종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3개월 이상 시설에 입소해야하고 건강보험료가 6개월 이상 체납돼야 한다. 더구나 노숙인 1종 자격을 받으면 보험증에 노숙인이라는 표시가 새겨진다.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노숙인들은 대부분 노숙인 의료급여 1종을 취득하지 않는다.

국토해양부에 전해진 권고 역시 노숙인들의 인권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다. 인권위는 국토해양부에 노숙인 주거대책 마련을 요구하면서 “소규모 가구 공급 이외에 가족 단위 노숙인의 요구가 반영된 거처도 공급”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가족단위 보다 독신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은 노숙인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대책이라는 것이다. 이동현 활동가에 따르면 가족 단위 임대주택의 경우 노숙인들은 그 임대료를 부담할 수 없다. 정작 노숙인들에게 필요한 주거권 대책은 1인가구 임대주택의 확대지만 인권위의 권고는 그와는 전혀다른 방향이라는 지적이다. 정부가 제공한 2012년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임대주택에서 1인가구는 36가구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12가구는 기존 임대주택 임차인이 입주해 정작 1인가구 주거취약계층이 입주한 실례는 24가구에 불과했다.

  2012년 1월, 국가인권위 전원위원회가 '노숙인 인권 개선을 위한 정책 권고'를 부결했을 당시 [출처: 비마이너]

이동현 활동가는 “효용도없는 하나마나한 정책권고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이어 “인권위가 작년 정책권고를 부결시키고 내놓은 후속대책이라는 것이 노숙인들을 강제퇴거하는데 2중대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서울역 공대위도 “작년 서울역 야간노숙행위 금지조치 재검토 권고의 부결 이후, 인권적 가치의 실현은 오히려 인권위와 반목하는 데 가깝다”며 인권위를 힐난했다. 공대위는 이어 “노숙인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침묵하는 것이 인권의식이 실종된 현 인권위가 노숙인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선의”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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