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주민들 국회 상경 투쟁, 송전탑 보상법 유보시켜

전문가 협의체 악영향 우려...“보상법 아닌 송전탑 필요 없는 법 만들어야”

6월 21일 오후 2시께 75세 밀양 주민 윤여림 할아버지는 30도가 넘는 서울 여의도에 올라와 손주뻘 되는 경찰들을 향해 30배를 올렸다. 경찰들 뒤로 국회 의사당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이지만 할아버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윤여림 할아버지 뒤에선 밀양에서 버스 4대를 나눠 타고 올라온 할머니 할아버지 140여 명이 일명 송전탑 보상법의 통과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어 밀양 주민은 이 더위에 국회 정문 앞에서 30배를 하겠다고 국회 정문 앞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경찰이 막았다. 경찰은 15명씩 나눠서 가야 30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윤 할아버지는 경찰 지휘관들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경찰은 “그나마 안 되는 거 위에 잘 얘기해서 허락을 받은 거니 무조건 15명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몇몇 할머니들이 “늙은 우리가 뭘 하겠느냐”며 항의가 거세졌고, 경찰도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윤 할아버지는 들고 있던 조끼를 집어던지며, “내가 여기서 죽어야겠냐”며 경찰들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반대 대책위 관계자들이 밀양 주민들을 달랜 끝에 주민들은 15명씩 돌아가며 국회 앞 30배를 진행했다.

  웃음일 잃지 않고 있는 윤여림 할아버지(맨 오른쪽)

이렇게 한 여름에 주민들이 노구를 이끌고 국회 앞에 온 것은 밀양 송전탑의 대안을 찾기 위한 전문가협의체가 진행되는 와중에 송전탑 보상법이 통과되면 전문가 협의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 협의체 대안이 나와도 보상 근거를 마련한 한국전력이 뒤에서 주민들을 회유하며 송전탑 건설을 강하게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비슷한 시각인 오후 2시 6분 국회의사당에선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전체회의가 에어컨 아래서 개의됐다. 이날 핵심 쟁점은 김관영 민주당 의원과 조해진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과 정부 수정의견을 병합 심사한 ‘송·변전 설비 주변 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안 대안이었다.

지난 19일 산통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이 법안이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합의로 통과되면서 전체회의 통과 우려가 높아졌다. 하지만 20일에야 소식을 들은 밀양 주민들이 대거 상경하고, 야당 의원들이 강하게 유보를 주장해 법안 통과가 유보됐다. 물론 이날 밀양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볼 때 송전탑 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가 협의체가 파탄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법안은 여당의원들과 산자부가 9월 정기국회 본회의 처리를 전제로 법안 의결 유보에 동의해 줘 전문가 협의체 결과 이후인 9월 본회의 처리 가능성이 높다.

  밀양 주민 140여명이 국회 정문 앞에서 돌아가며 30배를 올릴 때 국회 산자위가 열리고 있었다.

“송전탑 보상법, 전문가 협의체 요식행위로 전락시킬 수 있어”

법안 유보를 강하게 요청한 김제남 진보정의당 의원은 “이 법안을 만들고자 하는 여야 의원들의 뜻은 잘 알지만, 모처럼 밀양송전탑 대안 마련을 위한 전문가 협의체가 7월 8일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이 법안이 협의체를 파탄낼 우려가 높다”며 다음 회기로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강창일 산자위 위원장은 김제남 의원에게 “이 법안은 전국적으로 송전탑 문제가 생겨 이 문제 해결을 위한 법이지 밀양과 연결시키지 말아달라. 그런 법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김상훈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4월 법안소위 심의 때 제정법이라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두 달 정도 말미를 두고, 두 차례 공청회를 거쳐 법안소위 심의를 거치고 많은 논의 끝에 상임위에 상정됐다”며 “앞으로 전력공급을 위한 상당한 전력계통의 지원이 불가피해 그를 위한 보상 입법임을 이해해 달라”고 법안통과를 요청했다.

반면 전순옥 민주당 의원은 “이 법안이 밀양만을 위한 법안이 아니라고 해도, 7월 8일 전문가 협의체 조사가 끝나는 시일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주민들이 원치 않는 법안을 성급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며 “밀양문제 해결을 위해 성급한 결론을 내면 오해만 발생할 수 있다. 8년을 끌었는데 모든 사람이 동의할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법안 유보를 강조했다.

오영식 민주당 산자위 간사는 “이 법의 기본취지엔 동의한다”면서도 “다만 법을 처리하면 전문가 협의체를 요식행위로 전락시키고, 입법부와 정부가 논의해서 향후 밀양 송전탑 건설을 지원하려는 일각의 오해와 억측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 입법 논의로 협의체가 파행되거나 불필요한 악용가능성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오영식 간사는 “그런 일부의 오해와 주장에 대해 입법부가 경청을 하고, 그럼에도 위원 모든 분들이 입법 필요성에 동의하므로 이번 회기 상임위 의결을 유보하고, 9월 국회 첫 회의에서 의결처리를 전제로 유보하는 것을 고민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여상규 새누리당 간사는 “법안 유보를 해도 이것만은 약속해 달라”며 “다음 정기국회 첫 상임위에서 반드시 통과시키고, 9월 본회의에서 반드시 통과시켜달라”고 강조했다.

정부 측은 아예 7월 8일 전문가 협의체가 끝난 후 산자위 전체회의 보고가 진행될 때 상임위 통과를 요청하기도 했다.

강창일 위원장은 “협의체는 지중화라는 대안을 논의하는 자리고, 이 법안은 송변전탑 보상 문제로 별개 사항으로 전문가 협의체와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도 “실제 전문가 협의체에 악영향을 미칠지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혹여 전문가 협의체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돼 법안을 보류하겠다”고 결정했다.

점심도 못 먹은 70대 노인들, 30도 더위에도 희망 담은 30배

이날 밀양 송전탑 보상지원법의 산자위 전체회의 통과 우려는 정치권에 대한 밀양주민들의 불신을 가속화하기도 했다.

앞서 밀양주민들이 진행한 국회 앞 긴급 기자회견에서 밀양 주민들은 “국회 산자위 의원님, 애초 이 법이 이야기되던 때부터 전체 1,484세대 송전탑 경과지 주민 중 1,813명이 이 법을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며 “이 법이 통과된다고 절대 밀양 문제가 해결되거나 앞으로 수없이 생길 송전선로를 둘러싼 갈등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주민들은 대부분 70대 이상 노인들도 국회 일정에 맞추기 위해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뙤약볕 아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한 주민이 송전탑 건설 반대를 요구하며 분신한 고 이치우 할아버지 얘기를 하자 10여 명의 주민들은 눈물을 훔쳤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제남 의원은 “송전탑 지원법은 송전탑에 대한 대안을 만들고 난 이후에 만들어도 된다”며 “지금 밀양법이라고 해서 송전탑 보상법을 만들면 주민들의 송전탑 대안 만들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라고 말했다.

765kV 송전탑 반대대책위 김준한 신부는 “우리는 보상이 필요 없다고 수 천 번 얘기했다”며 “송전탑 보상 법제화는 어르신들 20여 분이 쓰러지면서 쟁취한 전문가 협의체를 무너뜨리려는 국회의 작태”라고 비난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지난 6월 5일 강창일 산자위 위원장은 저희 전문가협의체 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주며 모든 가능성을 열고 좋은 대안을 찾아달라고 했다”며 “그런데 그저께 2주 만에 송전탑 보상지원법을 소위에서 통과시켰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송전탑 보상법을 통과시키고 나면 협의체에서 아무리 대안을 검토해도 국회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우려했다.

하승수 위원장은 “민주당이 전문가 협의체 건설로 국민에게 생색만 내고, 무책임하게 소위에서 대충 법안을 합의해 줬다”고 덧붙였다.

윤여림 할아버지는 “정부가 법이 없어서 송전탑을 세우지 못한 게 아니다. 우리가 싸웠기 때문에 송전탑을 세우지 못한 것”이라며 “국회가 송전탑 지원법을 만들어도 우리가 원하는 법이 아니니 주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송전탑 건설을 막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밀양주민들은 모두 “우리는 ‘보상을 더 받는 법’이 아니라, ‘송전탑이 필요 없는 법’을 만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며 “핵발전소를 잔뜩 지어놓고, 밀양 같은 노인들이 사는 곳을 지나 도시로 수송되는 전력 생산과 송배전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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