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에서 ‘마춤법’으로

[새책] 몸의 증언(아서 프랭크 저, 최은경 옮김, 갈무리, 2013)

‘맞춤법’이 아니라 ‘마춤법’이라면 어땠을까. ‘양복마춤’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고, ‘양복맞춤’의 세계는 결코 박해받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다른 말도 용인하는 것이 ‘마춤법’의 제1항이니까. 아이들의 받아쓰기 시험지에서 ‘맞춤’의 ‘ㅈ’은 쉽사리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너그러움이 살아있는 문법이니까. 그런데 북아현동 재개발 구역 앞 대로변에는 “맞춤법”의 세계에서 폐업한 ‘마춤양복점’이 덩그러니 큰 간판을 달고 있었다. 아마도 핍박받았을 ‘마춤양복점’은 홀로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인 ‘맞춤법의 세계’ 속에서 조용한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듯했다. ‘맞춤법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철거용역들의 행패는 힘없고 엉거주춤한 ‘마춤법’들을 향한 위협이었다. 지금도 여전한 ‘양복마춤’이라는 간판은, 그래서 “여기, ‘마춤법의 세계’가 있다!”라는 외롭고 지속적인 증언 또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애초에 ‘맞춤’하기를 거부한 ‘마춤양복점’의 외로운 분투는 공허하다. 하지만 그 외마디인 ‘양복마춤’은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결국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일까.


『몸의 증언』의 작가 아서 프랭크는 크게 아파본 경험이 있는 사회학자이고, 계속 환자로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의사의 지침에 따라, 병원의 수많은 방들을 옮겨 다니며 치유라는 절대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미래의 시간들을 식민화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는 회복되었고, 스스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느낀다. 그가 1인칭 개인으로서 겪은 이러한 과정은 차마 말할 수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가 쉬운 답을 얻고자 했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하지만 ‘침묵해야 할 것’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말해야만 했던 비트겐슈타인처럼, 아서 프랭크 역시 혼돈을 말하기 위해 혼돈 속으로 뛰어드는 길을 택한다.

그는 환자를 환자의 역할에만 묶어두는 것은 철저히 모더니즘적인 사고를 견지한 결과라는 비판을 가한다. 의사는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진술하려는 말들을 전문적 의학용어들로 재단해 버린다. 그것들로 빼곡한 진료 차트 속에서, 상처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몸-자아는 이미 사라져버린다. 비록 의학적 조치라는 것이 질병의 치료를 위한 것일지라도, 아픈 사람이 겪는 생생한 고통은 절대 누군가에 의해 대신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은 오직 고통을 겪는 주체에 의해서만 발화될 수 있을 뿐이며, 그 이야기를 듣는 청자는 고통의 목격자로 남는다.

레비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애써 말하려는 사람과, 그 고통의 서사를 듣는 사람의 사이에는 부름과 응답의 상호 관계가 성립한다. 혼돈 속에서 구술된 화자의 고통은 비록 나의 고통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나를 간청하며, 타자에 대한 주목을 권한다. 이때, 타자의 고통을 접한 나는 새롭게 아프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타자의 고통이 절대 내게서 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타자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타자의 죽음을 대신 경험할 수 없고, 그래서 그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러나 절반의 열림이라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타자의 고통을 듣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타자가 발설하는 이름 없는 고통,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지속적인 응답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고통 속에서 함께 죽지 못하는 것을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귀를 빌려주는 것으로, 모더니즘 기획에 의해 목소리를 잃을 뻔했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돌려준다.

결국 그들의 상처가 우리를 치유자로 만든다. 또는 우리의 상처가 그들을 치유자로 만든다. 안쪽과 바깥쪽을 향해 모두 열리는 상처는 몸과 몸들을 이항적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몸과 몸들 사이에서 보편적 소통의 가능성이 발견된다. 말하는 이는 듣는 이에 기대어 말할 수 있고, 듣는 이는 말하는 이를 지탱하며 증언한다. 증언과 증언의 무한 연쇄는 하나의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우리 모두가 몸과 몸으로 연결되는 윤리를 기획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중심들의 해체가 이루어지는 대혼란의 포스트모던 시대 윤리는 이렇게 가능해 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 바로 아서 프랭크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의 기획을 ‘마춤법을 수립하려는 노력’이라고 불러 보아도 좋을까. 앞서 나는 ‘마춤법의 세계’에 대한 목격담을 풀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건물들이 차례로 철거되고, 오래 살던 사람들이 강제로 쫓겨나는 북아현동이라는 장소가 겪는 고통은 ‘마춤양복’이라는 외마디로 목격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마춤양복’은 강제 철거가 자행되고 있는 북아현동의 사태를 증언하는 혼란의 서사 중 일부이다. 오늘 밤, 나의 목격담은 여기까지다. -내일 밤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맞춤법’의 기획에 균열을 내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용인하는 ‘마춤법’의 세계에 응답해 보고자 하는 이들, 더불어 목격자가 되는 마법에 걸릴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아서 프랭크의 책, 『몸의 증언』을 권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마춤법’은 어쩌면 대혼란의 규칙일 수 있지만, 텅빈 규칙은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규칙을 용인하고, 각자의 몸을 이어 새로운 윤리를 구축하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떤 목격을 하고, 어떤 증언을 할 것인가. 『몸의 증언』의 원제는 『The wounded storyteller』, 즉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이다. 그러니까 ‘마춤법의 사전’에 하나의 예문을 보태는 일은 상처 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가운데 감히 상처 없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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