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주도성장’, 달콤한 유혹인가 장기적 대안인가?

[주례토론회] 포스트 케인스주의와 임금주도성장론 비판

[편집자주-토론문]

한국에서 간판을 바꿔 달다, ‘소득주도성장론’

지난 8월 14일 민주당 노동-임금 TF(은수미,김경협,김기준,김용익,박민수,홍종학 의원)에서 국제노동기구(ILO) 근로기준국 연구조정관을 초청해 ‘소득주도 성장의 가능성과 함의’를 주제로 발표회를 열었다. 소득주도 성장은 공평한 분배로 양극화를 해소하고 안정적인 성장을 이끌어 나가는 경제성장 모델을 지칭한다. 이 성장모델은 작년 가을 대선 전부터 경제민주화 논쟁을 거치면서 회자되기 시작했는데,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론’의 대항마로 최근 부상하고 있다. 이 자리엔 전병헌 원내대표도 참석해, ‘소득주도 성장론’의 당론 채택 움직임을 조심스레 예측해 보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토론자격으로 참석한 면면들을 보면 시민단체, 학계, 여러 연구소 등이 ‘소득주도성장론’을 둘러싸고 커다란 합의를 가지고 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실제 한국노동연구원은 지난해 10월 ‘임금주도성장론’에 관한 국제적 이론가들을 초청해 대규모 토론회를 개최했었다. 그리고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소)’에서는 올해 초 ‘소득주도성장론’의 핵심을 정리한 글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국제적으로 ‘임금주도성장론’이라 불리는 것을 요약한 내용이었다. ‘임금’을 ‘소득’이라 바꾼 이유는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 현실을 고려할 때, ‘임금’이라는 말이 주는 노동편향적인 뉘앙스를 누그러트리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그 후로도 이러한 성장론은 올해 여름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기본권 강화를 주장하는 여러 사회단체의 주장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이렇게 급작스레 ‘임금주도성장론’이 대안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아마도 분배 정책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볼 때, 구체적인 이론적 쟁점과는 별도로 그 자체로 상당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복지정책과 같은 분배요구에 대한 우파들의 비판은 언제나 “파이를 키워야 나눠줄 것이 있다”는 논리였다. 박근혜식 경제민주화 담론이 흐지부지 되는 것도 GDP 성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금주도성장론’은 임금분배를 높여야만 경제성장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논리를 갖고 있어서, 우파들의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더구나 전 세계적 불황이 장기화되고 있는 현재,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성장방식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터라 더욱더 이러한 분배를 통한 성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의 성장모형은 비주류 경제학파들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체계화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포스트 케인지언’과 ‘칼레키언’이 있다. 이번 주례토론회에서는 ‘임금주도성장론’의 이론적 쟁점과 역사적 쟁점을 분석하고, 나아가 현 정세에서 우리에게 교훈은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임금주도성장론’의 요지

먼저 ‘임금주도성장론’의 핵심을 정리해 보자. 우리나라에 소개된 글로는 한국노동연구원 토론회에서 번역된 스톡햄머(Stockhammer)와 라부아(Lavoie)의 글(임금주도 성장론: 개념, 이론 및 정책)이 있다. 아래 표에서 보듯 기본적인 분석의 틀은 분배정책과 경제체제의 효과적인 조합이다. 그래서 이윤주도에 의한 성장체제는 친자본적 성장분배정책을 가져야 하며, 임금주도에 의한 성장체제는 친노동적 성장분배정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실은 임금주도 성장체제가 일반적인 형태인지라 많은 나라들이 친노동정책을 취하는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친자본적 분배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불안정한 경제성장과 위기가 반복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덧붙여 과거 친노동적 정책을 취했던 60-70년대 케인스주의적 성장(전후 자본주의 황금기)을 제대로 된 정책조합의 예로 들고 있다.

[출처: 임금주도 성장론: 개념, 이론 및 정책, Marc Lavoie, Engelbert Stockhammer, 한국노동연구원, 국제노동프리프 2012년 12월호]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윤주도 성장은 이론적으로 가능하거나 혹은 일부국가들에 해당하는 예외적 체제이고, 현실 경제체제는 임금주도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노동 정책의 당위성을 재차 강조한다. 그래서 기업의 이윤이 남아야 투자도 하고 고용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우파적 경제관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불평등에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투쟁에 대한 강력한 호소와 케인스주의적인 복지국가의 향수를 자극시킨다. 당연히 복지담론이 활발해 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주장은 이론의 정합성을 떠나 운동주체들의 눈과 귀를 주목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더구나 임금분배를 높이는 친노동적 정책전환을 통해 성장과 분배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라서, 자본주의의 평화적 발전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위력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지배계급 뿐 만 아니라 자본분파들 내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요인이 있다.(가령 고용노동부에서 발간하는 월간 소식지에도 ‘임금주도성장론’이 소개되기도 한다. <알기 쉬운 임금정보 21호>, 2012년 3월) 이러한 타협체제를 보여주는 것이 과거 스웨덴 임금연대전략이었다. (주례토론회 3회 참조-스웨덴 모델, ‘고조세-고복지’의 진실)

현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 이에 대한 비판

이들의 주장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현 경제 위기의 원인진단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핵심은 소득의 불평등과 금융의 탈규제이다. 소득의 불평등(임금분배율의 하락)은 국내 총수요를 떨어뜨리게 만드는데,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부채주도의 성장정책과 수출주도의 성장정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빚으로 모자란 소득을 채워 성장을 하는 방식과 소득이 부족해서 국내에서는 팔수 없으니 수출을 장려해 해외에 내다파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가계부채로 내수를 충당하고 있고, 수출의존도가 높아 국민 총소득 대비 수출입 비중이 100%를 넘었다. 또한 금융부문의 탈규제로 인해 고삐 풀린 금융시장이 급격히 팽창하고 부채주도의 성장정책과 만나 2008년 금융위기를 일으켰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주장은 2008년 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연쇄파산을 목격했던 우리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준다.

그래서 이들의 처방은 최저임금인상, 고용보장 등을 통해 임금분배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노동정책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국내 총수요가 되살아나면서 더 이상 부채와 수출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일면 단순화시켜 정리한 바가 없진 않으나, 대체적인 주장은 금융을 규제하고 임금분배를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하여 이로 부터 경제성장의 선순환을 이룬다는 것이다. 흔히 알려진 케인스주의적인 처방과 비슷하다.

먼저 경제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대목에서 몇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른바 임금 몫의 하락이 위기의 원인인가라는 점이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미국의 비금융법인의 임금분배율은 지난 30년간 대체적으로 거의 미세하게 하락하였다. 그런데 임금소득자 내에서 격차가 커지면서 상위 5%(전문경영인)와 10%(전문기술인력)들이 가져가는 몫은 계속 커졌다. 임금소득자의 분화에 의한 계급지형의 변화는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주례토론회 2회 참조 - 노동의 양극화, 신중간계급의 부상)

그래서 임금분배율의 하락이 이번 금융위기의 원인이라고 지목할 근거는 부족하다. 다만 임금소득자내의 격차로 인해 하위계층의 소득은 뚜렷하게 하락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소득감소와 양극화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는 논리는 일면 타당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소득격차 때문에 부채를 통한 경제성장이 벌어졌고, 이것이 경제위기를 일으킨 요인이라고 주장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부채의 총량보다도 중요한 것이 부채의 질이기 때문이다. 누가 진 빚이며 소득대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

부채의 양은 계층마다 차이가 있는데, 실제 소득이 높은 계층이 가장 많은 부채를 일으켰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부채-자산’ 경제가 규범화되면서 부채를 통한 자산매입과 자산거래를 통한 차익실현이 일반화되었는데, 이를 수행하는 핵심적인 주체들은 대부분 소득상위자들과 중산층이었다. 이들에게 부채의 증가는 소득의 하락 때문이 아니라 레버리지를 통한 자산증식효과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개인의 소득 하락의 문제보다 더 큰 원인은 2000년대 자본축적 위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90년 대 말 IT 버블이 꺼지고 난 후, 위기 직면한 미국 경제가 선택한 필연적 귀결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것이었다. 주택금융기법의 발달, 이를 가능토록 한 투자은행의 각종 탈규제는 자본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반작용의 결과였다. 여기에 기축통화 패권국으로서의 미국경제의 고유한 특징이 미국 경제의 막대한 적자(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용인했고, 이것이 다시 투기성 자금으로 환류 되면서 세계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이것이 2000년대 새로운 금융버블을 일으킨 원인이었다.

따라서 수요 감소로 인한 ‘과소소비론’적 진단은 2008년 금융 위기의 적절한 원인 분석이 아니다. 오히려 위기 이후 그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설명할 때 잘 설명될 수 있다. 실물부문의 현 상황은 부채 축소 국면이 장기화되면서 경기침체, 임금 감소, 소비 감소, 비관적 기대 등이 악순환 되고 있다.(‘과소소비의 덫’, 인용: 정상준, <글로벌 금융위기와 과소소비론: 실증적 비판>, 마르크스주의연구 26호)

그래서 과연 임금 몫의 상승이 현재 소비수요를 충분히 자극시킬만한가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지금은 부채축소 국면이기에 임금의 증가분이 상당부분 빚을 갚는데 소모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쉽게 이해되는데, 대부분의 가계가 주거비용(임대료, 전세대출, 주택담보대출)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래서 유효수요를 창출해 공장가동률과 투자를 늘려 자본성장으로 고용이 확대되는 선순환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임금상승이 부채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논리라면 이견이 없다. 그러나 유효수요창출에 의한 자본성장이 가능한지는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수요가 창출된다면 부채관리로부터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자들에게 해당할 것이다. 이들의 소비성향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도 만무하지만 그렇게 발생한 양극화된 소비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성장인지는 의문이 든다. 임금 이외의 다른 방식의 부채문제에 해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의도했던 선순환 고리는 쉽게 끊어질 수 있다.

대안을 둘러싼 이론적 쟁점

앞서 살펴본 바, 위기에 대한 원인 진단이 다르기 때문에 그 해법에서도 차이가 난다. 다시 정리하면 ‘임금주도 성장론’의 대안은 말 그대로 임금분배를 통한 유요수효 창출 ->기업의 설비가동률 상승 -> 고용과 투자촉진 -> 경제성장(자본축적률 증가)의 선순환이다. 여기서 이론적으로 쟁점이 되는 부분이 바로 기업의 투자를 설비가동률의 함수로 해석하고, 설비가동률을 내생변수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참조: 주류 케인지안들은 투자를 이자율의 함수로 간주하지만, 포스트 케인지안들은 투자를 설비가동률의 함수로 설정한다. 그리고 설비가동률을 내생변수로 만들기 위해서, 당해 년도의 목표가동률을 전년도의 가동률과 전년도의 목표가동률의 가중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설정한다.)

다소 어려운 경제학적인 개념이긴 하나, 쉽게 말해 기업가가 공장기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투자와 고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해 얼마나 공장기계를 돌릴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전년도 목표수준과 실제가동률을 바탕으로 미시적 수요변동에 의해 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요를 촉진하여 물건이 많이 팔리고 기계가 잘 돌아가는 것이 고용과 투자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수요 촉진을 위한 임금분배를 강조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단기(1년)에서는 얼마든지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수요 촉진 정책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정부에서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추경편성이나 재정조기 집행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모두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런 수요증대에 의한 성장론은 단기적 상황에선 아무런 쟁점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장기에서도 이러한 수요증대를 통한 성장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이다. ‘임금주도 성장론’의 입장은 장기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항상 최대가동률과 현재가동률의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동률을 상승시켜 경제성장의 여지를 언제나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격차’가 존재하는 이유는 가동률이 최대가동률에 근접하면 이윤창출을 위해 설비투자를 늘리게 되고, 공장기계가 늘어난 만큼 다시 벌어진 가동률의 격차를 메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더구나 수요확대에 따라 생산성 향상이 이뤄지면서 투자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이윤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서 자본성장이 이뤄진다. 결국 유효수요만 창출되면 성장의 선순환은 장기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실제 기업들의 행동을 보면, 미시적으론 수요에 의해 목표가동률을 결정할 순 있지만, 장기적 경향에서 총수요에 반응하기보다는 기술-조직-제도 변화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가령 경기가 과열되는 것(목표가동률 이상)을 막는 거시 경제적 차원의 국가장치(중앙은행, 행정부)가 있고, 이것이 잘 작동하기도 하지만 때론 잘 작동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분배증가가 초기엔 노동생산성을 어느 정도까지 높일 수 있으나, 일정 수준이 지나 장기적 경향으로 보면 기술혁신의 의해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혁신적인 기술발달에 따라 생산성이 증대되어 가동률과 설비투자가 커지기도 하지만, 기술혁신의 곤란함 때문에 과잉경쟁-과잉생산이 벌어지면 하향되기도 한다. 실제 1948년부터 2012년까지 조사한 미국 제조업의 설비가동률은 60년대 후반부터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이 드러난다. 그리고 장기적인 목표가동률 값을 중심으로 경기순환에 따라 단기(2-3년)적, 중기(5-10년)적 수준에서 변동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뒤메닐·레비, , 2012)

대안을 둘러싼 역사적 쟁점

이런 복잡한 이론적 쟁점 말고도 역사적 쟁점이 하나 더 있다. 앞서 맨 처음 그림에서 ‘친노동-임금주도 성장체제’의 올바른 조합이라 언급했던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 시절의 ‘사회적 케인스주의’ 모델에 관한 것이다. 80년대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폐해를 많이 경험하다 보니, 그 전의 경제체제에 대해서 약간의 오해와 향수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과연 당시 경제체제가 ‘친노동’이었나? 지금 보다 계층 간 소득 격차가 적었고, 금융의 과도한 투기적 요소가 제약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두고 우리가 앞으로 개혁 혹은 변혁해 나갈 사회상으로 잡기엔 퇴행적이다.

실제 당시 경제체제는 ‘친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친자본’이었고, 자본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국가가 아주 밀접하게 자본과 결합된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당시 경제발전을 위한 각종 위원회(CED, Committee for Economic Development)들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서 관료들과 대기업 파견자들이 모든 경제 생산을 계획하고 조율했다. 국방산업이라 칭했지만 사실 모터나 타이어 등의 제조업과 같은 모든 산업이 연관되어 있었다. 이것은 자본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도 한데, 자본이 해결하기 힘든 시장의 위험성을 해결해 주고 안정적인 장기 성장을 보장해 주는 국가의 역할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재량은 ‘재정통화정책의 원리’라는 규범 하에서 이뤄졌다. 왜냐하면 국가의 재량이라는 것이 관료의 임의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경제규칙에 근거해서 정당성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적 분석틀에서는 과거 이러한 국가와 자본의 효율적인 결합의 형태를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칭했다.)

또 한 가지, 1930-40년대 사회복지 체제가 구축되어가는 과정에서 GE나 록펠러 같은 법인기업들이 이를 적극 수용했는데, 이들이 보기에 그렇게 해야만 장기적 축적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생산요소들 간의 투입과 산출의 균형 유지가 중요했으며, 특히 노동이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대공황과 같은 역사적 교훈을 보면서 기업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위험을 인식하게 되었고, 기업이 스스로 국가를 불러들이게 되었다. 이로서 국가가 기업의 사회복지 체제를 지원하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기업입장에서 장기적 계획화가 가능해지면서 성장과 안정적 투자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자본의 안정적 성장을 바탕으로 생산성에 비례하는 고임금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심지어 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절 수많은 실업자들이 길거리를 헤매는 동안에도, 수익성이 높은 기업들에 고용되어 있었던 노농자들(AFL과 CIO)은 상대적 고임금을 누렸다. 그리고 40년 대 이후 노사 협상에서 장기계약이 일반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안정적 고용과 임금을 자본가들이 만들어준 셈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경제체제를 ‘친노동-임금주도 성장체제’ 라고 부르긴 힘들 것 같다. 임금상승은 결과로 드러난 현상이지 성장체제의 원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친노동적 정책변경을 통해 ‘사회적 케인스주의’ 체제로 회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체제’와 ‘체제’ 사이의 단절을 고려하지 않은 기술 관료적 시각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성장론은 사민주의적 집권전략과 쉽게 융화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런 ‘체제’사이의 연속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은 현실의 이익배분과 이를 통제하는 제도와 규칙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념이 삼위일체가 될 때 이뤄질 수 있다. 과거 전후 ‘케인스주의식 성장모델’이 그러했고, 80년대 등장한 ‘신자유주의’가 그러했다.

만약 사민주의 집권전략으로 전후 케인스주의식 성장모델로 회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성장모델을 국제적으로 뒷받침했던 ‘브레턴우즈 체제’(미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국제통화체제로서 1971년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달러-금 태환정지를 선언하면서 종말을 고한다)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답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대안으로 제기하는 ‘글로벌 케인스주의적 뉴딜’체제가 바로 이런 것을 지칭한다면,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공조체제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지 현실적인 경로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글로벌 위기대응으로 만들어진 ‘G20 체제’는 금융개혁이나 불균형 해소와 같은 소박한 수준의 역할에서조차도 점점 후퇴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주는 정세적 쟁점 몇 가지

과연 장기적 전망을 여는 새로운 전락이 될 것인가? 아니면 혼돈의 시절 언제나 등장했던 것처럼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달콤한 유혹이 될 것인가? ‘임금주도 성장론’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급부상한 이론이라 이것이 어떻게 진화할지 함부로 예단하긴 힘들다.

그렇다면 이런 논쟁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먼저 소득불평등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도대체 누굴 위해 복무했던 체제였는지 폭로되어야 하고, 새로운 분배체제를 요구하는 투쟁이 지지받아야 한다. 그래서 ‘임금주도 성장론’자들이 주장하는 임금 불평등 해소는 현실적인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반드시 자본의 성장과 연관성이 있을 필요는 없다. 매년 GDP 1000조를 생산하는 우리나라에서 성장률이 0%라 해도 매년 GDP 1000조를 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우파 이데올로그들이 겁박을 주는 것처럼 성장률이 떨어지면 갑자기 땅이 갈라지는 식의 파국이 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성장률이 아니라 높은 대외의존도 때문에 발생하는 불균형이다. 그런데 이 불균형은 글로벌 자본축적의 전략이 가져온 결과이다. 그래서 새로운 분배체제를 요구하는 투쟁은 ‘생산의 사회화’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이 제시하는 성장률과 수출증가율의 숫자놀음에 종속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의 이익분배 문제는 항상 제도의 변화를 통해 통제되는데, 이것을 정당화시켜주는 새로운 이념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개인 간, 집단 간 갈등만 고조될 뿐 해결되지 못한다. 그래서 과거 70년대 스웨덴 모델만을 동경하고 있는 현실사민주의자들은 몇 가지 좋은 말로 사민주의를 포장한다고 해서 새로운 이념이 만들어지지 못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념이 현실의 대중운동과 결합되어 발전할 때 비로소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가는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주도 성장론’에서 주장하는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이라는 프로세스가 ‘계획가’에 의해 기획되고 관리되는 것으로 상을 그린다면, 주류경제학자들과의 논쟁만으로 협소화 될 것이고 현실의 추진동력을 얻긴 힘들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런 성장론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몫이라기보다 노조나 사회단체 등의 운동주체들의 몫이 더 크다고 보여진다.

얼마 전 민주당 관계자가 언론 인터뷰에서 "내년 2014 지방선거나 2016년 총선에서 당의 공식 성장론으로 소득주도 성장론이 채택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구체적인 내용 없는 창조경제론에 맞서는 민주당의 전략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반MB전선의 재판인 반박근혜 전선의 기치가 될 듯하다. 우리를 다시 한 번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일까? [토론문 끝]

아래는 발제문 전문이다.



포스트 케인스주의와 임금주도성장론 비판


0. 검토할 내용

- 임금주도형 성장모형에 대한 이론적/경험적 검토
- 임금주도형 성장모형의 최근의 위기 원인에 대한 진단
- 고전파-마르크스주의(제라르 뒤메닐/도미니크 레비)의 위기 진단
- 임금주도 성장의 실행가능성 및 쟁점

1. 포스트 케인스주의와 임금주도형 모형

- 임금주도형 모형은 케인스주의적 성장모형 논의의 일부
- 주로 포스트 케인스주의 논의에서 발전

- 포스트-케인스주의를 스스로 비주류경제학(heterodox economics)라 부르고 있고,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도 이 범주에 포함시킴
- 포스트-케인스주의는 미국/영국 포스트케인스주의로 나뉨
- 케인스가 재직했던 캠브리지 대학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나 최근에는 캠브리지 대학보다는 개별적이고 산포적 형태로 발전
- 영국의 맨체스터대학, 리즈대학 등과 미국의 UMKC(미주리 캔사스대), 유타대 등이 대표적이며, 최근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재직했지만, 그 세력이 축소되면서 UMASS-AMHERST, 영국의 KINGSTON(이 대학 철학과에는 우리에게 잘알려진 E. Balibar, P. Orsbonne 등이 재직), GREENWICH 대 등에서 연구

- 임금주도형 또는 케인스주의적 성장모형을 칼렉키(또는 칼레츠키) 성장모형이라 일컬고, 성장모형을 주로 연구하는 이들을 칼레키언이라고 부름
- 하지만 통칭 케인스주의적 성장모형이라 생각하면 됨. 실상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장기에서 케인스주의적 담론이 발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함.
- 최근에 Lavoie, E. Stockhammer, Onaran 등이 이 분야의 연구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INET, ILO 등에서 자금을 지원받고 있음.

# 제라르 뒤메닐/도미니크 레비의 연구
- 뒤메닐은 여기서 언급된 Lavoie 및 Stockhammer 개인적 친분이 있고, 이들의 연구를 높게 평가함.
- 하지만 뒤메닐은 이들보다 선배이고, 이들이 따르는 Dutt 등의 포스트케인스주의자들과 오랫동안 논쟁해옴
- 게다가 뒤메닐은 이들 논의의 일부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높게 평가하고 통합시켜야 보지만 특정 부분에서 결코 양보하지 않음(이것이 바로 Classical-Marxian을 구별하는 부분이며, 이후에 논의할 것)

2. 케인스주의적 성장모형

- 케인스주의적 성장모형에 대한 가장 교과서적인 논의를 살펴볼 수 있는 건 Duncan Foley and Thomas Michl, Growth and Distribution, 좀 더 포스트-케인스주의적인 논의는 Marc Lavoie, Introduction to PostKeynesian economics 등을 확인하기 바람.
- 적어도 단기에는 계획된 투자와 저축을 일치시키기 위해 산출(output)을 조정
- 산출수준의 변화는 가동률(capacity utilization)의 변화
- 따라서 케인스주의 성장모형은 고전파-신고전파처럼 인구에 제약되지 않고, 투자에 제약됨.
- 기업가의 투자용의(willingness)가 중요. 즉, 애니멀 스피릿

# 두 가지 패러독스
1) The paradox of thrift
저축성향의 증가->자본 성장률 감소, 낮은 가동률 수준
2) The paradox of costs
(투자용의가 일정한 가운데) 임금상승->가동률 증가(임금재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
이 두 가지 패러독스에 대해서는 이후에 살펴볼 것임.

Cf. 사실상 이러한 방정식 체계를 풀면 이른바 ‘과잉결정 문제’가 발생함. 이를 해결하기 위해 케인스 모형에서는 가동률을 내생변수로 설정. 즉 가동률에 일정한 추세가 발생함. 이 논의는 최근 40년 간 신자유주의를 설명할 때 매우 중요하며, 케인스-마르크스주의자, 포스트케인스주의자, 일부 마르크스주의, 로버트 브레너 등이 공유하고 있는 의견.

3. Comparative Dynamics (비교 동학)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절약의 역설
- 저축률 증가(투자성향일정)-> 낮은 이윤율, 가동률, 자본성장
- 이는 고전파 마르크스 및 신고전파와 다름

2) 비용의 역설
-임금몫 증가 가동률 및 산출 수준에 대한 positive effect
- 임금몫 증가는 노동자에게 유리한 재분배-> 금융자산의 성장률 하락-> 전반적 저축률 하락-> 유효수요 자극.

3) 과부의 항아리
->투자성향(애니멀 스피릿)의 증가-> 이윤율 증가-> 자본성장 증가
=>이는 financial system background에 대한 이야기. 자금이 충분히 공급되어야 함.

4. 이윤주도 성장 vs. 임금주도 성장

# Stephen Marglin, Amit Bhaduri
- 비용의 역설에 주목. 임금몫의 성장이 유효수요를 자극하면서 성장을 주도(임금-주도 성장)
- 이윤주도 성장: 이윤몫의 증가는 소비를 줄이지만, 대신 투자수요를 확대함. 즉 투자수요의 확대가 소비의 감소를 초과(dominate)해야 함.
- 장기에서 이러한 케인스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정상조건으로서 과잉설비를 기업이 승인해야 한다고 보고 있음. 자신들을 stagnationist or underconsumptionist라 부름. 이러한 과잉설비의 경향은 임금주도 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봄. 노조활동가들의 목표와 공명하는 측면이 있음.

# Onaran, Stockhammer and Grafi(2010),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 각각 그리니치 대, 킹스턴대, 오스트리아 금융시장국에 소속된 경제학자들
- 금융화 및 신자유주의 하의 금리생활자에 대한 소득 증가(또는 상위계층에 대한 소득증가)가 유효수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 있음.
- 칼레키적 모형을 통한 수학(이론), 실증통계(경험)적 연구를 수행
- 결론: 신자유주의 시절에 일어난 소득분배(즉 금융적 소득자에 우호적인 소득 재분배)는 소비를 위축, 이들에 대한 이윤재분배는 소비를 증가, 자산효과(하우징 버블)은 소비 증가, 하지만 결국 이러한 효과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수요에 대해 중립적 효과를 가짐.
= 자산효과를 제외하면 소비 및 투자에 대한 효과는 네거티브
= 낮은 실물투자를 유지하기 위한 하우징 버블을 통한 부채의 확대, 그리고 이에 기반한 수요의 확대는 위험하고 취약한 경제로 이끔(이것이 금융화의 임금소득자에 대한 효과)
= 따라서 네거티브 자산효과가 발생하게 되고, 이것이 금융화 전반적 결과로 이어짐. 2007-9년의 위기 원인. 상위소득자의 소득을 제한하고, 임금몫을 증대시키는 것이 성장의 건전하고 실질적인 기초가 될 수 있음=>임금주도 성장





# 불평등의 증가(임금구매력 또는 임금몫의 하락)가 빚을 늘렸나?
1) 차입의 대부분은 상위계층
2) 차입을 늘린 건 자산효과 때문(누적적 효과)

# 중앙은행은 이를 조장했나?
1) 2001년 경기후퇴 이후 FRB는 위기 이전으로 이자율을 조정했음
2) 문제는 1) FFR의 변화가 시장에 반영되지 않음(신자유주의적 세계화) 2) 파생상품의 탄생으로 이자율정책의 효과가 감소

5. 임금주도형 성장은 가능한가?

1) 경제이론 내에 케인스주의적 장기전략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고 있음.
2) Class configuration의 문제
3) 관리자적인 사민주의 전략
4) 단위비용 상승 및 인플레이션의 문제, 그리고 내생화폐(금융적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를 그 자체로 현실적이라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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