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기본소득’ 발의...진보진영 내에서도 논란

소비세 인상하고 국민연금 빼서 재원마련...신자유주의 정책 변질 우려

스위스에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한 국민 발의 법안이 의회에 제출된 가운데, 기본소득 재원을 소비세 인상과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비에서 마련하기로 제안해 논란이 되고 있다.

4일 노이에취리히차이퉁(Neue Zuericher Zeitung) 등 스위스 언론에 따르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한 스위스 시민단체는 4일(현지 시간) 약 1년 반 만에 126,000명의 서명을 모아, 연방의회에 제출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한 국민발의안은 이후 연방정부와 의회 검토를 거쳐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성사될 경우, 스위스는 2019년 초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세계 첫 번째 나라가 된다.

[출처: http://www.nzz.ch/ 화면캡처]

발의안에는 기존 헌법에 “110a”조항을 신설, “△연방 정부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도입한다 △기본소득은 전 국민에 인간적인 현존과 공적 삶에 대한 참여를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기본소득 재원과 규모는 법률로 규정한다”고 기술돼 있다.

이에 따라 기본 소득 액수는 스위스 의회가 규정해야 한다. 발의 단체는 성인에 대해서는 2500 프랑(약 297만원), 어린이에 대해서는 성인의 4분의 1 수준인 625 프랑(약 74만원)을 제안했다. 이 비용 총액은 연간 스위스 국내 총생산(GDP)의 약 3분의 1인 2000억 프랑에 달한다.

재정 조달 방안도 스위스 의회가 마련해야 한다. 이에 대해 발의 단체는 전체 2000억 프랑 중 스위스 국민연금(AHV)과 같은 사회보장비에서 약 700억 프랑, 나머지 1300억 프랑은 소비세(부가가치세) 인상 등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견해다.

국민발의안은 다양한 이들의 참여로 성사됐다. “기본소득세대”라는 시민단체 주도 아래 대표적으로 전 연방의회 대변인 오스발트 지크(Oswald Sigg, 사민당), 글로벌 금융기업으로 스위스에 본사를 둔 UBS 전 수석경제학자 클라우스 벨러쇼프(Klaus Wellershoff), 대중가수 취리히 랩퍼 프란치스카 슐래퍼(Franziska Schlaepfer)도 참여했다.

발의단체는 과잉생산, 강요된 노동, 소득불평등 등의 문제를 낳는 현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며 환영하지만 기본소득 규모, 재원, 사회보장 방안에 대한 이견으로 스위스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논란이 거세다.

우선 기본소득 발의자들은 임금과 사회보장을 둘러싼 계급 대립과 현실의 정치적 세력관계를 무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이들은 현재의 임금, 사회보장 제도는 유지되며 기본소득이 이를 보완한다고 본다. 또 기본소득 이상의 소득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며 기피되는 저임금 노동은 보상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실 정치세력관계 외면...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변용 우려

그러나, 스위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발행처인 주간지 WOZ 편집위원 베티나 뒤트기히(Bettina Dyttrich)는 3일, 오늘날의 정치적 권력관계에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임금과 사회복지에 대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과연 비사회적인 세금인 소비세(부가가치세) 인상에 대해서는 또 어떠할 것인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비세는 대표적인 간접세로 직접세에 비해 낮은 소득계층의 조세부담이 더 높다.

또한, 사회복지 제공과 관련해서 직접적인 소득지원에 대해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기본소득과 같은 직접적인 소득지원은 국가의 공공서비스를 축소시키고 민간자본에 대한 지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보육비를 직접 지원할 경우 지원비가 보육에 지출된다는 보장이 없고, 지출되더라도 민간 어린이집을 이용하게 돼 여기에 지원해 주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나아가 정부예산이 소득에 지출돼 공공서비스 기반은 오히려 더 취약해진다.

한편, 기본소득을 통해 보상받지 못하는 돌봄노동도 사회적 논의에서 배제된다는 지적이다.

뒤트기히는 기본소득을 찬성하는 이들은 기본소득이 사람들에게 가족을 돌볼 수 있는 보다 많은 시간을 줄 것이라고 바라지만 서유럽과 비교해 스위스는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복지가 낮은 상황에서 여성들의 현실을 감추는 위험을 낳는다고 제기한다. 기본소득 발의자들은 돌봄노동은 자유의지에 의한 노동 중 하나라고 보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며 돌봄노동은 승마나 교회합창단과 같은 취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기본소득은 결국 임금투쟁 외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질문은 주제화하지 않는 전통적인 노동조합 등에 신물 난 이들의 요구를 밝혀 새로운 사회를 위한 토론 기회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인 경제 원리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변혁을 위한 올바른 전략인지에 대한 질문은 남아 있다며, 과연 기본소득이 “해방적인 관점일까”라고 되묻는다.

또한, 기본소득 발의 운동 시작 당시인 지난해 4월 파울 레히슈타이너 스위스 노총(SGB) 의장도 <타게스안자이거>에서, “모두가 인간적인 현존을 위해 충분한 돈을 가져야 한다는 목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대한 가치 있는 대답은 최저임금과 강한 사회보장이다”라고 답해 기본소득에 대한 이견을 드러낸 바 있다.

SGB 경제정책을 주관하는 다니엘 람파르트(Daniel Lampart)는 기본소득이 국민연금 등 재원 사용에 의한 기존 사회보장 약화로 이어져 결국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