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가 된 ‘경제민주화론’과 멈춰버린 ‘재벌의 사회화’

[주례토론회] 재벌개혁, 재벌타협? “재벌몰수가 정답”

[편집자주-토론문]

박근혜 식 경제민주화의 실종

지난 10월 7일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국회연설을 통해, 경제민주화를 위한 입법에 대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경제활성화에 매진하자고 주장했다. 이미 예상된 일어여서 크게 놀라지 않을 일이지만, 이렇게 헌신짝처럼 갖다 쓰고 버리는 걸 보면 우리사회에서 재벌들이 차지하고 있는 힘이 막강함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결국 소리만 요란했던 경제민주화론은 재벌들의 일부 불공정행위를 규제하는 것에 머물렀고, 그나마 그마저도 국회입법과정에서 누더기가 된 채 종료되었다.

그런데 어느 설문기관에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5%가 경제민주화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55%가 그 입법내용을 잘 모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제적 불평등을 느끼는 국민들이 대다수이지만, ‘시장질서’를 바로 잡는 수준의 경제민주화로는 국민들을 전혀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돈의 논리에 충실한 ‘시장질서’에 의해 여전히 불평등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지난 대선 시기 중요한 화두였던 경제민주화 논쟁에 대해서 그 근본부터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다수 민중들은 경제적 불평등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가운데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례토론회에서 경제민주화의 방향성을 다시 재론해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경제민주주의론’의 역사와 2012년 경제민주화 논쟁

‘경제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1920년대 독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 노동조합 총동맹 대회에서 ‘경제민주주의’라는 책자가 제출되는데, 여기에 힐퍼딩과 같은 사민당의 이론가들이 참여했다. 이후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전략적 지향점으로 공식화되었다. 이들이 말한 ‘경제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엔 독점자본에 대해서 국가개입이 한층 더 강화되는 20세기 초의 정세가 놓여 있다. 주기적 공황에 따른 독점의 경향과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국가의 개입과 통제가 높아지던 시기에,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을 우회하여 국가 통제를 통해 독점자본을 장악할 수 있다는 논리가 제출된 것이다. 혁명을 통한 소유관계의 사회화보다는 통제의 사회화로 중심을 이동한 것이다.

이를 두고 수정주의적 입장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점은 이들이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경향을 포착하고 현실사회주의를 만들기 위한 나름의 권력대안을 구상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공황 시기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도입하는 등, 실제 집권 이후 사민당이 보여준 태도는 이보다 훨씬 후퇴한 정책들이었다. 전략과 실천의 괴리 속에서 우경화는 계속되었고, 결국 50년대에는 사회화 강령마저 폐기된다. 그리고 80-90년대 제3의 노선이 받아들여지면서 공식노선에 완전히 밀려나게 된다. 그런데 반세기 넘게 역사 속에 존재했던 ‘경제민주주의’의 전략적 노선은 기획했던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케인스주의보다 현실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고 독일 비롯한 유럽 각국에 영미식 자본주의와 다른 성격의 코포라티즘 체제를 구축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작년 경제민주화 논쟁이 촉발된 계기가 헌법 119조 2항에 실려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에 대한 진보적 해석과 이에 대한 우파들의 공격과 반론이었음을 모두 잘 알고 있다. 당시 전경련 산하 경제연구소들이 우파적 이념에 근거하여 이 논쟁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박근혜 대선주자가 경제민주화 구호를 받아들임에 따라 결과적으로 대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논쟁의 축이었던 우리나라 경제민주화 헌법조항이 독일 헌법을 참조해 만들어진 점에 비춰본다면, 1920년대 독일에서 제출된 ‘경제민주주의론’의 역사적 의미를 함께 고려해야만 지금의 경제민주화 논쟁의 초점을 올바로 맞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건 바로 앞서 지적한 바대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진화했던 20세기 초의 정세이다. 이후 더욱 체계화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반독점법 50-100년의 역사 속에서도 독점화 경향을 계속 심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민주화 논쟁에서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한 통제의 사회화 전략은 빼놓을 수 없는 논쟁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진보진영 내의 경제민주화 논쟁을 촉발시켰던 <프레시안>의 지면제목이 ‘한국사회 성격논쟁’이었던 점은 경제민주화 논쟁의 방향타를 짚은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경제민주화 논쟁은 귤이 회수를 건너니 탱자가 되더라는 식으로 ‘경제민주주의’의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실제 지면에서 주된 논쟁을 벌었던 당사자들은 각각 김상조 교수와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근거한 갑론을박에 머물렀다. 한국사회 성격을 심도 있게 분석하면서 ‘경제민주주의’의 의의를 되살리기보다는 재벌개혁으로 모든 쟁점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다. 결국 감정적인 논쟁으로 격화되었고, 재벌개혁문제에 대해서 강경한 자세를 취했던 김상조 교수에 대해 ‘재벌타협론’을 제기했던 장하준 교수가 뒤로 물러선 듯 모양새를 취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

이런 감정적 논쟁의 골은 10년 전 ‘참여연대’와 ‘대안연대’ 사이의 논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당시 소액주주운동의 대부이자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운영위원장이었던 장하성 교수가 ‘대안연대’를 민족자본론을 앞세우는 재벌 옹호 세력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대안연대’ 정책위원 이었던 정승일 박사는 장하성 그룹을 구한 말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에 비유하면서 수구세력 타도를 위해 일본 사무라이와 손잡는 걸 마다하지 않는 세력이라고 맞받아쳤다. 또한 ‘대안연대’ 정책위원 이었던 이찬근 교수도 소액주주운동은 미국 월스트리트와 암묵적 연대 등을 통해 국부 유출을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고, 이에 대해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이었던 김상조 교수는 독점자본은 모두 같으며 국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논쟁이 다시 작년 대선을 앞두고 격돌하게 된 것이다. 논쟁의 초점은 주적으로 누굴 삼을지, 그리고 누구를 이용하여 어떻게 주적을 쓰러뜨릴 것인가로 정리할 수 있다. 김상조-장하성 그룹은 주적은 삼성과 같은 재벌이며 기형적인 독점적 지배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주주자본주의의 기본원칙에 기반한 ‘재벌개혁론’을 주장했다. 반면 장하준-정승일 그룹은 주적은 론스타와 같은 초국적 금융자본이고, 오히려 복지국가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선 국내재벌(독점자본)의 안정적인 지배체제를 활용해야 한다는 ‘재벌타협-복지국가론’을 주장했다.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김상조의 ‘재벌개혁론’

그러면 이들의 주장을 하나씩 짚어보자. 먼저 김상조 교수가 최근에 쓴 ‘종횡무진 한국경제’에 이 그룹의 기본생각과 재벌개혁의 방향성이 정리되어 있다. 김상조 교수가 지적한 구체적인 재벌들의 행태와 불평등한 한국사회 경제구조에 대해서 이이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재벌개혁의 총론이라 할 수 있는 역사규정과 정치적 방향성이다. 김상조 교수는 자본주의 역사발전 단계를 중상주의->고전적 자유주의->포드주의->신자유주의 네 단계로 구분한다. 본인은 스스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다고 밝히면서 시시비비를 피하자고 하는데, 이러한 발전단계는 이론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포드주의를 주장했던 조절이론의 발전단계 구분과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을 한국사회에 접목시키면서 두 단계로 구분하는데, 중상주의->신자유주의로 압축 성장을 했다는 논리이다. 게다가 중상주의 시기를 지배했던 정권으로 박정희 정권을 지목하는데 상식적으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역사발전 단계에 근거하여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선 중간에 생략된 구자유주의적 과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과잉과 구자유주의 결핍”이라는 현실에 대해서 그 해결책은 정치적, 경제적, 관료적 기득권세력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이념을 지반으로 하는 세력과의 연대로 확대된다. 초국적 자본과 이해를 같이 했던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나름 정치적 대안을 내세운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역사인식의 오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진화한 자본주의의 역사적 토대를 상대화시키는 주관주의적 대응일 뿐이다. 만약 재벌(독점자본)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구자유주의적 과제의 달성이라면, 차라리 재벌해체 투쟁을 통해 구자유주의적 과제보다 훨씬 더 나아간 재벌의 사회화를 이야기하는 건 왜 안 되는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재벌을 해체할 정도의 혁명적 힘을 가졌는데 구자유주의적 과제 달성에 머무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현실적 실현 경로로서 주주자본주의의 원리, 즉 ‘1원-1표’에 입각하여 재벌의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것으로 자신의 당면과제를 한정시킨다. 그런데 해체된 재벌이 중소기업으로 쪼개진다고 해서 구자유주의적 과제가 달성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해체된 중소기업을 다시 경제민주주의 이념에 근거해 민주적으로 개조해 나갈 힘이 우리에게 있다면, 현재 재벌을 해체하고 사회화시키는 전략도 충분히 취할 수 있다. 우회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1원-1표’ 논리에 충실한 주주자본주의적 개혁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플랜이 아니며, 설령 집권하더라도 신자유주의 극복은커녕 개혁을 유지할 수조차 없는 전략이다. 오로지 19세기 자본주의로 되돌아가 자유방임적 ‘착취의 정상화’를 이루는 퇴행일 뿐이다.

이러한 역사적 논리의 오류는 독일식 신자유주의(질서자본주의)와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신자유주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워싱턴 컨센서스)인데, 그와 성격이 다른 독일식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원칙과 질서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 모두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 앞에서 작아지는 장하준의 ‘재벌타협-복지국가론’

다음으로 장하준 교수가 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통해 이들 그룹의 대안을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대안연대’의 논리를 기본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최근 급상승한 복지정책에 대한 대중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재벌타협-복지국가론’이다.

이들이 자본주의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등장한 재벌(독점자본)의 물질적 토대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앞서 지적한 김상조 교수의 그룹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이들은 재벌을 작은 기업으로 해체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장하준 교수는 김상조 교수의 ‘1원-1표’주의가 아닌 ‘1인-1표’주의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경제민주화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는다. 그래서 재벌해체가 한국이 ‘1원-1표’주의에 의해 외국자본에게 점령당할 수 있다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장 주시해야 할 주적을 초국적 금융자본이라 여긴다.

그런 반면 국내재벌에 대해선 소유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들과의 타협을 모색한다. 가령 상속세를 현실화해 재벌 재산 상속의 합법적 길을 열어주고 대신 복지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세금을 이들로부터 걷어내자고 한다. 또한 국가적인 산업정책과 금융정책에 재벌이 적극 호응하길 요구한다. 마치 80년대 이전에 있었던 스웨덴의 구 복지모델처럼 재벌과의 타협 체제를 만들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재벌들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속문제가 시간을 다투는 일도 아닌데 먼저 머리를 굽히고 들어갈 재벌은 없다. 또한 해외 현지공장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한 글로벌 기업인 삼성과 현대가 국내 산업정책에 묶일 유인이 크지 않다. 재벌을 움직이기 위해선 타협책 이상의 힘과 대안이 필요하다. 재벌 입장에선 김상조 교수의 입장처럼 재벌들의 지배구조를 뜯어고치겠다고 덤비는 이들이 두렵지, 타협책을 제시하는 그룹에 대해선 웃고 넘길 뿐이다.

장하준 교수가 롤 모델로 강조하는 스웨덴의 구 복지체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보듯, 당시 집권한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강한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연대임금-고조세-노동력 재생산’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더 밀릴 것을 두려워한 재벌들이 스스로 찾아와 타협책을 제안한 것인데, 대신 재벌의 소유 집중 문제는 비껴갔다. 이런 타협체제도 90년대 경제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로 우경화 된 사민당과 우파들의 공격에 의해 해체되었고, 지금은 형식적인 틀만 남아있다.

그래서 재벌을 사회화하는 전략적 방향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독점자본에 대한 소유와 통제의 사회화를 이루기 위해 경제민주주의가 처음 제기되었던 역사적 맥락을 되돌아보면 더욱 그러하다. 생산을 장악하고 있는 재벌과 승부를 보기 위해선 분배에 집중하는 복지국가론에 머물면 곤란하다. 재벌의 소유 집중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대로 ‘1인-1표’주의가 절실한 영역은 바로 재벌(독점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불평등한 경제부문이며, 여기에 ‘1인-1표’주의가 관철되기 위해선 국유화를 통한 재벌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장하준 교수도 재벌의 국영화를 언급하긴 하지만, 그것은 제한된 조건에서만 다룰 뿐이다. 가령 외국자본에 인수합병을 막기 위해서라든가, 부정과 폐해가 많은 재벌에 대해서 국영화를 고육지책으로 제기한다. 은행의 국영화 주장도 마찬가지인데, ‘1인-1표’주의에 입각한 경제민주화 실현이라기보다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재벌체제를 국가의 산업정책에 따라 금융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식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노동운동 진영에서 이들의 경제민주화 논쟁을 비판하면서 “노동이 배제되어 있는 경제민주화는 허구”라고 지적한 것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점자본과 노동자간의 불평등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 경제민주주의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진영의 경제민주화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노동기본권의 보장과 불안정 노동 철폐, 2>기업과 지자체, 중앙정부 수준에서의 노동자들의 의사결정 참여 보장, 3>완전고용과 소득분배, 복지증대 그리고 사회화와 사회공공성 강화라는 경제정책. 첫 번째를 수세적 경제민주화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공세적 경제민주화로 나눠볼 수 있는데, 이것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둘러싸고 생존권 투쟁인가 사회화 투쟁인가라는 방식으로 제기된 쟁점과 관련이 있다.(발제문 참조)

경제위기 탈출을 위한 사회화 전략의 필요성과 국가권력의 민주화

마지막으로 경제민주화가 세계 경제위기로부터 탈출과 관련한 쟁점이다. 김상조 교수나 장하준 교수의 주장이 이론가들의 논쟁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대선을 경유하면서 경제위기 극복의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모든 정치세력들이 여기에 달려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단순한 금융거품의 위기만이 아니다. 위기 발생 후 5년이 지난 지금 주기적 경기순환의 상승국면에서조차도 실물부문의 회복세는 뚜렷하진 못하다. 오히려 그동안 부채경제의 금융거품에 의해 가려져 있던 채무 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드러나면서 모든 각국들이 부채문제의 해법을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 중 유럽채무위기는 경제위기의 버팀목이었던 국가마저도 채무위기에서 자유로울 없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렇다보니 우리나라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재벌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는 것이다. 그것이 한 쪽에선 중소기업을 키우고 재벌을 해체하자는 ‘재벌개혁론’으로 제기되는 것이고, 다른 한 쪽에선 재벌로부터 복지재원을 충당하는 ‘재벌타협-복지국가론’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비판했듯, 19세기 구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위기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길이다. 또한 국가채무문제 해법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채,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스웨덴 구 복지모델이 왜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었는가에 대해 답을 회피해선 곤란하다. 그리고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의 제한된 사회화만으론 70년대 겪었던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되기엔 부족하다.

역사적인 경제민주주의는 사회화와 자본통제의 확대 강화를 전략적 대안으로 제출했던 것으로서 경제위기 대안이기도 하다. 그것은 수정주의자들의 관점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위기경향에 대한 고찰 하에서 제출된 대안이다. ‘경제민주주의’는 낮은 수준의 사회화로부터 높은 수준의 사회화까지 비교적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수록 위기극복의 길은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화의 전략엔 국가권력의 민주화가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대공황을 거치면서 이념과 실천에서 괴리를 보인 채 사멸한 ‘경제민주주의’의 역사를 볼 때, 현재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통제의 사회화를 넘어 소유의 사회화를 직접적으로 제기하는 대안이 요구된다. 즉 국유화를 통한 사회변혁이다.

이것은 현실 사회주의국가가 실패했던 지난 과거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데, 국유화 자체가 사회변혁으로 가는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으로서 국가를 변화시켜 나갈 장기적 계획과 대중의 역동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가 보여줬던 관료화되고 억압적인 국가권력의 모습이 국가권력의 민주화가 쉽지 않은 과제임을 상기시켜준다. 그래서 한편에선 협동조합처럼 제3섹터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자는 운동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경쟁해야 하는 협동조합은 생산성 경쟁과 생산의 무정부성이라는 곤란함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무정부성을 통제할 중앙단위의 연합체도 관료주의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데, 바로 그런 중앙단위가 현실에서 우리가 보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가령 삼성과 같은 거대 자본을 누가 어떻게 협동조합으로 만들 수 있는지 전혀 상상하기 힘들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지난 대선 때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그런 주장을 했다) 삼성을 1천여 개의 중소기업 또는 그런 형태의 협동조합으로 쪼개자는 것은 자본주의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퇴행적 주장일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 주장이기도 하다. 재벌과 같은 독점체의 해체는 분할을 통한 자유시장경쟁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독점자본의 국유화외엔 다른 현실적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은 대부분 소규모 생산자 그룹 형태로 존재하거나 자본주의적 시장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존하는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의 유지와 판로 개척 문제에서 항상 요구되는 것이 정부나 지자체의 도움(하청 및 직접구매, 예산지원)이다.

결국 다시 국가권력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사실 작년에 전 국민적 관심 사안이 되었던 경제민주화 논쟁도 대선이라는 커다란 정치적 국면이 있었기 때문에 격화된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모든 그룹들은 자신의 주장이 실현되기 위해선 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재벌을 개혁시키기 위해서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도 국가권력의 문제는 우회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 국가는 독점자본과 결합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국가권력의 문제와 독점자본 해체의 문제는 떨어뜨릴 수 없는 하나의 과제라는 점을. 그렇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장악해 놓고 중소자본가 만들기로 귀결되거나, 재벌과 타협하는 것에 머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바로 독점자본의 국유화로 나아가는 것이 수순인 것이다.

이윤창출의 공간을 찾지 못해 금융시장에서만 맴도는 재벌의 어마어마한 돈들이 문제라면, 그들에게 돈 좀 풀라고 읍소할 게 아니라 바로 국가가 인수해서 쓰면 된다.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닌 사회적 투자를 확대시키기 위해서 국가가 돈을 쓸 곳은 널려 있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에도 그런 방법이 사용된다. 법인세가 그런 것들 중에서 낮은 수준의 방식이다. 재벌들은 이것마저도 깎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제 그 수준과 방법을 높여보자. 사회화는 현실사회주의의 역사 속에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산물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이윤지배체제 역사에서 항상 드러났던 모순이 해결되었던 방식이다. 2008년 경제위기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신자유주의가 작동불능상태에 빠졌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질적인 변화를 향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의 터널은 매우 길어지고 있다. 경제민주화 논쟁에 우리가 주목하고 다시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시대적 정세가 생존권 투쟁을 넘어 구조변혁의 시급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토론문 끝]

아래는 발제문 전문이다.


한국의 경제민주화, 정말 진보적인가?


별반 차이가 없는 진보와 보수의 경제민주화

신자유주의와 재벌지배 그리고 금융위기와 양극화를 배경으로 경제민주화는 한국사회 최대의 이슈가 되었다. 지난 대선에서도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이른바 빅3 후보가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경제민주화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다. 경제민주화 논쟁이 이 이슈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빅3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사실 경제민주화 논쟁의 일정한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각 선거 캠프에는 김종인, 이정우, 장하성 등 논쟁의 당사자들이 경제정책의 좌장으로서 참여해서 관련 공약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벌개혁과 규제를 기조로 하는 세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들여다보면, 그 차이라는 것은 사소하고 부차적이며 경제민주화의 기본 구상은 동일하였다. 총액출자제한 부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근절, 골목상권 보호 등으로 요약되는 경제민주화 공약만을 두고 본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별반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대선이 끝난 후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함께 그나마 경제민주화 동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대선공약 자체가 빅3중 가장 미약한 내용의 경제민주화를 담고 있었던 데다가 대선공약을 실행할 국정과제에서 경제민주화란 용어는 사라졌고, 경제민주화 공약은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의 확립’속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사실 박근혜의 경제민주화란 대선공약 때부터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실현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재벌지배체제나 기업지배구조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체제와 구조 하에서 재벌의 불공정행위와 부당행위를 규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실 국정과제에 나타난 변화란 형식적인 것이었고 내용상의 변화라 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강조점이 이동한 것은 분명했다.

집권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그 변화는 보다 뚜렷해졌는데, 불공정행위와 부당행위 그리고 금산분리와 관련한 몇 개 법안의 국회 통과와 함께 경제민주화는 일단락된 것 같고, 국정운영과 경제정책의 중심은 경제활성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이를 위한 규제완화로 이동하였다. 노령기초연금 등 복지공약의 수정 또는 폐기도 같은 맥락의 변화다. 민주통합당 등 야권에서는 박 정부의 경제민주화 공약 후퇴와 번복이라며 정치공세를 펴고 있지만, 그렇다고 야권과 이른바 진보진영의 경제민주화가 박 정부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문재인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아마 공약 후퇴와 수정 문제는 마찬가지로 불거져 나왔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되돌아보면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진보파와 보수파의 경제민주화가 대동소이하다? 이는 그 자체로 무언가 분명 잘못된 것이고 수상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보수파와 진보파의 경제민주화가 수렴하고 있다는 것은 한편에서 보수파와 진보파의 경제정책이 동일한 신자유주의 기반위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경제민주화 논쟁이 주로 신자유주의 재벌개혁을 둘러싸고 전개된 결과이기도 하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파에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곤 하였고 논란도 여전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를 편협하게 영미권 신자유주의로 좁게 해석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독일판 신자유주의인 사회적 시장경제를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유형으로 포착한다면, 진보파의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보수-진보간 경제민주화 논쟁은 본질적으로 영미형 신자유주의와 독일형 신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두 개의 유형간의 논쟁이었고, 실제로는 논자에 따라 두 개의 유형이 혼재되어 전개됨으로써 전선이 명료하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경제민주화 논쟁은 결코 신자유주의를 넘어가는 진보적인 전망을 갖는 것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한국경제의 성격과 경제민주화 논쟁

역사적으로 경제민주주의는 20세기 이래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단계이행을 하고 국가의 경제개입이 점차 확대되는 역사적 변화 속에서 사민주의의 새로운 이행전략으로서 이미 1920년대에 제출되었다. 카르텔에 의한 생산과 시장의 조직 및 국가부문의 확대라는 조직자본주의의 전망 위에서 사민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우회로를 경제민주주의에서 찾았다. 독점자본의 전면적 사회화 요구를 사실상 접었지만, 그 대신 독점자본과 국가에 대한 통제의 확대 속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길이 열릴 것으로 전망하였다. 독점기업과 국가부문에서 노동자들의 공동결정, 주요산업과 은행의 사회화, 국가계획과 경제조절 등이 경제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이었다. 이런 점에서 경제민주화의 본질은 독점과 국가로 조직되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 이른바 비소유권에 입각한, 대자산계급의 소유권에 대한 통제에 있었다.

경제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 전망은 이후 사민주의의 일층의 우향화와도 결합하여 오류임이 드러났지만, 경제민주주의론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과 독점적 발전단계를 포착한 위에서 구상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즉 경제민주주의의 과제는 독점화로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을 역전시켜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복원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점화하는 경제를 노동자들이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과제 설정은 자본주의 발전단계와 그 성격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전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경제민주화 논쟁도 한국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그 성격에 대한 이론적 토대위에서 전개되지 않으면 경제민주화의 길을 올바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민주화 논쟁은 앞서 말한 바처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비롯한 부르주아 경제학의 토대 위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그 성격을 논할 수 있는 게 조금도 없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역사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초역사적인 시장경제를 관념적으로 상정하고 있어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이행이란 문제설정은 이 경제학과 전혀 어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민주화 논쟁을 확산시키는데 촉매역할을 했던 프레시안의 기획 ‘한국경제 성격논쟁’에서도 한국경제의 발전단계와 성격에 대한 논쟁은 부재하였다.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재벌개혁론 대 복지국가론’으로 진행된 이 논쟁은 한국경제 성격논쟁이라기보다는 재벌개혁 논쟁이었고, 이것이 경제민주화 논쟁으로 둔갑되었다. 이 논쟁에 참여한 논자들에서도 경제민주주의의 역사적, 이론사적 연관이나 이해를 읽을 수 없다. 그건 이들의 케인스주의 또는 제도주의 경제학에서도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이행을 논할 이론적 토대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적 결함의 결과로 한국에서 경제민주화 논쟁은 시장주의 재벌개혁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독점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독점과 국가의 결탁을 통한 독점이윤의 획득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와, 독점과 국가의 조직화에 입각한 계획과 조절의 확대와 통제라는 역사적인 경제민주주의론의 문제제기와 달리 한국의 경제민주화는 주로 소유의 분산과 시장경쟁의 강화를 통한 재벌지배체제의 해체 또는 약화를 지향했던 것이다. 영미권 신자유주의든 독일판 신자유주의든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시장경쟁을 통한 재벌의 해체 또는 규율 강화였고, 주주민주주의의 실현이었으며, 국가개입이란 주주자본주의와 시장경쟁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개입이었다. 그것은 시장을 통제하고 조직해서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를 강화한다는 경제민주주의론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이론적 근거 없는 김상조의 한국경제 발전단계론

프레시안 재벌개혁 논쟁의 한 축인 김상조는 보기 드물게도 한국경제의 발전단계론에 입각해서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제기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경제민주화론은 체계적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의 이론적 문제들을 다 드러내고 있다. 먼저 김상조(<종횡무진 한국경제>)는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대해 “중상주의-->고전적 자유주의-->포드주의-->신자유주의”라는 도식을 제시하고, 한국에서는 압축적 성장을 통해 자유주의와 포드주의를 건너뛰어서 “중상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로” 단계발전을 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과잉과 구자유주의의 결핍”이라고 하면서 이로부터 “신자유주의의 극복과 구자유주의의 확립”이라는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끌어낸다.

신자유주의의 극복과 구자유주의의 확립이란 건 결국 정부규제를 통한 시장경쟁질서의 확립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처럼 이런 방향의 경제민주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경향에 역행하는 퇴행적인 경제민주화다. 김상조는 알다시피 전에는 케인스주의자였고, 지금은 제도주의 경제학을 추구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에 의해서도 적지 않게 오염된 경제학자다. 위와 같은 발전단계는 케인스주의와도, 제도주의와도, 또 신자유주의와도 관련 없는 것이어서 무슨 근거로 이런 발전단계를 제시하는지 알 수가 없다. 포드주의 단계란 조절이론에서 말하는 역사단계고, 조절이론에서도 이렇게 자본주의 단계구분을 하지는 않는다. 김상조의 발전단계론은 말하자면 '잡탕‘단계론인 것이다.

한국경제의 발전단계를 중상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로 건너뛰었다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도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개발독재의 한국경제를 중상주의로 규정하는 것이어서 이 시기의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의 한국경제는 자본주의 하에서도 고도로 발전된 독점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였음에도 말이다. 설령 중상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로 단계를 건너뛰었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신자유주의의 극복과 구자유주의의 확립이라는 경제민주화의 과제가 나오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서 어디로 가야 하느냐, 어디로 갈 수 있느냐, 신자유주의 다음의 발전단계가 무엇이냐의 문제는 임의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법칙에 의해 기본적으로 규정된다. 경제정책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고, 진보적인 경제정책, 진보적인 경제민주화도 이 경향과 단계에 조응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자유주의 시장경쟁질서의 확립은 시대착오적 관념이며,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민주적 통제가 새로운 역사적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하준의 반쪽짜리 진보적 경제민주화

한국의 경제민주화 논쟁의 주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입각해 있고, 이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케인스주의나 제도주의 경제학에 의거하고 있지만, 이들도 대개 신자유주의를 일정하게 공유한다. 이에 반해 신자유주의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고 신자유주의 비판에 주력하는 논자는 장하준 그룹뿐이다. 경제민주화 논쟁에서 이들의 기여는 무엇보다 재벌지배체제의 해체를 통한 시장주의 방식의 경제민주화를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재벌지배체제 하에서 국가를 통한 진보적인 경제민주화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신자유주의 비판과 진보성의 한계도 명확하다. 신자유주의 비판의 핵심은 금융자본과 국제투기자본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무절제한 독점이윤을 추구하는 재벌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에 있다. 그러나 장하준은 양자를 분리해서 전자만을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이해하고, 재벌을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타협의 대상으로 삼는다.

장하준이 1원1표주의의 신자유주의 경제민주화를 비판하고 1인1표주의라는 급진적인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면서도 재벌지배체제를 용인하자는 모순을 드러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1인1표주의 경제민주화는 그 전제로서 재벌과 대은행의 사회화, 국유화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1인1표주의 경제민주화는 결코 재벌과의 타협을 용인할 수 없다. 장하준은 1인1표주의를 재벌의 사회화 요구와 연관시키지 않고, 보편적 복지와 시민권에 연관시켜 재벌의 사회화 문제를 피해나간다. 1인1표주의 시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영역은 물론 국가부문이고, 따라서 진정한 경제민주화는 국가를 통한 보편적 복지의 실현에 있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지배적인 부문은 재벌이 지배하는 사적 부문이고 국가부문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부문이다. 따라서 1인1표주의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은 복지국가라기보다는 재벌의 사회화에 있다. 재벌과의 빅딜을 통해 재벌의 지배를 용인하면서 복지국가를 통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장하준의 주장은 경제민주화의 핵심을 피해가는 것이고, 그의 복지국가론은 반쪽짜리 경제민주화밖에 되지 못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한다면, 장하준도 재벌의 국영화를 언급하긴 하지만, 그 경우는 일종의 고육지책에 지나지 않고, 1인1표주의 경제민주화와 연관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외국자본의 인수합병을 막기 위해서는 차라리 재벌기업의 국영화가 낫다든가 또는 부정과 폐해가 많은 재벌에 대해서는 국영화를 해야 한다든가 하는 주장이다. 또한 은행의 국영화를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 목적은 1인1표주의 경제민주화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산업을 지배하는 재벌체제를 국가의 산업정책에 따라 금융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식할 뿐이다. 사회간접자본 같은 국가기간산업의 국영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노동진영, 수세적 경제민주화인가 공세적 경제민주화인가?

경제민주화 논쟁에 대한 노동진영의 비판 관점은 노동이 배제되어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경제민주주의가 (독점)자본과 노동간의 경제적 불평등 관계를 민주화하자는 전략이었던 만큼 이 비판은 정곡을 찌른다고 할 수 있다. 1원1표주의 재벌개혁론은 자본과 자본간의 민주주의 즉 주주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고 독점자본과 중소자본간의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는 독점으로 표현되는 사회화의 해체와 자본주의 경쟁질서를 요구하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소유권과 시장경쟁의 지배는 기껏해야 노동자 착취의 정상화를 지향할 것이다. 한국의 노동진영은 신자유주의적 성격의 재벌개혁론에 의해 상당정도 현혹되고 오염되기도 했지만, 노동관점의 경제민주화라는 문제제기에서 보는 바처럼 비판적 인식도 확산되었다. 반면 복지국가론은 재벌과 노동자 사이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재벌기업과 공장에서의 임노동관계의 민주화를 직접적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국가를 통한 사후적인 복지증대에 그 중점이 놓여있다. 그만큼 그 경제민주화는 포괄적이라기보다는 한정적이다.

노동진영이 현재 요구하는 경제민주화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노동기본권의 보장과 불안정노동 철폐, 즉 신자유주의 노동악법에 의한 노동기본권의 악화와 정리해고, 비정규직, 파견노동을 저지하는 문제다. 둘째는 기업과 지자체, 중앙정부 수준에서의 노동자들의 의사결정 참여를 보장하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완전고용과 소득분배, 복지증대 그리고 사회화와 사회공공성 강화라는 경제정책적 요구다. 이중 첫 번째 경제민주화는 초과착취와 비정규직을 철폐하자는 것, 말하자면 ‘노동자 착취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이전 시기에 확보했던 노동권과 정상적인(?) 착취조건을 사수하거나 다시 복구하겠다는 의미에서 수세적인 경제민주화라 부를 수 있다. 반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제민주화 요구는 역사적인 경제민주주의론에서 구상되고 발전되어왔던 요구들이다. 경제민주주의는 원래 독점자본주의 단계 하 사민주의 노동운동으로부터 제기된 사회화 요구였고, 소유의 사회화로부터 통제의 사회화로 중점이 이동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를 통한 자본주의적 소유와 시장경쟁에 대한 통제가 핵심 내용인데, 역사적으로 보면 혁명적 사회화의 포기와 그로부터의 퇴보지만, 신자유주의 정세 하에서는 공세적 경제민주화의 성격을 갖는다.

수세적 경제민주화와 공세적 경제민주화는 97년 외환위기 하 노동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둘러싸고 생존권 투쟁인가 사회화 투쟁인가라는 방식으로 제기된 쟁점과 관련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원래 케인스주의적 노자타협을 공격하고 임금, 고용,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통한 노동자의 초과착취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하에서 수세적 경제민주화로 노동착취의 정상화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결국 공세적 경제민주화를 통해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를 바꿔놓기 전에는 수세적 경제민주화도 가능하지 않다. 물론 공세적 경제민주화의 동력은 수세적 경제민주화로부터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수세적 경제민주화 요구는 공세적 경제민주화 요구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 문제는 경제민주화로 표현되는 경제정책이 과연 현재의 세계적인 경제위기 정세로부터 탈출하는 대안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경제위기의 궁극적 토대는 금융부문이 아니라 실물부문이고, 생산의 무정부성 및 생산과 소비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주기적 공황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서 비롯되는 구조위기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력 발전이 이윤지배체제 즉 사적 소유권 및 시장경쟁의 지배와 모순된다는 것의 표현이다. 따라서 위기에 대한 자본주의적 대응책은 사회화의 진전 속에서만 모색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사적 소유권과 시장경쟁의 지배를 강화하자는 신자유주의 재벌개혁론은 위기의 대안은커녕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키는 길이다. 복지국가론은 제한된 사회화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서 한계가 명백하다. 국가채무위기가 심화되는 현재의 조건에서 복지국가는 케인스주의의 구상을 넘어 광범위한 사회화와 결합되지 않는 한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국가개입과 임금 및 소득증대를 통해 경제성장의 동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소득주도 성장전략은 1970년대 케인스주의가 왜 파산했는가, 이 질문에 답을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적인 경제민주주의는 사회화와 통제의 확대와 강화를 전략적인 대안으로 제출한 만큼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다. 그것은 수정주의자들의 관점이긴 하지만 자본주의의 위기경향에 대한 과학적 고찰 하에서 제출된 대안이다. 경제민주주의는 낮은 수준의 사회화로부터 높은 수준의 사회화에 이르는 비교적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수록 위기극복의 길이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에서 보는 바와 같은 미증유로 심화된 자본주의의 위기를 감안하면, 오늘날의 위기극복책은 아마도 경제민주주의론의 사회화를 넘어가는, 즉 통제의 사회화를 넘어 소유의 사회화를 직접적으로 제기하는 대안을 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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