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 노동으로 인정해야 노동자를 살린다

[감시 통제, 벼랑 끝 감정노동자](11) 감정노동자의 현실, 감정노동자의 권리

사람의 감정마저 상품이 되는 시대다. 우리는 비행기를 탈 때 예쁜 여승무원의 환한 미소와 친절한 서비스를 기대한다. 콜센터에 전화하면 상담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친절히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콜센터 상담원의 상담이 기대에 어긋나면 욕을 하며 당장 윗사람을 바꾸라고 소리를 지른다. 심지어 승무원의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보고 있던 잡지를 돌돌 말아 승무원의 얼굴을 때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설령 고객이 잘못했더라도 고객에게 화를 낼 수 없다. 뺨을 맞아도 욕설을 들어도 환한 미소와 상냥한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듯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긴 채 직업상 다른 얼굴 표정과 몸짓을 하는 것, 이것이 ‘감정노동’이다. 감정노동을 계속 하다보면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우울한 감정적 부조화를 겪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스트레스를 잘 해소하지 못하면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에 걸리거나 자살을 할 수도 있다.


민주당 한명숙 의원은 지난 10월 14일 “백화점 직원, 콜센터 상담원, 승무원 등 감정노동자 2,259명을 대상으로 심리상태를 조사한 결과 무려 30%가 자살 충동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체 국민 평균 16%보다 2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28%는 경도 우울증을, 38%는 중증 또는 고도 우울증을 호소했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냉장고를 만들며 웃지 않는다고 해도 냉장고 판매량에는 영향이 없다. 그러나 식당 종업원이, 미용사가 친절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가게에 다시 가지 않는다.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고 이 분야 종사자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감정노동(자)도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가 냉장고를 더 많이 팔려고 할 때 연구소에서는 품질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한다. 공장에서는 설비를 현대화하고 노동자들에게 밤에도 주말에도 일을 시킨다. 서비스센터에서는 A/S 노동자들에게 근무복을 강매하고 친절 교육을 시킨다.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자본이 노동자들을 착취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서비스업, 특히 고객과 직접 대면하는 노동자들은 기업의 얼굴이 돼 아무런 보호구도 없이 고객들의 기업에 대한 불만을 모두 받아야 한다.

고객들은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며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폭언과 (성)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할 회사 역시 고객이 왕이라는 주문을 되풀이하며 노동자가 아닌 고객의 손을 들어준다. 오히려 고객을 핑계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평가한다.

회사는 고객을 가장한 감시단인 ‘미스터리 쇼퍼’를 통해 판매 노동자를, CCTV를 통해 보육교사를, 감청이나 녹취 후 청취 등을 통해 콜센터 상담원을 감시한다. 그리고 감시 결과와 고객 민원 등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평가한다. 평가 점수에 따라 임금이 달라지는 건 기본이고 벌로 봉사활동을 시키거나, 승진 기회를 잃거나, 연고가 없는 곳으로 발령 내기도 하고 징계를 하거나 심한 경우 해고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끽 소리 한 번 하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서비스부문 노동시장은 소수의 고소득 전문직과 다수의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로 양극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서비스노동은 특별한 기능이 요구되지 않는 비숙련 노동으로 치부된다. 자연히 임금은 낮고 근로조건은 나쁘고 노동조합은 없다. 회사에 밉보이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 비정규노동자는 회사에 대항할 수 없다.

감정노동은 노동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 한다. 그러나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김경희 교수는 “일부 학자들은 감정노동도 상징, 의례, 감정의 선택과 실천에서 복잡성과 난이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숙련노동이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회사는 감정노동에 ‘감성마케팅’ 같은 이름을 붙여 매출을 늘리는데만 관심있을 뿐 노동자들의 감정에는 관심 갖지 않는다. 고객은 왕 대접을 당연하게 여긴다. 노동자들마저도 강요된 친절, 웃음, 희생을 ‘노동’으로 인식 못 하는 반면 감시와 평가와 통제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근무조건으로 여긴다.

유럽은 미래사회 심리적 10대 위험 요인 중 하나로 감정노동을 꼽고 있다. 감정노동자들을 두고 감정을 파는 대신 죽음을 사고 있다고 말한다. 감정노동자들의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 스트레스, 우울증, 자살 충동 등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지난 7월 1일 법원이 처음으로 감정노동자의 우울증에 대해 회사의 책임을 인정해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감정노동을 정신노동, 육체노동과 같은 노동으로 인정하고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수준이다. 민주당 한명숙 의원이 지난 5월 24일 감정노동자 보호 내용을 담은 산업안전보건법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입법발의했지만 아직 환노위에 계류 중이다.

지난달 31일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발표한 ‘백화점 판매 분야 건강실태조사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백화점 판매 노동자들은 고객 스트레스 해결을 위한 기업 차원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과도한 업무량을 줄여야 한다(20.5%)’, ‘암행방식의 모니터링이 없어져야 한다(19.5%)’, ‘고객으로부터 폭력 인지 시 피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16.1%)’고 요구했다.

감정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는 서비스노동, 감정노동의 성격과 특징을 파악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과 서비스노동의 직무스트레스와 감정노동 문제 해소를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기업은 주기적으로 직무 스트레스를 조사하고 건강검진에 정신건강 항목을 넣어 감정노동과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건강문제를 조기에 진단해야 한다. 진단에 따라 스트레스가 높은 노동자들은 직무를 재배치하거나 순환해야 한다. 스트레스 해소 프로그램과 직원 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정신과적 치료를 필요로 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관련 프로그램과 연결해줘야 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연구위원은 “현재 회사에서 시행하는 친절교육을 단순히 친절 강화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업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객과의 관계, 갈등 상황에서의 대처 및 해결을 목적으로 감정적 부조화를 해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적정 인력 충원과 합리적인 교대제 설계 등으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열악한 노동환경이 개선돼야 한다. (기획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