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나라의 앨리스들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레프트21> 활동가들(과 나)의 이야기

팩스 한 장

사람 많은 지하철을 끔찍이 싫어하는 나는 그날도 두 시간쯤 일찍 사무실에 출근해 내 자리 컴퓨터부터 켰다. 밤새 온 쓸데없는 팩스들을 모아 분리수거함에 처넣으려는데 뭔가 좀 이상한 팩스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보험에 가입하라거나 대출을 받으라는 광고지가 아니라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이 맨 위에 적혀 있는 공문이었다. 언뜻 ‘레프트21’이라는 글자가 보여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선 채로 공문을 읽었다.

짤막한 내용이었다.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레프트21을 팔던 활동가들 중 한 명에게 지난 2010년에 내려진 바 있는 선고유예 판결이 11월 14일 대법원에서 기어이 확정되었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쏭달쏭한 이들을 위해 길게 풀어서 말해 보자면,

다들 알다시피 레프트21은 국제주의·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노동자연대를 내세우는 운동 단체 ‘노동자연대다함께(다함께)’가 만들어 판매하는 신문의 이름이다. 주로 길거리에서 팔지만 정식으로 등록된 어엿한 정기간행물이기도 하다. (신문 이름만 2009년 3월에 레프트21로 바뀌었을 뿐 다함께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거리에서 신문을 판매해 왔다.) 다함께 활동가들은 두 손으로 신문을 활짝 펼쳐 든 채 행인들 틈을 파고들어, 마치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가 아이의 사진이 박힌 유인물을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듯 절실한 몸짓과 목소리로 신문을 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레프트 21에 실리는 내용은 하나 같이 한국 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레프트21은 돈 많은 기업들의 광고를 싣지도 않고 정부의 후원도 받지 않으며 돈 많은 신문사들의 신문처럼 온 나라 집구석에 배달되지도 않는다. 레프트21을 사서 읽는 노동자들의 주머닛돈이 고스란히 신문을 찍는 데 들어가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문이 집회 현장이나 대학, 길거리에서 판매될 뿐이다. 즉 다함께 활동가들이 신문을 판다는 것은 다음 호 만들 비용을 스스로 벌어들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광고주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하고픈 말을 죄다 신문에 쏟아낼 수 있는 자유 또한 스스로 틀어쥔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10년 5월 7일, 강남역 부근에서 레프트21을 판매하던 다함께 활동가 6명이 경찰에게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2010년 5월이면 어떤 시절이었을까? 요즘 신나게 ‘종북 몰이’하느라 정신없는 박근혜 대통령처럼 MB가 ‘천안함 몰이’를 하며 “북한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안 믿는 놈들은 모두 빨갱이”라 부르짖던 시절이었고, 바깥 나라 윗대가리들이 모이는 ‘G20 정상회의’를 준비하느라 서울시가 노점상과 이주노동자 등등 ‘남부끄러운’ 것들을 길거리에서 싹싹 쓸어내던 시절이었다. 당시 레프트21의 1면에는 ‘안보 위기는 사기다’라는 문장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촬영_김종현

그때까지만 해도 다함께 활동가들은 신문을 팔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거리에 나가 새 신문이 나왔다고 알리고 제발 신문 좀 사서 읽으시라고 권하는 것이니 굳이 지역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2010년 5월 7일 그날 서초 경찰서에서 우르르 몰려나온 경찰들과 형사들이 6명을 ‘미신고 불법 집회’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대로 끌고 가 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촬영_김종현

  촬영_김종현

이틀 뒤 유치장에서 풀려난 6명을 국가는 잊지 않고 살뜰하게 챙겨 주었다. 두 달 뒤인 7월에, 백만 원씩 네 명에 2백만 원씩 두 명 이렇게 모두 8백만 원에 이르는 돈을 내라는 벌금 통지서가 날아든 것이다. 다함께 활동가 6명은 ‘<레프트21> 판매자 벌금형 철회와 언론 자유 수호를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를 꾸리고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 참여연대, 민언련 등등 수많은 단체들이 다함께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검찰은 다함께 활동가들을 위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을 들고 나와, 다함께 활동가들은 신문을 판 것이 아니라 ‘미신고 불법 집회’를 했다고 주장했다.

1심 판결은 2011년 7월에 나왔다. 6명 가운데 5명은 무죄, ‘주동자’로 찍힌 1명은 유죄에 선고유예 2년이 나왔다. (선고유예는 유죄 판결이지만 유예 기간이 지나면 더는 유죄가 아니게 된다.) 검찰은 동의할 수 없다며 항소했고 대책위도 유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항소했다. 2심 판결은 2012년 초에 나왔다. 무죄 5명에 선고유예 1명. 1심 판결과 똑같은 결론이었다. 검찰과 대책위는 다시 항소했고 재판은 결국 대법원까지 갔다.

2심 판결이 나온 지 2년 가까이 흐른 지난 11월 14일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5명은 ‘단순가담’이라 무죄, 나머지 1명은 ‘주동자’라 유죄에 선고유예 2년. 역시 결론은 같았다. 다함께의 신문 판매를 불법 집회라 못 박은 검찰의 논리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버젓이 판례로 남게 되었다. 돈 없고 힘없는 ‘진보’ 언론을 탄압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생겨 버린 것이다. (2014년 1월 현재 민사소송과 헌법소원이 진행 중이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그들은 그동안 함께 해 주었던 단체들과 언론사들에 팩스로 ‘취재 요청’ 공문을 보냈고 그 가운데 한 장이 내게 왔다. 그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늦게 출근했다면 아마 일찌감치 분리수거함에 처박혔을 그 팩스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럼 이 글을 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팩스 맨 위에 적힌 대책위 대표 김지태 활동가의 전화번호로 손전화 문자를 보냈다. 주로 울산에서 활동하는 그와 시간을 맞춰 보며 약속을 잡았다. 국정원 댓글에 밀양 송전탑에 삼성전자에 한진중공업에 도대체 무슨 놈의 정세가 이렇게 복잡한지, 3년을 넘게 끌어 온 다함께 활동가들의 법정 싸움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아 나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거 말고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미 너무 길게 이야기를 풀었으니 이 글의 뒷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하자.)

다함께 활동가들의 이야기 (시작)

6명 가운데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김형환 활동가와 대책위 대표 김지태 활동가를 12월 7일 저녁 서울 시청 부근에서 만났다. ‘박근혜 정권 규탄 비상시국대회’가 열리던 중이어서 나도 활동가들도 시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다가 겨우 손전화로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서로 인사를 마치자 두 활동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당시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강남역 근처에서 다함께 활동가 4명이서만 신문을 팔고 있었어요. 나머지 2명은 나중에 합류했구요. 저녁 7시쯤부터 판매를 시작했죠. 그런데 서초서 이○○ 경위랑 다른 경찰관 하나가 가판대 쪽으로 다가오더니 이거 신고하고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서 신문 1부를 달라고 했어요. 판매하는 신문이라고 하니 그 경위가 직접 구입하기까지 했어요. 그리고 조금 뒤에 다시 나타나 이건 검증되지 않은 신문이라 하면서 신문들을 압수하려고 했죠.”

“더는 판매를 못할 것 같아서 짐 싸고 철수하려 했는데 경찰들이 못 가게 막았어요. 이○○ 경위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 있다. 사상 검증을 해야 한다.’ 그러고는 신문들과 소책자들을 짐에서 꺼내 허락도 안 받고 사진을 찍었죠.”

“국보법 위반에 선거법 위반이라는 말도 했어요.”

“경찰 몇 명이 더 왔는데 그중 한 명이 저희를 가게 해 주었어요. 그래서 강남역 뒷골목에 있는 주차장에 짐을 두러 갔는데 경찰들이 거기까지 쫓아오더니 또 못 가게 막았어요. 조사할 것이 있으니 높은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서요.”

“30분쯤 뒤에 서초서 강력계 형사들이 나타났어요. 선거법으로 조사할 게 있으니 서초서까지 같이 가자고 했죠. 저희는 근거도 없이 조사받을 수 없다고 버텼어요. 근데 저희 짐을 아무리 뒤져도 신문이랑 소책자만 나오고 유인물이 안 나오니까 선거법 위반이라는 말이 쑥 들어가더라구요. 그럼 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를 못 가게 하느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어요. 그렇게 1시간 정도 발이 묶여 있었죠.”

“그때 저희는 핸드폰으로 각종 단체들과 언론사에 연락을 돌렸어요. 경찰들의 손에 부당한 구금을 당하고 있다구요.”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활동가들끼리 한 곳에 모여 주저앉았어요. 그러자 경찰들이 저희 주변을 둘러싸더니 ‘야간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하겠다’고 했어요. 그때는 아직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이 위헌이 되기 전이었거든요. (집시법 10조 ‘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시간’은 2010년 7월 1일부터 효력을 잃었다.) 근데 하다못해 대낮에 집회를 해도 강제 해산까지 세 번은 경고를 하잖아요. 그런 것도 전혀 없었고, ‘미란다 원칙 고지’(경찰이 누군가를 연행하기 전에 △연행되는 이유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를 알려주는 것) 같은 기본적인 것도 없었어요. 그냥 다짜고짜 강제로 연행하기 시작했죠.”


다함께 활동가들은 어떻게 연행되었나

김지태 활동가가 내게 이메일로 보내 준 자료들 중에는 누군가가 다함께 활동가들이 연행되던 순간을 찍은 동영상이 하나 있었다. 그 동영상에 무엇이 찍혀 있었는지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도 괜찮을 듯싶다.

5분 18초 동안 흘러나오는 동영상의 앞부분 1분 25초는 강남역 부근 길거리에서 다함께 활동가들이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가판대를 접고 자리를 뜨려는 활동가들을 경찰들이 막아서고 그 앞에서 분통을 터트리는 활동가들의 모습이 보인다. 웬 경찰 하나는 손전화를 들고 멀찍이 서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나 흘긋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흘긋거리기만 한다.

1분 26초부터 화면이 갑자기 바뀌더니 활동가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경찰들에게 두 팔이 잡혀 경찰차 쪽으로 끌려간다. 활동가들이 말한 ‘강남역 뒷골목 주차장’인 모양인데 강남이라 그런지 뒷골목이라 하기엔 너무 밝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적잖이 보인다. 여전히 사람들은 흘긋거리기만 한다. 아직 끌려가지 않은 활동가들은 바닥에 누워 울먹이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도와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정부를 비판하는 신문을 팔고 있다는 죄로 말도 안 되는 연행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정기간행물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흐어어어! 흐어어어어! (감정이 몹시 북받친 활동가)”
“시민 여러분! 사진 좀 찍어 주세요!”
“이게...... 왜...... 우리가...... 어흐흐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활동가)”


경찰들 예닐곱 명이 보인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성 경찰 하나는 손전화를 두 손으로 곧추들고서 모든 광경을 영상에 담고 있다. 높은 사람처럼 보이는 남성 경찰 둘은 활동가들 곁에 서서 연방 손짓을 하고 나머지 남성 경찰들 너덧은 바닥에 누워 있던 활동가 하나를 골라잡아 뒷목을 누르며 두 팔을 뒤로 홱 꺾는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활동가는 남성 경찰 너덧의 힘을 당해내지 못한다.

  연행 동영상의 한 장면

여성과 남성 활동가 둘만 남았다. 곁에 서 있는 높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가야 될 거 일어나요.”
“저렇게 다 가는데 안 가실 수 있어?”


그러자 남성 활동가가 이렇게 답한다.

“절대로 응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얘기를 해 보세요!”

높은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곧 남성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와 활동가들을 에워싸더니 하나씩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영상을 찍던 여성 경찰이 와서 여성 활동가의 한쪽 팔뚝을 잡았지만 곧 남성 경찰 둘이 다가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 활동가의 몸을 붙잡아 경찰차 쪽으로 끌고 간다. 마치 사이렌 소리가 멀리 꼬리를 끌며 사라져가듯 활동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작아져 가며 마침내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말끔해진다. 그때껏 이 모든 것을 영상에 담고 있던 누군가가 저쪽으로 멀어져 간 활동가들을 보며 한 마디 한다.

“나라가 미쳤어.”

다함께 활동가들의 이야기 (계속)

“그렇게 유치장에 갔죠. 근데 저희가 쓸 수 있는 화장실 변기가 막혀 있어서 경찰서 직원들이 쓰는 화장실을 쓰게 해 달라고 요구했어요. 경찰은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죠. 그래서 저희가 인권위에 진정 넣을 테니 진정서를 달라고 했고 경찰은 그것도 거절했어요. 왜 진정서 안 주냐고 계속해서 항의하니까 ‘CSI’라고 적힌 옷을 입은 몇 명이 나타나더니 저희가 항의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갔어요.”

“결국 경찰이 진정서를 주긴 줬는데, 처음에 준 건 1장짜리였어요. 근데 저희 바로 옆방에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갇혀 있었거든요. 노동자들도 저희처럼 진정서를 달라고 해서 받아 갔는데 그중 한 노동자가 ‘이거 원래 두 장인데 한 장이 없다’고 막 항의했어요. 그래서 저희도 왜 한 장짜리 주냐고 함께 항의하기 시작했죠.”

“아까 사진 찍어 갔던 CSI들이 다시 나타나더니 이번에는 유치장 안이 다 보이는 위치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캠코더 촬영을 시작했어요. 유치장 안에는 CCTV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거든요. 유치장 CCTV가 음성 녹취가 안 된다는 둥 고장 났다는 둥 둘러대더니 결국 다섯 시간 동안이나 찍고서야 캠코더를 치웠어요.”

“어쨌든 경찰이 2장짜리 진정서를 줬고 저희는 그걸로 인권위 진정서를 작성해 제출했어요.”

“경찰은 47시간이 지난 뒤에야 저희를 풀어 줬어요. (형사소송법에는 ‘체포한 피의자에 대해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을 때는 즉시 석방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지만 어떤 경찰은 이를 ‘영장 없이 48시간 동안 붙잡아 둘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집회에 참여했다가 연행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많이 당한다고 한다.)”


서초 경찰서 식구들의 이야기 (1) - 기사들

여기서 서울 서초구 민중들의 지팡이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서초서로 전화를 걸어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몇 마디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려 3년 7개월 전에 있었던 일을 서초서의 누구 하나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고, 그 당시 몇몇 언론들에 서초서 간부가 답변한 내용들 말고 무언가를 더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경찰이든 형사든 도무지 말을 섞기가 싫었다. 그래서 서초서에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당시 몇몇 언론들이 보도한 서초서 간부의 답변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보기로 한다. 서초서 간부가 언론에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또는 언론이 거짓으로 보도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답변들을 한 자리에 모아 소개하는 것도 서초서 지팡이들에게 내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는 행동이 될 것이다.

2010년 5월 9일 한겨레신문
신문 거리 판매가 집시법 위반?
(줄임) 천주교인권위원회 강성준 활동가는 “유치장 안에 갇힌 이들의 항의에 정당히 응대하지 않고 이를 촬영해 추가로 압박하는 것은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초서는 “이들이 기물을 파손하고 자해할 우려가 있어 채증을 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현재 연행자들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손준현 기자)

2010년 5월 9일 연합뉴스
유치장 내부 캠코더 촬영... 인권침해 논란
(줄임) 서초서 관계자는 “유치장 안에 CCTV 사각지대가 있어 소란 등을 막고자 종종 캠코더를 설치한다. 억류된 상태로 조사받는 곳인 만큼 일정 부분 권리가 제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형평성이나 관리 문제도 있어 옆 유치실의 화장실로 안내했으나 연행자들이 고집을 부렸고, 진정서도 당시 준비된 수량이 부족해서 그랬을 뿐 곧 제대로 제공했다”고 해명했다. (줄임) (이상현 기자)

2010년 5월 9일 국민일보
미신고 야간집회에서 ‘진보’ 주간지 판매 6명 연행
(줄임) 경찰은 “유치장에선 질서 유지를 위해 권리를 일부 제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2010년 5월 9일 CBS
“화장실 보내 달라” 연행자에 캠코더 촬영... 인권침해 논란
(줄임) 이틀째인 8일 오전, 이들은 유치장 내 변기가 막혔다는 이유로 유치장 밖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에 따르면 실제로 전날 유치장에 있던 정신 이상자가 변기를 수건으로 막아버려 유치장 내 변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항의가 계속되자 경찰은 유치장 전면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캠코더로 연행자들을 촬영했고 연행자들은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연행자들의 지인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굳이 연행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할 이유가 없는데도 경찰이 무리하게 수사를 했다”며 경찰의 행위가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반면 경찰은 규정과 방침에 따라 행동했을 뿐 문제가 될 부분이 없다고 반박했다.
서초경찰서 진영근 수사과장은 “공교롭게도 정신이상자의 행동으로 변기를 이용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면서 “감방 내 화장실 변기가 막혀있다고 미리 고지까지 했다”고 말했다.
진 과장은 “유치인을 관리하는 규정에 따라 유치장 외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치장 안이 혼잡해 경찰관을 붙여 외부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할 상황도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캠코더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도 경찰은 “유치장 안에 마약사범을 포함해 20여 명이 있어, 유치장 내 폐쇄회로 화면만으로는 사각지대까지 감시할 수 없어 캠코더를 설치했다”고 반박했다.

2010년 5월 10일 미디어오늘
경찰, ‘입맛대로 연행’에 ‘마구잡이 인권침해’
(줄임) 또한 석방되던 날인 9일엔 △강 형사가 ‘밖에 나가면 쪽도 못쓰는 것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폭언했고, △연행자 5명을 다른 방에 나누려 해 우리가 ‘인권보장’을 촉구하자 오후 5시쯤 한 경찰관이 ‘죄수에게 인권이 어디 있느냐’고 비하 발언을 했다고도 김씨는 전했다.
이에 대해 진영근 서초서 수사과장은 이날 미디어오늘과 전화통화에서 “집시법 위반으로 수사를 하고 있다”며 “신고하지 않고 집회를 해 연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진 과장은 신문판매가 집시법위반이냐는 지적에 “신문 판매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사 과정에서 진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진전된 수사 내용이 없다”며 “신고하지 않은 집회로 수사한 것 외엔 없다”고 답했다. 영장 없이 불법 연행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현행법으로 체포한 것”이라고 진 과장은 주장했다.
유치장 내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줄임) (조현호 기자)

이렇게 기사들을 모아 놓고 죽 읽어 보니 마치 진영근 당시 수사과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기에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일 수 있을까 따져 보다가 내친 김에 상상력을 통해 서초서 지팡이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내가 서초서에서 일하는 경찰이었다면 마음이 어땠을까? 강력계 형사였다면? 진영근 수사과장이었다면?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나는 그들의 입을 빌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서초 경찰서 식구들의 이야기 (2) - 상상들

여기서부터는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내가 멋대로 지어낸 것들이니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사실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 부분을 건너뛰어도 좋겠다.

경찰 1 : 다함께인지 다같이인지 뭔지. 사람 무지 많은 강남 길거리 한가운데 드러누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무 죄가 없으면 금방 풀려날 것을 왜 그렇게 저항을 해서 우리가 힘을 쓰게 만드냐구요. 우리라고 그렇게 하고 싶었겠어요? 우리가 무슨 사람 잡아먹는 괴물도 아니고. 나 참. 그리고 강남이면 가뜩이나 인파로 복잡한 곳인데 꼭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신문을 팔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신문을 파는 건 좋은데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요? 몇 달 뒤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 아시죠? 회의 장소인 코엑스가 바로 코앞인 곳인데 왜 꼭 거기서 그렇게 지랄들을 해야 하냐구요. 우리가 안 막았으면 G20이 열리는 날에도 고성방가로 사람들 눈 찌푸리게 했겠죠. 아니,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그게 무슨 신문 판매예요? 여럿이 모여 시민들을 향해 정부를 욕하는 구호를 외치면 그게 집회가 아니고 뭐냐구요. 그 친구들이 입고 있는 옷에도 구호 비슷한 게 적혀 있었고 신문에도 구호나 다름없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구요. 차라리 집회 신고를 하든가. 그것도 안했으면서 집회가 아닌 판매 및 홍보 행위라고 하는 건 완전히 눈속임이죠. 그 친구들은 요즘 사람들의 마인드를 몰라도 한참 몰라요. 그 따위 구질구질한 길거리 홍보로 누가 관심이나 주겠어요? 하다못해 화장품 홍보 행사에서도 예쁜 모델들이 미니스커트 입고 나와 춤추는데 말이에요. (웃음)

(혹시 한 명쯤 있을지 모르는) 경찰 2 : 그게 참...... (한숨) 저도 잘 모르겠어요. 위에서 시키니까 짐도 뒤져보고 했는데 딱히 나오는 것도 없었어요. 신문들이랑 작은 책자들이 전부였거든요. 같이 있었던 경위님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했지만 도대체 뭐가 위반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국가보안법은 북한에 이로운 행동을 해선 안 된다는 법이잖아요. 저는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라 믿긴 하지만 그걸 안 믿는 것도 어떻게 보면 각자의 자유 아닌가요? 안 믿는다는 내용으로 신문을 만들어 파는 것도 일종의 표현의 자유겠구요.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그 신문은 정기간행물로 등록까지 되어 있는 정식 신문이라고 하더라구요. 유인물이 아니었다는 거죠.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 북한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럼 왜 서울시는 그런 신문이 정기간행물 등록을 하도록 지금까지 놔둔 거죠? 그 사람들은 이념적으로 너무 극좌 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그런 신문 누가 사서 읽겠어요? 자기들끼리 소리 지르다가 시간 되면 접고 철수하는 사람들인데, 아마 G20 때문에 위에 있는 양반들이 몸을 사리는 거겠죠. 예, 그걸 거예요.

형사 : 그 새끼들 우리가 안 보내주니까 아예 퍼질러 앉아 연좌 농성을 시작하더구만. 젊어서 그런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몰라. 운동권이면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그 새끼들은 나 잡아 잡수~ 하면서 제 목을 베어 가라고 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일이지. 지금이 80년대야? 좋은 시절에는 공부 열심히 해서 취직하고 애새끼 만들어서 도란도란 사는 게 최고야.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아도니 길거리에서 그딴 짓거리나 하고 있는 거지. 길거리에서 뭘 외치든 지네들이 대통령을 바꿀 수 있기라도 하나? 백날 소리 질러 봐야 나 하나도 못 끌어내릴 새끼들이 말이야. 그 새끼들이 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면 왜 사람들이 호응해 주지 않지? 그 신문인지 찌라시인지 하는 것에 맞는 말이 쓰여 있다면 불티나게 팔려야 맞는 거잖아. 안 그래? 근데 그게 아니란 말이지. 그 새끼들은 시대착오적이야. 자기들이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몰라. 걔들 옷 입은 거 봐. 다들 나보다 좋은 거 입고 있지? 계속 그런 옷 입고 싶으면 그런 옷과 어울리는 삶을 살면 되는 거야. 괜히 딴 짓하지 말고. 공돌이 공순이들이 그 새끼들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흥 하고 콧방귀를 뀐다.)

간부 : (마치 국어책 읽듯) 우리 경찰은 언제나 시민의 편에 서서 규정과 방침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날 있었던 사건 역시 한 시민에 의해 접수된 신고에 따라 출동했고 미신고 불법집회를 열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해 현행범으로 즉시 연행한 것입니다. 여경이 한 명뿐이라 여성 피의자 한 명을 연행하던 중에 남성 경찰들과 경미한 접촉이 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꾸 인권이다 뭐다 하는데 우리 경찰들의 인권도 좀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서초 경찰서 인원들은 매일 격무에 시달리지만 서초구 시민들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밤낮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피의자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피의자들의 폭력적인 행위를 우리 경찰이 모두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경찰서 내부의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피의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도 없습니다. 그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의자들은 신문으로 교묘히 위장한 유인물을 거리에서 배부하며 (피의자들은 ‘판매’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실제로 소액을 받고 판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신문보다 유인물에 가깝다는 본질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구호가 적힌 옷을 입고 체제에 반하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우리 서초서는 사전에 피의자들의 집회 신고를 접수한 바 없습니다. 왜 길거리에서 미신고 불법 반정부 시위를 벌였는지 조사가 필요해 동행을 요청했지만 그에 응하지 않고 또 다시 불법 연좌농성을 벌여 현행범으로 연행한 것뿐이지 G20 정상회의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 경찰은 언제나 시민의 편에 서서......

듣다 못한 나 : 이 무식한 것들아. 너희들은 그저 너희들 입맛에 맞지 않는 이들이 꼴 보기 싫어 잡아다 가둔 것뿐이야. 애써 포장하지 마라. 서초서 제일 윗대가리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기 구역 안을 얼룩 하나 지지 않게 깨끗이 관리해야 나중에 더 위로 출세할 때 편할 거라 생각했겠지. 누구나 아는 얘긴데 왜 시치미를 떼? 뭐? G20과 관련이 없어? G20 포스터에 쥐새끼 그림 하나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갔다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허깨비냐? 유령이야? 더구나 대통령부터 눈이 벌개져서 천안함에 목을 매고 있는데 자기 관할 구역에서 웬 떨거지들이 천안함 폭침은 안보 사기라느니 뭐니 떠들고 다니면 서초서 윗대가리들의 등골이 서늘해지겠지? 그래서 잡아다가 혼쭐을 낸 거 아냐? 다함께가 신문을 팔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폭력까지 동원해서 강제 연행해 간 건 너희가 처음이래.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둘 중 하나야. 너희들이 10여 년 만에 대단한 깨달음을 얻어 헐레벌떡 그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나섰거나, 아니면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생겨 갑작스럽게 지난 10여 년 동안의 관행을 무시해 버릴 수밖에 없었거나. 어느 쪽일까? 다함께 활동가들이 강남역에서만 신문을 파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이면 너희들만 그들을 끌고 갔을까? 난 바보가 아니라 그런지 이게 너무나 쉬운 물음 같아. 규정과 방침? 시민들의 안녕? 웃기고 있네.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꼴 보기 싫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잖아. 꼴 보기 싫은 놈들한테 아무것도 해 주기 싫었다고 하면 되잖아.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뭔지나 알아? 너희들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야. 너희들은 사람이 둘 이상만 모여도 말 탄 순사가 나타나 채찍을 휘두르던 일제 강점기에 살고 있어. 길거리에서 신장개업 전단지 나누어 주는 할머니들까지 잡아가지 그래?

여기서부터 상상이 끝난다. 서초서 식구들의 자잘한 이야기들에 굳이 조목조목 대거리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눈이 멀었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까맣게 칠해 놓은 안경을 쓰고 있거나 보이는 건 똑같다. 깜깜한 어둠. 서초서 경찰들과 형사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가 보라고 한 것만 보고, 자기가 본 것만을 믿고, 자기가 믿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그것만 놓고 보면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중요한 차이는 그들에게 다른 이들을 합법적으로 짓밟을 권리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함께 활동가들의 이야기 (계속)

김지태 활동가와 김형환 활동가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거기서 풀려나고 두 달쯤 지난 7월쯤에 갑자기 벌금 통지서가 날아왔죠. 네 명은 백만 원씩, 나머지 두 명은 이백만 원씩.”

“왜 두 명에게만 백만 원씩 더 나왔는지는 지금도 몰라요. 근데 그 두 명은 연행됐을 때 경찰한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끝까지 안 밝힌 두 명이거든요.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혔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6명이서 대책위를 조직하고 법정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주위 단체들에 연대를 요청했는데 정말 많은 분들께서 도와주셨죠. 그분들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첫 재판이 2010년 9월 16일에 있었어요. 그리고 2011년 1심 판결이 나올 때까지 대여섯 번쯤 재판이 있었죠. 누가 봐도 이건 너무나도 뻔한 사건이잖아요. 정기간행물로 등록되어 있는 멀쩡한 신문을 거리에서 판 것뿐인데 그걸 집회라 우기면서 집시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씌웠어요. 웃기는 건 검찰이 신청한 증인들이 오히려 저희들 편을 들어 줬다는 거예요. 한번은 그날(2010년 5월 7일) 강남역에서 저희를 신고한 사람이 증인으로 나왔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검사 앞에서 저희한테 사과를 하더라구요. 검찰은 어떻게든 저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증인을 찾기 위해 재판을 계속 연장했고 그러다 보니 쓸데없이 재판만 많이 하게 됐죠.”

“판사도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검사를 보는 것 같았어요. 검사한테 이렇게 묻기도 했죠. ‘체포에 대한 항의는 집회로 보기 어렵지 않나?’ 검사는 끝까지 저희가 집회를 열었다고 입증하고 싶어 했지만 검찰이 부른 증인들은 저희가 신문을 팔고 있었을 뿐이라고 증언했어요.”

“2011년 7월에 1심 판결이 나왔어요. 다섯 명은 무죄, 한 명은 유죄에 선고유예.”


김지태 활동가가 김형환 활동가를 가리키며 바로 이 분이 유죄를 선고받은 주인공이라 알려 준다. 김형환 활동가가 이야기한다.

김형환 : 그날 강남역에서는 제가 책임자였어요. 책임자라고 해서 주동자나 뭐 그런 개념이 아니라 그냥 그날 일정의 전반적인 것들을 챙기는 그런 역할이었죠. 경찰한테도 제가 책임자라고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근데 그걸 가지고 저를 미신고 불법 집회를 선동한 주동자라 점찍은 거예요. 저는 적극가담이라 유죄, 나머지 5명은 단순가담이라 무죄. 제가 책임자라고 해도 저희들은 그날 똑같이 신문을 팔았거든요. 이게 말이 되나요?

검찰은 겨우 한 명에게만 유죄를 선고한 1심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항소를 신청하고, 유죄 판결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대책위도 항소를 신청해 결국 법정 싸움은 2심까지 가게 된다. 두 활동가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2012년 초에 2심 판결이 나왔죠. 결과는 1심과 똑같았어요. 5명 무죄에 1명 유죄. 검찰도 저희도 다시 항소를 하기로 했어요.”

“결국 대법원까지 갔는데 대법원은 따로 재판을 하지 않고 저희들에게 기다리라고만 했어요. 대법원은 원래 그렇대요. 그래서 1년 10개월 동안 기다렸는데 바로 그 대법원 판결이 지난 11월 14일에 나왔어요. 대법원 판결도 1심과 2심 판결의 재탕이었죠. 5명 무죄에 1명 유죄.”

“검찰은 저희의 신문 판매를 재판 처음부터 끝까지 집회로 몰았고 재판부도 결국에는 거기에 따라 판결을 내렸어요. 저희가 한 건 미신고 불법 집회가 맞다. 그러나 대표자 한 명 말고 나머지는 단순 참가자들이라 무죄, 대표자는 대표자니까 유죄다. 이렇게 된 거죠.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저희처럼 가난한 진보 언론을 합법적으로 탄압할 수 있는 판례가 생겨 버렸다는 거예요.”


판결문들 (1) - 진짜

여기서 잠깐, 온갖 어려운 말로 뒤범벅되어 있는 판결문들을 보기로 하자. 전부 다 옮기기엔 팔이 아프니 중요하다 싶은 부분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2심 판결문은 1심 판결문과 내용이 비슷하고, 대법원 판결문은 2심 판결문이 옳다고 편들어 주는 내용에 지나지 않으니 1심 판결문만 훑어도 좋을 것이다.

1심 판결문에서 가려 뽑은 내용

<김형환 활동가가 유죄 판결 받은 이유를 밝힌 대목 - 검찰의 공소 사실>
옥외집회나 시위를 주최하려는 자는 그에 관한 목적 ․ 일시 ․ 장소 ․ 주최자 ․ 참가예정인 단체와 인원 등을 적은 신고서를 옥외집회나 시위를 시작하기 720시간 전부터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피고인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서를 제출하지 아니한 채, 2010. 5. 7. 19:23경부터 같은 날 20:00경까지 사이에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05-7에 있는 동일빌딩 앞 인도에서, 신○○, 김○○, 김○○ 등과 함께 모여 미리 준비한 탁자 2개를 설치하고, “MB 정부는 전교조, 공무원 탄압을 중단하라”는 내용이 기재된 속칭 ‘몸피켓’을 착용한 상태로 위 탁자 주위에 서서 “이명박, ‘호전적 세력의 장사포가 우리를 겨누고 있다’, 안보위기는 사기다”, “안보위기는 사기다. 이명박 정부는 군비증강이 아니라 복지를 늘려랴”, “IMF 긴축에 맞선 그리스 반란, 한국에서도 저항이 필요하다”라고 기재된 피켓 3개를 든 채, “천안함 사건이 터졌는데 이는 이명박 정부가 안보위기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경제문제가 심각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경제가 더욱 나빠졌고 일자리도 부족하다”라는 내용의 구호를 수회 제창하고, “안보위기는 사기다”라는 제목의 ‘레프트21’ 발행 명의의 신문 형식의 유인물을 그곳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건네주었다.
이로써 위 피고인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서를 제출하지 아니한 채 옥외집회를 주최하였다.

<신문 판매가 집회였다고 결론을 내리는 대목 - 판사의 판단>
우선, 집시법이 적법한 집회 및 시위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의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되게 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고, 집회 그 자체의 개념에 관하여는 아무런 정의 규정을 두고 있지 않으면서도 시위에 관하여는 다수인이 공동목적을 가지고 도로 ․ 광장 ․ 공원 등 공중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진행하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 다수인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정의하는 한편 제3조 이하에서 옥외집회를 시위와 동렬에서 보장 및 규제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위 법률에 의하여 보장 및 규제의 대상이 되는 ‘집회’란 ‘특정 또는 불특정 다수인이 공동의 의견을 형성하여 이를 대외적으로 표명할 목적 아래 일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위에서 든 여러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된 위 범죄사실 기재 여러 사실들에 의하면, 위 피고인 등의 이 사건 행위는 외형상 신문 판매행위라는 형식을 띠었을 뿐 실제로는 안보위기 등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인 공동의견을 형성하여 이를 대외적으로 표출 ․ 전달하기 위한 목적 아래 다수인이 일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인 것으로서 집시법상 신고의 대상인 ‘집회’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판결문들 (2) - 가짜

판결문들을 읽고 나니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누가 글을 썼는지 정말 더럽게도 못 썼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이런 황당한 논리라면 정말 길거리 맥주 시음 행사도 집시법 위반으로 옭아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바로 그 나중에 든 생각을 바탕으로 가짜 판결문을 써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글 쓰다가 후루룩 휘갈긴 이 부분을 무턱대고 끼워 넣는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이 부분을 읽지 말고 뛰어넘기 바란다.

다음은 강남역 부근에서 맥주 시음 행사를 개최했다는 이유로 ○○ 맥주 회사 홍보부 대리 김경아(가명) 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결문의 일부다.

<김경아 씨가 유죄 판결 받은 이유를 밝힌 대목 - 검찰의 공소 사실>
옥외집회나 시위를 주최하려는 자는 그에 관한 목적 ․ 일시 ․ 장소 ․ 주최자 ․ 참가예정인 단체와 인원 등을 적은 신고서를 옥외집회나 시위를 시작하기 720시간 전부터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피고인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서를 제출하지 아니한 채, 2010. 5. 7. 19:23경부터 같은 날 20:00경까지 사이에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05-7에 있는 동일빌딩 앞 인도에서, 김채빈, 유애리, 윤지선(이상 가명) 등과 함께 모여 미리 준비한 탁자 3개를 설치하고, “온몸에 퍼지는 강렬한 자극”이라는 내용이 기재된 속칭 ‘몸피켓’을 착용한 상태로 위 탁자 주위에 서서 “천연 암반수로 만들어 깨끗한 맥주”, “평범한 물로 만든 다른 맥주는 가라”,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맥주”라고 기재된 피켓 3개를 든 채, “무료로 드시고 사은품 받아가세요”, “비싼 수입 맥주 드실 필요가 없습니다”, “맥주는 물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업체 맥주들과는 달리 저희 맥주는 지리산 천연 암반수로 만들어 목넘김이 좋고 가슴속까지 알싸합니다. 직접 드셔 보시고 비교해 보세요”라는 내용의 구호를 수십 회 제창하고, 일회용 종이컵에 맥주 100cc 가량을 담아 그곳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건네주었다. 맥주 시음을 마친 사람에게는 ‘물이 다른 맥주’라는 글자와 맥주 회사 로고가 새겨진 선전물 형식의 소형 플라스틱 병따개를 사은품으로 제공했다.
이로써 위 피고인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서를 제출하지 아니한 채 옥외집회를 주최하였다.

<맥주 시음 행사가 집회였다고 결론을 내리는 대목 - 판사의 판단>
우선, 집시법이 적법한 집회 및 시위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의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되게 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고, (줄임) 위 법률에 의하여 보장 및 규제의 대상이 되는 ‘집회’란 ‘특정 또는 불특정 다수인이 공동의 의견을 형성하여 이를 대외적으로 표명할 목적 아래 일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위에서 든 여러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된 위 범죄사실 기재 여러 사실들에 의하면, 위 피고인 등의 이 사건 행위는 외형상 맥주 시음 행사라는 형식을 띠었을 뿐 실제로는 경쟁 맥주업체의 성분에 대한 자신들의 편파적인 공동의견을 형성하여 이를 대외적으로 표출 ․ 전달하기 위한 목적 아래 다수인이 일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인 것으로서 집시법상 신고의 대상인 ‘집회’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판사들이 쓴 진짜 판결문이 옳다면 내가 지어낸 가짜 판결문도 옳다. 그러나 판사들의 판결문은 죄 없는 이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내 판결문은 그다지 재미도 없는 글 나부랭이가 되었다. 판사들의 판결문과 나의 판결문이 지닌 힘의 차이는 판사와 내가 지닌 힘의 차이와 같다. 판사들에겐 힘이 있지만 내겐 없다.

법 조항은 결코 철학적이어서는 안 된다. 얽히고설킨 것들을 단숨에 풀어헤치기 위해 재판이 있고 판사 무리들이 있다. 판사들은 저울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고 법 조항은 저울에 새겨진 눈금 같은 것이다. 눈금을 읽고 무게를 다는 건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저울의 눈금은 저울에 얹힌 것이 무엇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집회 및 시위가 도대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마지막 결론은 항상 판사들이 내린다. 판사들은 눈금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일 뿐 철학자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장 중요한 물음과 부딪치기를 꺼린다.

판사들의 힘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가장 중요한 물음을 덮어둘 수 있는 권리.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혼자서 또는 자기네들끼리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철학을 하지 않아도 아무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권리. (집회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서도 집회가 무엇인지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권리.) 언제나 가장 옳을 수 있는 권리.

좋은 시 감상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신문 판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미신고 불법 집회가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권력과 명예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유죄 선고를 내려 주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법조문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판결이 되고 싶다.

<판사가 피고에게>

다함께 활동가들의 이야기 (끝)

“그 사건 이후로 저희를 비롯한 전국의 다함께 활동가들은 거리에서 신문을 팔 때 미리 집회 신고를 하고 있어요. 전에는 경찰이 전혀 문제 삼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혜화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하러 가니까 신문 팔 거면서 왜 집회 신고를 하느냐고 경찰들이 저희를 이상하게 쳐다봤어요. 저희도 어이가 없었죠. 집회 신고서에는 그냥 ‘판매 및 홍보 활동’이라 적어요.”

“저희가 신문 판매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잖아요. 그동안 경찰들과 거리에서 티격태격한 적은 있었지만 연행까지 당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연행되던 순간에는 정말 당황스러웠죠. 이게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인지 처음엔 감이 잘 안 왔어요. 근데 유치장에서 이틀 살고 밖에 나와 보니 주변의 동지들이 이건 절대로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알려 줬어요. 저희도 이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걸 차츰 절감하게 됐구요.”

“그래서 대책위를 조직했고, 이게 저희들 6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후퇴, 언론 자유 침해, 진보 언론 탄압의 문제라 인식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투지도 생겼죠.”

[출처: 레프트21]

“연대 단체들의 지지와 도움 덕분에 힘도 많이 받았어요. 지금까지 재판 비용으로 수백만 원이 들었는데 그걸 전부 다 모금을 통해 해결했으니까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주위 분들이 없었다면 저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이쯤에서 나는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김형환 활동가를 겨누어 물음을 던져 보았다. 유죄 선고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여기서부터는 두 활동가를 구분해야 한다.)

김형환 : 처음엔 서운했죠. (웃음)

김지태 : 사실 판결이 나왔을 때, 다들 마음속이 복잡했어요. 6명 가운데 5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무죄 5명이 ‘와, 나는 무죄다’ 하며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김형환 활동가가 유죄를 받고 만 거예요. 결국 나중에 생각해 보니 누구는 유죄고 누구는 무죄라는 게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죠.

김형환 : 사실 애초부터 무죄가 나올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MB 정부가 무죄를 줄 리도 없었고 판사들의 눈빛도 차가웠으니까요. 근데 막상 저 혼자 유죄가 되니 조금 서운하긴 했어요. (웃음) 하지만 저도 다른 활동가들도 이건 함께 싸워야 하는 문제라고 의견을 모으게 됐죠. 누구는 단순 가담, 누구는 적극 가담 뭐 이런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김지태 : 1심과 2심 재판이 끝났을 때 제가 레프트21에 이런 내용의 기사를 쓴 적 있어요. ‘6명 중에서 5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재판 내용상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승리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승리가 아니었죠. 저희가 받은 탄압이 그대로 살아 있는데 그걸 승리라 부르면 안 되는 거였어요.

김형환 : 뉴라이트들은 집회 신고 안 해도 자기네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다니는데 저희 같은 소수 언론들만 경찰들이 훼방을 놓고 있잖아요. 아직 승리가 아니죠.

여기서 나는 뭔가 색다른 답변을 기대하며 뻔한 물음을 던졌다. 긴 시간 동안 재판에 시달리고 법정 싸움도 하면서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김지태 : 저희 둘 다 법정 투쟁을 해 본 일이 없어서 처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몰랐어요. 다행히 많은 분들께서 조언을 해 주셔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김형환 : 법정 투쟁은 제겐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판사와 청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경찰들 망신 주고, 판사가 검사를 한심하게 보도록 만들고. (웃음)

김지태 : 재판 결과는 아직도 화가 나지만, 과정만 놓고 보면 후회는 없어요. 저희는 매순간 당당했으니까요. 6명이 똘똘 뭉쳐 싸우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 사건을 통해 저희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판사 앞에서도 쫄지 않을 수 있었죠.

김형환 : 저는 예전에도 경찰에게 잡혀 끌려갔던 적이 있어요. 그때는 처음이라 경황이 없어 묵비권이 생각도 안 났고 경찰이 시키는 대로 다 말해 줬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뒷골이 땡겨요. (웃음) 근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묵비권을 행사해 봤고, 그러다 보니 경찰 앞에서 더 당당해질 수 있었죠.

내가 이 글 앞부분에서 슬쩍 건드리고 지나간 ‘이 글을 쓰게 된 중요한 이유’를 혹시 기억하는가? 나는 그 이유에서 비롯된 물음을 이쯤에서 두 활동가들에게 던졌고, 활동가들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 쓸 데가 있으니 일단 뒤로 제쳐 두도록 하자.

이제 어느덧 마무리로 넘어가는 분위기. 두 활동가의 목소리가 다시 하나가 된다.

“결국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나왔는데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 이 판결이 선례가 되어 또 어떤 진보 언론이 탄압받게 될지 모르잖아요. 이건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에 관한 문제지 저희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대법원 판결이 나왔으니 법적으로 끝난 문제이긴 하지만 이 판결을 어떻게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려면 사안 자체를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어 싸워 나가야 할 거예요. 저희 대책위는 다른 연대 단체들과 힘을 합쳐 앞으로도 꾸준히 싸울 작정이구요.”

“이건 단순히 다함께 활동가 6명이 연행되었다가 재판에 회부됐다는 문제가 아니에요. MB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우파 정부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공격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써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계속해서 압살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에요. 더 많은 관심과 지지, 연대가 필요합니다.”

“이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아쉬운 점이 하나 있어요. 한겨레나 경향 같이 그나마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 여겨지는 신문들도 이 문제에 별로 관심을 안 가졌어요. 한겨레에는 제가 글을 한 편 써서 보내기도 했는데 단칼에 짤렸어요. 레프트21이 소규모 좌파 언론이라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가 싶기도 해요. 하지만 이 문제가 레프트21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언론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다들 깨닫게 되는 날이 분명 올 거라 생각합니다.”

“레프트21은 가난한 언론이라 다른 재벌 언론들처럼 신문을 배급할 수는 없어요. 돈이 없으니 거리에 나가 손수 판매하는 건데, 그렇게 기업 광고도 정부 후원도 안 받고 오로지 노동자들이 지불하는 신문 값으로만 신문을 만드니 다른 언론들과 달리 온전히 노동자들의 편에 설 수 있는 것이기도 해요. 거리에서 사람들과 신문을 통해 일대일로 만나며 직접 소통한다는 의미도 있죠.”

“레프트21은 노동자 운동의 단결과 연대를 위한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레프트21 판매자 탄압은 노동자 운동에 대한 공격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언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적 권리는 노동자 운동의 전진을 통해 가능하다고 봐요. 그래서 저희는 레프트21 탄압에 맞서 계속 싸우면서, 동시에 지금도 저희가 하고 있는 노동자 운동에 대한 지지와 연대 활동을 계속할 겁니다.”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다함께 활동가로 살아가는 대학 후배들이 요즈음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았고 글 사이사이에 끼워 넣을 사진 몇 장만 보내 달라고 부탁드렸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제 지금까지 제쳐 둔 그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되었다.

다시, 팩스 한 장

팩스가 온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보자. 팩스를 읽고 내 책상에 앉아 컴퓨터가 바탕화면을 띄우길 기다리는데 화면에 어떤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왔다. 단발머리에 동그마한 얼굴, 그 얼굴에 얹힌 동그란 안경, 그는 내가 예전에 잠깐 함께 일했던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곳은 한 마디로 말해, 좋지 않은 일만 생기는 이 세상을 더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생각과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또는 자신들의 생각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만한 글쟁이들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가끔씩 ‘실천’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함께 집회에 나간다거나 밀양 희망버스를 탄다거나.) 둥근 안경을 쓴 그는 제대로 된 물음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는 사람이었는데 어쩔 때 보면 물음에 한 맺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떠돌던 글쟁이들의 이름은 대충 이랬다.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 가라타니 고진 등등. 서로 생긴 것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른 그 글쟁이들은 요 몇 년 사이 책 좀 읽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고진은 제2의 전성기라고 해야겠다.) 물론 10여 년 전에도 그런 글쟁이들은 있었는데 지금과는 이름만 다를 뿐이다. 미셸 푸코,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발터 벤야민 등이 유행하던 시절이 한때 있었다. (아마 10여 년 뒤에는 다른 글쟁이들이 유행하고 있을 것이다.)

무슨 책을 읽든 그건 그 사람들의 자유니 내가 뭐라 할 건 못 된다. 읽기 어려운 책이라 해서 읽기 쉬운 책보다 나쁘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언제나 같은 변명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글이 어렵다구요? 어려울 수 있지만 그만큼 독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독서는 치열한 독서가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산다면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노동자 투쟁을 이야기하는데 정작 현장의 노동자들이 잘 알아먹지 못한다면 그건 ‘무식한’ 노동자들의 탓일까? 철학자들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면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대체 누가 쓴 책을 몇 권이나 읽어야 할까?

둥근 안경을 쓴 그가 내게 말했다. “걔네들은 싼 티가 나.” 신문을 파는 다함께 활동가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단체의 후원 계좌번호를 명함 뒷면에 새겨 넣고 다니는 어떤 활동가를 보면서도 비슷하게 이야기했다. “그게 뭐야? 싼 티 나게.” 나는 내 밥줄을 쥐고 있던 그 사람의 마음에 행여나 흠집이라도 낼까 봐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싼 티란 대체 뭘까? 그는 제대로 된 물음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고 늘 강조하는 물음쟁이였지만 정작 그가 좋아하는 건 물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대답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많았다.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훨씬 확고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물어도 재깍 대답이 나왔고 딱 잘라 대답할 수 없는 흐릿한 물음은 애초부터 던지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조르조 아감벤과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읽으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싸구려로 보일까? (난 안 그렇던데.) 나는 그가 내 밥줄을 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대체 싼 티가 뭔지, 어떤 것이 비싸고 어떤 것이 싸구려인지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는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음 말고는 그 어떤 물음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손전화 문자 한 통 받고 그곳에서 깨끗이 정리되고 나니 내겐 그 한 마디만이 남았다. ‘싼 티 나’.

큰 집회 판에 가면 항상 있는 두 가지가 있다. 백기완 선생님과 다함께 천막. 운동을 한답시고 껄떡거렸던 내 대학교 인연들 중 대부분은 괜찮은 일터 다니며 어느새 결혼까지 하고 밥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 먹고살 만한 그들은 더는 집회에 나오지 않는다. 내 후배들 가운데 아직도 가끔 집회에서 만나는 녀석들은 (정치판에 있는 몇 명 말고는) 모두 다함께 활동가들이다. 걔들은 큰 집회가 있으면 반드시 나타나 천막을 세우고 신문을 판다. 걔들은 일 년에 한 번씩만 나타나는 산타 할아버지나 각설이가 아니다. 걔들은 늘 그 자리에 있다. 10년이 넘도록 똑같이 생긴 손팻말에 큼직한 왼손 주먹이 박힌 깃발까지 도무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다함께가 무엇을 주장하든, 운동 판에서 어떤 뒷소리를 듣든 내 마음은 애틋해질 때가 많다. 먹고살 만해지니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거나 먹고살 만하니까 운동 판에 껌처럼 눌어붙는 (나는 어느 쪽일까?)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요즘 세상에, 다함께 활동가들의 성실함과 결코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레프트21의 1면 제목은 분명 보기 드문 것이다. 물론 다함께 활동가들 가운데서도 약사도 있을 테고 정규직도 자영업자도 잘 먹고 잘 사는 인간도 있겠지만 다른 약사들은 다함께 활동가들처럼 ‘무식하게’ 현장에 박치기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먹고사느라 엄청 바쁘거나, 싼 티 나는 건 싫거나. 길거리에서 먼지 먹으며 얼굴이 벌개지도록 신문을 파느니 차라리 거실에 앉아 원두커피 한 잔 타 놓고 지젝을 읽으려 할 것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이 모니터를 채우자 그 둥근 얼굴은 지워져 버렸다. 나는 팩스를 다시 한 번 읽으며 마음먹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자. 이들이 싼 티 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그 잘난 인간들에게 엿을 먹이자. 입으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뼛속 깊이 똑똑한 체하던 그 엉터리들의 낯짝에 먹칠을 하자.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자리에서 뭔가 작은 것부터 만들어 나가려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쓰자.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고 누가 그들을 괴롭혔는지 쓰자. 그리고 진짜 싸구려들이 자기가 싸구려임을 알도록 하자.

그러고서 김지태 활동가에게 연락을 했고 김형환 활동가와도 함께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하는지 아니면 내 이야기를 쏟아내기 위해 쓰려고 하는지 그때도 알지 못했지만 이미 글을 이만큼이나 쓴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팩스 한 장 때문에 내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다함께 활동가들의 이야기 (덤)

그러나 이 글은 오로지 나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만 쓰는 건 아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두 활동가들에게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보 진영 안에서도 다함께 활동가들의 신문 판매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있는데, 심지어 싼 티가 난다고까지 표현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 활동가는 뭘 그런 걸 다 물어보느냐는 듯 처음엔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있다고 해도 극소수일 거예요.”

“저희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없죠. 그게 그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여기서부터 목소리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다.)

“신문 판매는 다함께만의 특징이 아니라 세계 노동자 운동에 늘 존재했던 방식이에요. 영국 차티스트 운동에도, 러시아 혁명에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 혁명에도 신문은 존재했어요. 투쟁을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신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국제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의 전통이지 저희만의 방식이 아닙니다.”

“싼 티? 그런 말에는 물론 동의할 수 없지만, 저희가 싼 티 난다고 하는 사람에게 아마 이렇게 물어볼 수는 있겠죠. 저희들의 신문 판매 방식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대신 이러저러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말이에요.”

“신문 판매는 굉장히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일단 판매를 통해 얻는 수익은 저희들의 투쟁을 계속 이어 갈 수 있는 일종의 지지 기금이 되죠. 레프트 21은 노동자들이 신문을 구입할 때 내는 돈으로 만들어지는 신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삼성 같은 대기업의 눈치를 보는 다른 언론들과는 달리 올곧게 노동자들의 편에 설 수 있어요. 그리고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신문은 대화와 토론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신문에 실린 내용에 대해 노동자들과 즉석에서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니까요.”


“싼 티가 난다고 하는 사람은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신문 하나 판매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대화가 필요한데요. 끊임없이 설득하고 조직하는 과정이 없이는 신문 한 부도 못 팔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곧 정치잖아요. 사람들은 신문 하나를 살 때도 우리 편으로 지지할 수 있는 신문을 삽니다. 때문에 신문 판매는 정치적 지지를 조직하는 과정이기도 하죠.”

“한겨레나 조선일보가 종이 신문 없이 인터넷으로만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처럼 영향력이 있을까요? 신문 지면을 통한 조직과 선동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희 보고 싼 티가 난다고 하시는 분들은 그런 정치적 문제를 잘 모르는 분들인 것 같아요.”


(여기서 잠시 두 활동가들 사이에 대거리가 있었다. “싼 티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두고 정치적 문제를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그건 정치적 문제를 아는가 모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사상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가 아닐까?” 대거리 끝에 결국 이런 결론이 나왔다.

“누군가가 저희 보고 싼 티가 난다고 한다면, 그분의 정치적인 사상, 혹은 실천을 고민하는 방식이 저희랑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생각하는 실천적인 방식이 있겠죠.”

두 활동가들이 툭 터놓고 들려준 이야기들은 내가 그동안 품고 있던 생각들과 꼭 들어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함께 활동가들이 들려준 이야기로 쓰고 싶었다. 그런 내 앞에서 김지태 활동가가 “근데 이 얘기는 오늘 저희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과 좀 동떨어져 있네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형환 활동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걱정 마시라고, 글에 들어간다고 해도 곁다리로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어차피 다 쓰고 나면 원고 넘기기 전에 한 번 보여드릴 테니 그때 읽어 보시고 빼야겠다 싶으시면 빼시라고 했다. 두 활동가는 그제야 마음 놓은 얼굴을 했다.

쌍둥이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두 활동가들이 걱정했던 부분을 일부러 길게 살려 썼다. 그들이 말했던 ‘표현의 자유’가 내게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들이 신문을 팔며 외쳤던 것들 때문에 그들을 미신고 불법 집회 가담자로 몰아붙인 경찰들과 판검사들은 알고 보면, 신문 판매가 싼 티 난다고 서슴없이 못 박던 그 ‘똑똑한’ 인간들과 서로 놀랄 만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나를 끝내 놓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쪽은 정권의 사냥개들이고 다른 한쪽은 말하자면 ‘진보 진영’에 속해 있지만 둘 다 자신이 가장 옳을 수 있는 권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 둘이 보기에 여럿이 모여 정부를 비판하면 신문을 팔든 말든 집회가 되고, 목이 쉬도록 소리 질러가며 행인들 부여잡고 신문을 팔면 무조건 싸구려가 된다. 그 둘은 가장 옳은 존재가 되기 위해 복잡하게 굴지 않는다. 집회는 집회고 싸구려는 싸구려다. 그걸로 끝이다. 그 둘은 레프트21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다함께 활동가들이 어떤 마음으로 길거리의 한명 한명에게 신문을 파는지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말해 줘도 모를 것이다. 한쪽은 철학이 없다. 그래서 물음을 싫어한다. 다른 한쪽은 철학만 있다. 그래서 스스로 쥐어짜 낸 물음만 받아들인다. 둘 다 반쪽이다. 겉으로는 서로를 죽일 듯 미워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행동하지만, 마치 싸우면서 닮아 가는 쌍둥이 형제들처럼, 둘은 같은 것을 원하고 같은 것을 내친다. 그들은 결코 다르지 않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잘 안 될 테니

① 다함께 활동가들 6명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유치장에 처넣은 경찰들과, 신문 판매를 집회로 몰아 무거운 벌을 내리려 했던 검사들과, 집시법을 구역질나는 방식으로 풀이한 판사들은 죄다 개자식들이다.

② 대통령은 분명 바뀌었는데 내겐 똑같은 인간이 6년째 해 처먹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MB 정권 이전에도 노동자 편인 정부는 없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그 와중에 다함께 활동가들은 법정 싸움에서 졌고 이제 눈엣가시인 언론을 정권이 호되게 다스릴 수 있는 판례도 생겼다. 두 활동가들의 말처럼 이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신문뿐만 아니라 요즘 집회 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팩트TV’, ‘국민TV’, ‘고발뉴스’, ‘칼라TV’ 같은 이른바 ‘길거리 대안 언론’들도 머지않아 덫에 걸릴지 모른다. 돈 없고 힘없는 언론이 살아남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 ‘유일신’을 정성껏 섬겨야 하는 시절이 곧 닥칠 거라는 얘기다. 거짓말 같은가?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알지 않나. 불길한 예감을 언제나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거지같은 정권 밑에서 6년을 살았고 이제 곧 7년째가 된다는 사실을.

위의 짤막한 글들은 이 늘어질 대로 늘어진 글을 마무리하려고 끼적거렸던 자투리들이다. 근데 어차피 뻔한 말들 이제 와서 또 쓰면 뭐가 달라질까 싶어 그냥 집어치우기로 했다.

이야기를 끝낸 뒤 담배 한 대씩 나눠 피우고 헤어진 두 활동가들의 뒷모습은 내가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이 단단해 보였지만 그래도 뭔가 그들을 위해 작게나마 힘이 되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길기만 한 글이 두 활동가들에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신문을 팔게 될 다함께 활동가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니 지겨운 글 대신 내가 참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불러 보려 한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잘 안 될 거야
신경 쓰지 마
잘 될 턱이 없잖아
그래도 우리 삶에
가끔은 볕 들 날 오겠지
그래도 우리 삶에
가끔은 환한 날 오겠지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어차피 잘 안 될 거야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마
잘 될 턱이 없잖아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나는 이 노래를 흥얼거릴 때마다 몸과 마음을 따듯한 물속에 푹 담그는 것 같다. 뭘 해도 어차피 잘 안 될 텐데 왜 속을 끓이고 걱정을 해야 할까? 술 취한 밤에나 어울릴 그런 내던짐이야말로 나를 움직이는 힘이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무슨 일이든 저질러도 된다는 뜻이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비정규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장애인등급제와 고용허가제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존재할지도 모른다. 돈만 아는 저질들은 바퀴벌레가 알을 까듯 먼 훗날까지 징그럽게 번식할지도 모른다. 맑스는 스티브 잡스에 밀려 까맣게 잊힐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내가 다니는 일터에서 ‘운동’을 한답시고 껄떡거릴 수 있고, 돈 한 푼 안 되는 이런 글을 쓸 수도 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꿈꿀 수 있다. 어차피 잘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함께 친구들의 입맛을 내가 아주 조금은 아는데,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할 것 같진 않다. 두 활동가들에게 미리 사과드린다.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그래도 나중에 혹시 거리에서 만나게 되면 웃으며 인사해요 우리, 이 미친 나라의 앨리스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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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멀리서

    좋은 글 감사해요. 저도 그들의 우직함과 성실함에 늘 응원을 보냅니다. 비싸 보이는 거 좋아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헛짓거리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에 백프로 동의는 안하지만 헷갈리는 사안이 있을 땐 단호한 그들은 이럴 때 뭐라고 할까 궁금해서 찾게되는 신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