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20년’을 되찾기 위한 일본의 승부수

[주례토론회] 일본식 포퓰리즘의 등장과 신자유주의


[토론문-편집자주]

‘하시모토현상’에 담겨진 일본의 정서와 ‘아베노믹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 아베의 신사참배, 평화헌법 개정, 무기수출 원칙완화 등등 최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일본의 우경화 흐름을 두고 동아시아 주변국들 사이에 커다란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에 중일관계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터라 동북아 국제정세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변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작년 한 해 ‘아베노믹스’로 인기몰이를 한 아베정권은 탄탄한 여론지지를 기반으로 마이웨이 행보를 거침없이 이어나가고 있다. 게다가 하시모토와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까지 여기에 힘을 싣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할 정치세력이 부재하다는 점은 브레이크 풀린 아베정권의 폭주를 더욱더 부추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짚어볼 점이 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일본은 54년 만에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일본정치사의 전환기를 맞는 듯했다.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라는 구호로 집권한 민주당은 당시 각종 파격적인 복지공약을 내걸었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론 미일동맹에 종속되지 않는 자주적 외교와 ‘동아시아 공동체구상’을 표방하였고,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중국 방문단을 대대적으로 조직했었다. 비록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았지만, 미국에 예속되었던 일본의 외교관계의 방향을 바꾸려는 혁신적인 구상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장기불황 속에 일본 역시 계속된 경기침체를 벗어날 수 없었고 비정상적인 엔고현상으로 수출마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후쿠시마 핵사태를 거치면서 국가적 위기관리능력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각종 복지공약들이 줄줄이 후퇴하면서 민주당은 좌충우돌 끝에 침몰해 갔다. 그러다 2012년 소비세 인상 논란을 둘러싸고 격렬한 내분에 휩싸이다가 오자와 파벌이 대거 탈당하면서 민주당은 자멸하고 만다. 그리고 지금은 존재감마저 상실한 채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하여 불과 4년 만에 정치지형은 확 바뀌었고, 쪼그라들었던 자민당은 총선압승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60%에 이르는 지지율을 기반으로 거침없는 우경화 행보를 보여주고 있고, 이 때문에 주변국과의 긴장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의 반짝거렸던 짧은 시절은 그냥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일본 국민들이 다시 압도적이 지지로 자민당의 복권에 손을 들어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그냥 해프닝일까? 집권세력에 대한 실망감의 표출이라는 일반적인 평가만으로는 그들의 심연에 놓여 있는 정치 불신과 욕망을 온전히 이해하기 부족하다. ‘잃어버린 20년’에 담겨진 일본의 공통된 정서와 포퓰리즘의 확대는 서로 맞물려 있다.

이런 와중에 이를 비집고 세력을 키우고 있는 하시모토와 같은 극우 정치세력들이 있다. 중요한 건 하시모토와 같은 정치인의 등장이 아니라 ‘하시모토 현상’이라고 불리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이다. 이런 열망은 앞서 언급한 ‘잃어버린 20년’을 되찾고 싶은 욕망과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이 혼재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도 지난 대선 비슷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것은 ‘안철수 현상’이라 불렸고, 서울시장 자리를 박원순에게 양보했던 그의 의외의 행동은 대중들로 하여금 심연에 자리 잡고 있었던 변화의 욕망을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지금은 그 열기가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호남에서 보이는 안철수 신당에 대한 높은 지지도는 여전히 대중적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런 기대는 기존 정당 질서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분출하는데, 과거 중요한 선거 국면들을 돌이켜 보면 심심치 않게 자주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인제, 박찬종, 문국현 등이 지금의 ‘안철수 현상’을 대신했던 인물이었다. 2000년 바람을 일으킨 총선낙선운동도 인물을 세우는 방식이 아닌 떨어뜨리는 방식이었지만 그 기저엔 정치변화에 대한 대중적 욕망을 담고 있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12%의 지지율 역시 계급투표에 의한 지지라기보다는 기존 지역별 정치질서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확대해 보면 소외된 충청도 민심을 자극하면서 정치생명을 연명했던 자민련이나 특정 정치인의 팬클럽을 자칭한 친박연대 역시 기존 정당들의 기득권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던 세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유효기간은 별다른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할 때, 대중적 관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될 때, 종료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과 일본 공히 90년대부터 기존 정당 정치에 대한 불신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불만을 반영했던 새로운 정치그룹들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고, 정당 정치의 틀은 점점 더 해체됐다. 무당파적 경향이 증가하는 현상은 이를 방증한다. 한국이 고착화된 지역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에서 ‘새정치’의 욕망이 분출하였다면, 일본은 소위 ‘55년 체제’라 불리던 자민당 독주체제와 ‘정치-관료-기업’의 카르텔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90년대부터 시작된 장기불황과 삶의 위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해결책을 못 내놓고 있는 무능한 정치현실이 정치 불신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런 정치현실에 대한 불신과 ‘새정치’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때론 2009년 하토야마 정권을, 때론 2012년 아베정권을, 때론 하시모토와 같은 극우 정치인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소비세 증세와 TPP추진, 그리고 원전 재가동이라고 하는,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에 역행하는 민주당 정권에의 실망을 배경으로, 로컬 포퓰리즘이 석권하고 있다.” - 세카이 2012년 7월호 특집 ’하시모토 유신-자치 없는 개혁의 내실은’)

현재 높은 지지율을 가지고 있는 아베정권은 그 열망의 기저에 깔려있는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봤다. 그리고 당선도 되기 전부터 그 구체적인 정책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아베노믹스’이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을 한꺼번에 되찾을 기세로 일 년 동안 밀어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베노믹스’의 성패는 아베정권의 앞날을 결정지을 중요한 지렛대가 될 것이다.

왜 ‘잃어버린 20년’인가? - ‘55년 체제’의 붕괴

그럼 먼저 인구에 그토록 회자되는 ‘잃어버린 20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일본은 90년대 대내외적으로 격변에 휩싸였다. 내부적으론 부동산 버블붕괴 이후 장기불황이 지속되었으며, 국제관계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는 등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변은 40년 가까이 지속된 자민당-관료-재벌 지배체제에 대한 시대적 변화를 요구했고, 구체적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로 나아갔다.

그러나 파벌정치에 뿌리를 둔 자민당 중심의 관성화 된 체제는 이런 신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을 수용하기 힘들었다. 자민당 내에선 각 파벌간 대립이 심해졌고, 신당 창당을 위해 탈당러시가 벌어졌다. 소위 ‘55년 체제’라 불리는 자민당-사회당 양당 구조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55년 체제’란 1955년 선거를 기점으로 자민당과 사회당 양 그룹으로 지배구조가 확고하게 정립된 체제를 말한다. (<1>외교안전보장: 헌법9조와 미일안보체제, 자위대의 공존, 경무장 경제중심 노선/ <2>정당시스템: 정권교체 없는 자민당 일당 우위체제, 만년 야당 사회당/ <3>정책내용: 보수 정당(자민당)에 의한 재분배 정책/ <4> 정책결정 시스템: 관료 우위와 장기 집권 여당의 결합 - 자료: 야마구치 2004)


균열의 첫 단추는 93년 미야자와 내각불심임에 자민당의 오자와 파벌이 동참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8개 정당이 모인 비자민당-비공산당 연립정권이 등장하였는데, 총리로 선출된 비자민당 출신의 호소카와는 전후 역대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74%라는 높은 지지율을 얻기도 했다. 취임 후 호소카와는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라고 말하면서 사과와 반성을 피력했다. (그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식민 통치를 지배한 것에 대해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고 사죄한 바 있다.)

그러나 청렴함을 중요시 여겼던 호소카와는 정치자금 문제로 연립내각이 논란에 휩싸이자 돌연 사퇴하고 만다. 결국 10개월 만에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은 단명하게 되었고, 한 차례 이합집산이 이뤄진 후 극적으로 자민-사회-사키가케 3당 연립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당 위원장이었던 무라야마가 총리에 오른다. 그는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명시한 담화를 발표했는데,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그 유명한 ‘무라야마 담화’이다. 이는 이후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으로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나, 일본의 우익들은 이를 개인적 의견으로 깎아 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렇게 사회당의 수장을 얼굴로 내걸고 새롭게 등장했던 무라야마 내각이지만 자민당 중심의 정치체제에는 변화가 없었다. 연립정권 내에서의 잠복된 갈등은 여러 갈래로 터져 나왔다.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출범 시 탈당했던 자민당 출신들이 다시 자민당으로 들어오고 여전히 파벌 중심의 정치구조가 재생산되었다. 심지어 사회당은 소선구제로 선거법이 바뀌자 95년 참의원 선거에서 대배하고야 만다. 이념적으로 그나마 좀 더 가까웠던 공산당과는 선거연합에 대해 이야기조차 못 꺼낼 정도로 견원지간이었고,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과 변화의 욕구를 다른 신생정당들이 흡수하면서 수 십 년간 만년 야당으로만 존재했던 사회당은 1등만 뽑는 소선거구제에서 득표율의 확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회당은 96년 사회민주당으로 간판을 다시 달게 되었다. 그러나 30여명의 의원들이 신당 사키가케의 하토야마 유키오(이후 2009년 일본의 역사적 정권교체의 주역)가 구상한 신당 구상에 동참하면서 ‘55년 체제’의 한 축이었던 사회당은 역사적으로 소멸해갔다.

그렇다면 ‘55년 체제’의 다른 주축이었던 자민당의 지배체제는 과연 유지될 수 있었을까? 형식적으론 여러 이합집산을 통해 여당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나, 이미 그 역할은 앞서 언급한 93년을 기점으로 시효를 다하였다. 여당으로서만 존재해야 그 기능할 수 있었던 자민당과 야당으로만 존재해야 했던 사회당은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면서 한계를 곧바로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관료들도 찾아오지 않고 기업들로부터 후원도 받지 못했던 자민당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만년 야당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회당은 집권의지 자체가 없었는데, 전체 선거구에서 후보를 낸 지역이 절반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형적인 ‘55년 체제’는 결국 90년대 몰아닥친 대내외적 격변의 회오리바람에 추풍낙엽처럼 무너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타성에 젖은 관습과 뿌리 깊은 파벌정치에 의해 정치개혁은 뒷전으로 밀리고 정치생명을 연명하기 위한 이합집산만이 거듭되었다. 각종 미니정당들이 창당하고 합당하였지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대중들의 정치 불신은 극도로 높아져만 갔다. 또한 여기에 십년 공황이라 불리던 당시 경제상황은 이후 심각한 재정적자문제를 야기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경제부흥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지만 경기는 잠깐 회복하다가 다시 곤두박질쳤고, 잠복된 부실은행 문제는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여러모로 90년대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다시는 돌아가기 싫은 암흑기였다.

왜 ‘잃어버린 20년’인가? - 고이즈미식 포퓰리즘의 등장과 신자유주의 개혁

2000년대 들어 이러한 대중의 불만을 자극하면서 등장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고이즈미였다. 당시 자민당 내 비주류였던 고이즈미는 몇 번의 도전 끝에 자민당 총재에 당선된다. 그리고 당내의 주류분파들에 대해 기득권을 철저히 쳐부수겠다고 공언하면서 내부적인 전쟁을 선포한다. 고이즈미식 포퓰리즘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고이즈미의 행동은 일본인들에게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줄 구세주로 떠올랐고, 당시 고이즈미 총리의 캐릭터를 본 딴 인형과 악세서리가 불티나게 팔 릴 정도로 고이즈미 열풍은 대단했다. 이런 현상은 높은 지지율로 확인되는데, 아사히신문 여론조사 결과 5년 5개월 동안 평균 50%에 이르는 지지를 유지했다.

고이즈미가 이런 개혁정치에 시동을 걸 수 있었건 이유는 전에 있었던 하시모토 내각에 의해 행정개혁이 이뤄지면서 자민당의 정치 기반(파벌, 개인후원회, 상향식 의사결정)이 차츰 붕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선거구제로 바뀐 상황에서 강화된 내각기능과 함께 공천권을 쥐게 된 총리의 영향력이 막강해 졌다. 고이즈미는 공천권을 무기로 낡고 닳은 늙은 정치인들을 쫓아냈고, 이를 거스르고 후보로 나간 인물들에 대해선 ‘고이즈미가 보낸 자객후보’를 내세워 낙마시켰다.

고이즈미 개혁의 최절정은 ‘우정해산’이라 불리는 2005년 내각해산이다. 자민당의 최대파벌이 모여 있던 우정국을 깨부수기 위해 고이즈미는 우정개혁법안을 상정하는데, 참의원에서 이것이 부결되자 국민들에게 다시 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중의원을 해산하고 새로 선거를 실시하는데, 여기서 압승하면서 우정개혁법안을 통과시키고 동시에 지지기반을 더욱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그의 정치행보로만 보면 모든 것이 드라마틱했다. 고이즈미는 타고난 언변가에 승부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였다.

그러나 고이즈미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자민당 식 나눠먹기 정치구조에 의해 가로 막혔던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한 것에 불과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기존 파벌정치와 충돌이 불가피한데, 이들은 지역에 산재해 있는 이익집단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정치생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우정국 개혁도 미국의 요구가 반영된 것인데, 우체국 예금으로 묶여 있는 일본인들의 엄청난 금융자산을 민간은행으로 이전시켜 민간금융시장을 활성화시키는데 숨은 목적이 있었다. 일본의 우체국은 모든 지역에 곳곳에 존재하며 지역 유지들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일종의 대민센터의 역할을 맡았던 것이 우체국인데,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에 모든 예금을 저축하고 있다. 당시 일본 우체국 금융은 2003년 기준으로 자산(예금+보험)이 400조엔을 넘어 4대 민간 은행 예금잔액(226조엔)과 4대 생명보험사 총자산(121조엔)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2005년 민영화 추진 이후 덩치가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300조엔을 넘는 자산을 보유했었다.

이외에도 많은 신자유주의적 경제법안들이 도입되고 확장되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파견법은 이전부터 도입되었었는데, 고이즈미 때 와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변화들이 가져온 결과는 실질소득감소와 고용의 불안정이었다. 고이즈미가 집권한 2000년대 초중반은 미국의 부동산 버블에 힘입어 세계경제가 활황을 보일 당시여서 일본도 잃어버린 90년대의 아픔을 잊어낸 듯 최장기 경기호황을 가졌다. 그러나 경기회복의 과실은 일부 부유층과 기업들로 한정될 뿐, 실제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실제 일본은 97년을 정점으로 지금까지 실질임금이 계속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삶의 추락은 2008년 일명 ‘아끼하바라 살인사건’을 계기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공분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체포된 가토 도모히로로는 파견노동자 신세를 전전하다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삶을 포기한 채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사람을 짜르는 기업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던 일본인들의 정서에서 파견노동자들의 증가와 노동자 삶의 추락은 고이즈미 개혁이 과연 누굴 위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반감은 2009년 민주당의 정권교체로 이어지게 된다.

경제부흥을 위한 원한과 욕망 - “두 배로 갚아주겠어!”

일본에게 있어서 90년대가 ‘55년 체제’의 붕괴와 버블경제의 혼란기였다면, 2000년대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임금소득의 감소와 고용불안, 삶의 질이 추락하는 양극화의 시기였다. 이렇게 ‘잃어버린 20년’을 보낸 일본인들에게 경제문제를 회복하고 세계경제대국의 옛 명성을 되찾으려는 욕망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작년 일본에서 40%를 넘을 정도로 히트 친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가 있는데, 91년 버블경제 직후 ‘산업중앙은행’에 입사한 주인공이 2001년 ‘도쿄은행’으로 합병된 후 은행 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복수를 다루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은행이름은 가상이지만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심장함이 있다. 바로 돈줄을 쥐고 있는 은행이 그 시기에 산업부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에 대한 탄식이 담겨 있다.

이 드라마 첫 장면부터 은행의 역할이 무엇이여야만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술력은 출중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금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의 사장이, 사람만큼은 결코 자를 수 없다고 울부짖으면서 주인공 앞에서 도와 달라 머리를 숙인다. 다른 은행원들은 그저 돈을 회수하기 바쁘고, 대출실적을 올리기 위해 대기업 사장들과 결탁해 부당대출마저 저지르지만, 주인공은 은행이 절실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주변의 부당함에 맞서 싸워나간다. 자금난에 시달리다 목메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의 회상 신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 가볍고 튼튼한 나사 하나가 일본을 지탱하고 있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모두 “기술력 넘버원”, “일본식 경영 최고”를 연발했던 70-80년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주인공이 결정적 순간에 분노에 찬 얼굴로 외치는 말이 있다. “두 배로 갚아주겠어!” 여기서 말하는 복수의 대상은 드라마에선 악랄한 은행간부로 등장하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상징하는 것은 ‘잃어버린 20년’을 책임져야할 무능하고 자기 이익에 급급한 정치인들과 관료들이다. 이들에 대한 복수로 되찾고 싶은 것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70-80년대의 영광이다.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드는데, 45년 패전국이었던 일본이 어떻게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나 라는 점과 이런 일본이 또 어떻게 쇠락을 거듭했는가이다. 이를 위해서 종전 이후 일본경영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누구인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정치-관료-기업’의 굳건한 카르텔의 주축은 통상산업성(통산성)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30년대 만주국을 세웠던 검증된 실무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후 통산성의 산업정책과 행정지도의 원천은 바로 1930년대 전시통제경제의 군수성과 상공성의 재현이었다. 이로 볼 때, 1970년대 일본의 번영은 전시통제시대의 산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아리사와 히로미).

통산성의 진정한 영향력은 산업정책의 통제 관리였다. 여기서 말하는 “산업정책이란, 서구의 경제용어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 특유의 용어”(로버트 오자키)인데, 미시적 측면의 산업합리화정책과 거시적 측면의 산업구조정책을 일컫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산업구조정책이다. 산업구조정책의 핵심은 개발이 필요하거나 다른 부분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는 전략산업의 선정에 있다. 일본의 산업정책의 특이성은 계량경제학적(cost-benefit analyses)로는 그 정책효과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데 있다. 개발도상국의 발전주의 경제학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국가경영을 위한 제반 산업육성에 재정, 무역, 외교, 국방까지 포괄했던 전시통제경제의 전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이는 통산성 명칭(Ministry of International Trade and Industry, MITI)의 중간에 들어가는 “International”의 뜻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나중에 신자유주의 경제개혁 이후 위상이 추락한 통산성은 그 명칭을 경제산업성(Ministry of Economy, Trade and Industry, METI)으로 바꾼다.

또한 여기에 전시경제의 주축이었던 ‘재벌’들을 빼놓을 수 없다. 종전 직후 미군정은 전범들을 처단하고 군수재벌기업들은 해체했지만, 48년 중국혁명 이후 위기를 느낀 미국은 일본에 대해 통치전략을 수정한다. 다시 전범들이 정치와 관료층에 복귀하고 재벌들이 회생하기 시작했다. 만주국을 디자인했던 이들이 49년 발족한 통산성으로 모이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철저하게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재벌들은 앞서 언급한 ‘55년 체제’(정치-관료-기업)를 작동시켜 왔던 주축이 되었다. 이들 재벌들은 50-53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엄청난 군수물품의 수출길이 열리면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55년 전전의 경제수준을 달성하는 경제기초가 되었고, 이후 일본은 안정적인 미일동맹을 발판으로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가장 흔히 회자되는 뛰어난 기술력과 근면성이라는 것은 숨겨진 결정적 요인이 아니다. 바로 전전 시기부터 이어져온 통산성의 국가경영 전통과 재벌들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제성장은 70년대 미국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함께 점차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먼저 거시경제정책의 차원에서 미일 간 무역수지 불균형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국내정책을 변경할 것을 요구받는다. 70년대부터 불황에 빠진 미국은 일본에게 세계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을 종용하기 시작하는데, 카터 행정부는 일본이 고성장과 내수 확대를 기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재정지출에 의한 공공사업 강화, 금리인하 등 금융정책의 완화들을 요구했고 일본은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70년대 말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장성(재무부) 주도의 재정재건 노선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고성장 노선을 철회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일본의 내수확대 정책은 대장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제약되게 된다.

이런 갈등은 80년대 미일무역 마찰이 발생하면서 심화된다. 대표적으로 자동차, 반도체, VTR, 공작기계 등 당시 일본 산업의 주도적 부분과 ‘관제고지’라 불리던 첨단분야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컴퓨터와 반도체는 통산성의 중점 육성 목표였다. 이들 개별 마찰들은 전체 구조 문제로까지 발전된다. 생산구조 차원에서는 일본기업들의 폐쇄적 거래관행과 일본시장의 폐쇄성 문제를 미국이 지적하기 시작했고, 미래 주력산업에 대한 정부개입을 제한하도록 요구함으로서 일본정부의 정책 선택폭을 제약하기 시작했다.

무역마찰 초기에 통산성은 미국과의 대결자세가 잠재된 ‘경제 안정보장론’을 제시하면서 대응했지만, 개별 마찰들이 점차 내각차원의 대응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통산성, 대장성, 외무성, 농림수산성 등은 자신이 관할하는 사안에 대해 양보압력을 받게 되었다. 통산성은 산업구조 고도화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통상마찰 사안 중 일부를 적극적으로 양보했고, 대장성은 자신의 재정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금융정책 및 환율정책을 양보카드로 제시했다. 외무성은 이 두 가지 주요 행위자들과 보조적인 행보를 취했다. 당시 나카소네 정권은 적극적인 대미 양보파였는데, 85년 ‘시장 개방을 위한 행동지침’이라는 포괄적인 수입 대책을 정상회담 직전 선물로 마련하는 등 아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80년대부터 일본에 본격적으로 불어 닥친 미일간 경제 갈등은 일본으로 하여금 정부역할을 축소하도록 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도입하길 요구받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일본의 상황에서 그러한 개혁은 조용히 얘기될 뿐이었다. 더구나 자민당 지배구조가 지역유지들과 이익단체들의 후원으로 결탁된 파벌정치여서 신자유주의적인 정치개혁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였다. 그리고 86년부터 일본을 뜨겁게 달구었던 버블경제의 초호황 국면은 더욱더 그런 필요성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결국 모든 문제들이 91년 버블경제가 붕괴되고 나서야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옛 것은 갔으나 새것이 준비되지 못한 일본은 혼돈 속에 빠졌고, 90년대 기나긴 악몽이 시작되었다. 앞서 살펴본 93년 ‘55년 체제’의 종말과 이합집산은 새것을 찾기 위한 성장통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귀결점이 된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식 개혁이라는 것도 과거 일본의 경제부흥을 되찾아주지 못한 채 경제양극화와 정치체제의 혐오를 더욱 부추기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드라마 주인공이 외쳤던 “두 배로 갚아주겠다”는 의미는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 일본의 시대적 분노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경제부흥시절로의 회귀하려는 ‘아베노믹스’의 결과는?

50-60년대 일본의 경제부흥기의 시절 통산성 중심의 강력한 리더십은 ‘아베노믹스’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된다. 바로 ‘3개의 화살’이라고 부르는 경기부양책(공격적 금융완화, 대규모 재정확대, 획기적 성장전략)이다. 중심국들의 무제한적 양적완화로 인해 이미 신자유주의적 통화질서가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베노믹스’의 위상은 기존의 국내적 수준의 경기부양책과는 수준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공격적 통화정책에 의한 환율조정, 무기수출 제한조치완화, 미국의 셰일가스 대일수출 허용 등, 일련의 미일간 협력조치들을 볼 때, 아베정권이 미국과의 적극적인 외교적 공조 속에서 경제부흥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베 총리는 작년 동남아시아 10개국을 돌며 대대적인 세일즈 외교를 펼쳤는데, 자국의 원전 및 인프라 수출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중국과 영토 갈등을 빚는 동남아 국가들을 독려하여 '반중전선'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이는 마치 과거 ‘55년 체제’에서 통산성이 일궈냈던 경제부흥을 재현시키고자 하는 인상을 풍긴다. 냉전시기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을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삼는 대신, 일본의 경제부흥을 지원하고 동아시아를 일본의 경제적 배후지로 인정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중국과의 전략적 공조를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해 일본을 지렛대로 삼고 있다. 그리고 경제부흥을 갈망하는 일본은 이런 상황을 미국과의 철저한 동맹을 기반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중일간 영토갈등 문제와 감정싸움은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베노믹스’는 몇 가지 지점에서 과거와 다른 정세적 위치에 놓여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과거 경제부흥기는 성장하는 미국자본주의와 냉전이라는 진영구도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정치경제적 헤게모니가 많이 위축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세계경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내키지 않지만 중국과의 전략적 공조를 계속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시장 접근을 위해 일본의 경제인들이 대거 중국을 방문하는 모습만 봐도, 과거와 같은 확실한 진영구도에 입각해 일본이 안정적인 배후지를 획득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구조가 뿌리 내린 현 상황에서 과거 경제부흥기와 같은 시절의 산업구조와 경제구조를 만들기 위해선 긴 시간과 진통을 견뎌야 한다. 60%가 넘는 일본인들이 ‘아베노믹스’를 지지하면서도, 자신의 경제상황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람이 40%도 안 되는 최근 상반된 조사결과는 ‘아베노믹스’의 효과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감소와 양극화만 부추긴 채 사람들의 마음속에 배신감만 안긴 고이즈미의 경제개혁과 같은 운명을 걸을지 두고 더 볼 일이다. 그 분수령은 2014년 올해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그래서 ‘아베노믹스’는 양날의 칼을 품고 있다. 만약 실패한다면 정치적 무능에 대한 일본인들의 분노는 더욱더 커져만 갈 것이고, 새로운 포퓰리스트들의 등장을 앞당길지 모른다. 그리고 아시아 경영을 둘러싸고 중국과의 양보할 수 없는 갈등구조가 자리 잡고 있는 한, 그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점점 더 위험에 빠트릴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진보세력들이 그런 우익적 행보에 조금이나마 제동을 걸 수 있도록 동아시아 정세를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허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메워지지 않는 감정의 골과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갈등체제는 그것마저도 얼마나 요원한 일인가를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토론문 끝]

* 토론문 정리 : 송명관(참세상 기획위원)
** 발제자와 협의 하에 당일 발제문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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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진(홋카이도대 법학연구과)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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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너무달라요

    일본도 보면 한국과 공통점이 많이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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