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서비스 43일의 투쟁...‘꿈’을 이룬 사람들

[인터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 (1)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염호석 열사의 유언에 따라 정동진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43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열사의 유골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노조 결성 1년 만에 체결한 임단협의 성과가 고인의 영정 앞에 놓였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한다’던 염호석 열사는 그렇게 44일 만에 눈을 감았다.

염호석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1천 여 명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울음을 삼키며 서초동 삼성본사 앞으로 모여들었다. 노동자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본사 건물 밑에서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마냥 버텨야만 하는 기약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삼성 노동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기나긴 농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유쾌함과 여유로움이 필요했다. 슬픔의 눈물은 정동진에 도착해서 쏟아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20대의 젊은 노동자와 중년의 노동자,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는 노동자들은 지난 43일의 기적 같은 시간을 만들어냈다. [편집자주]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20년 록커 인생에서 삼성전자서비스 기사로
노조 결성으로 다시 ‘저항정신’ 찾아...“노래패는 큰 즐거움”


누구보다 농성투쟁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노래패’와 ‘율동패’ 소속 조합원들이다. 농성 기간 중 결성된 팀 치고는 실력이 상당하다. 매일 연습을 거듭하는 덕이다. 단독 공연 뿐 아니라 여타의 간접고용 사업장 노동자들과 ‘합동공연’을 벌이기도 한다.

노래패 ‘밧데리’를 이끌고 있는 평택분회 안경주 조합원은 과거 ‘록커’ 출신이다. 학창시절부터 서른다섯 살 까지 무려 20년 동안 언더에서 록 음악을 해 왔다. 과거 몸담았던 록 그룹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별로 유명한 팀이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친다. 겨우 알아낸 그룹이름은 ‘라이징 포스’였다. 유명한 기타리스트 ‘잉베이 맘스틴’의 곡명이다. 록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록커라면 ‘저항정신’ 아니냐고 묻자 반가운 듯 맞장구를 친다. 20년간을 ‘저항정신’과 록커의 ‘자존심’으로 살아온 그였다.

“록 음악을 하다가 서른다섯 즈음에 대천 해수욕장에 록카페를 차렸어요. 그런데 거기가 시골이라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죠. 그래서 망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록카페가 아닌 ‘7080 라이브 카페’로 바꾸면 돈을 벌 것이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록 음악을 하던 사람이 7080은 가능하지 않죠. 자존심이 있잖아요. 그래서 1년 반 만에 빚만 지고 평택으로 올라왔어요. 당시 친구가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서비스기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기술이나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친구의 권유로 일을 시작했지만, 현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한 처우들이 이어졌다. ‘저항정신’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고객한테도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반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에는 CMI라는 고객만족 평가 제도가 있잖습니까. 평가 항목에는 ‘불만’도 있고 ‘매우 불만’도 있습니다. 보통 기사들은 ‘매우 불만’이 1년에 한 번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루에 ‘매우 불만’이 두 번이나 나왔어요. 잘릴 뻔 했습니다. 결국 반성문을 쓰고 저녁에는 자아비판을 했어요.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나가봤자 음악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돈도 없는 상황이었죠. 사장하고도 많이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버텼던 것은 ‘살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항정신도 다 없어졌어요. 저항은 마음속에 갇혔고, 매일을 참고 견뎠어요. 그러다보니 센터에서 A급 기사가 돼 있더라고요. 회사는 일이 들어오면 A급 기사들에게 가장 먼저 일을 꽂아줘요. 성수기에는 새벽 1~2시까지 일을 했고, 노는 날도 없었죠”


타 기사들에 비해 건당 수수료도 많이 가져간 그였지만, 행복한 생활은 아니었다. 그러다 아산 지역에서 연락 한 통을 받았다. 노조를 만든다는 소식이었다. 안경주 조합원은 뛸 듯이 기뻤다. 곧 이어 평택센터에도 노조가 설립됐고, 그는 최초로 노조에 가입했다. 조합원들도 모으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켜켜이 쌓여 왔던 저항의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노조가 결성된 후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전에 평택센터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노조가 생긴 뒤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노조를 하면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의 역사를 쓰고 있다고 말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기업 삼성을 상대로 부당한 것을 비판하고, 노동자들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삼성본관 앞 농성에 돌입하면서, 안경주 조합원에게 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생겼다. 그동안 지역 집회에서 선보였던 노래실력을 인정받아, 그는 자연스럽게 노래패의 대장이 됐다. 록밴드 이후, 제 2의 음악 인생을 열게 된 셈이었다. 그가 20년 동안 지켜온 록음악은 아니었지만, 민중가요라는 새로운 장르도 꽤 매력적이었다. 처음에는 생경하던 가사들도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스스로 편곡에도 도전했다.

“민중가요를 처음 듣고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뽕짝 같은 노래도 있고 욕이 들어간 가사도 있었거든요. 제가 욕하면서 노래하는 것은 또 싫어합니다. 그런데 듣다보니 점점 민중가요가 록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가사에는 분명 저항정신이 있었고 마음에 와 닿기 시작했어요. 특히 ‘민들레처럼’이라는 곡은 너무 좋았어요. 제가 원래 서정적인 록발라드를 무척 좋아합니다. 민들레처럼 등의 민중가요는 편곡도 했어요.

지금 너무 재미있고 좋습니다. 노래패 활동을 한다는 자부심도 있어요. 다른 노동자들이 투쟁 다닐 때 우리는 빡세게 노래 연습을 하고 있거든요. 항상 이야기해요. 우리는 저 분들 투쟁하고 다닐 때 시원한 곳에서 연습하고 있는 것 아니냐, 그만큼 노동자들이 우리 노래를 듣고 충전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노래패 이름도 ‘밧데리’예요. 정말 연습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음악을 이렇게 하게 된 것이 꿈만 같아요. 어떨 때는 잠자리에 들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려고 내가 음악을 배웠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농성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물으니, 힘든 점 보다는 ‘억울했던’ 기억이 있다며 토로했다. 비를 피해 한남대교 밑에서 노숙을 할 때, 조합원들 앞에서 임재범의 노래를 구성지게 부른 직후였다. MR파일이 아닌, 원곡 파일에 맞춰 노래를 부른 통에 ‘립싱크’ 논란이 일었다. 그는 인터뷰 중 “노래 이후 조합원 반은 ‘임재범 목소리와 똑같다’고 이야기하고, 또 다른 반은 ‘립싱크였다’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단언코 저는 립싱크를 하지 않았습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나 억울했던 지 말수가 적다고 소문 난 그는 끝내 집회 발언에 나서 “립싱크를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어느새, 그에게 음악은 다시 ‘자존심’이 됐다.

아이돌 그룹 준비하던 청년.
삼성전자서비스 ‘율동패’로 제 2의 ‘춤바람’ 인생


‘율동패’로 또 한 번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도 있다. 과거 유명기획사 연습생으로, 90년대 인기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 백댄서로 활동해 왔던 성남센터 이우식 조합원이다. 그는 ‘젝스키스 멤버 중 누가 제일 성격이 이상하느냐’는 질문에도 고심 끝에 답을 주는 성실맨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젝스키스 백댄서를 했고, 3학년 때 SM연습생으로 들어갔어요. 연습생 시절에는 매우 어려웠어요. 매일 볼품없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같이 연습하던 멤버 중 잘사는 아이가 있었어요. 연습 후에 나가서 쇼핑을 하고 돌아와 몇 십만 원 짜리 옷을 보여주며 ‘형도 이거 입어봐’라고 하더라고요. 참지 못하고 나왔어요”

연습생 생활을 정리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전역하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다시 한 번 연예계 쪽에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컴퓨터 기사 같은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는 꿈도 있었어요.” 결국 그는 그동안 꿈꿔왔던 ‘엔지니어 기사’를 선택했다. 2005년 삼성전자서비스 센터에 입사를 했으니, 벌써 햇수로 9년 차 엔지니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일은 나름 재미있었어요. 돌아보면 부당한 것이 많았는데, 그 때는 이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분간이 안됐어요. CMI에서 불만이 하나 뜨기라도 하면 죄인처럼 있었어요. 이런 시스템들이 잘못된 것인지 몰랐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성실하게 일했어요. 노조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센터에서 동갑내기 친한 친구가 노조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그는 이우식 조합원에게 “내가 먼저 나서서 할 테니 믿고 따라와 달라”고 말했다. 이우식 조합원은 그 말 한마디만 믿고 노조에 가입했다. 그 친한 동갑내기 친구는 지금 성남센터 분회장이 돼 있다. 이우식 조합원은 노조 가입 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부당함을 알게 됐고, 이를 바꿔내기 위한 노동자들의 결의가 어떤 힘이 있는지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지난 30여 일 간의 농성 기간 중 결성된 율동패는 그에게 너무 큰 행복이었다.

“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살았는데, 노조 덕에 다시 춤을 출 수 있게 됐어요. 처음 노조에 가입한 후, 문선하는 분들을 보면서 ‘춤을 왜 저렇게 추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투쟁 중에 몸짓 ‘선언’의 박현욱 동지를 만났습니다. 그 때 박현욱 동지가 ‘몸짓패는 투쟁의 선봉에 서서 몸짓으로 싸우듯 선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때 했던 말이 마음에 감동으로 남았어요.

실제로 해 보니까 춤이랑 문선은 많이 달랐어요. 문선은 마치 무술처럼 각이 중요해요. 그동안 춤을 출 때 비트에 의존에서 췄다면, 문선은 가사를 몸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제 문선도 몸에 많이 익었어요. 율동패 구성원들 모두 문선은 처음 해 봤어요. 현재까지 ‘비정규직철폐연대가’와 ‘단결투쟁가’, ‘진짜사장이 나와라’ 3곡을 배웠어요. 현재는 ‘세상을 멈춰라’를 배우고 있어요. 지금까지 배운 것 중에는 ‘비정규직철폐연대가’가 제일 좋아요. 우리가 비정규직이니 비정규직을 철폐하자는 노래가 제일 좋지 않겠어요?”


43일의 노숙농성에도 노조가 투쟁 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즐겁게’ 투쟁하자는 마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대학로 등지에서 진행한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버스킹(거리공연)도 즐겁고 신선한 파업 프로그램이었다. 이우식 조합원도 버스커로 공연에 참여했다. 10년 전 짰던 안무도 선보였고, 가수 ‘비’의 ‘라송’을 공연하기도 했다.

“가장 즐거웠던 투쟁도 있어요. 6월 6일 현충일 날 삼성본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이 있었거든요. 그 때 갑자기 ‘몸짓패는 선봉에 서야 한다’는 박현욱 동지의 말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율동패 중 한사람에게 ‘우리가 한번 선봉에 서 보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말했지만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뭔가를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성남분회장아게 라송을 틀어달라고 했어요. 분회장이 흔쾌히 노래를 틀어주더라고요. 대치중인 경찰 앞에서 조롱을 하듯 라송에 맞춰 춤을 췄어요. 즐겁고 통쾌한 경험이었어요”

그는 30여 일 간의 농성 중 어려운 점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성남분회는 어느 센터보다 결의가 높은 곳이라며 자랑스레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내도 언제나 그를 응원하는 응원군이다. 17개월 난 아이가 많이 보고 싶기는 하지만, 꼭 승리해서 돌아가고 싶다. 그는 “농성이 아무리 힘들어진다고 해도 노조는 꼭 지킬 것”이라며 “노조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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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목록
  • 조합원

    ㅅㅈㅋ민주추진위도 연대한다,,,,,,투쟁

  • 반지

    멋있다~!!

  • 부럽

    우리 미조직 노동자들도 이들처럼!!! 함께 싸우는 동지덜이 10명미만인 사업장은 어케해여?

  • 이학천

    멋지다.안경주행님,우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