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164명 중 8명만 보상? 삼성, 결국 직업병 외면하나

“나머지 피해자들은 나가떨어지란 얘기냐” 삼성 직업병 피해자 반발

삼성전자와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이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수백 명의 피해 노동자들은 내심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교섭에 돌입한 지 세 달 동안, 삼성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안’ 조차 내 놓지 못했다. 교섭에 참여하고 있는 8명의 피해자 및 가족들에 대한 우선보상 주장만을 거듭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현재 삼성그룹 내 전자산업 부문 계열사에서 일하다 백혈병, 뇌종양 등 직업병을 얻어 반올림에 제보한 노동자는 223명이다. 그 중 이번 협상 대상자로 포괄되는 삼성전자 반도체, LCD 부분 제보자는 164명이다. 이들 중 이미 70명은 사망했다.

삼성이 교섭단에 포함된 8명을 우선 보상하겠다는 방침을 굽히지 않으면서, 제보자와 가족들은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입었다. 교섭단에 참여하고 있는 가족들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결국 유방암, 다발성경화증, 재생불량성빈혈 등으로 투병중인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과 자녀를 잃은 피해노동자 모친 등이 18일 오전,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증언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전자는 일하다 병들고 죽어간 모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보상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 164명 중 8명만 보상? “나머지 피해자들은 나가떨어지란 얘기냐”

직업병 피해자 박민숙 씨는 지난 91년부터 98년까지, 7년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유방암을 얻었다. 박 씨는 “일하는 동안 주변에서 유산, 불임 등의 고통을 봐 왔다. 나 역시 유산과 불임에 이어 유방암까지 얻게 됐다”고 밝혔다. 그녀와 함께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투병해 온 고 이숙영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박 씨는 “제보한 이들 말고도 오래전 일이라 숨기려는 피해자들도 많다”며 “아픈 사람들이 직접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것 같아 용기를 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미선 씨도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97년 6월에 입사해 3년 반 동안 삼성 LCD공장에서 일을 했다.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다리와 팔에 힘이 풀리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병원신세를 졌다. 그녀의 병명은 이름조차 생소한 ‘다발성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이었다. 왼쪽 몸이 마비됐고 시력도 떨어지며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렸다.

김미선 씨는 “나 말고도 피해자가 두 명이 더 있다. 그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며 “15년간 투병 생활을 하며 수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언제 어느 부위로 재발될지 몰라 불안하다. 시력도 거의 없고, 재발 위험도 있어 일도 하지 못한 채 병원비와 생활고에 시달린다. 막막하기만 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김 씨는 “교섭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에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는 나와서 폐해를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삼성은 나 말고도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을 인정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삼성과의 협상 과정을 지켜보는 직업병 피해 노동자의 가족들도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삼성 LCD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빈혈을 얻어 지난 2012년 사망한 고 윤슬기 씨의 모친 신부전 씨도 이 자리에서 울분을 토했다. 신 씨는 “우리 딸은 일한 지 6개월 만에 중증 재생불량성빈혈을 얻었다. 공장에서 퀴퀴한 화학물질 냄새가 났고, 간식으로 주는 빵도 도저히 먹지 못하겠다고 하더라”라며 “결국 13년 동안 투병을 하다 고관절이 괴사됐고, 폐출혈과 장출혈이 이어져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서른둘에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다.

신 씨는 “하지만 삼성은 야비하게도, 내 딸의 병이 삼성에서 걸린 병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교섭에서) 얼굴을 보인 8명만 합의한다고 한다. 그러면 얼굴을 모르는 다른 피해자들은 그냥 나가떨어지라는 말이냐”며 “내 딸 슬기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 삼성은 야비한 행동을 멈추고 내 딸 슬기를 살려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반도체 유방암 피해자 이현 씨의 오빠 이현배 씨 역시 “고등학교 졸업 전 삼성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 4년 넘게 일을 했다. 지금은 한 쪽 유방이 없어진 지 5년이 됐다”며 “유방암 투병약을 먹으며 자궁내막 수술까지 2번을 했다. 교통법을 위반해도 범칙금을 내는데, 이런 많은 사고와 환자를 만들어 낸 삼성은 왜 처벌을 받지 않나.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는 만큼 삼성은 책임 있는 자세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6차례 교섭, ‘보상’, ‘사과’, ‘재발방지대책’ 어느 하나 진전 없어

삼성과 반올림은 지난 5월 말 3차 본교섭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6차례의 교섭을 이어왔다. 하지만 ‘보상’, ‘사과’, ‘재발방지대책’ 등 주요 쟁점에서 번번이 이견이 발생하거나, 아예 다뤄지지 않았다. 보상 문제와 관련해, 삼성은 협상에 참여한 8명에 대해 우선 보상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반올림은 산재신청자를 포함해 잠재적 피해자 등에 대한 전원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삼성 측은 그간 교섭에서 8명에 대한 선 보상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보상기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오다, 지난 14일에 와서야 6개의 보상 기준안을 제시했다. 반올림은 “여섯 차례 교섭에서 삼성은 직접 교섭에 나선 8명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 논의부터 먼저 하자며 피해자들 사이를 가르려 했다”며 “그리고 보상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며 보상 대상이 되는 피해자들을 선별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직접 교섭에 참여하고 있는 직업병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도 삼성의 ‘8명 선 보상안’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고 황유미 씨의 부친이자, 교섭단 단장을 맡고 있는 황상기 씨는 “삼성이 근로복지공단에 유미 근로기간을 위조한 문서를 제출하더니, 얼마 전에는 권오현 부회장이 또 사기를 쳤다. 피해보상과 사과, 재발방지를 한다면서 긴 시간동안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비판했다.

황 씨는 “제보자만 200명이 넘는데, 달랑 8명만 보상하고 나머지는 추후 논의하자는 것이 말이 되나. 사망한 사람들이나 중증 환자들은 의사표시도 어렵다. 그 사람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며 “또한 병에 걸린 노동자들에게 회유 협박한 것,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업병에 걸린 것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교섭단에 참여하고 있는 한혜경 씨(삼성LCD 뇌종양 피해노동자)와 모친 김시녀 씨도 모든 직업병 피해 노동자에게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혜경 씨는 “8명만 우선 보상하겠다는 삼성의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삼성에 근무하다 병에 걸린 것도 억울한데, 어느 누구는 보상을 하고 누구는 안 하겠다는거냐”며 “삼성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한 명의 산재신청자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낙오자 없이 모두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시녀 씨는 “삼성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며 “일하다가 똑같이 병든 피해자들인데 8명만 보상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직업병 피해자 모두가 침대와 휠체어를 끌고 나오라는 얘기냐”며 반발했다.

한편 반올림은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드러난 피해자만 164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0명이다. 얼마나 더 죽고 병들어야 잘못을 인정하고 온전히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일 것인가”라며 “일부 피해자에 대한 선별적 보상만으로는 이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음을 명심하라. 이미 세상에 알려진 모든 피해자들에 대해 책임지고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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