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항소심서도 삼성 백혈병 산재인정...근로복지공단 패소

피해자 5명 중 2명만 산재인정, 3명은 패소...“과도한 피해자 입증책임 때문”

법원이 원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삼성 백혈병 노동자의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피해자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업재해 인정 싸움을 벌여온 지 7년여 만이자, 항소심이 진행된 지 약 3년 만의 판결이다.

서울고등법원 제9행정부(부장판사 이종석)는 21일 오후 1시 30분,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등 직업병 피해자 5명이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원심과 동일하게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반올림과 피해자 유족들은 판결 이후 서울고등법원 제1별관 앞에서 입장을 발표했다.

법원, 항소심서도 삼성 백혈병 산재인정...근로복지공단 패소
피해자 5명 중 산재인정 일부 승소, 3명은 패소


재판부는 “황유미, 이숙영은 업무수행과 백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판단했다”며 “습식식각공정과 세척작업 과정에서 벤젠 등에 노출됐다는 개연성이 있고, 작업장 이동 과정에서의 전리방사선 노출 개연성 등 여러 사정들에 비추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다”며 항소를 제기한 근로복지공단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고 황유미 씨는 2003년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지만 2년 만에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아 2006년 사망했다. 황유미 씨와 2인 1조로 작업하던 고 이숙영 씨 역시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2006년 사망했다.

또한 재판부는 이번 판결이 ‘상당 인과관계 존재는 의학적, 자연과학적 증거 뿐 아니라 제반사정도 고려해 추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에 근거한 것이라 밝혔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이 사건은 재해와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 입증을 위한 판단이 결코 쉽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입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근무 해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경과해 증거 확보가 어렵고, 원고가 정보에 접근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재판부는 원심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던 고 황민웅 씨를 비롯한 송창호, 김옥이 씨 등 3인에 대해서는 원심과 동일하게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피해자 본인이 직접 입증해야 하지만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재판부는 “황민웅 씨 등 3인은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들은 황유미, 이숙영과는 달리 업무 내용에 있어 발병 원인이 되는 유해물질에 직접 노출되거나, 질병이 유발할 정도로 다른 공정의 유해물질에 노출됐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밝히며 1심과 동일하게 이들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고 밝혔다.

고 황민웅 씨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설비엔지니어로 입사했으며 7년간 설비 유지 및 보수 업무를 수행해 오다 급성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2005년 사망했다. 또한 온양공장 설비엔지니어였던 송창호 씨는 6년간 일을 해 오다 악성 B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김옥이 씨 역시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5년간 일을 하다 급성전골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중이다.

“피해자에 대한 과도한 입증 책임으로 3인 패소...법제도 개선해야”

피해자들과 산재 인정 싸움을 벌여왔던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과 유족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환영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번 판결이 이후 진행 될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노동자들의 항소심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피해자에 대한 과도한 입증 책임 때문에 3인의 피해자 및 유족들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며 법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항소심에서도 패소 판결을 받은 고 황민웅 씨의 아내 정애정 씨는 판결 직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반올림 상임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는 “이번 판결은 2011년 서울행정법원의 산재인정 판결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제기하는 바람에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또 한 번의 법정 공방 끝에 내려진 소중한 판결”이라며 “피해자들의 백혈병이 직업병 등 업무상 재해라는 판단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이번 판결은 고 황유미 님과 같은 일을 했던 또 다른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노동자 고 김경미 님의 항소심 판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며 “또한 이미 삼성반도체 공장에서만 백혈병, 악성림프종 등 중증 림프조혈계질환 피해자가 70여 명이 드러난 상황이다. 이번 판결로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산업재해 인정의 길이 열리길 바란다”고 밝혔다.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도 “두 명은 승소했지만 세 명은 패소했다. 일을 하다 화학물질에 노출돼 병을 얻은 것에 대해 가족들이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삼성은 영업비밀이라며 자료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입증책임까지 져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삼성은 산재인정을 받은 이들을 비롯해 모든 피해자와 가족에게 사과하고 보상과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종란 노무사 역시 “산재인정을 받기 위해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고, 증명책임까지 노동자에게 부과되는 것은 아픈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산재보험 제도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번 산재인정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노동자에게 산재임을 입증하려는 현행 법제도는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 오늘 패소한 세 명의 노동자들도 직업병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이번 판결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번에도 또다시 근로복지공단이 상고를 한다면 근로복지공단 스스로 법을 무시하고 기업주를 위한 기관임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 역시 사태의 책임을 지고 모든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노무사는 “삼성전자는 노동자들을 유해한 업무환경으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산재 승인을 적극적으로 방해해 왔다”며 “따라서 삼성전자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오늘 판결에서 승소한 당사자들 뿐 아니라 모든 피해자에 대해 합당한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삼성 백혈병 피해자 5인은 지난 2007년 6월부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했지만 2009년 5월 전원 불승인 통보를 받았다. 이에 피해자들은 산재 인정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으며,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011년 6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곧바로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제기하면서 3년간의 법정공방이 이어졌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근로복지공단을 대신해 피고보조참가인으로 삼성전자의 대리인단이 참가하며 논란이 일었다.

이후 삼성과 반올림, 유족이 교섭에 돌입하면서 삼성은 올해 7월, 피고보조참가를 철회했다. 현재 반올림과 삼성은 6차에 걸친 교섭을 진행하고 있지만 보상 및 사과, 재발방지대책 등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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