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백혈병 교섭 안갯속, 재등장한 ‘조정위원회’ 설치 공방

“삼성의 ‘교섭 회피 명분’ 될 것” VS “교착 타개할 돌파구”

삼성 백혈병 교섭이 각 주체들의 입장 차이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지난 교섭에서 ‘보상 기준 논의’를 시작하자는 합의를 이뤘지만, 이마저도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지난 4월, 한 차례 논란을 겪었던 ‘제3중재기구 구성’과 관련한 쟁점까지 다시 부각되고 있다. 가족대책위는 현재 지지부진한 교섭에 속도를 내기 위해 ‘조정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으며 삼성측도 이를 수용한 상태다. 하지만 반올림은 조정위원회 설치는 시기상조라며, 삼성이 현재 피해자들과의 교섭 의제에 성실히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삼성이 반올림 측 요구안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거나 논의 자체를 회피해 온 바 있어, 사실상 삼성이 ‘조정위원회’라는 쟁점을 내세워 교섭의 논점 자체를 흐리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반올림이라는 틀 안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일부 피해자들이 ‘가족대책위’로 분리해 나왔고, 양 측 사이의 감정의 골도 깊어 삼성을 상대로 한 반올림-가대위의 공동 대응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삼성 백혈병 교섭 안갯속, 재등장한 ‘조정위원회’ 설치 공방

지난 17일, 삼성-반올림-가족대책위는 강남구 논현동 건설회관에서 5시간에 걸친 8차 협상을 진행했다. 이날 교섭에서는 각 주체가 입장 일치를 보였던 ‘보상기준’과 관련한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마저도 안갯속에 휩싸였다.

앞서 지난달 13일 열렸던 6차 교섭에서, 삼성은 ‘교섭단에 참여하고 있는 8명 피해자 선 보상 합의 후 보상기준을 마련한다’는 종래의 주장에서 한 발 물러나 소속회사, 질병종류, 재직기간, 재직 중 담당업무, 퇴직시기, 발병시기 등 6개 항으로 구성된 보상기준을 마련했다. 동시에 반올림은 삼성 측에 산업재해 신청자 33명의 명단을 전달했다. 이로써 피해자 33명을 포괄할 수 있는 보상기준 마련의 물꼬가 트이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반올림-가대위가 분열되면서 ‘보상 기준 논의’와 관련한 쟁점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7차 교섭에서도 삼성-반올림-가대위 3주체의 협상 틀과 관련한 논의로 쟁점이 전환됐고, 8차 교섭에서도 ‘보상기준 마련’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다. 특히 보상기준 논의는 반올림과 가대위의 공통된 요구지만, 8차 교섭에서 삼성이 “협상의 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논의를 회피해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됐다.

‘협상 틀’과 관련한 쟁점이 종지부를 찍기도 전에, ‘조정위원회 구성’이라는 쟁점이 재등장하면서 향후 3자 교섭은 더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8차 교섭에서 가대위는 정회를 선언한 후 삼성과 반올림 측에 ‘조정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4개월 째 각 주체 사이의 의견 대립만 이어져 교섭이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만큼, 조정위원회를 구성해 돌파구를 만들자는 요구다.

삼성은 즉각 “조정기구가 문제 해결의 가장 빠른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입장에 공감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가대위 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반올림은 조정위원회 구성은 ‘시기상조’라며 이에 합의하지 않았다. 삼성이 현 교섭에서 보상기준 및 재발방지대책 논의에 성실하게 임하면 지금이라도 조속한 논의가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조정위원회’와 관련한 쟁점이 등장하면서, 삼성은 사과, 보상, 재발방지대책 등 쟁점 논의에 대한 부담을 당분간 덜어버릴 수 있게 됐다.

“삼성의 ‘교섭 회피 명분’ 될 것” VS “교착 타개할 돌파구”

조정위원회 구성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4월,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제3중재기구 구성’을 삼성 측에 요구했으며, 그때도 삼성은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며 전향적인 입장을 밝혔다. 당시는 반올림과 삼성의 실무교섭이 4개월 째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다. 삼성에서 반올림을 교섭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교섭 자체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상정 의원의 제3중재기구 제안은 반올림과의 협의 하에 나온 것이 아니어서 논란이 일었다. 반올림과 삼성이 교섭 중인 상황에서, 내부 합의 없는 ‘제3중재기구’는 삼성이 교섭을 해태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정치권 등이 개입하는 중재기구가 당사자 협의가 배제된 ‘합의안’으로 양 측을 압박해 협상을 타결해온 관행이 있어 불신도 컸다.

이번에 재등장한 ‘조정위원회’ 역시 삼성을 압박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삼성이 각종 쟁점에서 한 발 물러설 수 있도록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반올림이 조정위원회 구성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조정위를 구성할지 여부조차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다. 조정위원회에 추천 인물 비율은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부터, 인원, 위상, 역할, 권한 등 합의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애초의 목적과 달리, 오히려 조정위원회 구성이 교섭의 논점을 흐리거나 교섭을 장기화시킬 수도 있는 문제다.

반올림 관계자는 “삼성은 8차 교섭에서 보상 논의를 하자는 요구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상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라며 “조정위원회 구성여부를 떠나, 삼성이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는 문제다. 삼성은 하지만 보상 논의에는 답하지 않으면서 조정위원회 구성은 즉각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교섭에서) 반올림을 밀어내기 위해 작정을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조정위원회 구성 논의로 교섭이 더 지연될 수도 있다. 향후 삼성에 책임회피의 명분을 만들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가대위는 교섭 자체가 4개월간 공전만 하고 있어,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금 상태로는 교섭 교착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다. 가대위 관계자는 “이번 교섭은 (지난 4월)중재기구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교섭이다. 당시 반올림은 중재기구 구성은 차후에 생각하고 미뤘던 부분”이라며 “4월간 교섭이 교착상태다. 이정도면 제대로 된 교섭이라고 볼 수 없지 않나. 새로운 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가대위는 ‘조정위원회’를 보상 논의 뿐 아니라, 사과, 재발방지대책까지 포괄 논의할 수 있는 틀로 구상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 가대위가 ‘8명 우선 보상’만을 요구하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가대위 관계자는 “지금까지의 원칙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교섭을 하자는 게 아니다. 10개월간 실무교섭에서 사과, 보상, 재발방지 대책과 관련해 얻어낸 것들은 기본으로 안고 갈 것”이라며 “반올림이 이를 거부해도 존중해줘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후 교섭도 난상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가대위는 8차 교섭에서 삼성 측에 조정위원회 구성 논의는 실무협의에서 진행하는 방안을 제안한 상태다. 협상에 속도를 내기 위해 협상 주기를 기존 2주에서 1주로 단축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가대위는 9차 교섭에서 조정위원회 구성과 관련한 세부 계획을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9차 교섭 일정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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