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전봇대 올라가는 통신노동자

[싸우는 이야기] ⑤SK브로드밴드

언제부터 우리는 ‘우리’가 꽤 잘 산다고 생각해왔다. 생활은 편리하고 풍족해졌다. 그러나 세련되고 성능 좋고 더 커진 텔레비전 브라운관 속에는 저임금, 일자리 부족, 비정규직이라는 문구가 맴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 옆의 누군가는 예전보다 반 값 임금을 받고, 고용의 불안에 떨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너무나 당연해진 고용의 불안. 우리의 삶은 진정 풍족한가? 우리 무엇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울산지역 투쟁사업장 승리를 위한 공동투쟁단’은 울산에서 간접고용과 고용불안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이 물음의 답을 찾으려 한다. 기획은 (2) 울산과학대, (3)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4)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5) SK브로드밴드까지 모두 5회로 진행됩니다.

비오는 날 전봇대 올라가는 통신노동자

하루 평균 11번 전봇대에 올라가는 이가 있다. 비 오는 날 감전 위험이 있어도 전봇대를 꼭 껴안고 오르내린다. 전봇대 발판은 50년 지난 것도 있어 발 디디면 부러지기도 한다. 사고라도 나면 낭패다. 저녁까지 최소 8집, 중간에 꼽힌 작업까지 하려면 10집 이상을 돌아야 한다. 다쳐서 일 못하면 병원비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 월급도 받지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비 오는 날 전봇대에 오르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통신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준수와 직접고용을 요구한다. [출처: 울산저널]

“손목이 붓더니 물혹이 생겼어요. 주사기로 물을 뽑아내도 자꾸 재발되는 겁니다. 결국 수술하면서 한 달 쉬었죠. 다시 출근했더니 제 구역에 딴 사람이 배치됐어요.”

최 모씨(45)는 주택 인터넷 개통기사다. 통신업계에 13년째 일한다. 무릎 연골이 반은 닳았고, 하지정맥류에 허리디스크까지 생겼다.

“그게요, 전봇대 오를 때 손목이랑 발에 힘이 많이 들어가요. 반은 전봇대에 반은 발판에 몸을 지탱하죠. 떨어지기도 여러 번 떨어졌어요. 큰 사고 안 나 다행이죠.”

일하다 전봇대에서 떨어져도 산재처리 할 수 없고, 전봇대 오르면서 일해도 주상안전대나 안전모 하나 지급되지 않는다. 사다리, 안전모, 안전대, 통신장비를 모두 개인이 구입한다. 노조가 생기고 나서 최근에 안전화 한 번 받았다. 불법주차했다고 과태료 딱지 받는 일도 자주 있다.

“우리는 차 없으면 일하기 힘들어요. 주차 시설이 없는 상가나 주택가도 있어요. 케이블박스 2개에 20kg, 사다리 8kg, 연장가방 5kg 등 합쳐서 40kg은 들고 다녀야 하고 무게만 문제가 아니라 부피도 장난이 아니죠. 손이 4개 있는게 아니잖아요.”

옛날 전화국 시절에는 차에 KT나 한국통신 이름이 박혀 있으면 과태료 청구가 안 됐다고 한다. 공공의 일이라고 봤던 것이다. 지금은 어느 통신사든 구분 없이 불법주차 스티커를 발부받는다.

통신업계는 이직률이 높다. 송 모씨(33)는 LG, KT, SK 등의 통신사에서 두루 일했다. 중간업체가 임금을 미루거나 개통관리팀장이 중간에서 임금을 떼먹는 일도 자주 봤다.

“모 통신사 관리자는 사람 아닙니다. 아침 9시부터 출동해요. 새벽에 부르는 고객도 있죠. 안 가면 고객이 본사에 항의전화를 하고, 평가를 낮게 받으면 월급 차이가 한 달에 100만원 이상 나기도 해요.”

송씨는 개통기사는 실적에 목 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본급 없이 개통 건수에 따라 월급이 나오고, 고객 평가에 따라 수당이 차등지급되기 때문이다.

애완견한테 물리고 과태료 물어내도 하소연할 곳 없어

“개통기사는 애완견한테 한 번 이상 안 물린 사람이 없을 겁니다. 늦게 왔다고 심한 욕을 하거나 고객에게 맞은 사람도 있어요. 회사는 아무 책임도 안 집니다. 개한테 물려도 치료비는 안 나와요. 어떤 고객은 내가 맡은 일 외에 사재로 산 공유기 연결이나 컴퓨터를 조립해 달라고 하기도 해요. 거절하면 불쾌해하죠. 점심 먹을 시간 없이 시간대별로 꽉 찬 스케쥴을 설명할 수도 없고 사람 미치죠.”

희망연대노조 LG유플러스와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본부가 생기고 통신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글로 접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다. 주택가는 전봇대나 옥상에 올라가야만 인터넷 개통이 된다는 걸 새로 알았고, 애완견한테 물리면서 일한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통신노동자의 작업 환경은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다. 근무시간은 9시부터지만 8시까지 출근해 교육을 받는 일은 없다. 저녁 8시까지 일하는 게 기본이었는데 지금은 저녁 6시면 일을 마친다. 일이 밀리면 연장근무를 하지만 수당을 받는다. 무엇보다 좋은 건 저녁 시간에 동료를 만날 수 있다는 거다.

“노조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하고 말도 안 했어요. 옆사람한테 장비도 안 빌려주죠. 다 경쟁자고 말하는 것도 피곤하고... 그런데 지금은 바뀌었거든요. 사람들이 좋아요.”

희망연대노조 가입하고 웃음 찾았다

이 날은 같이 일하는 형이 집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 했다. 아직 어두워지기 전인데 동료들이 한 두 명씩 비닐봉다리를 들고 온다. 형님은 삼겹살을 구웠고, 봉지마다 사들고 온 막걸리와 소주를 한잔씩 나눠 마신다. 8명이 모였다.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으로 고된 하루를 보냈어도 저녁때 동료들과 함께 저녁 먹는게 행복하다.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아침에 사무실에서 고객 집으로 일하러 나갈 때 혼자 일하러 가는 기분이 아니거든요. 동료들이 등 뒤에 든든하게 서 있고, 장비도 빌려주는 사이가 됐죠. 옛날엔 막막하고 외롭고 힘들었어요.”

  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 동울산지회 조합원들 [출처: 울산저널 용석록 기자]

올해 4월, 통신기업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조가 결성됐다. 이들은 진짜 사장을 알 수 없는 다단계 고용구조와 비정상적 근로계약 형태를 폭로했다. 휴일을 찾아볼 수 없는 장시간 노동, 유류비, 통신요금, 스마트폰구입비, 등급별 인센티브 차감, 퇴직적립금 부당공제, 차량유지관리비·주차비, 자재구입비, 장비분실 차감, 설치수수료 일방 삭감, 해피콜 차감, 검수불량 차감 등 원청과 업체의 불법행위는 이들 일상 전반에 걸쳐 진행돼 왔다.

희망연대노조비정규직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는 아직 사용자측과 단체협약을 체결 못했다. 각 지역 센터별로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려는 사용자의 시도가 있지만 조합원들은 이제 제 목소리를 낸다.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인권 보장하라”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는 서비스센터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라”

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비정규직지부 동울산지회(지회장 오규영)는 회사와 7차까지 단체교섭을 했지만 지난 8월 22일 결렬됐다. 노조결성 뒤 조합원 40여 명 가운데 절반은 탈퇴했다. 그래도 조합원들은 힘든 기색보다 밝은 표정이다. 아직은 비 오는 날 전봇대에 올라가야 하지만, 지회는 전국 통신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 투쟁기금을 모으는 중이다.
덧붙이는 말

용석록 기자는 울산저널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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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 SK브로드밴드 , 통신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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