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전봇대 올라가는 통신노동자
하루 평균 11번 전봇대에 올라가는 이가 있다. 비 오는 날 감전 위험이 있어도 전봇대를 꼭 껴안고 오르내린다. 전봇대 발판은 50년 지난 것도 있어 발 디디면 부러지기도 한다. 사고라도 나면 낭패다. 저녁까지 최소 8집, 중간에 꼽힌 작업까지 하려면 10집 이상을 돌아야 한다. 다쳐서 일 못하면 병원비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 월급도 받지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비 오는 날 전봇대에 오르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 통신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준수와 직접고용을 요구한다. [출처: 울산저널] |
“손목이 붓더니 물혹이 생겼어요. 주사기로 물을 뽑아내도 자꾸 재발되는 겁니다. 결국 수술하면서 한 달 쉬었죠. 다시 출근했더니 제 구역에 딴 사람이 배치됐어요.”
최 모씨(45)는 주택 인터넷 개통기사다. 통신업계에 13년째 일한다. 무릎 연골이 반은 닳았고, 하지정맥류에 허리디스크까지 생겼다.
“그게요, 전봇대 오를 때 손목이랑 발에 힘이 많이 들어가요. 반은 전봇대에 반은 발판에 몸을 지탱하죠. 떨어지기도 여러 번 떨어졌어요. 큰 사고 안 나 다행이죠.”
일하다 전봇대에서 떨어져도 산재처리 할 수 없고, 전봇대 오르면서 일해도 주상안전대나 안전모 하나 지급되지 않는다. 사다리, 안전모, 안전대, 통신장비를 모두 개인이 구입한다. 노조가 생기고 나서 최근에 안전화 한 번 받았다. 불법주차했다고 과태료 딱지 받는 일도 자주 있다.
“우리는 차 없으면 일하기 힘들어요. 주차 시설이 없는 상가나 주택가도 있어요. 케이블박스 2개에 20kg, 사다리 8kg, 연장가방 5kg 등 합쳐서 40kg은 들고 다녀야 하고 무게만 문제가 아니라 부피도 장난이 아니죠. 손이 4개 있는게 아니잖아요.”
옛날 전화국 시절에는 차에 KT나 한국통신 이름이 박혀 있으면 과태료 청구가 안 됐다고 한다. 공공의 일이라고 봤던 것이다. 지금은 어느 통신사든 구분 없이 불법주차 스티커를 발부받는다.
통신업계는 이직률이 높다. 송 모씨(33)는 LG, KT, SK 등의 통신사에서 두루 일했다. 중간업체가 임금을 미루거나 개통관리팀장이 중간에서 임금을 떼먹는 일도 자주 봤다.
“모 통신사 관리자는 사람 아닙니다. 아침 9시부터 출동해요. 새벽에 부르는 고객도 있죠. 안 가면 고객이 본사에 항의전화를 하고, 평가를 낮게 받으면 월급 차이가 한 달에 100만원 이상 나기도 해요.”
송씨는 개통기사는 실적에 목 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본급 없이 개통 건수에 따라 월급이 나오고, 고객 평가에 따라 수당이 차등지급되기 때문이다.
애완견한테 물리고 과태료 물어내도 하소연할 곳 없어
“개통기사는 애완견한테 한 번 이상 안 물린 사람이 없을 겁니다. 늦게 왔다고 심한 욕을 하거나 고객에게 맞은 사람도 있어요. 회사는 아무 책임도 안 집니다. 개한테 물려도 치료비는 안 나와요. 어떤 고객은 내가 맡은 일 외에 사재로 산 공유기 연결이나 컴퓨터를 조립해 달라고 하기도 해요. 거절하면 불쾌해하죠. 점심 먹을 시간 없이 시간대별로 꽉 찬 스케쥴을 설명할 수도 없고 사람 미치죠.”
희망연대노조 LG유플러스와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본부가 생기고 통신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글로 접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다. 주택가는 전봇대나 옥상에 올라가야만 인터넷 개통이 된다는 걸 새로 알았고, 애완견한테 물리면서 일한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통신노동자의 작업 환경은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다. 근무시간은 9시부터지만 8시까지 출근해 교육을 받는 일은 없다. 저녁 8시까지 일하는 게 기본이었는데 지금은 저녁 6시면 일을 마친다. 일이 밀리면 연장근무를 하지만 수당을 받는다. 무엇보다 좋은 건 저녁 시간에 동료를 만날 수 있다는 거다.
“노조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하고 말도 안 했어요. 옆사람한테 장비도 안 빌려주죠. 다 경쟁자고 말하는 것도 피곤하고... 그런데 지금은 바뀌었거든요. 사람들이 좋아요.”
희망연대노조 가입하고 웃음 찾았다
이 날은 같이 일하는 형이 집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 했다. 아직 어두워지기 전인데 동료들이 한 두 명씩 비닐봉다리를 들고 온다. 형님은 삼겹살을 구웠고, 봉지마다 사들고 온 막걸리와 소주를 한잔씩 나눠 마신다. 8명이 모였다.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으로 고된 하루를 보냈어도 저녁때 동료들과 함께 저녁 먹는게 행복하다.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아침에 사무실에서 고객 집으로 일하러 나갈 때 혼자 일하러 가는 기분이 아니거든요. 동료들이 등 뒤에 든든하게 서 있고, 장비도 빌려주는 사이가 됐죠. 옛날엔 막막하고 외롭고 힘들었어요.”
▲ 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 동울산지회 조합원들 [출처: 울산저널 용석록 기자] |
올해 4월, 통신기업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조가 결성됐다. 이들은 진짜 사장을 알 수 없는 다단계 고용구조와 비정상적 근로계약 형태를 폭로했다. 휴일을 찾아볼 수 없는 장시간 노동, 유류비, 통신요금, 스마트폰구입비, 등급별 인센티브 차감, 퇴직적립금 부당공제, 차량유지관리비·주차비, 자재구입비, 장비분실 차감, 설치수수료 일방 삭감, 해피콜 차감, 검수불량 차감 등 원청과 업체의 불법행위는 이들 일상 전반에 걸쳐 진행돼 왔다.
희망연대노조비정규직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는 아직 사용자측과 단체협약을 체결 못했다. 각 지역 센터별로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려는 사용자의 시도가 있지만 조합원들은 이제 제 목소리를 낸다.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인권 보장하라”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는 서비스센터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라”
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비정규직지부 동울산지회(지회장 오규영)는 회사와 7차까지 단체교섭을 했지만 지난 8월 22일 결렬됐다. 노조결성 뒤 조합원 40여 명 가운데 절반은 탈퇴했다. 그래도 조합원들은 힘든 기색보다 밝은 표정이다. 아직은 비 오는 날 전봇대에 올라가야 하지만, 지회는 전국 통신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 투쟁기금을 모으는 중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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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석록 기자는 울산저널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