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아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해?

[팩트를 채우는 미디어비평] 재벌 총수발 기사는 늘 노골적 홍보 아니면 두루뭉술 선문답

아주 생쇼를 가지가지로 한다. 지난해 1월 횡령으로 구속 수감된 SK 최태원 회장은 옥중에서 저서를 출간한다. 그것도 저소득자, 장애인 등 취약계층을 돕는 ‘사회적 기업’을 주제로 한 책이란다. 현대중공업 정몽준 회장은 아버지의 뜻을 기린 아산나눔재단 창립 기념식에서 “기업도 성공하려면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기염을 토했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노사 이슈에 현명한 대처를” 주문했다.


내가 일하는 울산저널 사무실 밑엔 2년 전 SK 돈으로 들어선 ‘사회적 기업’ 방식의 2평 남짓한 작은 커피집이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 마자 숨이 막힐 정도로 온통 페인트 냄새로 호흡곤란을 물론이고 눈마저 따가웠던 그 집 커피는 더럽게 맛이 없었다. 결국 개업 1년 만에 깨끗이 손털고 문을 닫았다. 장사가 될 리가 만무했다.

그 따위로 장사하면서도 커피 가게 앞에는 큼직막하게 SK 로고를 박아, 사실상의 기업 홍보를 해댔다. 그 집에 들어설 때마다 잠시 들어가는 나도 힘든데 안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다. 그런 SK가 “우리는 사회적 기업을 기업 홍보가 아닌 사회적 기업 그 자체만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9월 25일자 B2면 톱기사로 실린 <최태원 회장 ‘사회적 기업’ 저서 옥중(獄中) 출간한다>는 기사는 우습기 그지없다.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 시인 김남주는 80년대 초 집필시간과 펜조차 허락받지 못해 옥살이 때 나오는 우유팩에 못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시를 썼다. 조선일보의 이 기사는 옥중의 최태원 회장을 김남주 시인처럼 묘사하고 있다. “최 회장이 감옥에서 개인 노트북을 사용할 수 없어 직접 펜으로 문장 수정과 퇴고 작업을 한 것으로 안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저항 시인과 시대와 불화했던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옥중 출간이 사라진 21세기에 재벌 회장의 옥중 출간이 이를 대신한다. 그렇게 ‘사회적 기업’이 소중한 사람이 그 많은 돈을 왜 횡령해 그렇게 오랫동안 옥살이를 할까.


정몽준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이 지난 7일 아산나눔재단 창립 3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기업도 성공하려면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세계일보 10월 8일자 29면) 그걸 아는 사람이 매일 7만명이 드나드는 울산조선소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정규직 2만명에 4만명 넘는 다단계 하청 노동자를 마구잡이로 써댈까.

현대중공업 울산공장엔 크고 작은 사고가 1주일이 멀다하고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들 99%가 하청 노동자다. 세계 조선업 1위 기업이 안전교육도 없이 일당 노동자를 물량 쳐내기 소모품으로 사용하고 있다. 벼룩시장 구인구직란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 10만원, 당일 취업 가능, 현대중공업 협력사’라는 구인업체가 즐비하다. 이렇게 하는 게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건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기업 홍보기사를 써대는 일간신문을 뭐라 해야 할까. 이날 세계일보와 같은 앵글의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는 그나마 솔직하게 사진 출처를 ‘아산나눔재단 제공’이라고 썼다. 누가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진을 지면에 버젓이 싣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재벌이 꼭 보여주고 싶은 것만 찍어 언론사에 보내준 사진을 출처를 밝히지도 않고 쓰는 게 오늘날 한국 언론의 현실이다.


정몽준 회장과 같은 날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그룹의 인사책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노사 이슈에 현명한 대처를” 주문했다. 이 부회장은 “근로시간 단축 등 노사 이슈에 현명하게 대처해달라”고 주문했단다. 이들은 노동법 정책변화 동향에 대한 강의와 토론도 벌였다. 반올림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싸움으로 힘겨운 한두 해를 보낸 삼성이 전열을 다지는 장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이 언급한 ‘현명한 대처’가 무노조 신화를 고수하는 노동자 탄압 일관책에서 벗어날지가 큰 관심인데, 이 기사만으론 도무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기사 요건을 갖추려면 ‘현명한 대처’의 구체적 상을 독자들이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선문답 하는 듯한 이 기사만 놓고 보면, 이 기자는 이날 삼성의 모임에 가지 않은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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