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LG등 전자산업 노동자 19명 집단 산재신청

백혈병, 림프종, 뇌종양, 유방암 등 발병...이 중 4명은 사망

삼성반도체와 LG디스플레이 등에서 일해 온 전자산업 노동자 19명이 집단 산재신청에 나섰다. 그동안 전자산업 노동자들이 제기한 집단산재 신청 중 가장 큰 규모다. 산재신청에 나선 피해자들은 사업장에서 독성 화학물질과 방사선 등에 노출돼 백혈병과 림프종 등의 혈액암과 뇌종양, 유방암, 갑상선암 등의 질병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는 28일 오전 11시,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도체 등 전자산업 노동자 19명에 대한 집단 산재를 신청한다고 밝혔다.

반올림은 지난 2007년 6월부터 올 1월까지 총 7차에 걸쳐 집단 산재신청을 제기한 바 있다. 이날 8차로 접수하는 집단 산재신청에는 총 19명의 피해자들이 참여했다. 현재까지 모두 63명의 전자산업 노동자들이 산재를 신청했지만, 이 중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승인된 사례는 3건에 불과하다. 공단에서 불승인 처분을 내린 후 법원에서 산업재해를 인정받은 사례도 3건이 존재한다.

이날 집단 산재신청에 나선 19명의 노동자 중 15명은 삼성반도체와 LCD, 무선사업부, 전기 등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이다. LG디스플레이 노동자 2명과 서울반도체, 하이닉스반도체 노동자들도 각 1명씩 참여했다. 이들 중 8명이 백혈병, 림프종 등 혈액암 계통의 질병을 얻었고 이 밖의 피해자들도 뇌종양, 유방암, 갑상선암, 골육종, 루푸스, 전신성경화증 등 다양한 희귀병에 시달리고 있다. 산재신청인 19명 중 4명은 이미 사망했다.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에서 노광장비 셋업 등의 업무를 담당하다 2012년 4월, 뇌종양으로 사망한 고 심규석(사망당시 32세) 씨는 투병 중 직접 산재신청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역학조사조차 의뢰하지 않은 채 서류조사만으로 산재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이에 고 심규석 씨의 모친은 공단 결정에 불복해 산재 재신청에 나서게 됐다.

고 심규석 씨 어머니 박종순 씨는 “아들이 어렸을 적부터 반도체 전자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반도체 공장이 좋은 곳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병을 얻고 보니 1년 중 100일 이상을 밤샘근무하며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이 됐더라. 하루에 16시간에서 20시간 이상 일을 했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반도체 공장이 위험한 곳이더라. 선진국에서는 사람 잡는 도살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나라에서만 아직도 반도체 공장이 좋은 곳인 줄 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서 “아들의 죽음으로 한 가정이 망가졌다. 3년간 투병생활을 했는데 엄청난 병원비 때문에 나중에는 ‘내가 죽어야 엄마아빠가 살 것 같다’며 자포자기했다. 조부모는 손자가 위독하다는 소리를 듣고 노심초사하다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장례식 날 우리 아들도 저 세상으로 갔다”며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니 병원비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병에 걸린 것도 억울한데 산재인정이 안 된다는 것이 말이 되나. 병에 걸린 아들은 매일 울다 지쳤고, 행여 우울증으로 자살이라도 할까봐 매일 붙어 있었다. 너무 억울하다, 다른 분들도 산재로 인정받아 치료라도 마음 놓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오열했다.

삼성전기에서도 올 들어 2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지난 6월 24일 삼성전기 엔지니어 고 장동희 씨가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했고, 지난 2일에도 삼성전기 노동자 최 모 씨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사망한 최 씨의 아내는 편지글을 통해 “남편은 수원 삼성전기에 입사 후 기판과 콘덴서를 제조하는 곳에서 십년동안 온갖 유독약품과 접촉하며 일했고, 조치원 사업장으로 발령받아 10년 동안 설비검수, 발주, 검토, 셋업을 주업으로 했다. 자동 노광기라는 설비 설치를 위해 한 대당 3~6개월 여를 크린룸에서 평균 6시간 이상 일했다. 밤샘 작업도 종종했고 스트레스 또한 많았다”며 “이렇게 자기를 벼랑 끝으로 내몬 회사에 복직하겠다는 일념으로 3년이란 시간동안 죽을 만큼 힘든 순간을 넘겨가며 고통 속에 죽어간 제 남편의 짧은 인생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나”고 토로했다.

이 밖에도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약 28년간 설비엔지니어로 근무하다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이 발병해 올 8월 1일 사망한 고 이범우(사망당시 46세) 씨의 유족들도 이번 산재 신청에 참여했다.

반올림 상임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는 “집단 산재신청에 나서기까지 과정이 험난했다. 여전히 삼성은 산재승인에 따른 산재보상금보다 회사 위로금이 더 크지 않느냐며 산재신청을 방해하고 있다”며 “하지만 단 한 명에서 시작했던 산재신청이 62명이 됐다. 좀 더 많은 노동자들이 정당하게 산재인정을 받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어서 “삼성전기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가 올 들어서만 벌써 2명째다. 정부는 삼성전기에 대한 철저한 역학조사를 실시해 어떤 유해 요인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지를 밝혀야 한다”며 “아울러 근로복지공단은 신속하게 피해자들에 대한 산재를 승인해야 한다. 이미 드러난 반도체 산업 백혈병 문제는 더 이상 역학조사 없이 산재를 승인하면 된다. 여타의 사업장에 대해서는 역학조사를 실시함과 동시에 각종 정황자료 등으로 산재를 승인하면 된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반올림은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이제라도 정부가 반도체, LCD, PCB등 전자산업 노동자의 산업재해 문제에 대한 신속한 보상과 철저한 예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며 “오늘 신청하는 19명 모두에 대해 신속한 산재인정을 촉구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