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생태논의

[주례토론회] 사회주의 생태논의의 활성화를 위하여


1. 들어가며

2000년대 이후부터 한국 진보 사회운동진영은 본격적으로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를 주목했다. 2009년과 2010년 기후변화와 에너지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회단체와 참가자들은 한국기후행동캠프(Korea Climate Action Camp)를 개최했다. 기후행동캠프는 기후변화를 고민하는 단체 활동가와 개인들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곳으로, 서로의 활동과 고민지점을 공유하고 향후 기후변화와 에너지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 이러한 사회 흐름 속에서 2011년 5월 25일 노동, 정당, 환경, 시민사회단체는 기후변화 문제를 중심으로 한 “기후정의연대”를 결성했다. 20개의 진보 사회단체가 모인 기후정의연대는 환경과 노동이 연대하는 “정의로운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다. 무엇보다도 기후정의연대는 한국 사회에서 녹색과 적색의 만남, 즉 환경과 노동의 상승 발전을 모색할 수 있는 실천의 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녹색(환경운동)과 적색(노동운동)의 만남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사회운동 진영의 생태논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준비모임(이하 사노준)이 발행하는 2009년 11월 4일자 <문제는 자본주의다>는 사회주의 운동에서 생태운동의 재구성을 제안했다. 이러한 생태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는 시도로는 노동해방실천연대(준)와 노동자연대(옛 노동자연대다함께)의 고민도 있다. 이들의 입장은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에서 “생태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 글과 <노동자연대>(옛 <레프트 21>)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 사회주의 운동 진영은 생태주의에서 제기한 문제를 나름의 방식대로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노동해방실천연대(준)은 2010년 7월 16일(제5호)에 나온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에서 사노준이 4월 26일에 제출한 강령초안에 대해 “생태주의와 타협한 이원론적 입장”이라고 비판했다.
2010년 4월 6일 사노준의 기관지인 <문제는 자본주의다>에서 “여성 ․ 생태 ․ 소수자 문제는 사회주의운동의 주변이 아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생태문제를 규정한다.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사건이 보여주듯이, 사회주의 사회라 해서, 환경파괴와 생태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생산력주의’ 그 자체를 문제삼아야하지, 소련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답은 이끌어내서는 안된다. 즉 현 시기 생태위기(재앙)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윤을 위한 자본주의 생산은, 특히 1980년대 이후 진전된 자본의 세계화는 인류를 포함한 지구 모든 생명체의 생존까지 위협할 정도의 생태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따라서 생태문제 해결은 자본의 이윤을 위한 생산체제인 자본주의를 철폐해야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생태문제가 해결가능하다는 것이 생태문제는 계급모순이 해결되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재설정’이 필요한 문제다. 인간은 주체고 환경은 대상이라는 관점, 자연은 정복대상이라는 관점을 극복하고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는 생태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즉 생태문제 해결은 자본주의에 맞선 정치경제적 변혁과 생태적 관점과 삶이라는 일상 삶의 변혁이 결합되었을 때 가능하다.

사노준 기관지의 핵심 주장은 우선 소련 및 동유럽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이들 사회의 생산력주의를 비판한다. 두 번째로 자본주의가 생태위기를 가져오지만 계급모순의 해결이 곧바로 생태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계급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 번째로 (이들이 규정한 역사상에 존재한) 사회주의에서도, 자본주의에서도 자연을 인간의 정복대상으로 본 관점을 극복하여 인간과 자연간의 공생적 관점으로 전환해야 된다.

실천 운동진영에서 제기되는 생태문제의 핵심은 이론 논쟁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연결된다. 생태사회주의(테드 벤튼, 알랭 리피에츠 등)는 환경론 및 생태론이 사회주의와는 연대할 수 있지만 생태론과 마르크스이론의 결합을 다소 불편한 관계로 설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2009년 여름 『진보평론』“여성 환경 노동운동 평가를 넘어 연대를 향하여”에 참여한 몇몇 집필진이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여성문제와 환경문제는 마르크스이론의 재구성을 통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사회주의에는 여러 버전이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로 귀결될 수 없고 사회주의 안에 여러 가지 이론 중 하나로 마르크스주의를 취급한다.

최병두(2009)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비판받고 있는 마르크스이론의 반(反)생태적인 핵심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로 마르크스주의1는 자연을 도구적 가치로만 인식하는 인간 중심주의이다. 두 번째로 마르크스주의는 자연의 한계를 무시한 기술중심주의, 생산성중심주의이다. 세 번째로 마르크스주의는 환경문제의 보편성을 무시한 계급 환원주의다.2

그리고 존 벨라미 포스터(2010)는 마르크스 사상을 재평가한 여러 저작들의 논지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로 대표적으로 클라크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시종일관 반(反)생태적이라고 평가한다. 두 번째로 기든스와 노브, 테드 벤튼, 마틴 오코너 등은 마르크스가 생태에 관해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나 말년에는 “프로메테우스주의” (친기술적이며 반생태적인 관점)에 굴복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마르크스는 탈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풍요로움”의 결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는 제임스 오코너는 마르크스가 농업분야의 생태악화를 분석했으나 이것은 그가 주력한 사회에 대한 분석과는 별개라는 주장이다. 네 번째로는 파슨스와 리보위츠, 알마 알트파터, 폴 버킷은 마르크스가 체계적으로 자연과 환경의 악화(특히 토양의 비옥도에 대해)에 대해 접근했으며 이것은 그의 다른 사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생태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했다고 주장한다.

종합하자면, 최병두의 정리는 모종의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실천가의 문제제기를 중심으로 비판을 구분했다면 포스터는 ‘환경’문제를 둘러싼 학자의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마르크스 이론의 쟁점을 정리했다.

이 글은 마르크스이론이 반(反)생태적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생산력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계급 환원론에 대한 논의를 다룬다. 이러한 고찰은 서영표(2009)가 주장하듯, “생태적 문제의식을 받아들이면서도 마르크스의 텍스트와 문제틀 안에 이미 생태주의를 이론화할 수 있는 충분한 이론적 자원이 들어있다고 주장하”는 문헌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마르크스이론을 단순한 테제로 박제화해 ‘생산력주의’와 ‘인간중심주의’, ‘계급환원론’의 딱지를 부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크스이론에서 환경문제를 해석하는 것은 마르크스이론이 충분히 생태주의라는 식의 주장이 아니다. 마르크스이론에 기반한 환경문제의 해석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개방적으로 적용하여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생태주의자인가라는 논의는 층위를 달리하는 문제제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이론에 기초한 환경 논의의 필요성은 마르크스이론의 역사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

2. 마르크스이론의 반(反)생태성 비판의 근원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생태 및 환경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이론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중요한 책이다. 변증법이란 자연과 인간, 사회 및 사유의 일반적인 운동법칙과 발전법칙에 대한 방법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증법을 자연 그 자체에 적용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소련과 동구권에서는 『자연변증법』을 맹종에 가까운 목적론적 ․ 기계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과학정책을 수립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서구 마르크스주의자, 특히 (초기) 루카치와 그람시는 (비판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John Bellamy Foster, 2013 참조).

루카치는『역사와 계급의식』에서 각주를 통해 엥겔스의 변증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와 같이 방법을 사회, 역사 현실에 한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변증법에 관한 엥겔스의 서술에서 생겨나온 오해는 본질적으로 엥겔스가 헤겔의 잘못된 예에 따라 변증법의 방법을 자연에까지도 확장한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변증법의 결정적인 규정들, 즉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 이론과 실천의 통일, 사유 변화의 근본원인으로 범주 기저에 있는 현실의 역사 변화들은 우리의 자연에 대한 지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루카치, 1986: 68).

루카치는 변증법은 인간 역사와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자연의 영역까지 확대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엥겔스에 대한 평가의 일부는 이후 노먼 레빈(헌트, 2010)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엥겔스주의는 스탈린 시대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바로 이어졌다. ... 역사에서는 정해진 발전 방향이 존재한다고, 예정된 역사 발전 단계에 따라 사회주의가 도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엥겔스주의는 소련이 역사의 완성 단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 스탈린 시대에 온 세상이 마르크스주의라고 이해했던 것은 사실은 엥겔스주의였다.”

『자연변증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후 마르크스이론을 프로메테우스주의, 즉 생산력주의, 또는 생산력지상주의로 곡해하는 길로 빠져버렸다.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이론은 생산력의 무한 증대가 가능하며 그것이 아무 문제없다고 옹호했으며 마르크스의 저작에선 자연에 대한 무관심이 일관되게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부정한 폴란드의 철학자 콜라코프스키는 1968년 (1978년 영국에서 출판)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안에 있는 생산력주의를 제기했다. 그는 정확하게 프로메테우스주의를 정의하지는 않았으나 자기창조자로서 인간의 무한한 능력 신뢰, 전통과 과거의 숭배를 경멸, 역사를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아실현으로 본다는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기원을 찾았다.

이후 기든스는 『사적유물론의 현대적 비판』(1981)에서 콜라코프스키의 비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기든스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에 있어서 자연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사회 발전을 매개로서 간주되고 있다. 인간의 보편적 역사는 자본주의에 이르러 극대화된 생산력의 점진적 발전의 성과를 통하여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계급 체계라고 표현되는 이른바 착취적인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변천에 관한 마르크스의 관심은 자연에 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지 않”은 점을 논증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프로메테우스 태도’를 지목했다.

이러한 비판은 테드 벤튼, 라이너 그룬트만, 존 클락, 마이클 뢰비 등과 같은 다양한 생태사회주의자가 마르크스의 자연에 대한 무관심을 각자의 표현으로 덧붙임으로써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와 동구 수정주의자가3 자연변증법을 거부한 이유는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인간의 주관성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구성하는 ‘주관’이 없이는 ‘자연’은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과 분리된, 독립된 세계는 없고 모든 사물은 인간의 사회적인 주관의 산물이다. 이러한 주장은 객관적 지식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처럼 변증법을 주체의 활동에‘만’ 관련시키는 것, 주체의 의식적 계기에‘만’ 관련시키는 것, 또 반영론을 부정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이들의 실천관은 변증법을 사회 역사적 영역으로 한정시키고 ‘자연 자체’의 변증법적 운동을 거부하게 만든다. 이렇게 귀결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들이 자연의 객관적 변증법을 인간의 실천과 대립시키고 동시에 실천의 능동성을 인간의 ‘의식’적 계기에서 찾기 때문에 실천을 ‘유물론’적으로 파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 외부에 자연자체가 존재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 즉 외부 자연의 선차성을 승인하는 것이고 이것은 유물론의 전제조건이자 최초의 노동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인간의 실천은 우리의 인식과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의 객관적 본질 사이의 조응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물(물질)은 우리의 의식, 감각과 독립되어 우리의 외부에 존재한다. 이전부터 철광석에는 철이 존재하였다. 지난날 우리는 이러한 철의 존재를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철광석으로부터 아무런 자연의 사실을 얻지 못했다. 이러한 사물과 우리의 의식의 관계에서 진정한 차이는 알려진 것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뿐이다. 자연과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인류는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물 그 자체의 사실을 발견과 발명을 통해 끊임없이 밝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에게 변증법 사고가 필요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고정 불변하고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며 역사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이러한 주장은 엥겔스의 『반뒤링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계는 어떤 것이기 이전에 먼저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의 존재가 그 통일성의 전제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통일성은 그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란 우리 시야의 한계를 넘어서는 언제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세계의 현실적 통일성은 그 물질성에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몇몇 요술적 문구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 및 자연과학의 장구하고 지난한 발전에 의하여 증명되는 것이다(엥겔스, 1988: 52)

엥겔스가 주장한 자연의 객관적인 변증법에 대한 사상은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선차성과 자연에 대한 인간 의식의 발전과 역사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인간적, 사회적 실천에 대한 규정적인 계기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 실천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적용하여 실천의 근거를 주관적 측면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질 관계 속에서 찾게 해주며, 그 결과 사회역사의 운동을 물질의 한 운동형태로 이행할 수 있게 하는 세계관의 토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마르크스이론에서 자연을 이해하는 훌륭한 길라잡이다.

그러나 스탈린정권 아래 자연문제를 ‘진정으로’ 취급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숙청4과 더불어 스탈린주의의 기계적 변증법을 비판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자연’이라는 문제를 기권 혹은 거부한 이론의 역사는 이후 마르크스이론 내에서 ‘자연’에 대한 이론의 빈 공간을 만들었다. 이러한 마르크스 진영 내의 지난한 역사적 궤적은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3.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을 위한 생산

생태/환경 문제를 둘러싼 마르크스이론에 대한 왜곡과 곡해는 마르크스주의 진영 외부 및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날로 심각해져가는 지구 환경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환경이론, 특히 신맬더스주의가 1970년 이후 강해졌다. 신맬더스주의자는 마르크스이론이 과잉인구와 자연의 한계를 다루지 않은 부분을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이론을 죽은 개 취급했다. 이후 신맬더스주의는 생태주의와 결합되면서 심층생태주의 입장에서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의 적대 대립관계를 설정한 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도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한 이론이기 때문에 생태문제를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다른 한편,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는 신맬더스주의에서 제기한 마르크스이론 비판을 수용하고 역사 발전의 단계론에서 생산력중심주의를 강조한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이론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토대로 마르크스이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소련 및 동유럽의 환경 악화가 1980년대 이후부터 세간에 알려지면서 마르크스이론에 기초한 환경문제 분석에 회의적인 입장이 나타났다.5

크리스 뱀버리(2009)는 서방 공산당의 궤적을 “스탈린주의에서 유러코뮤니즘으로” 변천되어왔다고 주장한다. 1940년 후반 소련과 동유럽,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사태에 압력을 받은 서방 공산당들은 공공연히 소련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 유로코뮤니즘의 출현으로 서방공산당들은 개혁정당으로 변모하려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89년 동유럽혁명의 충격과 소련정권의 붕괴가 촉발되면서 유러코뮤니즘적 경향은 주된 흐름이 되었다. 이렇듯 그간의 역사 과정과 이론의 변모 과정은 생태사회주의 및 생태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6

1970년 이래로 생태주의자는 마르크스이론의 주된 비판으로 자연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생산력 중심주의(프로메테우스주의), 동유럽과 소련의 심각한 환경 악화 등을 지적한다. 이들의 문제제기의 수용 여부 및 수용 정도에 따라 통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생태 논의를 생태사회주의와 생태마르크스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생태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경제 합리성과 산업 성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반생태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마르크스이론의 생태주의 한계를 넘어서는 논의를 생산해낸다. 생태사회주의는 생산양식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사회 비판이 자본주의에 ‘한정’되는 기존 논의들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다른 한편 생태마르크스주의는 자본 축적과정, 즉 자본주의적 가치증식과정에 초점을 두고 환경 문제를 해석한다.

생산력주의는 ‘생산을 위한 생산’이 이루어지는 경제체제를 비판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개념일 수 있다. 그러나 생산력 그 자체를 역사 발전의 기본 토대로 보고 이를 기반으로 인간 역사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했던 마르크스의 유물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비판할 지점이다.

마르크스가 생산력 개념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생산력이 바로 인간 생존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처럼 생존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여 자기 활동의 에너지로 전환시켜야 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에 대한 합목적적인 이용과 변형을 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동물과 구별된다.

이때 생산력은 가장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스스로 생존을 위한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이러한 생산력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식 능력이 발달함으로써 더욱 발전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개인들 자체의 능력의 발전”, 인간능력의 발전으로 파악하였다.

인간은 인간의 외부에, 인간과 독립하여 존재하고 작용하는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지 못할 때에는 자연이 제약하는 맹목적인 필연성에 종속된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의 의지 및 의식과 독립하여 작용하는 자연법칙을 조금씩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인류 역사의 생산력 발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엥겔스는 “유인원의 인간화에 있어 노동의 역할”에서 인간이 자연법칙을 이전 보다 더 많이 이해하는 과정은 정복자가 타민족을 지배하듯이 자연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에 일부라는 위치에서 자연을 올바르게 사용할 것을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생산력을 자연 생산력과 사회 노동의 생산력 혹은 노동의 사회 생산력으로 구분했다. 우선 자연 생산력은 자연적 위치, 토양의 비옥도 등이 생산력의 차이를 낳을 수 있다. 자연 생산력의 차이는 인류 역사에 존재한다.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자연력의 차이에 의한 생산력 차이는 자본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력에 대한 처분권의 독점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러한 자연력의 처분권 독점은 차액지대 일반, 즉 초과이윤을 낳는다.

... 폭포를 사용하는 제조업자의 초과이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높은 생산성은 자연력의 이용과 결부된, 노동의 더 큰 자연발생적 생산성(greater natural productivity of labour)으로부터 생긴다. 그런데 이 자연력은 동일한 생산 분야의 모든 자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예: 증기의 탄력)이 아니며 따라서 자본이 이 생산 분야에 투하된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그러한 자연력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자연력은 (폭포와 같이) 특수한 장소와 그것의 부속물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만 독점할 수 있는 자연력이다(마르크스, 2004: 793).

자연력의 차이에서 발생되는 생산력의 차이는 경제관계, 즉 농업상의 화학과 기계의 발전수준의 관계를 내포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 생산력의 발전 수준에 따라서 자연력은 극복될 수 있다.

다른 한편, 노동의 사회 생산력은 다음과 같다.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사회화된 (공동의) 노동의 생산력은 협업을 통해, 작업장 안에서의 노동 분업, 기계의 사용, 일반적으로 자연과학, 기계학, 화학 따위의 의식적 적용, 특정하게는 기술 따위에 의한 생산과정의 변형 등을 통해, 그리고 이런 모든 진보에 조응하는 대규모의 노동”(마르크스, 1998b: 92) 이다. 노동의 사회 생산력은 인간의 집단 노동을 통해 발생된다.

자연은 기계, 기관차, 철도, 전보, 자동 방직기 등을 제작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의 근면의 산물이다.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 의지의 기관이거나 자연에서의 인간 의지의 활동 기관으로 전환된 자연적 재료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손으로 창출된 인간 두뇌의 기관들이다. 대상화된 지력(知力)이다. 고정 자본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식이 어느 정도까지 직접적인 생산력으로 되었고 따라서 사회적 생활 과정 자체의 조건들이 어느 정도까지 일반적 지성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 이 지성에 따라 개조되는가를 가리킨다. 사회적 생산력이 지식의 형태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기관들, 현실적 생활 과정의 직접적인 기관들로서 어느 정도까지 생산되었는가를 가리킨다(마르크스, 2007: 382).

“역사유물론의 생산주의가 인간의 이러한 유적 능력을, 마침내 인간이 대상을 미의 법칙에 따라 형성하게까지 된 사정을 설명해주는 것이라면 그 생산주의가 필연적으로 생산 ‘지상’주의 혹은 ‘나쁜’ 생산주의일 이유는 없다. 더 나아가 생산력의 지속적 발전 그 자체가 환경위기를 야기한다는 생각은 근거 없다. 문제는 어떤 생산력이 발전하느냐, 그 생산력이 어떻게 사용되느냐, 그 생산력을 누가 통제하는냐이다”(정성철, 2007:327).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에게 생산력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능력의 발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생산력 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문제는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 자체를 위한 생산’, ‘생산력주의’는 다른 범주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산력의 발전이 그 자체로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 이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력의 발전은 자연 및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원한(소외) 관계를 극복하는 것이고 이는 인간이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을 위한 생산’은 생산자가 노동 통제 및 자연에 대한 합목적적인 이용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작동 기제로 마르크스에게는 거부해야 할 자본주의 본성이다.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직접적인 생산의 목적으로 등장하자 자본이 노동을 포섭하고 생산을 위한 생산이 나타난다. 생산규모가 주어진 사회 욕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양식 자체에 의해 규정되고 끊임없이 증가하는 생산규모에 의해 생산량이 결정된다.

실질적인 생산자는 단순한 생산수단이고, 객관적 부가 그 자체로 목적이다. 그리고 따라서 이러한 객관적 부의 발전은 인간 개개인에 대립하고 이들을 희생시킨다. 노동생산성 일반=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생산물, 따라서 상품들을 가능한 한 최대한 싸게 하는 것. 이것이 개별 자본가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법칙이 된다. 그리고 이 법칙은 오직 이것이 또 다른 것, 즉 생산 규모는 주어진 필요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 역이라는 것: 생산물들의 총수는 항시적으로 증가하는 생산 규모에 의해 결정되며, 이는 생산양식 그 자체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으로 오직 실현될 수 있다(마르크스, 1998b: 105).

자본이 노동과정을 예속하는 과정에서 생산자의 노동이 자본가에 예속되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본가가 생산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자에게는 노동대상 및 수단에 대한 통제권의 상실이고 이러한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의 상실은 자연의 활용 방식에 대한 자본의 예속을 의미한다.

생산력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의 대안은 생태공동체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긍정성은 생산수단의 집중을 통한 생산력의 비약적 증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성은 생산력의 자기 파괴적 측면과 동시에 나타난다. 이러한 이중적인 측면을 간과한 생태 공동체주의는 생산성을 부정한 저성장, 제로성장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생태 공동체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이 아닌 생산력 그 자체를 ‘악’으로 등장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긍정성을 유지하고 부정은 지양하여 대안적 사회적 모델을 제시하지 않은 생태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측면만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생태 공동체 모델은 현재의 지양이 아닌 과거 지향적인 자기 노동에 기반한 소생산제 사회로의 회귀를 갈망 한다”(김민정, 2010).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 그 자체가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조응하는 방식 그 자체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인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소유를 사회적 통제 및 관리로의 변혁을 통한 사회주의 생산을 목표로 한다.

4. 인간중심주의 대 생태중심주의

생태주의는 현재의 반생태적인 사회를 인간중심주의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된다. 현재의 경제성장이 반생태주의고 자연과 함께 사는 인간 삶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감으로 형성된 생태중심주의는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준다. 생산수단을 기반으로 한 자연에 대한 통제 및 관리가 사회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자본 중심으로 통제되는 상황에서 생태중심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대적 대안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생태중심주의를 주장하는 관점도 여전히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간의 대립 관점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 모두 인간과 자연간의 대립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의 입장을 취사선택한다고 해서 인간과 자연간의 대립적 관점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 예외주의 패러다임(인용자-인간중심주의)과 새로운 환경주의의 패러다임(인용자-생태중심주의)의 대비가 갖고 있는 중대한 문제는 환경적 요소를 강조하다보니 사회 대 물질적 환경, 인간중심주의 대 생태중심주의라는 이원론을 고착하게 되고 그래서 중간을 배제하는 이분법의 오류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비법 가운데는 사회경제적 발전이나 문화적 축적을 “인간중심적”으로 파악하고 인간세계와 인간의 노력을 낮게 평가하는 “생태중심적”관점을 배제하는 경향이 자리 잡고 있다”(존 벨리미 포스터, 2010: 268).

마르크스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점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연의 산물로서 그 자체로 자연 존재로 파악한다. 1844년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로 추상적인 관념으로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거나 인간이 지닌 의식을 과도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연법칙 하에서 인간사를 발전시키기 때문에, 인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자연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어떻게 자연이 인간 행위에 관련되는가를 밝히는 ‘자연의 인간화’와 어떻게 인간의 역사가 자연에 관련되는 가를 밝히는 ‘인간의 자연화’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어떤 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두 측면의 상호적 과정에 토대를 둔 중용의 시각을 결코 잃지 않았다.

생산과정에서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및 관리를 하지 못한다는 현실적인 물질 조건이 인간과 자연을 상호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고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사고를 낳는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중적인 도덕 기준을 갖게 된다. 직장에서는 수돗물과 전기 사용에 관해서는 무관심하다. 하지만 집에 오면 수돗물과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이 타인의 소유인 곳과 그렇지 않는 곳에서 달라진다.

따라서 인간 중심주의 경제 성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집단을 위한, 어느 집단에 의한 경제 성장인가라는 계급 및 계층적 이해관계에서 경제 성장을 비판해야 한다. 문제 설정 자체가 성장주의 대 제로성장주의, 마이너스 성장주의에서 사회적 세력관계의 대립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녹색을 위해 저성장, 제로성장을 주장하는 생태주의 입장과 환경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던 이명박식 성장주의 입장은 ‘성장’ 그 자체만을 주목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 어떤 방식의 성장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5. 다양한 사회 운동의 대립

일자리 만들기와 자연보호가 대립된다. 쌍용자동차의 투쟁처럼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 및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서로 반목하게 된다. 국내 노동자들이 국외 노동자들을 때리거나 욕을 한다. 남성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를 성희롱 및 성폭행한다. 제철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해에 반대하는 지역주민의 집회에서 제철공장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고소득 노동자들은 주식 투자, 아파트 투기, 자녀들의 사교육에 많은 돈을 투자한다. 이러한 모습은 각 쟁점에서 사회 운동의 대립지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착취와 억압받는 이들의 단결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내노동자가 억압받고 이주노동자들이 억압받는다고 해서 이들이 ‘반드시’ 함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착취와 억압받는 자들 사이에서 연대보다는 반목과 대립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적-록-보라의 경우 각각의 결합 요소들은 그 내부에서 불완전성이 확인된다. ...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렇게 각각의 결합 요소들의 불완전성은 위 세 가지 요소들의 연대를 ‘반드시 진보적으로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이승원, 2009). 이는 올바른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적녹보라 패러다임이란 노동, 생태환경, 성을 함께 고려하면서 운동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고정갑희, 2013: 315).

심광현은 적과 녹, 보라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자본주의의 착취/수탈 구조에 대한 체계적 비판에 초점을 둔 적의 전략과 대안적 사회구성과 주체형성에 초점을 둔 녹과 보라의 전략은 서로 다른 차원에 위치하기 때문에 환원불가능 하면서도 각기 목표를 달성하려면 서로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확인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심광현, 2013: 316).

노동, 환경, 여성의 ‘주제’가 연대 운동을 진보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각 운동의 연대가 진보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몇몇 학자의 주장을 통해 살펴보자.

이승원(2009)의 주장처럼 “연대의 중심은 오로지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인가? 헤게모니 실천의 정치 지향점을 주목하지 않은 채 각 국면에서 연대 주체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지배하는 지적-도덕적 실천”에 의해 보장받으면 되는 것인가? 박영균(2009)의 주장처럼 차이를 보장받는 느슨한 접속지점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한가? “각 운동의 다름 속에서 침투해서 자기를 바꿔가는 운동이 필요하다. 차이를 강조한 연대는 하나(같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부분들의 접속, 연결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가 만나서 뭔가를 할 때 느슨하게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자본이다. 이는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급진적 민주주의 틀로 다양한 운동 영역들이 만나자.” 이런 점에서 그는 “자본에 의해 배제된 자들끼리 ‘적-녹-보라’의 연대적 가치를 중심으로 ‘자본 없이 살기’라는 생산-소비의 자치적 공동체인 ‘코뮌’을 이 사회 곳곳에서 구성해 가는 전략(박영균, 2013: 319)”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는 강내희(2009)의 주장처럼 각 운동이 연대할 수 있는 의제 설정이 필요한가? “만날 수 있는 의제 설정이 필요하다.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특히 부동산문제, 교육문제 등에 무기력했다. 이 지점을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이승원(2009)은 특권적 위치와 노동계급 중심성을 비판하면서 “연대는 연대의 중심이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특권적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도 상황에 따라서 바뀌게 된다.”, “각 부분마다 적이 다르기 때문에 연대가 어렵다. 이러한 현실에서 동일화, 연대의 강도를 어디까지 규정해야 하는가.” 라는 점에서 현실적 힘의 역학관계에 따른 헤게모니적 실천을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타나는 운동의 분열 지점을 이론적으로 해석해 내지 못한다면 실천은 ‘상식에 기반하면서도 상식을 넘어서는’ 실천적인 지침을 제공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양한 실천 운동‘만’으로 이론은 자동적으로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허성우(2009)의 고민처럼 “... 이명박 보수 정권의 등장과 더욱 강도와 순도가 높아진 신자유주의 정책의 직간접적 결과들을 목도하며 각개 약진하던 정체성의 정치학에 기반한 운동영역들은 새로운 대안적 사회체제에의 접근을 구성하면서 사안별 연대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전략의 필요성을 보다 긴급하게 인식(강조 인용자)”한 현실에서 이러한 실천적 지침은 절실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성우의 지적처럼 “적, 녹, 보라 삼자 간 관계의 재구성에서 삼자 간의 어느 정도의 균형적 태도들을 가정하는 접합, 연대, 동맹이라는 방향보다는 서로에게서 비가시화되고 배제되었던 문제들을 얼마나 개방적이고 환대하는 태도로 맞아들이며 이를 통해 자기 경계를 무너뜨리며, 즉 해체를 통한 재구성의 전환의 실험 앞에 자신을 그대로 내놓는가에 따라 달려”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공론의 장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론의 장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려면 대화 및 토론과 함께, 더 많은 사람들을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목표를 기반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다양한 사회 운동의 대립에서 필요한 것은 사회 운동들의 반목과 대립을 해석할 수 있는 이론 작업과 토론이다. 그리고 이론이 실천에서는 어떠한 유의미성을 제공해줄 수 있으며 약점을 보일 수 있는 지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6. 나오며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는 수많은 역사적 질곡 및 우여곡절과 함께 이어져 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마르크스이론이 생명력을 잃지 않은 것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계속되고 있는 사회 조건도 한 몫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지구적인 기후변화는 더 이상 사회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이론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이론의 기반을 제공해준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착취와 환경 악화의 상관관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논의보다 탁월하다. 이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환경 악화를 가져오는 가를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이론은 여타의 억압과 사회 불평등을 계급으로 ‘환원’하지 않고 계급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이론은 다양한 사회 억압의 원인이 사회의 계급 분열과 관련성을 맺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타의 억압과 환경 악화 등의 문제가 계급사회의 물질적 기반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마르크스이론의 과제이다. 다양한 억압 및 환경 악화를 계급으로 환원하는 것과 이런 억압의 근원이 계급 사회임을 밝히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마르크스이론이 반(反)생태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은 마르크스이론에 대한 올바른 정립을 통해 환경문제가 어떻게 착취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가를 입증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이다. 사회주의 생태론을 정립하기에 앞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왜곡과 곡해를 짚고 넘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 글이 제시한 출발점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생태논의가 활성화되기를 희망한다.

* 주

1) 여기서 언급된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생태주의자들 및 생태주의에 경도된 사회주의라고 본다. 이러한 구분은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2) 2011년 6월 민주노동당은 당 강령 토론회에서 21세기 진보의 재구성의 필요성으로, 기존의 전통 진보운동을 계급중심주의 관점과 입장에서 계급환원론이라고 비판하면서 각각의 운동들은 각자 고유한 모순들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또한 각각 다르다는 점에서 새로운 분석 방법론을 제시한다(새세상연구소, 2011,『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대안체제로』 참조).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분석 방법은 이미 진보신당 및 『진보평론』등에서 제기했던 비판과 대안의 재반복 버전이다.

3) 변증법을 주체와 객체사이의 관계로 한정시키면서 변증법의 적용영역을 사회와 역사 영역에 한정시키려는 루카치와 코르쉬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자가 있고 마르코비치, 콜라코프스키 등과 같은 동구 수정주의자들의 견해가 있다.

4) 대표적으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식물육종학자인 니콜라스 바빌로프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리센코 자연과학에 저항하다가 스탈린 정권에게 숙청을 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Pringle Peter( 2008)과 게리 폴 나브한(2010)을 참조해라.

5) 스탈린주의에 경도된 마르크스주의자의 환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환경문제를 고민하는 일부 좌파진영은 이들을 비판하면서 대안을 찾았다. “노동가치설, 자본축적론, 계급이론, 혁명론과 같은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론적 영역의 노선에 입각하여 소위 역사적 주체라고 일컫는 노동자계급 대신에 자연을 그 자리에 두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자본주의에 대한 생태학적인 비판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해야겠다는 유혹을 받아 왔다. 여기서는 자연이 모든 가치와 부를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은 착취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해방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좌파에게 더 이상 전형적인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반응에 얽매이지 않아도 될 만한 이론적 도구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룬트만, 1995).

6)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진보적 사회운동을 통해 급진화한 이들의 다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년판 서문에서 생산력 발전을 강조한 마르크스의 주장이 주체적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한 ‘기계적 결정론’이라며 거부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코헨은 1978년에 출간한 저서 『칼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 옹호』에서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발전시키고『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59년판 서문에서 간결하게 개설한 유물론적 역사 이론을 옹호했다(“알렉스 켈리니코스 논평: G.A. 코헨을 추며하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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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비

    본문에 참고문헌 표시가 있는데 내용에 첨부되어 있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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