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향하던 비정규직 오체투지, 광화문 바닥에서 절규

비정규직 동토의 땅에 비정규직 폐기 쟁점화...1월 5일 2차 행진 제안


지난 22일 부터 '비정규직 철폐'를 사회적 의제로 던지며 시작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오체투지가 끝내 청와대까지 이르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하지만 지렁이처럼 맨 땅에 온몸을 내던지며 기어온 5일간의 여정으로 비정규직 법안 개악의 문제를 대중적으로 알려내고, 본격적인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법제도 폐기를 우리 사회 의제로 만드는 첫 발을 내디뎠다는 데서 의의가 컸다. 기륭 노동자들의 오체투지는 내년 1월 5일 민주노총까지 가세해 전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2차 행진으로 이어갈 예정이다.

26일 오전 9시 30분 '비정규직 법제도 전면 폐기를 위한 오체투지 행진단' 50여명은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 모였다. 이들은 1시간여 뒤인 11시에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까지 오체투지를 한 후 비정규직 법제도 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행진에 앞서 김소연 전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은 “지난 5일 동안 비정규직 법제도가 사라져야 한다고 온몸으로 호소하면서 왔다. 긴 세월 동안 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지금도 거리를 해매고 있다.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을 담아 반드시 비정규직 체제를 없애겠다는 마음으로 행진하겠다”고 밝혔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오체투쟁은 우리말로 배밀이”라며 “배밀이 싸움으로 청와대를 점령하러 가자”고 격려했다.

이어진 오체투지 행진은 광장 중간 지점인 세종대왕 상 앞에서 경찰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경찰은 이미 행진단의 행진신청에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행진금지 통보를 한 상태였다.

행진단 관계자는 경찰을 향해 “통행에 전혀 방해를 주지 않는 평화적 오체투지를 막는 이유가 뭐냐”며 “앞으로 가야할 길이 700미터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기륭 여성노동자들의 간절한 바람인 오체투지를 막는 것 자체가 이들을 죽이는 행위다. 빨리 목적지에 가서 기자회견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 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은 해산만 종용했다.

오체투지 행진단은 광장 대리석 바닥에 한 줄로 엎드린 채 경찰이 길을 터주길 기다렸지만 경찰은 묵묵부답이었다. 맨 땅에 얼굴을 박고 두 손과 두 발을 쭉 뻗은 채 1시간여를 기다린 행진단은 11시 20분께부터 다시 오체투지를 시작했다. 이번엔 경찰 앞에서 멈추지 않고 한 명 한 명이 경찰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경찰들은 다리 사이로 들어온 오체투지 행진단을 두 발로 버티고 막아서 겹겹이 에워쌌다.



결국 행진단은 점심도 거르고 경찰들 다리 사이에 끼어 4시간여가 넘게 오체투지 자세로 대치하며 절규했다. 이 과정에서 이인섭 기륭 조합원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일부 조합원들과 행진단의 몸이 추위에 마비되기도 했다. 경찰 다리 사이에 행진단이 오체투지 자세로 장시간 엎드려 있는 사이 행진단 관계자들은 마이크를 붙잡고 오체투지 행진의 의의를 알려나갔다.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활동가는 “파견노동과 계약직 기간 연장이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끔찍한지 알고 있는 노동자들이 이걸 제대로 얘기하겠다는 데 경찰이 막고 있다. 경찰은 정권과 자본의 충견이 되지 말고 더 이상 못살겠다고 분노하는 목소리를 두려워 해야한다”고 비난했다.

양한웅 조계종 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은 “가장 간절한 마음이 담긴 오체투지를 막은 나라나 정권은 없었다”며 “오체투지를 하는 노동자의 행위 하나하나는 이 땅에서 비정규직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이라고 강조했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5일 동안 팔다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여기까지 걸어왔다”며 “이 노동자들이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고 싸우는 것은 우리가 알리지 않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비정규직의 고통과 눈물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싸움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자본과 박근혜정권에 맞서 더 큰 운동을 만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5시가 넘게 이어진 오체투지 대치는 오후 4시 30분께 민주노총 새 지도부와 함께하는 긴급 기자회견이 시작되면서 풀렸다.

기자회견에서 최종진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당선자는 “박근혜 정권의 미친 질주를 꺾고 노동자가 살기 위해 싸우라는 조합원의 명령을 겸허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안겠다”며 “비정규직 동토의 땅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대장정에 2015년 박근혜 정권과 한판 대결로 역사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제 친구들인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비정규직법이야 말로 사장 놈들이 야반도주하게 하는 법이란 걸 알았다”며 “모든 사람이 동등한 주인이 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비정규직 양산 법을 없애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권리를 누리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유흥희 기륭노조 분회장은 “오체투지를 하면서 1895일 동안 싸웠던 참담한 날들이 떠올랐다”며 “더 이상 우리 일터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비정규직, 정리해고 제도를 없애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우리 삶은 편안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고 했다.

유흥희 분회장은 “5일간 기어오면서 매일 매일이 해고의 불안에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2015년은 끔찍한 비정규직의 굴레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사람이고 이 땅에서 일할 수 있다는 그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 면서 가려고 한다. 저희들이 작지만 그 시작을 했다고 본다. 2015년을 반드시 승리하는 원년으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고 더 큰 연대를 호소했다.

행진단 참가자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전혀 새로운 투쟁, 개인 단사의 이익과 승패를 넘어 체제 자체를 변혁할 근본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며 “노동자 민중의 거대한 항쟁이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 1차 오체투지 행진의 최종 결론”이라고 밝혔다. 이어 “5일간 걸어온 길은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이라며 “1월 5일 차별받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할 두 번째 행진이 시작된다. 더디고 힘들 지라도 더 크고 강한 행진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2차 행진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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