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통제 운동의 두 경로: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

[주례토론회] 국가와 생산수단 소유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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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파리 코뮌 이래로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부르주아적 지배 질서가 이완되거나 혁명적 정세가 고조될 때 공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평의회를 결성하며 자주관리를 시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영국 글래스고에서 노동자평의회가 출현하였으며 1918-1919년 사이에 베를린에서 결성된 노동자 평의회는 국가권력을 위협할 정도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전쟁 직후 이탈리아의 이른바 붉은 2년 동안 토리노의 노동자 평의회 경험을 바탕으로 그람시는 작업장 민주주의와 노동자 헤게모니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의 노동자 평의회인 소비에트는 혁명적 노동자 민주주의의 한 극점을 보여주었다.

이 민주적 노동자평의회들은 우여곡절 끝에 대부분 부르주아적 질서 속에서 소멸되거나 스탈린주의의 예에서 보듯 형식화되고 억압적 국가기구의 장식물로 바뀌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 평의회를 통한 자주관리를 국가권력을 통하여 전국적 수준에서 체계적으로 실행한 매우 독특한 사례였다. 그러나 유고의 자주관리 경험은 사회주의에 시장이 전면적으로 도입되면서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사회전체 수요에 대한 계획보다 자주관리 기업간의 경쟁을 격화시켰고 이에 따라 전문경영인 체제로 복귀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논문에서는 21세기 초반에 신자유주의에 의한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노동자 통제의 두 경험을 다루려 한다.

이 두 나라의 노동자 통제는 초기에 기업회복운동이라 불렸다. 즉 자본에 의해 황폐화된 회사를 노동자들이 점거하여 방어하고 자본가의 복귀에 저항하며 궁극적으로는 소유형태를 변환시킴과 동시에 노동자통제를 실시하는 운동이 이 두 나라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는 그 이후 노동자 통제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키르치네르와 페르난데스 대통령 하에서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통제운동은 국가권력의 체계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였고, 사례별로 오랜 법적 공방을 거쳐 협동조합 방식으로 노동자 통제가 정착되거나 자본의 복귀로 퇴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베네수엘라에서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에 의해 초기부터 매우 우호적인 조건에서 노동자통제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전략적 부문에서의 노동자 통제 문제를 둘러싸고 국가권력과 노동운동 사이에서, 그리고 노동운동 내부에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렇지만 2005년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회복된 기업 대회”가 개최되어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서 반신자유주의적인 기업회복운동의 연대가 형성되었다.

이 두 나라의 사례를 각각 검토해보고 비교하기로 한다.

2. 아르헨티나의 기업회복운동과 노동자 통제

2001년 후반기에 아르헨티나는 국채에 대한 디폴트를 선언하였다. 이와 함께 달러 자산의 해외유출과 제조업을 포함한 여러 산업부문에서 작업장과 회사의 가동이 중지되었고 노동자들은 폐쇄된 공장 앞에서 출입을 봉쇄당하였다. 그러나 곧 많은 공장과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점거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점거한 공장과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추방되는 것에 저항하였으며, 스스로 생산과 서비스를 조직하여 작업장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2001년에서 200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약 2500개의 작업장이 폐쇄되었다. 그 중 150-200개의 작업장이 피고용자들에 넘어가 생산을 계속하였다.

기업회복운동이 전개된 작업장은 폐쇄된 작업장의 10%를 넘어서지 않았고 모든 작업장에서 그 운동이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자본주의의 핵심기둥인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의 관리가 아닌 노동자의 자주관리에 의해서도 생산이 성공적으로 조직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디폴트와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5명의 대통령이 단기간에 교체되었다. 이런 정치적 균열은 노동자들의 작업장 점거와 기업회복운동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방해를 무력화하였다.

이렇게 열린 정치적 공간 속에서 전개된 기업회복운동은 페론주의자들 중에서 무명이었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이 되면서 점차로 닫히게 되었다. 키르치네르 집권 하에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안정화되기 시작하였고 국가기구의 위신도 점차 회복되었다. 이런 상황 변화에 영향을 받아 기업회복운동은 노동자 협동조합의 형태로 일부 인정되기도 하고 일부는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 주변화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운동의 조직적 분화가 일어났으며 아르헨티나 사회의 변형에 미치는 영향 또한 제한되었다. 작업장 점거와 노동자 통제에 나섰던 노동자들은 예외없이 지루한 법적 소송과정에 시달렸고, 생산을 정상화하는 데까지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여야만 하였다.

2005년 5월 카라카스에서 “노동자가 점거한 기업”대회가 열렸고 아르헨티나는 500명의 대표를 파견하였다. 이 사실은 이 운동이 라틴 아메리카 전체로 파급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이후 베네수엘라 노동자 통제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소(Argentinazo)

아르헨티나소는 2001년 12월부터 일어난 아르헨티나 민중의 격렬한 봉기를 나타낸다. 이 봉기에 의해 민중은 기존의 모든 정치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철회하였고 억압적 국가기구는 민중의 저항에 의해 일시적으로 무력화하였다. 이 때 등장한 구호가 “ Que se vayan todos”(너희들 모두 다 꺼져)이다. 아르헨티나 민중의 절망감과 분노를 잘 나타낸 이 표어는 도시빈민, 노동자, 실업자 등의 항의운동에 경제위기로 몰락할 위기에 처한 중간계급의 결합을 나타낸 상징적 표어이다. 아르헨티나의 기존 정치세력은 일시적으로 헤게모니를 상실하게 되었다.

군부가 물러난 후 아르헨티나의 경제개혁은 신자유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특히 메넴 치하에서 외채위기를 돌파한다는 명목으로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경제자유화 정책이 수행되었는데, 국영석유회사를 비롯한 공기업의 사영화, 재정긴축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고, 통화주권을 일부 포기하여 페소화와 달러화의 교환비율을 1:1로 고정시킨 convertibility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 정책으로 인플레를 진정시켰다는 미국 등의 칭찬을 받았지만 아르헨티나 산업은 초토화되었다. 이로 인해 전인구의 50%가 넘는 사람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였다.

2001년에서 2002년에 이르기까지 아르헨티나 경제는 15%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였다.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1410억 달러의 외채에 대하여 디폴트를 선언하고 페소화의 대폭적 평가절하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달러화 예금과 페소화 예금에 대해 인출금지 지시를 내렸다. 이는 외화도피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5월 광장에 모여든 군중은 “Que se vayan todos”를 연창하며 거세게 기존 권력에 항의하였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혁명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환상을 낳았다. 그러나 많은 좌파 지식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는 결코 혁명적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베네수엘라와는 달리 혁명을 조직할 아무런 사회세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업장 점거와 저항

자본가들은 이런 경제위기에 대해 작업장 폐쇄와 의도된 파산, 임금체불 등으로 대응하였다. 그리고 빚을 얻어 또다른 공장을 짓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이 공장 담을 넘어 점거를 시도하였을 때 그들이 본 광경은 자본가들이 팔기위해 기계를 해체하는 광경과 회계장부에서 확인된 의도적 임금 체불 등이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자생적으로 작업장을 점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매우 소극적인 자기방어 행동이었다.

공장점거가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 통제와 자주관리는 노동자 계급의 빈곤화에 저항하는 대안으로서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자국 산업을 재건할 대안으로서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작업장 점거를 주도한 층은 거의 블루칼러 노동자들이었다. 이는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장 점거가 진행되면서 그들은 한편으로는 지리한 법적 공방을 벌여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생산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보스없이 훌륭하게 생산을 조직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자본가들의 기업 소유권의 절대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들은 거의 협잡 수준으로 의도적 채무를 발생시키고 파산시키는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체불 임금과 사회보장 기여금 등을 고려할 때 도덕적으로 그 공장은 자본가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이는 공장점거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정당성이 흔들리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기업회복운동은 전 산업에 걸쳐 진행되었고 주로 종업원 규모가 40명에서 100명 정도 되는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이 운동은 도시중간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도시 중간계급은 피카테로 운동과는 달리 이 운동이 무언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운동이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대부분의 점거기업에서 노동자들은 우선 노동중재재판소에 대해 불법적 직장폐쇄를 막아달라고 호소하였고, 임금 체불 문제도 호소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재판관들은 이런 노동자들의 호소를 외면하였다. 여기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 공장을 점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체불임금이 아니라 일자리가 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공장 점거가 진행되는 동안 자본가들의 기계, 생산설비 처분 행태는 저지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이제 이 공장을 어떻게 처분할지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즉 회사를 어떻게 가동할 것이며, 미래를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토의하면서 의사결정능력은 배가되었다. 또한 생산과 시장의 난점을 헤쳐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안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방식들을 실행에 옮겨야만 하였다.
점거 후에는 저항의 과정이 계속되었다. 도덕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비법적인 행위는 공권력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공장 점거 노동자들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아르헨티나 최대노조인 CGT는 페론주의자들에 장악되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로 새로운 연대의 사회적 틀을 만들어 나가야만 하였다.
이런 역경을 극복하면서 이들은 매우 전투적인 노동조직으로 거듭났으며 지역공동체 등 기존 노조가 아닌 새로운 연대의 틀에 생존을 의존하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에 있는 바우엔 호텔이 이 경우이다. 공권력의 침탈기도를 이들은 세 번이나 막아내고 2009년 협동조합으로서 법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FaSinPat(보스없는 공장이란 뜻)로 개명한 Zanon 세라믹 공장도 지역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노동자 통제를 방어한 주요한 사례이다.

노동자들이 보스없는 생산을 성공적으로 조직한다 하더라도 또 하나의 문제가 따랐다. 그것은 스스로 생산을 조직하기 위한 조건의 창출에 관한 문제였다. 생산물이나 서비스의 판로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설비나 원료는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혁신적 생산방식을 어떻게 도입한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노동자 통제기업의 장기적 존속은 불투명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방식이 창의적으로 도입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의 해결에 자주관리 기업들 노동자 집단들 사이의 연대와 시민사회와의 연대가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다.

노동자 통제운동의 분화

많은 연구들은 노동자 통제, 노동자 자주관리가 제대로 시행되려면 사회주의 경제가 전제되어야 하며 따라서 혁명적 사회변혁운동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통제운동에 대해 진화론적 관점을 취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에 의하면 노동자 통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자주관리는 하나의 관리관행으로서 수많은 사례를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노동대중을 설득함으로써 점진적으로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이 두 관점은 운동이 발전해감에 따라 서로 경쟁하는 두 노선으로 구체화되었다.
보수적 기업가는 Luis Caro가 이끄는 MNFRT와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MNER로 기업회복운동은 분열하였다. 보수적 변호사인 카로는 회복기업들에 대해 법률적 자문을 제공하면서 급속히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MNER은 대안적 경제체제에 대해 이들 회복기업의 경험이 매우 중요함을 인정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내에서는 차선책으로 그 기업들이 협동조합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흐름과는 별도로 사회주의의 징검다리로서 회복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제3의 흐름이 있는데, 이 흐름의 대표적인 사례는 FaSinPat이다.

3. 베네수엘라의 노동자 통제운동

베네수엘라는 1999년부터 참여민주주의적인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 중에서도 공동체 평의회와 함께 가장 주목받는 제도적 실험이 공동관리(코헤스티온, cogestion, co-management) 운동이다. 이 운동은 세가지 방면에서 행해졌다. 첫째는 기업주가 방기한 공장을 노동자들이 인수하고 이를 정부가 법인하여 정부와 노동자 협동조합의 공동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기업회복운동에 입각한 공동관리, 차베스의 발의 하에 정부의 재정지원과 사회적 소유에 바탕을 둔 사회적 생산기업에서의 코헤스티온, 마지막으로 전략적 산업에서의 코헤스티온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맹아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많은 모순을 드러내어 코헤스티온이란 용어는 공식언술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2008년부터 사회주의적 과야나 계획에서 사회주의적 자주관리가 강조되면서 코헤스티온의 정신은 다시 다른 맥락에서 부활하고 있다.

석유채취산업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와 석유지대의 분배를 통한 후견인주의(clientelism)적 정치구조가 특징이었던 베네수엘라는 1980년대의 국제유가의 하락과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급격한 빈곤화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런 경제적 퇴행과정은 마침내 베네수엘라 당시 정부가 1989년 국가채무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IMF와 맺었던 정책협약에 따라 재정긴축과 공공요금 인상, 식료품과 유가인상 정책으로 대규모 도시폭동으로 귀결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베네수엘라 정치를 양분해왔던 양대 정당인 COPEI와 AD 중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전직 공수부대 중령 출신이며 1992년 민-군 연합 봉기를 기도했던 책임자인 우고 차베스는 광범위한 좌파연합과 1994년부터 그를 중심으로 조직된 제5공화국 운동이라는 선거중심 정당의 후보로 보수 양당의 연합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헌법제정의회의 소집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민족주의적, 민주주의적 변혁을 이루어 내겠다는 민족민주혁명의 플랫폼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 결과 1999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제정의회가 새롭게 구성되었다. 여기에서 제정된 헌법이 이른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헌법으로 과거 사회운동의 성과가 그 조문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차베스의 집권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취하고 있던 베네수엘라의 이른바 과두세력은 2001년 차베스가 헌법에 따라 의회로부터 부여된 수권법을 행사해 49개조의 신법을 제정하자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차베스는 사유화를 통해 초국적 자본에 매각될 예정이었던 국영석유회사(PDVSA)를 재국유화하고 그 회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국가 속의 국가로 사실상 국가의 통제를 받기는커녕 사실상 국가와 분리된 조직이었던 PDVSA 경영에 대한 감사가 진행되고 그 회사운영의 심각한 문제들이 폭로되기 시작하였다. PDVSA의 재국유화 과정을 포함한 개혁조치들로 인해 구체제 세력은 차베스와 그들의 이권이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고 2002년 4월 군내부의 동조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차베스를 카리브 해의 외딴 섬에 감금한 채 헌법을 정지시키고 구체제로의 복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빈민을 중심으로 한 수십만의 차베스지지 민중의 조직적 저항에 의해 구체제 복귀를 위한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구체제 과두세력은 2002년 12월 초부터 베네수엘라 경제의 핵심인 PDVSA의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공장과 기업, 상점, 주유소 등에서 파업을 벌여 베네수엘라 경제를 마비시켰다.

이 때 PDVSA의 노동자들은 직장폐쇄에 참여한 경영진과 기술 전문인력의 도움 없이 PDVSA의 가동을 정상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브라질 기술자들의 도움과 은퇴한 숙련노동자들의 복구 참여 덕분으로 빠른 시간 내의 생산 정상화가 가능했다 하더라도 국영석유회사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통제 하에 석유생산을 정상화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석유부문의 직장폐쇄와 경제전반에 대한 사보타지가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처벌을 두려워한 많은 기업 소유주들은 공장이나 회사를 버려둔 채 미국 등 외국으로 도피하였다. 2002년 말의 아르헨티나와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가동을 중지시킨 많은 공장을 노동자들이 점거하였고 이들을 아르헨티나의 선례를 따라 복구된 공장(fabricas recuperadas)으로 지칭하면서 베네수엘라 정부에 노동자 통제에 의한 공장관리를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2003년 차베스를 축출하기 위한 보수파의 마지막 시도인 국민소환투표에서 차베스가 큰 폭으로 승리한 후 베네수엘라의 과두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하게 약화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온건한 민족주의적인 의제에서 출발했던 베네수엘라 혁명은 베네수엘라 과두세력의 반혁명기도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급진화되어 그들의 목표가 21세게 사회주의의 건설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2004년부터 쓰기 시작하였는데 20세기 사회주의와 구별되는 차이점으로 차베스가 염두에 둔 것은 공동제 평의회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사회주의 시스템의 건설이었다. 물론 차베스는 이 21세기 사회주의의 구체적 상에 대해 매우 모호하게 언급하였다, 그러나 도시빈민들의 급진화와 의식화를 가져온 공동체 평의회운동과 함께 공장에서 노동자 통제, 또는 공동관리라고 불리는 새로운 민주적 관리 시스템의 발전도 차베스와 그 지지 세력이 생각한 21세기 사회주의의 핵심적 내용을 구성하였다.

2005년 노동절 때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코헤스티온(Cogestion)은 혁명이다”라는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였다. 여기에서 cogestion은 보통 영어로 공동관리(co-management)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가리키는 스페인어이다.

코헤스티온은 차베스 집권 후에 채택된 신헌법에 명시된 참여민주주의를 증진하기 위한 여러 제도 중 하나이다. 즉 코헤스티온과 자주관리(autogestion)는 헌법적 근거를 가지며 노동자들은 이 헌법적 근거 위에서 끊임없이 코헤스티온을 요구해왔다.

아르헨티나의 자주관리운동과는 달리 혁명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노동자 통제는 매우 쉽게 관철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른바 차비스타 세력 내부에서 새로운 특권층의 발생과 구 국가기구로부터 물려받은 관료기구의 저항, 국제적 상황과 볼리바르 운동 내부의 분화 등의 요소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장애는 노동자계급 의식의 발전 지체였다.

2005년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와 함께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코헤스타시온 운동이 일어났으나 2006년 후반기부터 차베스는 더 이상 코헤스타시온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이른바 전략적 산업에 대한 국가통제를 강화한다.

이러한 차베스의 입장 변화는 국외의 관찰자들에게 그의 사회주의 노선의 후퇴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2007년 과야나 사회주의 계획(Guayana Socialist Plan, PSG) 에 의해 오리노코 강 유역의 볼리바르 주에서 전략적 산업인 광업과 금속공업의 국유화와 국유화된 기업에서의 노동자 통제가 진전됨으로써 코헤스티온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노동자 통제라는 이름으로 그 본질적 성격을 간직한 채 재개되었다. 그러나 2012년 차베스의 투병과 그에 이은 사망 등 베네수엘라 정치에서의 혼란이 계속되자 이 틈을 타서 차비스타 내부의 관료주의 세력에 의해 노동자 통제에 대한 공격이 계속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네수엘라의 노동자 통제 운동은 전진과 왜곡, 현실에 대한 타협, 새로운 방향으로의 운동의 조정이라는 복잡한 변증법적 과정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흔히 코헤스티온을 공동 관리로 번역하고 있지만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의 노동운동 세력은 이 두 개념을 분명히 구별하면서 공동 관리를 독일의 노사 공동결정제, 미국 등의 일부 기업에서 실시되어 온 노동자 주식보유제(종업원 지주제)등,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일어나는 노동자의 경영참여 제도를 지칭하는 용어로 쓴다. 코헤스티온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 바꾸려는 실천 속에서 나타난 생산과정과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주체적 통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20세기 사회주의의 여러 모델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었다.

차베스가 주장한 21세기 사회주의 역시 20세기 사회주의가 직면했던 문제들에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매우 복잡한 실천 속에서 기획되고 구축되며 수정되어야 하였다. 생산 단위를 누가 소유할 것이며(국가나 협동조합, 공동체), 생산의 의사결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전문가에 위임할 것인가,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할 것인가? 노동자의 통제는 어떻게 관철될 것인가? 노동자들은 관리 역량을 갖출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생산물과 소득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베네수엘라의 경험은 매우 독특한 것이며 여러 철학적 근거들이 이러한 경험을 끌고 가는데 동원되었다.

러시아 혁명 초기의 노동자 소비에트의 경험, 이탈리아 피아트 자동차 회사에서의 노동자 자주관리 경험 등 사회적 전환기에 자생적인 노동자 자주관리의 경험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였고,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체제 아래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는 국가 시스템으로 대규모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에서도 민족민주 혁명기나 경제 위기 국면에서 자생적인 노동자 자주관리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베네수엘라의 코헤스타시온 시행에서 분명히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중소기업과 영세 장인기업 연명 부의장인 Rodolfo Cibank에 따르면 코헤스타시온은 일반적으로 관리에서의 제한된 노동자 경영참여에 공동소유가 겹쳐진 베네수엘라 특유의 노동자 통제 형태라고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코헤스타시온의 본질적 조건 중에 하나가 노동자들의 부분적 기업소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정의는 베네수엘라에서의 노동자 통제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다. 2002년의 실패한 쿠데타와 2002년 말에서 2003년 초에 걸친 석유부문의 사보타지에 참여한 자본가들이 버리고 떠난 공장을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점거하여 자생적인 노동자 통제가 시행되었고 차베스 정부는 이 현상에 주목하여 그 공장에 대한 개입을 통해 국유화한 다음 공동 경영의 형태로 노동자 통제를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코헤스티온은 회사의 전체적 운영에서 노동자들이 공동책임을 지는 경영참여가 개인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 협동조합의 소유 지분 획득에 의해 보장될 때의 경영형태로 경공업 및 상업부의 한 관료가 정의하였다.

개량주의적 코헤스타시온인 독일의 노동자 경영 참가 제도와 구별하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분석가들은 혁명적 코헤스티온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노동자 협동조합의 소유에 의한 코헤스타시온은 곧바로 큰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왜냐하면 이는 사회적 소유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에 대한 관념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복원하거나 강화하는 쪽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코헤스타시온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해석이 유력해졌는데, 이 해석에 따르면 코헤스티온은 러시아 혁명기나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제도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에 의한 사회주의적 통제를 지칭하되 노동자가 사회적 요구를 자각하고 그 요구에 응답하려는 사회주의적 의식을 기초로 한 노동자 자주관리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베네수엘라 혁명의 지그재그식 발전과 관련이 있다. 볼리바르 헌법에서 이미 참여민주주의의 한 핵심적 장치로 코헤스티온이 규정되어 있으나 초기 논의는 협동조합 중심의 사회적 경제를 구축하려는 시도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급진화는 결국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국유화된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 통제라는 의제를 부각시켰다.(Lanz Rodriguez, 2005)

그러다가 공동관리에 들어갔던 몇몇 기업들에서 노동자 협동조합은 노동자의 혁명의식을 발전시키기보다 소소유자 의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코헤스티온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가져오게 하였다.

2001년 발표된 국가 경제 및 사회 발전 계획 2001~2007과 헌법은 노동자의 경영참여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정을 담고 있다. 우선 그 계획과 헌법은 국가와 노동자, 공동체 사이의 협치(co governance)를 강조한다.

헌법 184조는 보다 직접적으로 공적 소유 기업의 운영에서 자주관리와 코헤스티온적인 방법을 통해 노동자와 공동체의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184조 3항은 공기업에서의 코헤스티온과 “사회적 경제” 내에서의 코헤스티온을 구별하면서 후자의 경우에는 협동조합이나 다른 결사체에 의한 집합적 소유를 강조한다.

헌법은 국가부문과 사회적 경제, 사적 경제 사이의 균형적 발전을 강조하고 있는데, 결국 코헤스티온은 가장 지배적인 사적 경제에서의 노동자 통제 문제를 제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동관리에 대한 최초의 실험은 Pio Tamayo 제당공장에서 행해졌다. 2001년 폐쇄되었다가 재개업한 그 제당공장에서 노동자와 국가가 공장을 협치하는 구조를 만들어내었는데, 차베스 당시 대통령은 이러한 공동관리 실험을 분권화와 의사결정과정의 분산에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즉 이때까지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은 참여민주주의였으며 이에 필요한 한 과정으로 공동관리를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델에서 노동자 대표들이 회사의 이사회에 이사로 참여하였다.

이 모델에서는 노동자 협동조합이 회사 소유지분을 보유하며 사탕수수 줄기를 베는 노동자들 역시 소유지분을 소유하게 하였는데, 이는 이러한 공동관리가 단순히 공장 노동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공정의 전 단계에 걸쳐 확대될 것임을 시사하였다. 차베스의 목표는 이 공장이 노동자들의 소유와 긍지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공장이 위치하고 있는 투쿠요 지역사회의 자랑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Fuentes, 2011)

이런 공동관리 실험은 그 운영이 공동체와 결합될 수 있는 중소 규모의 지역적 산업에서 가능하나 국가기간 산업이라 할 수 있는 석유부문과 전력, 통신 부문에서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비록 석유부문의 사보타지를 극복하는 데서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크게 작용했다 하더라도 국가전략산업에서 다른 산업과 유사한 공동관리의 실험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적 관리 관행을 고수하여 국가가 임명한 최고 경영자가 노동자들을 위계적으로 지배하는 관리 방식도 극복의 대상이었다. 여기에서 무엇인가 다른 모델이 추구되어야 하였다. 이런 모순은 전력 부문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국영회사인 CADAFE(발전 및 전력 관리회사)에서 경영층과 노조가 원칙선언을 통해 공동관리에 합의하였으나 그 이후의 전개과정은 정부에 의해 공동관리에 대한 기존 합의가 무효화되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베네수엘라 노동운동의 당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차베스 집권 전 베네수엘라 노동운동을 지배하고 있던 베네수엘라 노동자 연맹(CTV) 지도부는 베네수엘라 올리가르키의 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어용화하였고, 석유부문 사보타지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과두세력이 주도한 전사회적 사보타지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의 재구조화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차베스 세력은 그들에 우호적인 노동운동가를 CTV 위원장이 되도록 지원하였으나 그 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기존 세력의 영향력을 허물어뜨리고 지도부의 정권교체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2002년 가을부터 자연히 CTV에 대립하는 새로운 전국적 노동조합이 태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노동운동 지도부는 정부에 대하여 코헤스티온을 핵심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는 차베스 대통령이 천명한 “코헤스티온, 책임의 공유”라는 슬로건에 대한 반응이었고 집권세력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 노동자 대표들은 차베스 대통령에게 “국가부문과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적 부문에서의 코헤스티온을 확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PDVSA의 사보타지가 분쇄되고 난 다음 새로운 PDVSA를 만드는 과정에서 차베스는 이 회사를 단순히 석유를 채취하는 회사가 아니고 베네수엘라 경제를 발전시키고 다변화하는 주요 동력으로 삼기를 원하였다. 이런 능동적 역할은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회사경영에 참가할 때 가능하다는 인식하에 노동자 대표를 새로운 경영진에 포함시켰다. 이런 정책은 CADAFE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PDVSA에 대한 차베스의 인식은 그 회사가 “앞으로 영원히 공화국의 자산이 되어야 하고 어느 누구의 사적인 이익이나 정당, 또는 사회집단의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언명에서 잘 나타나 있다. 전략 산업에서 공적인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구조적 변화를 위해서 새로운 노동조합 조직을 필수적인 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전국 노동자 연합(UNETE)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UNETE는 여러 경향을 가진 정파의 연합노조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이들 사이의 노선 투쟁은 노동운동의 통일과 혁명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일관된 관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003년 4월에 결성된 UNETE는 코헤스티온을 그들의 표징으로 선택하여 “폐쇄된 회사는 노동자들이 인수한 회사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런 움직임으로 볼 때 베네수엘라에서의 노동자 통제운동은 일관된 경로를 밟을 것처럼 보였다. 사실 2005년까지 코헤스티온은 상당히 정부의 지원 하에 몇몇 공장에서 꽤 성공적으로 시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베네수엘라 노동부는 2003년 코헤스티온 운동을 지원하는 부서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실제 코헤스티온이 본격적으로 착수된 해는 2005년으로 볼 수 있다. 즉 정부는 본격적으로 자본가가 생산을 방기한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에게 생산을 계속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공장을 몰수하여 노동자들이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런 정부의 정책에 의하여 몰수된 공장의 첫 번째 사례는 2005년 1월에 수용된 베네수엘라 펄프 및 제지회사(VENEPAL)였다. 그 다음에는 전국 밸브 제조사( CNV)를 수용하였다. 이 두 회사는 각각 베네수엘라 내생적 제지 산업(INVEPAL)과 베네수엘라 내생적 밸브 산업(INVEVAL)로 개명하였으며 이 두 회사에서 코헤스티온이 시행되었다.

2005년 말까지 몇몇 다른 기업들이 국가에 수용되고 코헤스티온이 실행되었는데, 그 소유적 기초는 노동자협동조합에 의한 소유지분 소유였다.

기업주가 내버린 기업을 국가가 몰수하여 노동자에게 지분을 분여하며 노동자 협동조합이 확립한 부분적 소유권을 기초로 자주관리를 하는 이런 모델은 21세기 사회주의의 내용적 진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차베스는 2005년 8월 산업전환을 위한 공동책임 협정 프레임워크, “Fabrica Adentro"를 발기하였다. 이 도식에 따르면 재정이 어려운 기업들은 노동자 경영참여와 소유권 참여를 조건으로 국가 대부를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2006년 말까지 이 프로그램에 1500개의 회사가 참여하여 1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되었다.

약 3천명이 고용된 알루미늄 제조업체인 ALCASA는 또 다른 모델을 보여준다. ALCASA에서 노동자들은 지분소유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경영자들을 직접 선출하고 그 회사의 예산을 짜는데 직접 참여한다. (Thomas, 2005)

그런데 2006년에 이미 이런 모델의 모순이 드러남으로써 PDVSA와 CADAFE와 같은 국가기간 산업 부문에서 코헤스티온은 후퇴하게 되었다. INVEVAL과 INVEPAL에서는 협동조합을 형성한 노동자들의 소소유자 의식이, PDVSA와 CADAFE에서는 부패문제가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그리하여 코헤스티온이 사회주의적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 내리라는 예상이 빗나가게 되었다.

차베스는 또한 철학자 메자로스의 책에서 영감을 받아 코헤스티온을 통한 생산이 사회적 요구를 의식적으로 수용하는 생산체계를 수립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적 생산”이 바로 21세기 사회주의에 조응하는 생산형태이다. 공동체적 생산은 공동체적 소비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차베스는 사회적 생산기업(EPS)의 창출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에서 유의미한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베네수엘라는 석유관련 산업을 제외하고는 산업발전이 미비하고 산업노동자 또한 과소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생산기업은 한편으로는 공동체적 수요를 충족시키면서도 내생적 공업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사회적 생산기업들은 연대, 협동, 상보성, 호혜성, 형평, 지속가능성 등의 가치들을 구현하려는 동기에 의해 창출된다.

지금까지 보았듯 코헤스티온은 자본가가 방기한 이른바 회복기업과 국가기간 산업, 그리고 사회적 생산기업이라는 매우 다른 세 가지 맥락 속에서 실험되고 있다. 이 각각의 실험에서의 시행착오는 그 후 코헤스티온에서 아우토헤스티온으로의 전환을 통해 사회주의적 관리로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회복기업에서의 코헤스티온에 대한 차베스의 호소는 노동자들에게 자본가가 버린 1천여 개의 기업을 노동자들이 인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UNETE는 2년 내에 800개의 기업을 점거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실제 노동자들이 회복한 기업은 40개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INVEVAL, INVEPAL, ALCASA 등에서의 코헤스티온의 실험은 결코 노동자들을 협동조합 소유를 통해 소소유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극복한 새로운 생산관계를 정초하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노동자들의 의식변화가 이에 따라주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전보다 훨씬 안정된 환경에서 일하게 되고, 자신이 일부 소유한 기업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에 개인주의와 소유욕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UNITE도 이 문제를 직접 다루지 못하였다. 그들의 보고서는 공기업과 사기업에서 의사결정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소유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사회적 경제부문과 자본가가 방기한 회복기업, 그리고 국가의 전략적 부문에서 소유의 문제는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사회적 경제부문에서는 초기에는 협동조합적 소유를 국가재정을 통해 지원하였으나 점차 지역사회(공동체) 소유로 전환되었다. 회복기업 모델에서는 노동자 협동조합이 49%의 소유지분을 가지고 국가가 51%의 소유지분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 노동자들이 기업을 자신의 재산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화되고 사회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생산이란 대의는 점점 퇴색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어떤 회복기업의 경우 노동자 협동조합이 100%의 소유권을 가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49% 지분에서 점차 지분을 확대해가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다.

전략적 산업에서는 애초부터 확고하게 국가적 소유에 도전하는 어떤 움직임도 불가능하지만 사회주의적 의식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효율성과 부패의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2005년에 착수된 Fabrica Adentro 기획의 결과 정부의 재정지원이나 공적 자금의 대부를 받아 노동자의 집단적 소유로 출발한 많은 중소기업들이 출현하였다.2006년 말까지 847개의 노동자 집단 소유 기업이 만들어졌다. 처음에 차베스는 이러한 노동자 집단 소유가 자본주의로부터 이탈과 사회주의로의 접근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다. 만약 노동자의 깁단 소유가 확고하다면 자본주의의 폐해는 피할 수 있다.

결국 차베스는 국가 전략산업에서의 코헤스티온은 유보한 채로 새롭게 형성되는 사회적 경제부문에서 코헤스티온을 추진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자본과 자본주의를 구분하고 문제를 자본주의에서 찾고자하는 이런 시각은 결국 노동자 집단소유에 기초한 기업들이 시장압력에 굴복하여 사회적 요구에 반응하기 보다는 시장경쟁에 유리한 경영관행을 도입하고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는 등 자본주의적 경영관행을 부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INVEVAL과 INVEPAL에서 일어난 이런 경영상에서의 사회주의적 원칙의 후퇴는 결국 노동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노동자들은 협동조합이 소유한 49%의 지분을 포기하고 100% 국유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 Fuentes, 2011)

이런 사태의 발전은 차베스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주의 건설전략에 대해 집단적, 협동조합적 소유가 가진 문제들에 대해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소유의 문제는 결국 생산과정의 문제와 연관된 문제이다. 즉 초기에 차베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자본의 민주화와 분산이 노동자 개인의 인격적 발전을 포함한 사회적 개인의 인간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코헤스티온의 실천과정에서 그런 예상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처음에 차베스 세력은 INVEPAL에서의 경영이 자본주의적 관리관행으로 후퇴한 것이 지도력의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코헤스티온을 채택한 다른 기업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평가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의 미성숙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일부 분파는 문제가 더 근원적인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노동과정에서의 변혁이 없이 코헤스티온이 피상적인 의사결정의 민주화에 머물렀기 때문에 결국은 자본주의적 관리관행으로 후퇴하게 된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통제가 형식적인 데 머물러서는 안 되고 생산활동이 개인의 인간적 발전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2004년에 국유화된 ALCASA의 사례는 중요한 준거점을 제공한다. ALCASA는 오리노코강 하류지역인 과야나에 소재한 알루미늄 생산기업이다. 이 지역은 베네수엘라의 석유채취 산업과 함께 가장 중요한 광업과 광업을 기반으로 한 소재산업(철강, 비철 금속), 수력발전 등 베네수엘라의 또 다른 전략적 산업이 집중적으로 위치한 지역이다. 이 지역 산업을 총괄하는 회사인 CVG가 과야나 발전계획에 의해 설립되고 제철, 제련, 광업 등의 여러 기업들이 CGV 산하로 통합되었다.(Fuentes, 2011)

2005년 신설된 기초산업자원부의 장관으로 임명된 V. Alvarez는 쿠바에서 훈련받은 경제학자이다. 그는 장관으로 취임하고 나서 곧바로 게릴라 출신이며 노동자 통제의 강력한 지지자인 Carlos Lanz를 ALCASA의 사장으로 임명하였다. 란스는 주도면밀하게 ALCASA에서 노동자 통제에 기초한 관리구조를 만들어나갔다. 세계 유수의 보크사이트 매장국인 베네수엘라에서 알루미늄 제련업은 철강 산업과 함께 핵심적인 전략 산업이다. 이런 전략 산업에서 노동자 통제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코헤스티온 운동의 발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란스는 공장평의회와 노조, 노동자총회 등을 통해 노동자들이 단순히 관리층의 지시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학습된 전문성을 가지고 경영을 감독하며, 또 순번제로 여러 관리업무를 수행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예산과 경영, 기술과 생산의 문제, 노동조직의 형태 등 일반 노동자들은 그 전에는 그들이 참여할 생각도 못했던 영역에 대해 주도적으로 감시하고 의견을 내놓는 존재로 바뀌었다. 모든 관리자들은 노동자 총회에서 선출되며 그들은 총회와 각 위원회에 분기별로 그들의 업무를 보고한다. 그리고 이런 선출직 관리자들은 연임되지 않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교대로 호선된다. 이것은 단순히 작업조직의 구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작업현장의 근본적 변화를 통하여 노동자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의식, 즉 계급의식을 고양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이다.

ALCASA의 사례는 매우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05년 1월, 마카과 선언(Declaracion de Macagua)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국가와 공동 책임 하에 있는 관리와 행정에서의 노동자 참여를 규정한 것이다. 주목할 사항은 이 선언에서 지식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손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식의 민주화”가 적극적으로 이 선언에서 추천되었다. 이런 학습과정을 지원하기 위하여 란스가 설립한 “Negro Primero 사회정치적 교육 센터”가 2005년 7월 문을 열었다. ALCASA에서의 노동자 통제는 밑으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적 기업 통제의 좋은 보기이다. 노동자들은 총회 외에도 다양한 위원회에 참여한 대표자(voceros)를 선출하고 이들은 다시 총회에 책임을 진다. 19개의 작업부에서 231명의 voceros가 선출되었다. 2005년 11월부터 지역사회의 인사 2명이 회사 집행부에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러한 ALCASA 모델은 국영석유회사인 PDVSA나 국영전력회사인 CADAFE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 회사들의 경우 노동자들은 이사진이나 경영 집행부에 노동자 대표를 참여시키기 보다는 임명된 관리자들이 제대로 협약을 준수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 차이는 그 생산업무의 복잡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업무의 성격 때문에 생긴다.

베네수엘라에서의 노동자 통제는 일관된 혁명적 원칙 속에서 주도면밀하게 추진된 것이 아니라 베네수엘라 사회에서의 복잡한 계급투쟁의 지형에 따라 매우 복잡한 궤적을 그리면서 진화되어 나아갔다. 우선 친 차베스 세력(차비스타)은 매우 복잡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일부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차베스의 사회주의적인 언설에 동의하지 않지만 베네수엘라 내에서 주도적 헤게모니 블록의 한 구성부분으로 존재한다. 이들에게는 기업에 대한 노동자통제는 바람직한 경영형태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들은 정부부서의 각료나 주지사 등을 차지하면서 끊임없이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방해하였다. 그리고 많은 경우 노동자 통제가 행해지는 회사의 구조는 그 전부터 확립된 위계적 구조가 우세하였고, 하루아침에 그 구조를 혁파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다국적기업의 경우 해당 국가와의 외교관계를 실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차베스 자신이 노동자 통제의 전진을 가로막는 경우까지 있었다. 노동자 통제가 가장 성공적이라는 ALCASA까지도 그 전부터 끈질기게 내려오는 후견주의나 부패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경영참여를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한 점도 노동자들의 부담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란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시간의 단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생산과정에서의 코헤스티온은 결국 노동자들의 의식에서 커다란 전환이 없이는 거의 성공하기 어렵고 이런 점에서 베네수엘라의 노동자통제운동은 큰 장애에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 차베스 시기부터 계속 교육과 헤게모니, 체 게바라가 말한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의 혁명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차베스는 조직 노동자 내에서의 경제주의적 경향의 강화라는 문제에 부딪히면서 이 문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생산과 소비의 공동체적 시스템”이라는 메자로스의 견해를 부각시켰다. 결국 그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주도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그 생산의 사회적 의미를 노동자가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경제주의를 극복하는 관건이라고 보았다.

여기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이 공동체를 향한 것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할 때 새로운 노동의 전형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차베스는 2005년에 이런 인식을 기초로 사회적 생산기업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Wilpert, 2007) 차베스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기업들은 이윤을 네 부문에 나누어 재투자할 필요가 있다. 그 기업의 생존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자립 펀드, 노동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노동 펀드, 사회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기 위한 펀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회적 생산기업을 추진하기 위한 펀드가 그것이다.

이런 사회적 생산기업(EPS) 모델에 조응하기 위해 정부 중소기업부와 CGV는 과야나 개발기금을 사회적 생산기금으로 전환하였다. 이리하여 2006년 과야나 지역에서 수많은 EPS가 설립되었으며, 이들은 ALCASA와 같은 대기업들과 연계를 맺고 생산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PDVSA 역시 사회적 생산기업을 자신의 기금으로 창출하였다. 카라카스의 바리오 지역에 있는 Ojeda 생산지구가 바로 PDVSA가 지원한 사회적 생산기업 단지이다.

이런 EPS에 의한 생산이 지속가능할지는 상당한 논쟁거리가 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국영석유회사의 사회적 기여에 의해 창출되고 판로도 PDVSA나 ALCASA 등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Lebowits는 EPS의 두가지 형태를 구분한다. 첫째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기업과 연계된 EPS이다. 이런 EPS들에서는 연계기업과의 관계 속에서 노동자 통제가 이루어진다. 레보위츠가 지적한 또 하나의 유형은 공동체(지역사회)와 연계 속에서 그 공동체의 출자로 설립되고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운영되는 EPS이다. 이런 EPS는 공동체 평의회의 통제를 받는다. 문제는 공동체가 스스로의 필요를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EPS 실험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2007년부터는 이들 기업형태들이 사회적 소유기업과 사회주의적 생산기업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2007년에 차베스의 대선 공약이었던 사회주의로의 사회적 전환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과야나 계획

한 때 21세기 사회주의의 표징이 되었던 코헤스티온은 2006년부터 차베스의 연설에서 사라지기 사작하였다. 그는 2007년 개정헌법에서 코헤스티온에 대한 조항을 삭제하려까지 시도하였다. 그 시도는 유야무야 되었지만 왜 갑자기 코헤스티온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코헤스티온이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사회주의적 의식을 고양하기보다는 소소유자 의식을 가져왔다는 평가가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코헤스티온의 원래적 의미는 그대로 살아남아 그 용어 대신 아우토헤스티온(autogestion), 또는 노동자 자주관리의 문제가 더 적극적으로 부각되었으며 코헤스티온은 협동조합적 소유가 가지는 한계 때문에 용어로서 기피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대신 차베스는 2007년부터 사회주의적 생산을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내생적 발전과 사회주의적 생산을 개념적으로 결합시켰다. 과야나 지역은 석유를 제외하고는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원인 금속자원의 채취와 제련, 제강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과야나 지역은 약 3만명의 노동자가 CGV 산하에서 일하고 있다.

그 지역의 가장 중요한 기업인 Sidor는 전임 대통령인 칼데라 치하에 사영화되어 아르헨티나 기업소유로 넘어갔다.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철강공장인 Sidor의 국유화 문제였다. Sidor는 사영화되어 있는 동안 직접고용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하청노동자의 숫자를 늘렸다. 그리하여 한 때 11,000명에 달했던 직접고용 노동자 숫자는 5,000명으로 줄었고 하청 노동자의 숫자는 9,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2008년에 일어난 쟁의과정에서 노사양측은 단체 협약이 실패하고 파업은 장기화되었다. 이때부터 노동자들은 Sidor의 국유화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차베스는 동맹인 아르헨티나와의 관계를 고려해 Sidor의 국유화를 주저하였다. 뿐만 아니라 볼리바르 주의 주지사인 집권당의 랑헬 고메스와 노동부 장관인 리베로도 국민방위군을 동원하여 파업노동자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차베스는 결국 노동자편에 서서 Sidor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그런데 Sidor의 노조 활동가인 후앙 발로르는 국유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국유화된 Sidor에서 노동자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제안은 CGV 산하 전체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곧 국유산업의 미래를 논의하는 CGV 전체 노동자 대회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전개는 차베스로 하여금 과야나 지역을 사회주의적 기업이 주도하는 지역으로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이 지역에서 높아져 있는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열망을 잘 조직하면 베네수엘라가 21세기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2009년에 드디어 Plan Socialist Guayana(PGS)가 공표되었다. PGS의 전략적 목표는 9가지로 요약된다. 그 중 첫 번째가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기적 목표에 따라 생산을 통제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볼리바르 사회주의의 건설을 촉진할 수 있게 사회적 소유를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차베스 집권 1기에 21세기 사회주의 논의와 관련해서 논의되었던 코헤스티온의 모순적 전개를 극복하고 확실한 사회적 소유의 기반 위에서 사회적 책임을 짊어진 노동자의 자주관리를 확립한다는 사상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그 전에는 노동자 개인의 복지가 중심적 고려사항이었다면 이제는 사회적 존재로서 전체 공동체에 책임을 다하는 노동자의 주체적인 관리가 중요해진 것이다.

PGS에서 베네수엘라 노동동맹(UNETE)은 노동자 통제에서 노동자 평의회 모델을 제출하였다. 국유화된 사회주의적 기업에서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일상적인 생산관리에서 노동자 통제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2009년 5월, 철강공업에 필요한 분탄을 생산하는 5개의 회사를 국유화하여 기존의 Sidor와 ALCASA와 통합하여 단일한 철강-알루미늄 사회주의적 기업을 설립하였다. 차베스는 이 공장이 노동자 통제하에 운영될 것임을 천명하고 계획부 장관인 Jorge Giordani와 Maria Iglesias를 파견해 그 계획을 노동자들에게 설명하고 구체화시켰다. 2008년 8월 차베스 대통령과 노동자대표들이 PGS에 관한 회합을 가졌는데, 여기에서 집중치료 PGS 투자계획을 승인하였다. 이 계획은 베네수엘라-중국 펀드에서 313 백만 달러 정도를 지원받아 노동자대상 의료기관을 설립하는 계획이었다.

2010년 5월 15일부터 PGS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였다. CVG 산하 여러 공장들에서 노동자출신 사장이 노동자총회에서 선출되어 회사경영의 총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특히 Sidor의 Elio Sayago와 ALCASA의 Carlos de Oliveira가 차베스 앞에서 회사경영을 충실히 할 것을 선서하였다.

과야나 지역에서의 이러한 노동자통제의 진전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곧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어 노동자 통제가 전면화할 기회를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미 2010년 Blanca Garcia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PGS 내에서 관료화 경향이 강화되고 있었다. 상부의 복잡한 위계구조(중앙정부, 주정부, 노동자단체 등)는 새로운 관리 엘리트를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었다. (Robertson, 2012)

엘리오 사야고가 경고한 바와 같이 결국 2012년부터 반동이 시작되었다. 통합사회주의당 당원이며 군인출신인 볼리바르 주지사는 사야고를 해임하고 전문경영인을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여기에 대해 노동자들은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Sidor는 다시 전문경영인을 사장으로 하는 체제로 회귀하였다. 알카사 노동자들은 이런 사태에 강력히 항의하고 파업을 조직하였으나 노동 쪽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차베스의 와병과 죽음, 마두로 정권의 허약함으로 CGV 산하 기업들에서 구체제의 복귀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차비스타 세력 중에서는 아직까지 노동자 통제를 위험하게 보는 세력이 존재한다. 그들이 과연 제대로 관리 권력을 행사할 제대로 된 준비가 갖추어져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차비스타 세력 내부에 존재한다. 이와 함께 차베스 집권 하에서 새롭게 성장한 볼리부르주아지(친체제적 부르주아지. 주로 부패한 고급관료나 그들과 결탁된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들이 관리 권력을 전면적으로 차지하는 혁명적 변화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특히 2012년은 노동자 통제를 강화해 나가려는 혁명적 노동자 세력과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력 간에 매우 지리한 싸움이 일어난 해이면서 차베스의 3선, 그리고 와병과 같은 지도력의 공백이 존재했던 해이기도 하다. 이 틈을 타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 왔던 노동자 통제가 큰 장애에 봉착하게 되었다.

4.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 두 대조적 경로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통제운동은 초기에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으나 계급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도 없었고 노동과정의 자본주의적 특징도 전반적으로 바꿀 수 없었다. 이 운동의 지속성은 아르헨티나가 키르치네르의 지도력으로 급속히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실제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크게 낳아지지 않았지만 중간계급과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운동은 키르치네르 부부의 정치에 급속히 동화되었으며 기업회복운동과 이에따른 노동자 통제운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반해 베네수엘라 혁명은 초기부터 생산수단의 소유와 경영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강조하여 왔으며 이는 노동자 통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실천을 낮았다.

초기에 베네수엘라 노동자 통제운동은 자본가들이 방기한 기업에 대한 복구운동의 일환으로 노동자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자주관리운동과 흡사하다.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자본가들이 버린 기업을 몰수하여 노동자와 국가가 공동소유를 확립하고 노동자 집합체(협동조합)이 정부와 협의하여 회사를 경영하게 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또한 수많은 사회적 생산단위를 만들어 이들 생산체가 협동조합적 소유와 자주관리에 의해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주요한 전략적 산업부문인 석유생산과 전력 산업에서는 국가 소유와 국가에서 지정한 경영책임자에 대해 노동자 집합체가 발의권과 이사회참여 등을 통해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혁명의 변증법적 진행과정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원래 볼리바르 혁명은 빈곤층의 사회적, 정치적 동원과 주요 자원에 대한 국가적 통제권의 확립에 의존하면서 석유와 지하자원 채취산업에 재정을 주로 의존하는 경제구조를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는 도시빈민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해야 하며 새로운 내생적 경제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따라서 차베스는 고용창출과 국내 산업의 내생적 발전에 대해 강조하였는데, 이는 협동조합적, 집합적 소유에 의존하는 사회적 생산단위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익세력과의 대결과정에서 차베스는 더욱 급진화되어 사회주의적 기업의 설립을 강조하고 사회주의적 기업 내부에서의 노동자 통제를 지원하는 발전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그 가장 전형적인 예가 사회주의적 과야나 계획(PGS)이다. 이 계획이 진전됨에 따라 가장 중요한 기업인 Sidor의 재국유화와 ALCASA의 노동자 통제가 이루어졌고 재국유화된 Sidor에서도 노동자 출신 사장이 노동자 총회에서 선출되어 노동자 자주관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차비스타 세력 내부에서 힘을 축적하고 있던 볼리부르주아 세력은 차베스의 건강악화를 틈타 자주관리와 노동자 통제를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차베스와 차비스타가 주장하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질적 내용은 이러한 계급투쟁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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