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이중 식민의 특수성과 한국

[주례토론회] 홍콩을 의미 있는 타자로 인식하기 위한 작업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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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다원주의적 역사관과 타자인식

일반적으로 인간의 개체성이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때, 이를‘사회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서로 차이를 갖지 않는 보편적인 공동체로 추상된 것이라면, 그 사회는 폐쇄된 보편성(즉, ‘세계’)의 구성요소로 정태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역사는 여기에서 인식론적으로 멈춘다. 그러한 정태적인 사회 안에서 개체의 자유는 인식되지 않고, 나아가 억압된다.

개체의 자유는 개체가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창조해가는 역동성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보증된다. 여기에서 공동체의 역동성의 근원적 역량은 기본적으로 개체의 자유(‘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에서 주어지지만, 자유는 공동체 간의 다원주의적 관계설정에서 내용과 구체성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다원주의는 보편주의와 그 짝으로서의 특수주의에 비판적이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관계설정을 역사적이고 지리적으로 자기 내용을 갖는 ‘민족’ 공동체 간의 평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인식론적 관점이 도출되고, 이는 타자 인식, 자기 인식, 세계 인식에 관한 언어와 번역의 문제로 표현된다. 우리가 타자를 보편의 상 아래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 이는 다원주의적 관계설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타자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번역 실천이 오히려 타자를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게 하고, 역사에서 그 능동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변화에 따르는 능동적 자기 인식을 가로막게 된다. 이는 특히 이른바 ‘고유명사’의 번역에서 두드러진다.

일반적으로 '고유명사'가 표현하는 것은 '고유성'이다. 이는 '배타성'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그로 인해서 '번역'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독점'이다. 나는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나누어 가져서는 안 된다는 언명이다. 이는 우리의 번역 현실에서 '번역되지 않는 고유명사'로 표현된다. 기본적으로 인명과 지명 등의 고유명사는 ‘원음’에 따른다는 것이 우리가 유럽적 현대성에서 받아들인 번역 방식이다. 이는 더욱 확장되어 개념어의 번역에서 적용된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 타자의 맥락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한자적 문화/문명을 공유한 타자를 번역하는 데 있어서는 상당 기간 동안 한자음 번역이 지속되었고, 일정 기간 혼용 과정을 거치다가 대략 1980년대 들어 원음주의적 번역이 보편화되었다.

'번역되지 않는 고유명사'는 직간접적 번역 능력을 가진 지식인만이 그 의미에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위선적 번역의 대상으로만 존재해 온 '유럽'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번역자'들만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나아가 '타자'를 번역하지 않는 방식은 '자신'의 번역불가능성을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다. '타자'를 번역을 통해 나누고자 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타자와 나누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인식에서 타자는 고정되고, 나 자신도 고정된다. 다시 말해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민중의 주체적 실천을 고유성 안에 가두게 된다는 것이다. 역으로 진정한 '번역'은 '타자'의 것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고, '나'를 타자와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즉, 번역은 '나'와 '타자'의 동시적 다원화의 방법인 것이다. 이는 민중에 의해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역사의 동력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닫힌 '보편성'과 갈등적이게 된다. '다원화'는 개별적 역사문화의 맥락에 근거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역은 이와 같은 존재론적 전제를 갖게 된다. 개별 민족사가 영원히 세계사를 구성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번역을 통한 지식의 형성과 이를 매개로 한 대중의 주체화는 또한 인식론적 전제가 된다.

1. 지식과 사상의 식민성

이글은 홍콩의 현실에 접근하기 위한 연구자 나름의 시각을 고민하며 얻어진 가설들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2014년 홍콩 사회의 현실과 운동에 대한 분석과 판단은 이 글의 논의 범위를 넘어선다. 익숙한 시각을 반영하는 주류미디어의 논조는 기본적으로 이번 시위와 6.4천안문 사건을 연결하며, ‘독재’ 체제로서의 중국 대륙(이른바 ‘중공’)과 자유민주 수호자로서의 홍콩 민중을 대립시키는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주류미디어와 달리 상대적으로 소수인 진보적인 미디어의 경우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계급정치의 주체로서의 홍콩 노동자 민중이라는 구도를 설정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오히려 2014년 이른바 ‘우산 시위’ 이후 우리 사회에서 분출된 홍콩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향후 어떻게 홍콩을 의미 있는 대상으로 우리 안에 맥락화 할 수 있을지를 몇 가지 상호 참조적 범주를 통해 구체화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사상가 竹內好(다케우치 요시미, 1910~1977)의 논의를 먼저 인용해 본다. 그는「근대주의와 민족의 문제」(1951)라는 글에서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학의 인간학과 보편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학은 계급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수입하는데 성공했지만, 억압당한 민족을 구출하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을 억압하기 위해 계급을 이용하고 만능화 했다. 추상적 자유인에서 출발하고 여기에 계급투쟁설을 적용하면 그만이었다.1

아울러 「국민문학의 문제점」(1952)이라는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전후 일본의 식민성을 비판한 바 있다.

단절을 이루려면 그 자체로서는 단절할 수 없는 전통이 필요하다.2
문학에서 식민지성은 민족과 매개되지 않은 세계 문학의 표상이 얼마나 횡행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처럼 그 표상이 완벽하게 투영되는 것은 지금이 완전한 식민지임을 보여준다.3


우리가 2014년 홍콩의 현실을 토론하는데 1950년대 전후 일본 사상가의 언설을 참조하는 것은 그가 착목했던 일본의 ‘식민성’의 문제가 적어도 우리에게(어쩌면 홍콩에게도) 여전히 적실하기 때문이다.4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상적 인식에는 주류적 학술 담론은 차치하더라도, 진보 진영의 사상적 담론에도 여전히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학이 가졌던 추상적 자유인이라는 인간학과 계급적 보편주의라는 지적 식민성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 모두에 그러한 표상이 완벽하게 투영되는 담론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권이나 민주주의5 등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자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보편적 구조 비판은 하나의 쌍이 되어 추상적인 자기 인식, 타자 인식, 그리고 세계 인식을 동시에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구조에서 세계 인식은 폐쇄적이고 정태적인 것으로 머물게 된다. 여기에서 정태적인 세계 인식을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개별 사회 또한 고정된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인식은 역동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개별 사회의 역사적 능동성과 모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족’이라는 매개 없이, ‘개체’와 ‘세계’를 직접 대면시키는 보편-특수적 논리가 지식 담론을 지배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를 지식에서의 ‘식민지’적 현실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고, 이는 역사를 살아가는 민중의 구체성이 역사적 힘으로 상승하여 보편성에 참여하는 개별적 특수성을 담지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한다. 이는 곧 식민화된 ‘지식’의 비윤리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비윤리성은 일차적으로 역사 및 현실과 유리된 지식의 비윤리성이지만, 궁극적으로 지식의 매개를 갖지 못한 채 제어되지 않는 현실 모순의 심화가(일정하게 폭력적 국가장치를 경유해서) 대중 내부의 상호 폭력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폭력의 대중적 내면화의 문제이기도 하다.6

2. 보편주의와 본토주의의 동형성 및 탈역사성

2014년 홍콩 시위에 대한 여러 분석과 평론들 대부분은 사실상 외재적 시각에서 홍콩의 상황을 분석하고 일정한 판단을 내리며, 나아가 전망 내지 제안을 내놓고 있다. 이는 기존의 이론적 분석틀이 홍콩이라는 대상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좌익적 비판의 경향을 갖는 입장들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홍콩의 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라는 보편적 현실을 전제로 그러한 현실을 표현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홍콩을 실체화하여 목하 여하한 현상들을 분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틀에 기대어 홍콩의 역사 또한 이러한 전제에 충족될 수 있도록 다시 쓰인다. 이른바 좌익 보편주의 이론이 추동하는 ‘탈역사’적 역사 인식이다.

그렇지만 홍콩의 현실을 결정짓는 역사적 요인으로서 ‘전통’ 중국, 영국 식민 경험과 그 유제, 그리고 냉전 구조 및 편향적 근대화 경험을 빼놓고, 자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적인 현실만을 준거로 홍콩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해석 가능한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자폐적 해석을 내놓는 것일 뿐이다. 사실 이는 분석 주체의 자기 인식 및 세계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홍콩에 대한 실체화는 사실상 남한의 실체화(나아가 대만의 실체화)와 유사한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즉, 20세기 중후반 언급한 준準/비非국가들은 한편으로 물질적으로 대외종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다른 한편으로 지식/사상적 현대화를 이룸을 통해서 사실상 ‘신식민’적 상황을 총체적으로 공고화했다. 여기에서 대중적 층위에서 핵심적인 것이 미국을 경유한 냉전적 문화 주체화다. 이는 식민 시기와 달리 냉전 및 국민국가화 시기에 식민주의적 현대성이 교육제도와 문화기제를 거쳐 개별 주체에 내면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남한’이 ‘한국’으로,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탈역사적으로 실체화되고, 홍콩 또한 그런 방식으로 본토주의적 외피를 얻게 될 수 있었던 대중적 기반은 바로 이와 같은 냉전 하의 주체화(이른바 ‘국민화’)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서로 통약 가능한 대상과 주체로 단위화된 것이다. 우리가 ‘국민국가’라는 단위로 분석하는 자신과 타자들은 그것이 갖는 최근 시간대에 대한 일정한 해석력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의 궁극적 의미를 더 긴 역사적 맥락에 놓고 보면 사실상 ‘국민국가’의 외피를 쓴 본토주의(또는 특수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는 보편주의와 이원적 구도를 형성하며, 역사의 탈맥락화를 완성한다.

3. 홍콩의 냉전 경험과 이중식민적 ‘신식민성’

이와 같은 작금의 지배적 지적 담론에서 ‘냉전’ 또는 ‘신식민성’의 제기는 고루하거나 또는 낯설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홍콩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 필자는 오히려 이러한 잊힌 언어들을 다시 소환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거기에는 식민, 분단, 내전, 냉전, 신식민 등과 같은 역사적 범주들이 핵심적이다. 아울러, 그러한 역사 과정을 그려냄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지식과 사상의 왜곡,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연동되는 ‘저항’과 ‘운동’의 대표성의 문제를 동시에 고려할 필요도 있다.

이는 현실의 담론 수준에서 연역된 역사 해석이 갖는 ‘역사의 평면화’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사실 우리 현대사의 과정을 살펴보면, 지식과 사상의 왜곡은 역사와 현실을 괴리시키고, 결국 민중의 현실적 실천은 사상이라는 매개를 갖지 못하면서 궁극적으로 역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박탈당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한 식민 및 신식민적 조건 하에서 진행된 좌익의 역사는 여전히 복권되지 못하고 있고,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 치렀던 1960년의 4.19와 1980년의 5.18이 (과장되지도, 비하되지도 않으면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신의 적절한 이름과 내용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독재’에 대비되는 ‘민주’ 그리고 보편적 주체로서 ‘민중’으로 추상화된 것이 그 뼈아픈 사례다. 그 후과는 우리가 봐 온 그대로다.

2008년 촛불 시위, 그리고 2014년 대만의 해바라기 운동이나 홍콩의 우산 운동을 보면서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운동들은 역사적 과제를 다시 제기하고 책임 있게 현실적 실천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평면화된 역사 인식 아래에서 우리는 이러한 운동의 정세적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일반적으로 홍콩은 1841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의 식민지로 할양되고, 1941년 이른바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에 잠시 점령된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돌아갔으며, 1997년 중국7으로 ‘회귀’한 것으로 인식된다.8 이런 맥락에서 홍콩에서는 ‘신식민’의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홍콩은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홍콩 정부가 정치적 차원에서 수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홍콩에서는 대만이나 남한과 달리 ‘통일’의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신식민’의 문제와 ‘통일’의 문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홍콩이 갖는 차별성도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 또한 ‘냉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홍콩의 영국 식민정부와 중공 사이에서 실용주의적으로 만들어진 ‘비정치화’ 공간 속에서 사실상 이중적 문화 냉전이 전개된 바 있다. 하나는 국공내전의 이데올로기적 연속이라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냉전 논리의 관철이다. 이로 인해 홍콩 나름의 냉전 경험은 영국 및 미국의 이중식민이라는 외적인 규정을 얻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냉전 경험은 내전 경험의 간접성으로 인해 더욱 특수해진다. 대만은 내전의 직접적 전장은 아니었지만, 국민당이라는 내전 당사자에 의해 부분적으로 내전의 후과와 냉전 문화가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상대적으로 홍콩은 내전의 직접적 전장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어느 한쪽에 접수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홍콩의 전후 냉전 경험은 대만 및 남한과 매우 다른 것일 수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한반도가 내전과 분단을 거쳐 민족적 자립의 길과 신식민지적 길로 양분된 데 비해, 홍콩은 전후 영국의 식민지로 다시 편입되면서도, 사실상 미국의 냉전 전략이 정치경제 및 문화적으로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측면에서 홍콩은 영국과 미국의 ‘이중식민’으로서의 신식민적 현실이라는 특수성을 가진다. 다른 한편, 대만과 비교할 때도, 국공내전이 종결된 후 중국 국민당 또는 중국 공산당 어느 한쪽으로 ‘회귀’되지 않고, 형식적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차별성도 확인된다. 여기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국민국가화의 길 속에서 홍콩이 처한 특수한 조건이 확인된다. 이것이 우리가 냉전과 국민국가의 형성이 초래한 후과를 성찰함에 있어 아시아 내부 또는 제3세계에서 권역적인 참조점으로 홍콩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홍콩은 대만이나 남한과 달리 전후에도 이데올로기적이고 문화적 차원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서로 다른 세력들 사이에서 치열한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이를 단순히 외부세력의 투영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경험은 유사하게 식민 경험을 가진 우리가 내전의 후과 및 냉전의 왜곡을 재역사화 하는데 있어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사실상 홍콩이 겪은 신식민의 특수성은 일정하게 개방성을 내포하는데, 이는 제국주의 영국의 쇠퇴, 새로운 패권을 형성하고 있던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개입, 그리고 제3세계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이라는 전환기의 복잡성에서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회귀’될 예정에 있으면서도, 전후에 형식적으로 영국의 식민지 상태를 유지하고, 실질적으로 미국의 냉전 전략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는 복잡성은 기타 동아시아의 분단 체제와 다른 홍콩 나름의 조건을 창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전후 홍콩의 경험이 적어도 남한 또는 대만에서 출현한 바 있는 극단적 냉전 이원 논리에 좌우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주어진다. 이는 역사적 힘의 균형이 낳은 공백에서 주어지는 개방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홍콩에서 전후에 주어진 공백과 그 공간에서 진행된 이데올로기적 대립도 현실의 신식민적 재구조화가 가져온 변화와 점차 동떨어지게 되면서 사실상 현실의 모순과 결합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고 평가된다. 국민당은 사실상 미국에의 의존성의 심화로 인해 능동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 공산당은 문화대혁명과 6.4천안문 사건이라는 계기를 통해 분열을 거쳐 대중적 층위에서 부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경험은 남한 또는 대만과는 무척 다른 것일 수 있다. 이는 홍콩 사회의 냉전이 내전의 상흔을 위로부터 과장하거나 왜곡했다기보다는(그런 측면이 분명 존재하지만) 상대적으로 볼 때 영국 식민 정부의 ‘비정치화’ 전략 하에 일정하게 아래로부터의 역사/현실 인식을 근거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홍콩의 특수한 냉전 조건과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홍콩의 현실적 모순을 분석하는 데도 불가결하다.

4. ‘회귀’의 의미

따라서 1997년 홍콩의 중국으로의 ‘회귀’는 역사적 맥락에서 복잡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1841년부터 1997년까지 (신)식민 역사를 경험한 홍콩에게 사회주의 혁명을 거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회귀’는 기본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합리성의 뒤늦은 실현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회귀’의 과정에 대해 식민지 민중의 주체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신)식민지적 현실 속에서 홍콩인은 주체적으로 ‘회귀’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않았고,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인을 그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홍콩인의 수동성과 중국 대륙의 홍콩 주체성 배제는 일정하게 상호적인 교감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홍콩인은 식민지적 현실 속에서 누려온 생활방식과 제도의 보장 이상으로 자기 개조와 개혁의 전망을 제출할 수 없었고, 중국 대륙 또한 그러한 홍콩인들과 회귀 이후의 전망을 직접적이고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1997년 회귀 이후 모순의 심화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의 현실화는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이는 ‘중국 대륙’ 그리고 ‘중국’으로 회귀된 ‘홍콩’, 양자에게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통일과 영토의 완정성을 기하고, 홍콩의 번영과 안정을 유지하며, 나아가 홍콩의 역사와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여, 국가는 홍콩에 대해 주권 행사를 회복할 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31조의 규정에 근거하여, 홍콩특별행정구를 설치하고, 나아가 ‘하나의 국가, 두 종류의 제도’라는 방침에 따라 홍콩에서 사회주의 제도와 정책을 실행하지 않으며,(중략) 원래의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50년간 이를 변경하지 않는다.9

이와 같은 「기본법」에서의 일국양제一國兩制 규정은 홍콩의 ‘회귀’가 형식적 차원에서의 식민의 종료를 표지하는 것일 뿐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실질적 의미를 갖는 진정한 탈식민은 회귀 이후 적어도 50년간 제도적 불변 하에서 점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홍콩이 역사적 중국으로부터 할양된 식민지였고, 전후에도 신식민적 상황에 놓인 데는 중공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이탈 식민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홍콩을 포함한 ‘중국’의 탈식민의 완성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홍콩과 중국 대륙은 竹內好의 문제의식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이라는 민족적 범주와 내용을 사상적 기반으로 중국에서 완성되지 못한 ‘탈식민’의 기획을 완수하는 홍콩과 중국 대륙의 관계모델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역사적으로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홍콩인’만의 과제도 아니다.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담론으로 ‘홍콩인’의 민주를 주장하는 입장이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자’들에게 환영받고 있지만, 우리는 작금 보통선거권이라는 형식으로 제시되는 그러한 민주주의가 과연 홍콩인의 실질적 민주를 보장할 수 있는지, 오히려 실질적 민주에 역행할 수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50년의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약속한 기본법의 ‘일국양제’ 규정은 사실상 50년이 지난 이후의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다. 50년이 지나는 2047년이 되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그 약속은 시효 만료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회귀’는 바로 홍콩인과 중국 대륙의 사람들이 함께 역사적 ‘탈식민’의 과제를 확인하고, 완수해 나가는 이행기적 계기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특히 강조될 지점은 중국 대륙이 탈식민을 자기 과제화할 필요성이다. 중국 대륙의 공산당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전쟁과 내전을 통해 형식적으로 상당한 탈식민을 이루었고, 1949년 혁명 이후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자립적 경제구조를 건설했지만, 냉전 구조의 이원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현대화’와 발전주의로 표현된 유럽적 현대성을 내재적으로 극복하는 과제는 여전히 요원하다. 따라서 실질적 의미에서 ‘탈식민’의 과제는 비단 홍콩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나아가 홍콩의 탈식민 과제는 중국 대륙과 홍콩에게 혁명 이후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홍콩의 회귀와 ‘50년’의 시간이 중국이 분단되어 경험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재평가하고, 중국과 중국인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1949년 대만이 중국 역사에서 국공내전을 내재적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편향적이고 부분적인 ‘회귀’를 경험하게 되고, 한반도가 가상적 ‘해방’ 공간 속에서 내전을 거쳐 분단되면서 미완의 ‘독립’으로 그쳤다면, 홍콩은 전후 ‘식민’의 조건에서 대만과 남한이 가지 못했던 길을 걸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5. 다원주의와 국제주의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박현채(1934~1995)는 1990년 ‘광주’를 특권화하고자 했던 당시 진보 좌익의 전형적 탈역사화 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그러나 해방 후 역사에서 5.18의 1980년은 어느 점에 해당할까요. 역사는 진보의 길만을 열어 온 것이 아닙니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해 왔습니다. 1980년이 1950년보다 앞선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1980년이 1950년, 1940년보다 앞선다고 이야기합니다.10

이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역사의 평면화’라는 문제를 남한에서 1990년의 시점에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역사의 평면화는 한편으로 지식과 사상의 단절과 왜곡이라는 문제,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의 대표성에 대한 부적절한 평가의 문제가 상호 결정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단절된 이론과 지식이 민중의 희생을 과잉/과소 해석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석은 민중의 희생을 역사적 진보의 흐름에 계승적으로 위치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흐름으로부터 단절시켜 탈맥락적이고 탈역사적 이론의 보충적 근거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찰은 우리가 홍콩을 바라볼 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본래 국제주의는 현실의 수준에서는 늘 세계적일 수 없었고, 일정한 역사적 조건을 공유하는 권역에서 정세적으로 가능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민족공동체의 역사적 특수성을 전제로 한 연대였고, 공동의 대응 이후에는 서로의 차이를 무화하는 세계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자신의 역사로 되돌아가야 하는 연대였다. 이는 역사 및 지리적으로 일정한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 온 민족 공동체의 민중들의 삶이 요구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를 명확히 정의한 것처럼, 국제주의 또한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 주어진 보편성에서 역사와 현실의 구체성을 외재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제주의는 역사지리적이고 상호참조적 인식을 원리로 하는 일상적 상호 인식의 노력과 특정한 역사적 정세에서의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권역적 연대로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

6. 나가며

우리에게 익숙한 타자 인식은 대체적으로 권위를 갖는 보편적 이론에 기대어 그들의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며 일정하게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이론적 분석이 실질적 권력과 연결되었을 때, 타자의 문제를 대리하여 해결해 주려는 시도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식민주의였다. 과거 식민주의에서 유럽적 보편성은 그렇게 제3세계 및 동아시아의 역사를 ‘봉건’으로 규정하면서 외재적으로 부정했고, 이를 내면화했던 지식과 사상은 자신의 역사로부터 단절된 바 있다. 특히 이와 관련해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는 식민 경험에 의한 단절, 그리고 내전의 폐허와 냉전의 질곡이 초래한 왜곡을 문제화하는 것이다.

21세기 초엽, 홍콩의 복잡성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오히려 보편 이론의 폭력성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다. 현실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우리는 사상과 이론 나아가 운동의 형식 및 방법을 다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보편주의적 이론에 기대어 대리주의적 문제 해결의 답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역사를 존중하는 전제 하에 자기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 해결에 충실한 타자 인식의 노력이 절실해지는 때다. 홍콩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사상적 과제를 성찰적으로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20세기 홍콩이 경험한 이중식민의 특수성은 내전의 연속선상에서 극단적으로 이원화된 냉전 논리가 작동했던 우리를 비추는 의미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을 제출하고자 시도했다.

*주

1.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I: 고뇌하는 일본』, 윤여일 옮김(휴머니스트, 2011), 231쪽.

2. 같은 책, 250쪽.

3. 같은 책, 253쪽.

4. 전후 일본 사상에 대한 재인식의 필요성은 전후 절박했던 ‘식민성’에 대한 다각적 분석과 내재적 극복 방안이 내전, 분단, 냉전의 전개 속에서 사회주의 또는 자본주의 진영 모두에서 해결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식민 경험이 부재한 패전국 일본에서 일정하게 사상적 성취를 거두게 되었다는 새로운 인식에서 주어진다.

5. 이는 물론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요구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역사성과 매개되지 않고 보편주의적 권리담론으로 머물 때 갖게 되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6. 反정부 또는 反국가 운동에서 종종 나타나는 ‘국가’의 물신화 문제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시 검토될 수 있다. 이는 폭력과 윤리의 문제를 단순히 국가 장치 개조의 문제로 외부화해서는 궁극적으로 인민 내부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7. ‘중국中國’이라는 칭호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는데, 대외적 관계에서는 명나라 이후에 사용됐다. 20세기 이후 ‘중국’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으로 쓰였고, 최근의 역사에서는 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킨다. 이 글에서의 ‘중국’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하는 ‘역사적 중국’으로 쓰인다.

8. 일반적으로 서구에서는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handover)’되었다고 표현하지만, 홍콩과 중국 대륙에서는 ‘회귀回歸’라는 표현을 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회귀’라는 표현이 홍콩과 중국의 주체성에 부합된다고 판단해 이 글에서는 ‘회귀’라고 통일했다.

9. 일국양제경제연구중심, 「중화인민공화국홍콩특별행정구기본법」(홍콩: 일국양제경제연구중심, 1992), 5쪽.

10. 「광주 5월 민중항쟁의 학술적 재조명 –광주 5월 민중항쟁 10주년 기념 전국학술대회」에서 박현채의 발언, 『박현채 전집 1권』(해밀, 2006),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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