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날’에도 눈물 흘리는 ‘여성노동자’

[3.8세계여성의날]법도 외면한 노동자, 10년을 해고 투쟁으로

3.8 세계여성의 날을 앞두고도 웃을 수 없는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해고생활 10년간 거듭되는 소송 끝에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패소 판정을 받아든 이들이다. 물론 경찰의 성추행으로 긴 시간 법적공방을 벌이다 최근 대법원에서 승소한 노동자도 있다. 하지만 돌아갈 일자리는 사라져버린 지 오래고, 사건의 기억은 상처로 남아 오래도록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1. 지난달 26일, 대법원이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7명 전원을 불법파견으로 인정했다. 현대차 모든 공정에서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는 판결이다. 하지만 정규직 근로자지위 인정에 대한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불법파견이라도 근무기간 2년을 초과하지 않은 노동자 3명에 대해서는 정규직 근로자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올해로 해고생활 13년 째를 맞은 권수정 씨는 정규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3명의 노동자 중 한 명이다. 회사의 불법을 인정받았음에도, 현장으로 돌아가는 일이 요원해졌다. 10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불법파견 판결을 이끌어낸 것이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허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권 씨는 2002년 9월, 현대차 아산공장에 입사해 의장라인 전장검사 공정에서 일을 해오다 다음 해 해고됐다. 지난 12년의 해고생활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회사를 상대로 불법파견 투쟁을 벌여왔다. “처음에는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받고 되게 좋았어요. 그런데 조합원들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저를 위로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패했다는 생각보다는 법원이 치사하구나, 반쪽짜리 판결로 현대차 봐주기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허탈한 기분이 드네요. 현대차 회사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정규직 노동자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사람이 다치고 목숨까지 잃어야 했는지 허탈하고 허무해요.”

[출처: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해고자 생활을 하며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2006년 류기혁 열사 사망 후, 지회장이었던 권 씨는 전면 총파업에 돌입한 후 현장에서 파업집회를 열었다. 삭발식을 마친 후 집회를 마무리하려는데 3~4백 명의 용역이 현장을 덮쳤다. 현장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용역 침탈 사건이었다. 치열한 몸싸움이 이어졌고, 권 씨는 스타렉스 차량에 납치됐다. “용역들이 저를 납치해서 스타렉스 차량에 태우고 회사 근처를 빙빙 돌다가 논바닥에 갖다 버렸어요. 삭발한 채 신발이랑 안경도 잃어버리고, 조끼도 다 찢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죠.” 권 씨는 현대차가 제기한 공장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위반한 혐의로 실형까지 살았다. “원래 벌금만 내고 마는데 이례적으로 법정구속이 됐어요. 집을 나서며 ‘천안 갔다 올게’라고 엄마에게 인사했는데 구속 돼 버렸어요. 2007년 7월부터 8개월을 살았죠.”

오랜 해고 생활은 생계를 압박하기도 한다. 노조와 조합원들로부터 마련된 해고자 기금으로 생계를 꾸려가지만, 2010년~2012년까지 3년간 수입 없이 살아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불법파견은 인정했지만 권 씨를 비롯한 3명을 현대차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체불임금도 청구할 수 없게 됐다. 박정식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현대차 아산공장 정문만 보면 고통스럽고, 숱한 관리자의 조롱과 폭력의 기억이 권 씨를 괴롭히지만 회사와 법원은 끝내 그녀를 외면했다. 그래도 권 씨는 여전히 씩씩하다. “승소한 동지들이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같이 데리고 들어가겠다면서요.” 지난 12년의 시간처럼, 권 씨는 다시 불법파견 철폐 및 복직 투쟁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2. 현대차 불법파견 판결이 나온 그 날, 대법원은 KTX여승무원 34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등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10년간의 해고생활, 7년간의 법적 싸움 끝에 나온 판결이었다. 노동자들은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1심과 2심의 판결을 모두 뒤집어버린 대법원의 판결을 믿을 수 없었다. 김승하 KTX승무지부 지부장은 “전혀 예상 못한 판결이었다. 애매한 표현들이 난무했고, 철도공사 편을 들어주기 위해 애쓴 것이 역력한 판결문이었다. 상식적인 판결이 아니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대법원 판결 직후 법정 앞에 나온 김승하 KTX 승무지부장(왼쪽) [출처: 김용욱 기자]

KTX여승무원들은 지난 2005년 철도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 등을 벌였고, 2006년 5월 해고됐다. 해고 이후에는 농성과 단식, 고공농성 등의 투쟁을 벌여왔고, 2008년 법원에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했다. 이십 대 중후반의 나이에 해고 돼, 젊은 날의 10년을 해고자로 살았다. 그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이제 대부분이 결혼을 해 아이 한 둘을 낳았죠. 가정주부로 생활하시는 분도 있고, 서비스강사, 자영업, 프리랜서 등 일을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해고 이후 생계 때문에 직장을 가져야 하는데, 그동안의 경력과는 맞지 않게 전혀 다른 분야로 진출해야 하는 게 현실이죠. 오랜 투쟁 때문에 이력서를 넣어도 KTX여승무원이라고 하면 회사에서 달가워하지 않아요. 숨기는 경우도 많죠. 경력단절이 생기는 거예요.”

대법원 판결 이후, 10년을 간신히 버텨온 그들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소송비용과 판결에 따라 지급받아 왔던 생계비 등 1인 당 1억 원 가량의 금액을 철도공사에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자리를 잃고 숱한 고통을 감내해 왔던 그들은 이제 가정까지도 파탄 날 위기에 처했다. 노동자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철도공사 측에 공식적으로 조건 없는 대화를 하자고 요구했지만, 공사는 아직까지 답변이 없다. 오랜만에 해고자들이 모여 현재 처한 상황과 형편을 공유하고 대책을 이야기했다. “다시 한 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파기환송심이 남아 있으니까 다른 증거를 찾아보고, 최선을 다해 재판을 준비해 보자고요. 해고된 철도노조 승무지부 조합원이 교섭을 통해 복직한 사례가 있는 만큼, 투쟁을 통해 공사와 협의점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이번 판결은 노동자는 투쟁으로서 요구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였어요.”

그들이 걸어야 하는 길은 아직도 가시밭길이다. 몸을 혹사시키는 투쟁도 여러 번 해 봤지만, 가장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주위의 왜곡된 시선이다. “지금도 저희 기사가 나가면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계약직, 비정규직인 것 알고 들어갔으면서 떼쓴다, 거저먹으려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KTX승무원이라는 직업 자체를 하고 싶어서 들어온 사람들이예요.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규직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승무원은 철도의 안전을 다루는 업무이기 때문에 철도공사에서 직접 고용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거예요.” 10년 전 350명으로 시작한 동지들이 지금은 34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근무하는 KTX여승무원들은 존재한다. 해고된 34명의 투쟁도, 철도노조에 가입한 ‘코레일관광개발(주)’ 소속의 KTX여승무원들의 싸움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3. 지난달 12일, 기륭전자 박행란 조합원은 대법원으로부터 경찰의 성희롱 가해 사실을 인정받았다. 장장 5년에 걸친 법적 싸움의 결과였다. 하지만 여전히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성희롱 가해자인 공권력은 가해사실을 부인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여성노동자에게 왜곡된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가해자인 경찰은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검찰은 피해자를 불구속기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대법원은 판결을 통해 가해자의 가해사실을 인정하고 가해 형사와 대한민국이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가해자의 무고 및 위증죄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박행란 조합원은 아직까지도 심적 고통에 울분을 토한다.

  2014년 12월 24일 청와대로 오체투지 행진을 진행하고 있는 기륭전자 조합원들 [출처: 김용욱 기자]

“제일 속상한 것은, (가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나를 완전히 돈에 미친 사람 취급 한 거예요. 그런 부분이 굉장히 두고두고 상처가 돼요.” 사건은 2010년 4월 6일 발생했다. 그 날 기륭전자 노사문제로 동작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박 씨가 배탈이 나 화장실에 갔고, 남성 형사는 박 씨가 있던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박 씨는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며 항의를 하다 실신해 응급실에 실려 갔으며, 노조는 동작서 성희롱을 규탄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동작서는 허위사실을 유포해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피해자를 검찰에 고소했다. 심지어 가해자는 노조가 성희롱 사건을 투쟁에 이용하려 한다며 주장하기도 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싸움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성희롱 사건을) 이용해 투쟁을 알리려 한다고 주장했어요.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마치 나를 도둑놈 몰듯 몰았어요. 자기가 잘못해 놓고 나한테 죄를 덮어씌우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 언론 인터뷰도 매번 기피해 왔다. 지금도 그 때 생각을 떠올리면 괴로움이 밀려온다. “텔레비전에서 성추행 관련 뉴스만 나와도 마치 내 일 같아요. 화장실을 가도 남녀화장실을 가면 그 때 생각이 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것도 있어요. 괴로웠어요. 이번 판결 이후 사람들이 축하한다고 하는데, 사실 저에게는 머리가 너무 아픈 상처예요.”

법원에서 승소했지만 아직 그녀가 감당해야 할 괴로움들은 너무나도 많다. 2005년 해고 후 8년 6개월 만인 2013년 5월 일터로 복귀했지만, 6개월 만에 회사가 야반도주를 해 다시 길거리로 나 앉았다. 사회적 합의는 헌신짝이 됐고, 다시 질긴 투쟁에 나서야 했다. 지난겨울에도 이들은 추운 겨울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오체투지를 벌였다. “해고가 길어지니까 생활이 가장 힘들죠. 교통비고 뭐고 엄청나게 올라서 특히 요즘 힘드네요. 그래도 노조를 하면서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좋아요. 내가 싸움을 포기하고 자리를 비운다면 그게 또 다시 나에게 상처가 될 거예요. 내가 나를 아프게 하고 싶지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아요. 조합원들에 대한 의리도 있지만, 이곳을 버리고 간다고 밖의 삶이 더 나은 삶은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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