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좌파 부상 물꼬 튼 ‘물 투쟁’과 신페인 당

[유럽 민중의 오디세이](2) 수도세 도입 반대 투쟁이 낳은 좌파의 부상

아일랜드는 유럽 경제위기 극복의 성공 사례로 입에 올랐다. 유럽 경제위기의 회복세를 반영하는 사례로도 꼽혔다.

한국에서도 <한국경제>는 “유럽 문제아, 다시 ‘켈틱 타이거’로…아일랜드 경제, 7.7% 성장 ‘포효’”(2014년 9월 9일 자)한다고 주목했다. <조선일보>는 “‘경제 부활’ 아일랜드, 떠난 인재들 故國복귀 프로젝트”(2015년 3월 6일 자)라는 제목으로 아일랜드인들이 임금 삭감 등 긴축을 견뎠고, 낮은 법인세로 기업을 유치해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일랜드의 재기에 대한 다양한 경제지표에 의심의 눈초리도 잦아들었다. 지난해 아일랜드 경제성장률은 5%에 가까웠다. 이 수치는 유로존 전체 평균의 약 6배에 달한다. 경제성장을 이끈 주요 원인은 수출 증대 때문이다. 2012년 15%로 최고점을 찍었던 실업률도 현재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쾌재는 아니더라도 기지개를 펼 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보수 언론이 경제성장을 논할 때마다 읊는 “복지 축소 - 노동시장 유연화 - 법인세 인하 - 투자 유치 - 일자리 창출 - 경제 회복”이라는 수사 뒤의 내막은 과연 어떠할까? 아일랜드는 한반도와 유사한 역사를 공유하면서도 양국 정부 모두 ‘부채’전도사가 된 만큼 그 속내가 더욱 궁금하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 은행 이자로 들어가”

세계은행에 따르면, 아일랜드 실질경제성장률은 2007년 4.9%에서 2009년 -6.4%로 최하점을 찍었다가 2014년 4% 수준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는 지난 6일 이러한 아일랜드의 성취에 대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얻은 것이 아니라, 유럽중앙은행(ECB)이 채권 시장을 고정시키고 실제 위험 요소를 계속 제거한 것과 함께 투자가들이 이 나라에 최소 금리를 보장한 것이 무엇보다 자금이 유입된 원인”이라고 짚었다.

이 언론은 또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아일랜드 경제는 주변에 개선된 여건 때문에 이득을 봤다”며 “가장 중요한 2개의 무역 상대국인 영국과 미국은 다른 산업국보다 매우 강한 성장세를 보였고, 아일랜드 수출산업은 이의 수익자가 됐다”고 지적했다.

우파 정부가 이끄는 아일랜드에 대한 유럽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지원은 좌파가 집권한 그리스와 비교해 보면 참으로 대조적이다. 유럽중앙은행은 그리스에 대해서는 오히려 금융시장을 혼란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투입된 자금은 외국기업의 투자가 아닌 대부분 부채로 이어지는 대출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수출 이윤도 낮은 법인세와 임금을 이유로 들어온 구글과 같은 초국적 기업이 주로 올렸다.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경제 후퇴의 위험이 제거된 것은 아니”라며 “채무대납에 필요한 경제성장 쇠퇴 등을 이유로 다시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봤다.

아일랜드 정부 부채는 2008년 유로존에서 2번째로 낮은 25% 수준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부동산 거품 붕괴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서 2011년 2월까지 모두 810억 유로의 부실 자산을 사들이며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여기에는 2010년 트로이카(EU, ECB, IMF)로부터 받은 675억 유로의 구제금융도 들어갔다. 결국 2014년 정부 부채는 약 5배가 늘어 123.3%까지 치솟는다.1

지난해 6월 독일 <엔티비>에 따르면, 가계 채무를 비롯한 아일랜드 민간 채무는 심지어 GDP의 400%까지 올라갔다. 이 수치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긴축 세대’와 ‘긴축 디아스포라’의 등장

  (위)지난 20일 수도세 반대 투쟁 장면. (아래)3월 초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긴축 투쟁 장면. 선두에서 선 노동자들이 정부의 삭감을 반대해 영화 '가위손' 복장을 하고 행진 중이다. [출처: www.anphoblacht.com]

긴축조치 아래 아일랜드 국가 예산은 2011년 이래 3분의 2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아일랜드 임금은 축소돼 단위 노동비용은 2008년 대비 20% 이상 추락했다. 그러나 해고는 더 자유롭게 됐다. 또 실업기금, 아동지원비, 최저임금은 삭감됐지만, 부가가치세는 증가했다. 2013년 30만 중소기업 중 4분의 1 이상이 채무를 졌으며, 이 중 41%는 적시에 납부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일 <아이리쉬 타임스>에 기고한 딤프나 디바인 더블린대 교육학 교수에 따르면, 만성 빈곤 속에서 사는 아일랜드 어린이의 수는 6%에서 11.8%로 올라갔다. 아동 빈곤 수준은 41개국 중 37번째를 기록했다. 어른들이 지는 빚더미는 교육 기회와 생활을 통해 그들의 일상에 기록된다. 디바인 교수는 이들을 ‘긴축 세대’라고 불렀다.

또 긴축이 시작된 지난 7년 간 국가를 등진 이들의 수는 아일랜드 대기근(1845년부터 7년 간 지속) 당시 해외로 이주를 시도한 200여 만 명(이중 60%가 뭍을 밟지 못했다)의 약 4분의 1에 달한다. ‘긴축 디아스포라’라 할 만하다.

물 사유화 반대 가두 투쟁, ‘수량계 요정들’의 직접행동

경제위기 이래 처음으로 긴축 예산을 편성한 2009년부터 아일랜드 농민과 노동자들은 총파업, 가두시위 등을 통해 정부에 저항했다. 학생들은 등록금 인상에 맞서 위력적으로 대학을 점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의 동력은 좀처럼 지속되지 못했다.

드로이앤 퍼틀(Duroyan Fertl)은 호주 <그린레프트위클리>에 “아일랜드 경제 몰락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소요는 최소화됐다. 대신, 아일랜드 인구 450만 명은 대량 학살을 문자 그대로 목격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2014년 물사유화 반대 투쟁을 중심으로 ‘켈틱 타이거’의 포효는 드디어 시작됐다.

<그린레프트위클리>에 따르면, 아일랜드 정부는 그동안 일반세에 수도 비용을 포함해 거뒀지만, 지난해 국영기업 아이리쉬 워터(Irish Water)를 창설하고 별도의 수도세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수도세 대신 수년 동안 부글부글 끓어온 분노를 정부에 향하도록 했다. 수도를 통해 안전한 식수가 공급되지 않는 지역들도 많아 불만은 더욱 컸다. 아이리쉬워터가 물 사유화를 위해 도입됐다는 의심도 확산됐다.

수도세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아이리쉬 워터에 등록하지 말라고 제안했다. 수도세를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급기야 지난해 10월 더블린에서 열린 전국 시위에는 10만 명이 참가하면서 정점을 기록했다.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라이트투워터(Right2Water)’가 조직한 이 집회에는 노동조합, 지역단체와 반긴축동맹(AAA), ‘이윤보다 인간을’ 동맹과 신페인 등 정치 단체들 간 연합이 연대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는 반발하는 사람들에 대해 위협과 폭력으로 대처했고, 세금도 더 올리겠다고 경고했다. 급기야 10월 21일 존 버튼 부총리(노동당)는 텔레비전 생방송에서 “물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들끓는 공분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11월 1일에는 전국에서 100여 개의 집회가 일어났다. 퍼붓는 빗 속에서 집회에 참가한 20만 명은 “우리는 지불하지 않겠다”, “강에서 바다까지, 아일랜드 물은 무료”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더욱 승세를 이어갔다.

또 자칭 ‘수량계 요정들’이라는 익명의 단체가 나타나 정부가 단 수량계를 떼어내기 시작하면서 물 사유화 반대운동은 고조됐고, 지역위원회 다수가 물 요금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결국 정부를 양보시켰다.

물꼬 트인 신페인, 어디까지 흘러갈까?

수도세 도입에 반대하는 시위의 밀물은 곧이어 긴축에 반대하는 정당들, 특히 공화주의 신페인의 부상으로 흘러넘쳤다.

신페인(Sinn Fein)은 원래 아일랜드 제1공용어인 게일어로, ‘우리 스스로’를 의미한다. 1905년 창당해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역사적으로 긴밀한 연관을 가졌던 이 정당은 1990년대 무장폭력 노선을 폐기하고 정치정당으로 나아가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신페인은 아일랜드 남부에서는 우파 정부에, 북부아일랜드에서는 영국 정부의 긴축에 맞서 사회운동과 연대해 거리와 의회에서 싸워 왔다. 이 과정에서 신페인은 지난해 5월 아일랜드 지방의회 및 유럽의회 선거에서 각각 17%, 20% 이상을 획득했다. 북아일랜드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2

애초 경제위기를 초래하며 긴축을 강행했던 피아나페일당(아일랜드공화당), 경제위기 심판 선거에 따라 치러진 2011년 총선에서 집권한 피네게일(통합아일랜드당)과 노동당의 지지율 상당폭을 쓸어냈다. 그러나 신페인은 2007년 6.9%, 2011년 9.9%에서 지난해 최고 26%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보수언론은 필사적으로 신페인의 부상을 저지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IRA 부정을 새로 제기하고, 현 신페인 지도부의 연루 의혹을 퍼트리는가 하면, 특혜 시비 등의 문제를 유포하고 있다. 물 투쟁에 대해서도 신페인을 빗대어 ‘사악한 외부 세력’이 침투해 있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신페인은 이를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더러운 술수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지속된 무장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IRA의 잘못을 신페인이 적절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 사과를 구했다.

현재(3월) 신페인의 지지율은 17-24%를 보이고 있다. 집권 피네게일과 노동당은 각각 24-27%, 6-10%, 피아나페일당은 17-19%로 소폭 회복한 추세다.

신페인은 아일랜드 1916년 부활절 무장 봉기의 100주년인 내년, 같은 시기에 열리는 총선에서 승리한다는 계획이다. 30일에는 민중조약을 발표하고 “예산, 공공서비스, 사회복지 삭감 뒤에 있는 백만장자들의 정부를 지지하는 어떤 정당이든 민중의 필요를 무시하고 있다”면서 “신페인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밝혔다.

향후 총선까지 신페인의 선전은 물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달려있다는 평이다. 지난 20일에도 아일랜드는 더블린에서만 약 4만 명이 수도세 도입 철회를 요구하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폐인’ 아니고 ‘신페인’?

신페인은 한국에선 낯설다. 하지만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라면 ‘아!’하고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영국 영화감독 캔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부터 한국 드라마 <아일랜드>, 최근에는 독립영화 <원스>까지 한국의 기억과 문화에도 스며있는 조직이다. 그리고 이 IRA와 신페인은 관계가 깊다.

한반도에서 일제에 맞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영국 제국이 식민통치했던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에 대해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한 IRA가 창립됐다. 1949년 북아일랜드 6개주(얼스터)를 영국에 남기고 아일랜드가 완전히 독립한 뒤 IRA의 진영은 아일랜드국방군의 전신과 반대파로 양분돼 사그라지다가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에서 영국계 주민들의 박해가 확대되자 이에 반발해 기존 IRA에서 PIRA(Provisional IRA)를 세우고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신페인은 1905년 창당돼 이러한 IRA와 연관돼 있지만, 특히 PIRA와 긴밀한 관계를 지니며 종종 PIRA의 정치조직이라고 불린다. PIRA는 1998년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와 자치권(성사되진 않았다)을 이양 받는 ‘굿 프라이데이’ 협정을 체결한 뒤 2005년 7월 28일 공식적으로 무장투쟁을 철회했다.

현재 신페인은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아일랜드 공화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명하고, 유럽연합에서는 좌파 진영인 그리스 시리자, 독일 좌파당 등과 함께하는 ‘유럽통합좌파 및 북부 녹색좌파연합(EUL/NGL)’에 속해 있다.

*주
1. 세계 국가부채 규모를 보여주는 내셔널뎁클락스(www.nationaldebtclocks.org)에 따르면, 아일랜드 정부 부채는 현재 기준 약 2,136억 유로(약 260조 원)로, 이자만 매초 당 336유로(404,500원), 연간 106억 유로(약 1276억 원)를 납부해야 한다.

2.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정식명칭인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을 구성하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함께 4개 행정구역에 속한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의회는 그동안 일부 권한을 이양받았지만 정책은 잉글랜드에 있는 런던이 결정하며, 예산권도 런던 하원에 속해 있다.

긴축은 이러한 북아일랜드도 흔들고 있다. 영국령 북아일랜드의회에서 신페인은 1998년 ‘굿 프라이데이’ 협정에 따라 친영 왕정주의 민주통일당(DUP)과 함께 공동으로 의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보수당의 긴축에 따라 이 권력 분담 체제도 내년 5월 영국 총선을 앞두고 약 20년 만에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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