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역사에서 지워진 조반(造反)

[주례토론회] 문화대혁명은 어떻게 재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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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적 투쟁의 대상으로서의 ‘과거’

A. 캘리니코스가 그의 저서 속에서 “과거는 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된다”는 발터 벤야민의 경구를 인용했을 때, 그가 의도했던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흔히 ‘맑시즘’이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이론의 결집체인지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는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따라서 “서로 갈등하는 요소(전체로서의 맑시즘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인용자)들 가운데에서 하나의 맑시즘 전통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곧 (맑시즘에 대한-인용자) 하나의 특수한 입장을 선택”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1 모순적이고 상호 대립적인 요소들 속에서 특정한 요소들을 선택, 추출해 내고, 그것을 모순 없는 (혹은 모순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론의 역사(history)로 재구성해 내는 행위를 우리는 역사(History)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을 만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과 계기들이 역사화를 위한 한 고비를 막 넘어서는 순간에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이러한 역사 ‘해석’은 실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적·해석적 권위를 독점함으로써 현재 및 미래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특수한 집단의 현재적 시각 혹은 입장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의 행위는 필수적으로 특정한 목소리, 시각, 관점, 입장, 그리고 기억에 대한 억압과 말소의 기제를 수반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특수한 집단의 해석과 기억이 특권화되거나 말소되는 것이야말로 그 행위가 지니고 있는 정치성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캘리니코스는 ‘과거’에 대한 벤야민의 경구를 맑시즘에 대한 해석들 사이에 숨어 있는 정치적 투쟁의 계기들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관점은 이 글의 논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흥미롭게도 ‘맑시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의 역사적 분기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중국의 ‘모택동주의’,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이론적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오늘날의 담론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거는 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장이 된다’는 예의 경구가 가장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서사가 그 자체로 정치적 투쟁의 형식이 되는 것은 맑스주의와 같은 이론적 전통의 재구성이나 순수한 역사쓰기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미학(문학)적 재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문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여전히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대중적 견해에 따르면 문학은 흔히 정치적인 문학과 비정치적인 문학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미학은 우연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2이라는 랑시에르의 지적은 정치적 문학과 비정치적 문학의 경계를 가르고자 하는 이러한 일반화된 관념의 허구성을 다시 한 번 날카롭게 파고든다. 랑시에르의 지적처럼 모든 문학적 행위는 작가의 앙가주망(engagement)으로 인해서만 정치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것, 즉 세계(그리고 세계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재현해 내는 행위는 그 서사가 기반하고 있는 하나의 담론 체계에 대한 인간의 감성을 재조직하는 행위가 된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미학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는 어떤 종류의 문학 담론도 본질적으로 정치와 미학의 관계를 둘러싼 담론에 대한 재조직의 시도이며, 이러한 ‘정치와 미학의 관계에 대한 재조직’은 결국 ‘정치’ 개념 및 그와 관련된 사회적 담론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2. 서사와 정치

우리가 중국의 문화정치적 맥락 속에서 문학과 정치 사이의 상관관계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굳이 랑시에르가 지적한 바와 같은 본질적인 차원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어 보인다. 文과 治 사이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과 강조로 점철되어 온 전통 중국의 유구한 文의 역사는 주지하는 바와 같거니와, 20세기만 하더라도 중국의 중요한 정치 개혁은 문학적 방향의 선회와 상당 부분 일치해왔으며, 새로운 문학은 언제나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개척하는 문화적 전위이자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깃발이 되어 왔다. 오사 신문학의 출현은 중국의 정치적 근대성의 출현을 상징하는 깃발이었고, 30년대 좌익 문학과 연안 문예의 전통은 중국 혁명의 핵심적 방향을 선도하는 문화적 선봉이기도 하였다. 이 글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화대혁명만 하더라도 『海瑞罷官』에 대한 비평과 이른바 상흔문학, 반사문학의 출현이 기나긴 매듭의 마지막 고리와도 같이 그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전통 중국에서도, 현대 중국에서도 정치적 담론의 생산 및 유통 과정 속에서 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그야말로 각별하다.

문화대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반추와 기억의 영역에 있어서도 문학적 서사가 감당해 내고 있는 역할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적어도 중국대륙에서는)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사회주의 시기에 대한 역사학적, 사회과학적 연구나 서술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문화대혁명과 관련된 문학적 서사와 미학적 재현은 적어도 양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대단히 풍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른바 傷痕文學으로부터 시작해서, 反思文學, 尋根文學, 다양한 知靑敍事, 그리고 수많은 지식인 산문과 회고록[回憶錄] 등이 1980년대의 시작과 함께 쏟아져 나왔고, 이러한 서사 작품들 속의 문혁 이야기들은 다시 영화로 각색되어 더욱 폭넓은 대중들에게 보급되었다. (그 가운데 陳凱歌의 『覇王別姬(1993)』, 張藝謀의 『活著(1994)』, 田壯壯의 『藍風箏(1993)』, 謝晉의 『芙蓉鎭(1986)』 등은 한국에서도 상당히 널리 보급된 바 있다.) 이 방대하고 영향력 있는 서사 작품들은 문화대혁명과 사회주의 시기의 역사에 대한 신시기 중국(그리고 세계)의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기억을 사후적으로 구성해내는 가장 핵심적인 구성적 텍스트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서사작품들의 창작과 대중적 수용 과정은 한편으로는 문화대혁명의 역사에 대한 해석과 재구성의 과정이었음과 동시에 신시기 중국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과 정치적 방향성이 형성되고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돌이켜보자면, 문화대혁명만큼 전세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건도 그리 흔치 않지만, 문화대혁명만큼 그 실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혹은 잘못 알려져 있는 사건 역시 그리 흔치는 않아 보인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존재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는 매우 높은 반면,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문화대혁명의 기본적인 쟁점이나 대립구도, 전개 과정, 주요 사건이나 인물들을 간략하게라도 이야기할 수 사람은 지식인들 가운데에서도 상당히 드문 편에 속한다. 문화대혁명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실(fact)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 사실들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모순적 구조나 사건 자체의 다면체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화대혁명이 매우 이질적이고 다층적인 경향과 사건들이 교직되어 있는, 따라서 한 마디로 그 성격을 규정해 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대중적인 담론의 차원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기호가 소비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그 기의가 놀라울 만큼 단정적임과 동시에 ‘단순화’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문화대혁명의 실재와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사이에는 상식적으로 용인 가능한 수준을 뛰어넘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고 있는 셈인데, 이 ‘간극’이야말로 오늘날 대중화된 문화대혁명 담론의 정치성이 형성되고 자라나오는 공간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3. 이미지와 서사

오늘날 대중적인 담론과 미디어의 영역에서 문화대혁명은 우선 몇 가지 ‘이미지(Images)’로 소비된다. 문화대혁명에 관한 이미지 가운데 가장 대중화된 이미지는 역시 마오쩌둥의 이미지이다. 마오쩌둥의 이미지 가운데에서도 사진, 초상화, 포스터 등을 통해 유포된 홍위병 군복을 입은 마오쩌둥의 이미지가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문화대혁명의 이미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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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그림1」과 「그림2」는 그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하는데, 그림 속에서 마오쩌둥은 홍위병 복장에 홍위병 완장을 찬 채로, 천안문 광장에서 홍위병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 이미지는 아마도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마오 주석이 우리(홍위병)와 함께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이 이미지는 ‘마오의 홍위병 선동’, 혹은 ‘홍위병들의 마오 숭배’에 대한 일종의 증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 이미지 속에서 마오와 홍위병의 이미지가 극적으로 오버랩되고 있다는 점만은 매우 분명한데, 이러한 강렬한 이미지의 중첩 효과로 인해 우리는 (문화대혁명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인) 홍위병 이미지들 속에서도 마오의 그림자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게 된다.

문화대혁명을 상징하는 홍위병들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마오쩌둥과 혁명에 열광하고 있는 이미지(대체로 마오쩌둥 어록, 거대한 붉은 깃발, 마오쩌둥 배지 등은 이 이미지들에 가장 흔히 등장하는 소품들이다)이며, 또 다른 하나는 무차별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폭력의 이미지는 다시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첫째는 비판대회에서 지식인과 관료에게 비인간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미지이며, 둘째는 문화유물을 파괴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오늘날 이 두 가지 범주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하나의 개념으로 수렴되는데, 그것은 바로 ‘비이성’, 혹은 ‘광기’이다. 이 비이성과 광기라는 개념은 홍위병들의 올바른 정치적 판단 및 주체적 사고 능력에 대한 회의, 현대적 지식과 예술, 전통 문화의 가치를 부정하는 반문화주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혐의를 자연스럽게 수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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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회의’와 ‘혐의’는 홍위병의 이미지 이면에 드리워져 있는 배후 조종자로서의 마오쩌둥 이미지로 인해 대대적으로 증폭된다. 그런데, 이처럼 홍위병들의 이미지가 비이성적 광신과 반문화주의, 반지성주의 등의 개념을 환기시키는 순간 이들이 등장하는 이미지와 서사 속에서 폭력과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지식인과 간부, 그리고 전통문화 유산들은 자연스럽게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비이성적 대중의 광기와 비이성의 대척점에 서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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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문화를 상징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미지 속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식인과 간부들에 대한 일정한 문화주의적 동일시에 기반하여 이 이미지들을 접하게 되는 경우, 이 이미지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이 이미지들을 생산해 낸 생산자들이 이 이미지들에 담아내고자 했던 메시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아주 쉽게 대중정치의 위험성과 야만성에 대한 확정적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외에도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중화된 이미지들로 이른바 사인방, 시위하는 군중, 대자보와 혁명 구호, 무장투쟁 장면, 고도로 양식화된 포스터, 양판희와 충성무 등의 혁명 문예 공연 장면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이미지들은 문화대혁명의 시공간적 전개과정과 논리적 쟁점들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경우에는 마오쩌둥으로 대표되는 문혁 지도자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버리거나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비이성적이고 난폭한 군중의 이미지와 중첩됨으로써 포괄적으로 ‘문화대혁명’이라는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인상을 구성하는 하위범주로 배치된다.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중화된 이미지는 이렇게 선동가 마오쩌둥,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홍위병, 그리고 무고한 희생자인 지식인과 혁명 간부라는 세 범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러한 세 범주의 이미지들이 발생시키는 의미작용(signification) 사이의 내적인 상관관계는 하나의 서사적 메시지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문화대혁명에 관한 재현적 서사의 프로토타입(prototype)을 구성함과 동시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적 정의(定義)를 대신하기도 하는 이 서사적 메시지는 바로 ‘마오쩌둥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어린 홍위병들을 선동하여 무고한 지식인들을 박해하고, 국가와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한 재난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프로토타입 속에서 문화대혁명의 전개과정과 대립구도는 선과 악, 가해와 피해의 이원대립적 구도로 선명하게 획분되는데, 이 때 사악한 가해자이자 혼란과 무질서를 대표하는 것은 마오쩌둥과 그의 하수인인 홍위병(대중)이며, 선한 피해자이자 질서와 이성을 대표하는 것은 엘리트(지식인과 老幹部를 포괄하는)와 해방군(군부)이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이러한 프로토타입의 매우 전형적이면서도 주목할 만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1966년 이념의 성전을 발동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했다. 마오쩌둥은 학교의 문을 닫아버렸고, 학생들로 하여금 홍위병이 되어 ‘부르주아 전문가’로 일컬어졌던 교사, 교장, 교수들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이 혁명운동은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았다. 홍위병들은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면서 정부와 당의 간부들을 공격하고 군부대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들고 싸움을 벌였다. 1969년에 인민해방군이 질서를 회복하기 전까지 온 나라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치달아 있었다.”3

이 문장은 수잔 셔크(Susan Shirk)가 그의 잘 알려진 저서인 China: Fragile Superpower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있는 부분으로부터 발췌된 것이다. 사실 수잔 셔크의 위와 같은 서술은 실제로 매우 흔하고 전형적인 서술 방식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내용적으로는 그리 특별한 사례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위 문장에 특별히 주목하고자 한 것은 그녀가 말하자면 자타가 공인하는 1급 ‘중국 전문가’에 해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UC 샌디에이고(UCSD)의 정치학 전공 교수이고, 지난 클린턴 정부에서는 미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런 영향력 있는 중국 전문가가 자신의 저서에서 문화대혁명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단순화된 프로토타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채택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중국에 대한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미국 국무부의 대중국 정책에 대한) 이해와 분석의 신뢰도를 적잖이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프로토타입이 지니고 있는 파급력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녀의 설명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기고 넘어가기로 하자. 셔크는 이 짧은 문장 속에 문화대혁명의 원인과 책임, 목적과 전개 과정, 결과,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문제점)들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문화대혁명은 1966년에 마오쩌둥이 혁명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이념의 성전을 발동함으로써 시작되었고, 마오쩌둥은 학생들이 홍위병이 되도록 선동하여 ‘교사와 교장, 교수’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들 홍위병은 군부대 무기고를 탈취할 정도로 과격하고 불법적인 폭력행위를 자행하였으며, 이로 인한 혼란은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치달았지만 1969년 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러한 서술 방식은 앞서 언급한 바, 대중적 이미지들로 조합된 문혁 재현 서사의 프로토타입과 그대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꼼꼼히 살펴보면 이 길지 않은 문장 속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다양한 정치적 암시들이 녹아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문화대혁명의 근원과 목적에 대한 서술과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화대혁명이 1966년 마오쩌둥으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서술 자체는 마오쩌둥의 개인적 의지를 문화대혁명의 유일한 발발 원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만 아니라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는 데에 마오쩌둥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목적’을 간단히 혁명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이념의 성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규정은 문화대혁명의 원인과 목적을 마오쩌둥의 이념적 급진성이나 야심이라는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의 테두리 내에 가두는 (정치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들이 문화대혁명의 사회경제적, 역사적 근원들에 대한 다양한 설득력 있는 분석들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거니와,4 이 글의 관심사와 관련하여 보자면, 이 연구 성과들 자체보다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문화대혁명의 근원을 단순히 마오쩌둥의 이념적 급진성이나 정치적 야심이라는 사적인 영역의 범주 내에 가두어 두는 것이 발생시키는 정치적 효과이다. 그것은 바로 문화대혁명이 발발하게 된 원인을 (따라서 그 책임까지도) 마오쩌둥이라는 개인의 영역 속에 묶어 둠으로써, 문화대혁명을 통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중국 사회주의 사회 내부의 객관적인 모순과 갈등이라는 문제를 은폐하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그 객관적인 모순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중국공산당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분리가 개혁개방 이후 중국공산당의 당대사 서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홍위병이라는 문화대혁명의 실행 주체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물론 짤막한 서술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문화대혁명의 폭력과 혼란을 유발한 여러 실행 주체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홍위병만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특별히 눈여겨보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선동했다는 서술은 세부적으로는 일정한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5 대체로 사실로 인정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이른바 조기 문혁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발생했던 교사들에 대한 홍위병들의 공격이 마오쩌둥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는 서술은 확실히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며,6 홍위병들이 정부와 당의 간부들을 공격하고 군부대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서술 역시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반영한 진술로 인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7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폭력과 혼란을 유발하고 격화시킨 실행 주체에는 홍위병으로 지칭될 수 있는 집단 외에 보수파와 조반파를 망라하는 다양한 대중조직, 나아가 결정적으로 ‘당조직’과 工會, 군 등이 두루 포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8 더구나 홍위병들은 68년 여름 이후 대부분 상산하향 운동에 동원되어 도시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에 홍위병의 활동은 대체로 문화대혁명 초기의 사태에만 관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초기의 홍위병조차도 처음부터 단일한 형태의 조직은 아니었다. “문화대혁명 초기부터 ‘홍위병 일반’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특정한 입장을 지닌 서로 다른 홍위병들이 존재”9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위병’이라는 집단이 마오쩌둥의 의도와 지시를 투명하게 반영해내는 단일한 성격의 집단인 것처럼 서술되거나, 나아가 홍위병을 문화대혁명 시기의 대중조직, 특히 조반파 조직과 혼동하거나 등치시키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현상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발생한 모든 폭력과 혼란을 홍위병의 이미지로 통합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는 그 폭력과 혼란의 책임을 마오쩌둥에게로 배타적으로 전가하는 데에 일정정도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로는 문화대혁명의 ‘대상’, 혹은 ‘피해자’와 관련된 문제이다. 수잔 셔크의 서술 속에서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사람들은 역시 교사, 교장, 교수, 의사, 그리고 간부이다. 크게 범주화해서 구분하자면 지식인과 간부로 나눌 수 있겠지만, 그 중에 지식인의 피해 상황에 대한 진술에 무게가 놓여 있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지식인들이 문화대혁명 당시에 수난을 당했다는 것은 물론 분명한 사실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문화대혁명의 성격을 ‘지식인에 대한 박해’로 규정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정당화시켜줄 수 있을 만한 것인지 여부는 좀더 세심한 검토를 요하는 문제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문화대혁명이 ‘지식인에 대한 박해’로 규정될 수 있으려면, 지식인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 문화대혁명의 대체불가능한 핵심적 목표였다는 점과 함께 지식인에 대한 비판과 박해가 부분적 사실이 아니라 문화대혁명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주요한 실천 형식이었음이 증명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본질적 성격 규정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작품인 『民主課』의 저자 曹征路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참고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큰 틀에서 보자면, 혁명이란 그야말로 상처로 가득한 역사일 뿐인 거죠. 혁명은 결코 후대의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그렇게 아름답고, 선악과 시비가 선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을 달려 적을 무찌르고, 날렵하게 문장을 써내려가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예요. 혁명의 전과정은 그저 고통과 상처로 가득한 역사일 뿐입니다. 저는 작품 속에서 특별히 두 명의 인물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것은 가슴 아픈 두 명의 늙은 혁명가들입니다. 제가 끈질기게 추궁하고자 했던 것은 도대체 당신들은 왜 혁명을 했느냐는 것이었어요. 개인의 신분 상승, 그러니까 지체 높으신 나리가 되고자 했던 것이었나요? 그렇다면 당신들의 혁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 뿐이죠. 문혁 역시 마찬가지예요. 만일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지식인이 고난을 좀 겪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구요. 사실 지식인들이 당한 건 그리 대단히 부당한 고난도 아니었어요. 월급 한 푼 깎이지 않고 고스란히 다 받아가면서 길거리 청소를 한 것뿐이고, 남들 다하는 육체노동에 좀 참여를 했을 뿐이거든요. 농촌으로 가서도 월급은 고스란히 받았으니 뭐 대단한 희생을 치른 거라고 할 수 없어요. 농민들은 예전부터 늘 그랬거든요.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아왔어요. 아주 특별한 경우에 두들겨 맞고, 모욕을 당하고, 그로 인해 심지어 자살을 한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극히 드문 개별적 사례일 뿐, 결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에요. 더구나 만약 문화대혁명 동안 지식인이 학대를 받았다면, 그를 학대한 것은 틀림없이 지식인이에요. 이건 각급 대학 내부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분명하죠. 별의별 희한하고 기괴한 방법과 논리를 동원해서 별 시덥지 않은 사소한 문제를 계급투쟁이니 노선투쟁이니 하는 어마어마한 문제로 엮어 내는 건 절대로 노동자나 농민이 아니에요. 만에 하나 그렇게 해서 재난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었다 한들 그 상황이라는 게 농민들이 처한 상황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거든요. 뭣 때문에 당신들이 농민들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이죠? 이른바 상흔이라는 것도 그래요. 여성 지식청년이 농촌으로 내려가서 대대 서기에게 강간을 당한 이야기를 소설로 엮고 영화를 만들고, 양아치나 다를 바 없는 조반파들로부터 눈물 나는 모욕을 당한 이야기로 영화를 찍어 냈지만, 이건 근본적으로 거론할 가치가 없는 헛소리들일 뿐이에요. 나도 생산대에 들어가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단 말입니다. 68년 여름에 농촌으로 내려갔어요. 우리가 농촌으로 떡 내려가니까, 농민들은 그야말로 학생들이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요. 그 당시에 어떤 농민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고 갖고 놀아요? 여성 지식청년은 농촌에서는 그야말로 신기하기 그지없는 존재였어요. 당신처럼(대담자인 嚴海蓉을 가리킴-인용자) 안경을 낀 여자만 봐도 농민들은 신기해 놀라 자빠질 지경이거든요. 어이쿠야, 여자가 안경을 다 꼈네. 농민들은 거의 받들어 모시다시피 했어요. 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들 가운데 일부가 노동자나 간부의 자격으로 대학에 선발되어 가고 나머지는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빈하중농의 추천이니, 농촌 생산대대 서기의 승인이니 하는 것이 필요해졌고, 그때 가서야 대대 서기의 비위를 맞출 사정이 생겼던 것이지, 농촌에 내려간 초기에는 그런 일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질 않았어요. 당시에 지식청년들은 늘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뭔 일이 났다하면 몇 개 인민공사에서 죄다 몰려와요. 설이나 명절 때가 되면 그야말로 난리를 피우죠. 뻑하면 공사로 찾아가 소란을 피우고, 그러다 맘이 동하면 이 여자 저 여자 건들기도 하거든요. 그 사람들(농촌의 간부)도 겁이 나서 어떻게 못해요, 그런데 어디 누굴 건드리겠어요. 물론 개별적인 경우 그런 사례가 절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큰 틀에서 볼 때 결코 그렇지 않았어요. 이야기를 꾸며 내는 건 동정을 얻기 위한 거예요. 내가 이렇게 억울한 억압을 당했다 이거죠. 이 상흔(80년대 초반의 상흔문학을 가리킴-인용자)이 나오고 난 뒤에 동정의 대상이 지식인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10

曹征路의 이러한 발언은 문화대혁명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물들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지식인 중심의 서술 경향과 상당히 날카롭게 충돌한다. 물론 지식인들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당한 부당한 비판과 수모, 학대 등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지만, 다만 문화대혁명 당시 다른 계층과 신분의 사람들이 입은 피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식인 문제가 두드러지게 클로우즈업 되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라 할 수 있는데, 이처럼 지식인 문제가 다른 문제에 비해 유독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198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생산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현 서사들의 서사 주체가 대부분 지식인이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다만,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므로 이 자리에서는 더 자세히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우리의 관심사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위 인용문 가운데 “만약 문화대혁명 동안 지식인이 학대를 받았다면, 그를 학대한 것은 틀림없이 지식인이예요. 이건 각급 대학 내부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분명하죠. 별의별 희한하고 기괴한 방법과 논리를 동원해서 별 시덥지 않은 사소한 문제를 계급투쟁이니 노선투쟁이니 하는 어마어마한 문제로 엮어 내는 건 절대로 노동자나 농민이 아니”라는 지적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지적은 ‘지식인/피해자 vs 홍위병/가해자’라는 널리 퍼져 있는 관념과 ‘문화대혁명은 비이성적인 홍위병을 동원하여 문화인과 지식인을 탄압한 사건’이라는 일반화된 해석의 적실성에 대해 일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曹征路에 따르면, 지식인들에 대한 박해는 지식인이 아닌 자들의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지식인 내부 투쟁의 성격을 더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11

더구나, 역시 曹征路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문화대혁명 당시에 도시의 중고등 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은 그 자체로 대단히 두려워할만한 지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68년 농촌과 변방으로 하방된 홍위병들을 중국에서 知識靑年이라고 불렀던 것은 적어도 당시의 사회적 관념에 비추어 본다면 결코 과장된 명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물론 당시의 홍위병들이 지니고 있었던 사고와 행위의 조야함에 대한 현재적 평가의 문제는 별도로 남겨질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일반화된 관점처럼 당시 홍위병과 지식인 사이의 문화적 권력 관계를 ‘대중독재 vs 엘리트’라는 프레임 속에서 상상함으로써 당시의 홍위병을 아무런 사상적 판단 능력이나 사회적 지식을 지니고 있지 못한, 따라서 전적으로 마오쩌둥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동원된 피동적 대중으로만 간주하는 관점에 대한 적절한 조정의 필요성은 조심스럽게나마 제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볼 때, “이 상흔이 나오고 난 뒤에 동정의 대상이 지식인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라는 曹征路의 지적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적 기억의 프로토타입이 재구성되는 서사정치의 한 계기를 날카롭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의를 끈다. 80년대 이후 중국에 쏟아져 나온 지식인 작가들의 상흔, 반사문학 작품들은 문화대혁명의 과정 속에 존재했던 다양한 행위주체들과 受害者들 가운데, 홍위병과 지식인을 문화대혁명의 주요한 加害者와 受害者로 부각시켜 냄으로써 비로소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억이 ‘지식인 vs 대중’, 혹은 ‘啓蒙 vs 蒙昧’라는 뚜렷한 엘리트주의적인 성질을 지닌 프레임 속에서 재구조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不准反思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역사학적, 사회과학적 연구나 서술은 여전히 상당히 희소한 반면, 상대적으로 문화대혁명과 관련된 문학적 서사와 미학적 재현 서사물들은 꽤 풍성하다. 더구나 소설과 영화로 대표될 수 있는 미학적 재현 서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대중적 파급력을 고려해 본다면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형성에 어느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중적인 이미지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문화대혁명 해석의 프로토타입이 수많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현 서사작품들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관철12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프로토타입과 재현 서사작품들 사이에서 모종의 일치가 발견된다는 사실로부터 양자 사이의 선후 관계(무엇이 무엇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어느 쪽이 원본인지)에 대한 분석을 위한 유의미한 데이터를 이끌어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건 간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미지와 문혁 해석의 프로토타입, 그리고 서사작품들 속의 재현된 문화대혁명 사이에 뚜렷한 상관성이 발견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적 기억과 해석이 확실히 개별 매체의 차원을 넘어서는 더 큰 사회적, 정치적 흐름과 맥락 속에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는 있겠다. 그러하다면 이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야말로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적 기억과 해석의 근원이자 그 기억과 해석에 내재된 정치성의 기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데, 이 기원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대혁명에 대한 서사적 재현의 양상들을 일별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프로토타입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현서사 작품들 속에서는 개별 작품들의 주제와 故事에 대한 기본적인 조절 작용을 하는, 일종의 ‘매스터 플롯(Master Plot)’13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면관계상 이 글에서 개별 문혁 재현서사 작품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여기에서는 한국의 문혁 인식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친 몇몇 작품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가장 먼저 주목해 보아야 할 작품은 戴厚英의 『사람아 아 사람아!』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사람아 아 사람아!』은 작품의 수준에서나 영향력에서나 가히 1980년대 중국의 반사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한국에서도 상당히 많은 독자를 확보했던 영향력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1980년대 상흔, 반사문학이 주로 그러했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지식인 문제’를 논의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작가 戴厚英은 이 작품에서 문화대혁명을 일종의 ‘지식인 수난사’로 재해석해 내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이 작품 속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스토리 전개상의 특징이 발견된다.

이 글의 관심사와 관련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눈에 띠는 부분은 바로 주인공 孫悅의 형상이다. 주지하다시피, 자전적 소설인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주인공 孫悅는 작가 戴厚英이 직접적으로 투영된 인물이다. 孫悅의 형상은 주인공 戴厚英의 경험과 역정을 잘 반영해 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에서 孫悅과 戴厚英 사이의 차이가 발견되는데, 소설 속의 孫悅은 현실 속에서 戴厚英이 매우 급진적인 조반파였던 것14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철저한 보수파(보황파)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 戴厚英의 경험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문화대혁명 초기 열정적인 조반파였던 戴厚英이 자신에게 배당된 반혁명 혐의자인 시인 聞捷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내면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하게 됨으로써 聞捷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하이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4·12 張春橋 사건’으로 인해 강경한 조반파에서 하루 아침에 반혁명분자로 전락하는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두 사건은 투철했던 조반파인 戴厚英이 사상적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혁명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15 그러나 소설 속의 孫悅는 처음부터 보수파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에피소드는 작품 속에서 그려질 수가 없게 되고 말았으며, 결과적으로 작품 속에서 孫悅가 왜 그렇게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되는지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상당한 배경 지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파편화, 추상화되어 있다. 필자는 이처럼 문혁 재현서사 속에서 ‘조반’의 흔적들이 깨끗이 지워져 있거나 그 사건과 인물의 내면이 상당히 모호하게 그려지는 현상을 ‘조반의 소실’16이라고 개념화하여 부를 것을 제안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문혁 재현서사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 ‘조반의 소실’이라는 현상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조반의 존재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 경우이다. 조반의 시기를 완전히 생략한 채 이른바 ‘상산하향’ 운동 시기로부터 스토리가 시작되거나 66년 여름의 조기문혁에서 바로 68년의 상황으로 넘어가 버리는 경우이다. 대표적인 지청 서사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老鬼의 『血色黃昏』17이 상산하향을 위해 베이징 역에서 기차에 오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은 매우 전형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18 沈汎의 『홍위병:잘못 태어난 마오쩌둥의 아이들』19은 더욱 문제적이다. 이 책은 모두 다섯 장20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인 ‘불’의 마지막 장면은 66년 8월 천안문에서 마오쩌둥을 접견하는 장면이고, 제2장인 ‘흙’의 첫 장면은 상산하향을 위해 베이징역을 출발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1장과 2장 사이의 기간 동안 어떤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두 경우 모두 ‘조반’과 무투, 그리고 그에 따른 진압의 과정은 깨끗하게 삭제되어 있다.

둘째는 조반과 관련된 행위, 내지는 조반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의 동기와 내면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 경우이다. 餘華의 『兄弟』에서 宋凡平을 살해하는 조반파 인물들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독할 수가 있나”21 싶은 생각이 들만큼 잔인하고 폭력적인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들의 잔인한 행위에 대한 묘사는 끔찍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세밀한 반면, 도대체 이들이 왜 송범평에 대해 이토록 비이성적인 적개심을 갖게 되었는지, 이들은 작품 속 누구와 어떤 관계에 있는 인물들인지, 어떤 사회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고 어떤 사상과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인지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심지어 이들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다만 “조반파”, “붉은 완장을 찬”22 사람들로만 지칭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인물들은 작중 인물과의 구체적인 ‘관계’ 바깥에 위치하며, 다만 스토리 전개를 위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배치되어 있는 엑스트라나 소품, 혹은 문화대혁명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기호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아 아 사람아!』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조반파인 許恒忠의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이다. 戴厚英 스스로가 매우 열정적인 조반파였기 때문에 조반파의 내면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만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작중 조반파 許恒忠의 내면이나 조반에 가담하게 된 동기는 조금도 진지하게 묘사되거나 설명되지 않고 있다. 물론 그의 조반 행위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오로지 許恒忠이 조반파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조반에 가담한 것은 다만 劉少奇가 곧 몰락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는 전적으로 영혼이 없는 기회주의적 인물로만 그려지고 있는 것인데, 이 내면이 결여된 나약한 기회주의자는 끊임없이 孫悅의 주변을 맴돌면서도 끝내 孫悅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정신적으로 하등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때문에 독자는 許恒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도 역시 조반의 동기를 이해하거나 조반자들의 내면에 다가설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세 번째 유형은 문화대혁명 전개 과정의 일반적 양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조반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인물들이 설정되어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조반파라는 호칭이 부여되어 있지 않거나 혹은 조반파의 존재 자체가 작품 속에서 생략되어 있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영화 『芙蓉鎭』에서는 串聯을 온 외지 홍위병들이 마을로 파견된 공작조 조장인 李國香을 비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외부 홍위병에 의해 공작조의 지도 권력이 붕괴된 문화대혁명 초기 상황이라 할 수 있는데,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이 경우 공작조에 의해 수난과 박해를 받은 인물들이 외지 홍위병들과 연대하여 공작조장을 타격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을 전개하게 될 것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공작조장에 의해 수난을 당했던 秦書田이나 穀燕山 등이 공작조장이 타도된 상황에서도 아무런 적극적인 조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문혁 초기 공작조와의 갈등은 노동자들이 조반에 가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였음23을 상기해 본다면, 『芙蓉鎭』의 스토리 구성은 확실히 일반적인 문화대혁명 전개 과정의 상황적 진실을 전형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사람아 아 사람아!』의 何荊夫라는 인물의 배경이 설정된 방식 역시 주목해 볼 만하다. 작품 속에서 何荊夫는 반우파투쟁 때 우파로 지목된 바 있으며, 반혁명 분자로 몰려 죽음을 맞이한 숙부와 아버지를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적어도 이러한 조건만을 두고 본다면 何荊夫는 당조직에 맞서는 조반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그러나 작품 속의 何荊夫는 우파로 지목되어 학교에서 퇴출되자 기나긴 유랑을 떠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1950년대 후반 사회주의 중국에서 우파로 지목된 지식인이 조직을 벗어나 긴 유랑에 오른다는 설정 자체도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비현실적이거니와 더욱 놀라운 것은 긴 유랑을 마친 何荊夫가 문혁 후기에 이르러 갑자기 놀랄만한 사상적 성장을 이룬 80년대 계몽적 지식인의 모습으로 다시 孫悅 앞에 나타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何荊夫와 그의 사상적 성장은 문혁 전반기의 경험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말하자면 何荊夫는 작가에 의해 조반과 진압의 역사 바깥으로 빼돌려진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何荊夫의 휴머니즘은 조반을 포함한 문혁 시기의 사상적 박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탈문혁기’의 완전히 새로운 정신적 산물인 것처럼 그려지게 된다. 이처럼 우파로 지목된 何荊夫가 비현실적인 장기 유랑을 떠난 것으로 설정됨으로써 조반의 역사로부터 비껴 서게 된 것, 그리고 실제 聞捷와 戴厚英의 만남과 달리 작품 속 孫悅와 何荊夫의 만남이 문혁 후반기로 늦추어진 것 등은 작품 속에서 조반의 그림자를 최대한 지워내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24

이러한 사정으로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문화대혁명 시기를 재현하고 있는 대부분의 소설과 영화 속에서 66년 가을 당과 간부들에 맞서 조반을 했던 사람들이 무엇에 저항하고자 했었는지를 들려주는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으며, 69년까지 이어진 잔인한 해방군의 진압과 살육 앞에서 그들이 지른 비명 소리 역시 들을 수 없다. 陳凱歌의 『覇王別姬』를 통해서도, 張藝謀의 『活著』를 통해서도, 田壯壯의 『藍風箏』이나 謝晉의 『芙蓉鎭』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들이 왜 66년 중국 사회주의 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는지,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없다. 수많은 상흔문학과 반사문학 작품들 속에서도, 그 수많은 회고록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80년대 이후 현대 중국의 수많은 지식인 작가들은 ‘계몽’과 ‘이성’의 이름 아래 다양한 형식의 이른바 ‘反思’를 수행해 왔지만, 이들이 수행했던 反思에서 조반과 무투와 진압으로 이어진 문혁의 가장 뼈아픈 역사는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서사의 영역 밖으로 눈을 돌려보더라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문화대혁명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중국 내외를 막론하고 비교적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혁 급진파 인물에 관한 기록 중에는 신뢰할 만한 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장과 이론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25 그것은 서사도 기억도 허용되지 않는 영역이었으며, 따라서 反思도 허용되지 않는, 루쉰과 마오쩌둥의 표현 방식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不准反思’26의 영역이었다. 80년대의 계몽적 지식인들이 계몽과 이성의 이름 아래, 문화대혁명의 역사에 대한 지식인 중심의 서사와 기억을 새롭게 구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조반과 진압의 피어린 역사를 ‘폭력’과 ‘혼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아래 은폐함으로써 역사적 반성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한 결과이다. 66년 여름의 홍색테러와 66년 가을의 조반과 67년의 치열했던 무투와 이어진 잔인한 진압의 역사를 ‘폭력’이라는 추상화된 코드로 얼버무려 홍위병이라는 상징 속에 뭉뚱그려 버림으로써 비로소 ‘지식인 수난사’이자 ‘위대한 당의 최종적 승리의 역사’로서의 새로운 문혁 서사와 기억이 재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호는 한편으로 중국의 당대 역사를 상징하는 가장 흔한 기호 가운데 하나로 광범위하게 소비되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사회적 발언의(따라서 ‘기억의’) 금기 영역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5. “기억의 투쟁”

확실히 문화대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조반에 대한 기억과 反思가 금지된 것은 鄧小平이 1981년 「關於建國以來黨的若幹歷史問題的決議」(이하 「결의」로 약칭)에서 문화대혁명 시기 毛澤東의 주장을 당의 공식적인 사상인 毛澤東思想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해 버렸던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관치 않다는 말이 문혁 재현서사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조반의 소실” 현상이 「결의」의 관점이 행정적 검열과 규제를 통해 강제적으로 작품 속에 관철된 결과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80년대 초반 중국 사회의 분위기 속에는 「결의」와 상흔, 반사문학이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이 존재했다는 점 역시 간단히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것은 80년대 초반 중국의 시대정신 가운데 하나였다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사회의 모순이 일정한 한계를 넘어선 오늘날에도 중국 사회 대중의 지향과 민심이 문화대혁명의 역사에 대한 80년대식 평가와 여전히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판단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조반의 기억을 억압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정치적 효과는 무엇보다도 당천하에 도전하였던 대중의 존재를 은폐하고 대중적 저항의 정치적 정당성을 말소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의 내적 모순을 계몽 vs 반계몽의 구도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중국 혁명이 수행했던 근본적으로 분리불가능한 이중의 과제인 계몽과 구망을 지식인의 자산(계몽)과 정치인의 자산(구망)으로 배타적으로 분할함으로써 수립된 李澤厚의 ‘계몽과 구망의 이중변주론’ 역시 이러한 시대정신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중국 사회의 기층 대중이 날로 심각해져 가는 관료부패와 사회적 모순에 대해 새로운 형식의 저항을 모색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이 대중적 저항의 정당성을 발굴하기 위해 잊혀진 역사에 대한 새로운 기억과 해석을 시도하는 것 역시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러운 역사의 전개 과정임에 틀림없다. “과거는 언제나 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장이 된다”는 벤야민의 경구와 “권력에 대항하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항하는 기억의 투쟁”27이라 했던 쿤데라의 경구에 진심으로 주목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문화대혁명의 역사에 대한 전면적이고 새로운 反思가 필요한 시점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조반의 내면과 무력 진압의 역사와 기억들을 정확히 복원해 내는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錢理群 선생의 진지한 역사 회고와 비록 타이완에서이지만 曹征路의 『民主課』 출판28이 진심으로 반갑고 陳益南의 『청춘무흔:一個造反派工人的十年文革』29과 陳冀德의 『生逢其時』에 눈길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화대혁명의 핵질이었던 조반의 내면을 정확히 복원해 내지 않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진정한 反思를 수행하고 문화대혁명이 범했던 오류와 한계를 진정으로 극복해 내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확신이 가장 확고하게 공유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보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는 없다. 북경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G2로의 확고한 부상으로 인해 개혁개방 35년의 성공이 어느 때보다도 확실해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중국공산당과 중국 지식인 사회가 봉인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시 펼쳐 놓고 진정으로 문화대혁명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전면적 反思를 시작해야만 할 시점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것 외에는 위기에 직면한 중국의 정치개혁을 위한 다른 기술적 출구는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주

1. 알렉스 캘리니코스 저, 김용학 옮김, 『역사와 행위』(서울:나남, 1997), 25쪽.

2. 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옮김, 『미학 안의 불편함(Malaise Dans L'esthetique)』(서울:인간사랑, 2008) 표지글에서 인용.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다. ……. 문학의 정치는 특정한 집단적 실천형태로서의 정치와 글쓰기 기교로 규정된 실천으로서의 문학, 이 양자 간에 어떤 본질적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옮김, 『문학의 정치』(서울:인간사랑, 2009), 9쪽.

3. 수잔 셔크(Susan L. Shirk), 강준영 외 옮김, 『판도라의 상자:중국(China:Fragile Superpower,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3), pp. 19~20.

4. 문화대혁명의 사회경제적 원인들과 관련된 연구들로는 Roderick MacFarquhar,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1~3 volumes(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4, 1983, 1997); Lynn T. White Ⅲ, Policies of Chaos: The Organizational Causes of Violence in China's Cultural Revolution(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Elizabeth J. Perry and Li Xun, Proletarian Power: Shanghai in the Cultural Revolution(Boulder: Westview, 1997) 등이 참고할 만하다. Roderick MacFarquhar은 문화대혁명을 초래한 당내외 엘리트 집단 사이의 갈등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으며, Lynn T. White Ⅲ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에 발생한 대중적 폭력의 사회조직적 원인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Elizabeth J. Perry는 상하이 노동운동에 대한 폭넓은 조사를 통해 상하이 노동자 조반 조직과 상하이 정치엘리트 사이의 다양한 파벌 관계들에 대한 신뢰할 만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5. 이와 관련하여서는 청화대학교 부속중학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최초의 홍위병 운동이 마오쩌둥의 선동이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었다는 점이 우선 지적되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적어도 66년 여름의 이른바 ‘조기문혁’ 기간에 전개된 이른바 老紅衛兵들의 운동이 그 방향성에 있어서 마오쩌둥의 의도와 날카롭게 배치되는 것이었다는 점은 분명하게 지적될 필요가 있다. 이에 관련하여 이른바 조기 홍위병들의 출현 및 활동 과정에 대해서는 印紅標, 『실종자적족적:文化大革命時期的靑年思潮』(香港:中文大學出版社, 2009) 第1章의 내용을 참고.

6. 홍위병들의 교사, 교장, 교수들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대체로 문화대혁명이 학생운동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66년 여름, 즉 조기 문혁 기간에, 老紅衛兵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모든 구성원이 혁명 간부의 자제들이라 할 수 있는 紅五類로 구성되어 있던 이들 노홍위병은 마오쩌둥이 주장하는 문화대혁명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이해를 갖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당의 공작조가 주도하고 있던 또 다른 투쟁 노선과 방향을 그대로 답습하여 당 내부 인사에 대한 비판에 반대하고, 당 외부의 우파들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노홍위병들이 격렬한 부르주아 비판 활동을 전개하던 당시에 아직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주장과 이론은 이들에게 침투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거행된 마오쩌둥의 홍위병 대접견 이후 陳伯達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문혁소조와의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쳐 점차 逍遙派와 造反派로 분화, 소멸되어 갔다. 이에 관해서는 印紅標, 『실종자적족적:文化大革命時期的靑年思潮』(香港:中文大學出版社, 2009) 제1장과 제2장의 내용을 참고.

7. 대중의 조반 조직이 군부대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하는 현상은 (지역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이른 경우라 하더라도 67년 이후에 나타났으며, 문화대혁명에 대한 군의 개입이 본격화된 67년 여름 이후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물론 67년 이후에도 다양한 홍위병 조직의 활동이 지속되지만, 문화대혁명이 학교 밖으로 확산되어 본격적인 탈권과 무장 투쟁이 시작된 67년 이후 학생들로 이루어진 홍위병 조직은 사회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된 대중 혁명 조직 가운데 다만 일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문화대혁명의 주요한 행동 역량이라고 볼 수 없는 위치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무기고를 탈취한 무장의 주체를 ‘홍위병’이라고 단일하게 지칭하는 것은 사태의 진상을 적절하게 반영해 낸 서술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8. 예를 들어 이른바 문화대혁명 ‘초기 50일’의 홍색테러를 주도함으로써 전국적인 범위에서 무력 충돌을 야기하고 격화시킨 것은 공작조였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보수파들의 무장을 해당 지역 군구가 지원한 사례들 역시 다수 발견된다. 이에 관해서는 蕭喜東, 「一九六六年的五十天:記憶與遺忘的政治」, (http://www.mzdsx.net/Article/Print.asp?ArticleID=276), 그리고 陳益南, 『청춘무흔:一個造反派工人的十年文革』(香港:中文大學出版社, 2006)의 내용이 참고할 만하다.

9. 백승욱,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서울:그린비, 2012), 38쪽.

10. 曹征路(심수大學文學院)·嚴海蓉(香港理工大學應用社會科學系),「(訪談錄)反思不是妖魔化:和曹征路談『民主課』」(심수, 2011年10月), http://bbs.huanqiu.com/thread-1565464-1-1.html

11. 문화대혁명 당시 유명했던 ‘上海寫作組’의 주요 구성원이자 ‘文革第一刊物’로 불리웠던 『朝霞』의 主編이기도 했던 陳冀德의 회고록 『生逢其時』(香港:時代國際出版有限公司, 2008)는 문화대혁명 당시 陳冀德와 戴厚英 등 유명한 조반파 지식인들의 내면과 경험, 문혁 격랑 속에서의 부침과 지식인 내부의 갈등과 투쟁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다. 특히 陳冀德의 벗이기도 했던 戴厚英에 관한 기록은 이제까지 戴厚英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을 조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2. 물론 필자가 여기에서 “수많은 재현 서사작품들 속에서도 대체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결코 전체 작품에 대한 통계적 분석 결과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대혁명의 종결과 함께 전중국의 수많은 매체와 지면들을 통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져 나온 그 수많은 작품들 모두 발굴하여 검토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설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작품의 수준과 열독률, 영향력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수많은 작품들을 모두 등가적인 ‘하나’의 표본으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통계적 분석 방법으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13. ‘Master Plot’이라는 개념은 Katerina Clark이 그의 저서 The Soviet Novel: History as Ritual(Chicago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클락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들을 분석하면서 주요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의 플롯을 관통하고 있는 Master Plot의 존재를 분석해 내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다양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에서 개별 작품들 속의 특정 지역이나 특정 테마에 관련된 언급들을 모두 빼내면 고도로 일반화된 精髓를 뽑아낼 수 있는데, 이 추상적인 결정이 바로 매스터 플롯에 의해 형성된 요소가 된다. 매스터 플롯은 이 경전적 소설들 속에서, 플롯 전개의 결정적 계기들마다 소설의 전개 방향을 조절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14. 戴厚英은 문화대혁명 당시 상하이 조반파의 핵심 조직 가운데 하나였던 上海寫作組의 일원이었다. 上海寫作組는 1964년부터 반수정주의 사상 공작을 위해 당시 상하이시위원회 서기처 서기였던 石西民의 주도 아래 葉以群을 組長,徐景賢을 副組長으로 하여 구성되었으며, 사상적으로 투철함을 인정받은 젊은 문인들을 모아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戴厚英을 비롯하여 高玉蓉, 吳聖昔, 吳立昌, 高彰彩, 陳冀德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혁 당시 이들은 이 사작조 및 그 후속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장춘교, 요문원 등의 핵심 조반파들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陳冀德, 『生逢其時』(香港:時代國際出版有限公司, 2008)의 1~3장의 내용을 참고.

15. 이 사건들을 겪는 과정에서 일어난 戴厚英의 내면의 변화는 戴厚英의 유고 서신인 『연인아 연인아』(戴厚英, 김택규 옮김, 서울:휴머니스트, 2003)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6. 이 논의 주제와 관련하여 성근제는 「문혁과 계몽」(『중국어문학논집』 53호, 2008. 12)에서 ‘조반자의 소실’이라는 개념을 제출한 있다. ‘조반자의 소실’이라는 개념은 「문혁과 계몽」에서 주로 조반 인물의 재현 양상과 관련된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제출된 것이었는데, ‘조반의 소실’은 ‘조반자의 소실’이라는 개념을 인물과 ‘사건’을 포괄할 수 있는 범주로 조금 더 확장한 것이다.

17. 老鬼, 『血色黃昏』(臺北:李敖出版社, 1989)

18. 『血色黃昏』과는 배경과 스토리가 전혀 다르지만, 아마도 『血色黃昏』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2004년 등문기 감독, 劉燁、孫儷 주연의 TV 드라마 『血色浪漫』 역시 서사의 시간적 출발점은 동일하다.

19. 션판(沈汎), 이상원 옮김, 『홍위병:잘못 태어난 마오쩌둥의 아이들』(서울:황소자리, 2004)

20. 각 장은 불, 흙, 쇠, 나무, 물의 오행(五行)을 따라 제목이 붙여져 있다.

21. 위화, 최용만 옮김, 『형제』(서울:휴머니스트, 2007) 제1권, 제202쪽.

22. 같은 책, 124~126쪽과 198~202쪽.

23. 이와 관련하여서는 장영석, 「노동자의 문화대혁명 참여와 노동관리」, 『중국노동자의 기억의 정치』(백승욱 편, 서울:폴리테이아, 2007)를 참고.

24. 『사람아 아 사람아!』의 문화대혁명 재현 양상과 관련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성근제, 「문혁과 계몽」(『중국어문학논집』 53호, 2008. 12)를 참고.

25. 이와 관련된 내용은 안치영, 「문화대혁명 연구의 동향과 쟁점」,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백승욱 편, 서울:폴리테이아, 2007), 68~70쪽의 내용을 참고.

26. 루쉰은 『아Q정전』 8장에서 아Q가 처한 상황을 “不准革命”이라 요약한 바 있다. 훗날 마오쩌둥은 다시 「10대관계론」 9절에서 루쉰을 인용하면서 인민의 혁명을 허용하지 않는 “不准革命”의 상황을 비판한 바 있다.

27. M.Kundera, The Book of Laughter and Forgetting (Harmondsworth, Middlesex : Penguin Books, 1983), p.3.

28. 曹征路, 『民主課』(臺北:대만사회연구잡지사, 2013)

29. 국내에 번역본이 소개되어 있다. 번역본의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천이난 지음, 장윤미 옮김, 『문화대혁명:또 다른 기억』(서울:그린비, 2008)

*참고문헌

<자료집 및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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譚放 · 趙無眠 編,『文革大字報精選』(New York: 明鏡出版社, 1996)
宋永毅 · 孫大進 著, 『문화대혁명화타적이단사조』(香港:田園書屋, 1997)
Elizabeth J. Perry and Li Xun, Proletarian Power: Shanghai in the Cultural Revolution(Boulder: Westview, 1997)
Katerina Clark, The Soviet Novel: History as Ritual (Chicago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Lincoln Cushing & Ann Tompkins ed, Chinese Posters-Art from the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San Francisco:Chronical Book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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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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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 抒, 「로사위하자침태평호」, http://www.aisixiang.com/data/151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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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이 글은 2013년 10월 18일 타이완사범대학중문과 주최로 거행된 「2013제삼계서사문학여문화국제학술연토회」에서 「文革如何被再現」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中語中文學 第 57 輯, 2014. 4, 韓國中語中文學會에 게재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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