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리본 단 월남 학살 피해자, 군홧발의 파월 노인

베트남 학살 피해자 대구 방문...고엽제 전우회 항의

#응우옌떤런(당시 15세): 새벽 4시, 폭격이 시작됐다. 방공호로 황망히 내려갔다. 7시부터 총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졌다. 사람들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기도했다. 16시, 호랑이 마크를 단 군인들이 나오라고 손짓했다. 총부리를 어머니에게 들이밀었다. 노인과 아이들도 끄집어냈다. 둥글게 모여 앉게 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한국군이 소리쳤다. 수류탄이 날아왔다. 팔다리가 잘리고 창자가, 뇌수가 흘러나왔다. 내 뒤꿈치에 수류탄이 떨어졌다. 기절했다 깨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여동생을 묻었다. 어머니도 묻었다. 어머니의 기도는 닿지 않았다.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 보니 이 세상에 나 혼자였다.

#응우옌티탄(당시 8세): 오빠가 먼저 나갔다. 총에 맞았다. 다섯 살의 동생은 물가까진 뛰었다. 이모는 총에 맞지는 않았다.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질렀다. 이모가 놀라 일어섰다. 칼에 난자당했다. 나는 부엌까지 뛰었다. 배에 총을 맞았는데 아프진 않았다. 동생은 숨을 쉴 때마다 피를 토했다. 안을 수가 없었다. 살리려면 엄마를 찾아야 했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려 고개를 숙이니 창자가 흘러나왔다. 집어넣고 엄마를 다시 찾았다. 다시 찾지 못했다.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을 맞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9일 대구를 방문했다. 응우옌티탄(NGUYEN THI THANH, 57) 씨와 응우옌떤런(NGUYEN TAN LAN, 64)씨다.

  왼쪽부터 응우옌티탄, 후잉응옥번, 응우옌떤런 씨


응우옌티탄 씨는 퐁니퐁넛 학살의 생존자다.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는 마을 주민 70여 명을 학살했다. 응우옌티탄 씨는 평화박물관(대표 이해동)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할 때만 해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한국에 오면 참전 군인들이 와서 손을 잡아줄 줄 알았다.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참전 군인들은 다시 군복과 군화를 신고 그들을 맞이했다.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 마음속에 오랫동안 묻어뒀던 아픔이 다시 떠올랐다.

응우옌떤런 씨는 따이빈사 안빈마을 학살 생존자다. 1966년 해병대 맹호부대가 지나간 3일 동안 인근 15개 마을에서 민간인 1,004명이 사망했다.

“내 심장으로 말씀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몸으로 겪은 사실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들려 드리기 위한 것이지, 원한이나 증오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날 저녁 열린 간담회에서 그가 한 말이다. 응우옌떤런 씨는 파월 군인들을 용서했다. 그와 응우옌티탄 씨는 가슴에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았다.

이들과 함께 간담회에 참여한 후인응옥번(HUYNH NGOC VAN) 호치민시전쟁증적박물관장은 “베트남 전쟁으로 3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중 2백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2백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고엽제에 피해를 받았다. 30만 명 이상의 실종자가 있다. 지금도 당시 투하됐던 불발탄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다”며 “전쟁을 참상을 알려서 교훈을 얻자는 거다. 증오를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부당한 전쟁 자체가 범죄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고엽제 전우회 100여 명 나와 “강의 주제 변경”요구
물리적 충돌은 없어


한편, 고엽제전우회 대구지부와 파월 노인 100여 명은 간담회가 열리기 전부터 경북대학교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강의 주제 변경”과 “취재 중단”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항의했다.



노인들은 어떤 심정으로 시위에 나와 열을 올리는 것일까. 이 자리에 나온 박 모(71)씨는 맹호부대 출신이다. 박 씨는 “23살에 강제로 파병 갔다. 나도 가기 싫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아야했다”며 “파병으로 말초신경계에 질환이 생겼다. 월남전 참전으로 대한민국이 살아났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못 먹고 살았다. 한국에서 대접을 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대접을 받으려고 이러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A(70) 씨는 “6.25는 전선이 있어서 충돌하고 싸우면 그만이었지만, 베트남전은 전선이 없었다. 내가 안 죽으려면 총을 쏴야 했다. 베트남 사람을 보면 나도 마음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전부 베트공이다”라며 “고엽제를 뿌린 것은 미국이지만 이해한다. 사람을 죽지 않게 하려고 제초용으로 뿌렸다. 우리가 양민 학살했다고 해서 여기에 몰려왔다. 당시 여덟 살짜리(응우옌티탄 씨를 지칭)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주장했다.

교정에 군복차림의 노인들이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지자, 경북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채장수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들도 피해자의 면모가 있지만, 미국과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이는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엽제 전우회는 7시 30분께 자진 해산했다.
덧붙이는 말

박중엽 기자는 뉴스민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뉴스민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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