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분쟁사를 통해 본 중소 논쟁

[주례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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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의식주를 얻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신의 왕국은 스스로 열릴 것이다. - 헤겔

마르크스에 의해 훈련을 받은 역사가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계급투쟁은 조야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싸움이다.
이러한 싸움 없이는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계급투쟁 속에서 승리자의 손에 굴러 떨어진 전리품의 이미지와는 다른 양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신뢰, 용기, 유우머, 기지, 불굴성으로서 이러한 투쟁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또 지나가 버린 머나먼 과거의 시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덕목들은, 지배자에게 굴러 떨어진 일체의 승리에 언제나 새로이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
마치 꽃들이 해를 향하듯, 과거 또한 알 수 없는 종류의 신비스러운 향일성(向日性)에 힘입어, 바야흐로 역사의 하늘에 떠오르는 바로 그 해를 향하려고 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모름지기 모든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이러한 사소한 변화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 테제 4 – (강조 – 발제자)


사회주의 붕괴에 있어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드는 것이 ‘중소논쟁’이다. ‘중소논쟁’에서 시작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은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중소논쟁’은 중국과 소련의 이념 논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것은 이론 투쟁으로만 볼 수 없다. 중소 논쟁은 중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중소분쟁’을 밑바닥에 깔고 진행된 논쟁이기 때문이다.

중소 논쟁은 중소 분쟁의 표면적 형태일 뿐이다. 중소논쟁 당시의 중 소 양측의 문헌들을 보면서 어느 쪽 이론이 맞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중소 분쟁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중국과 소련 양쪽 다 논쟁에서 주장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과 소련이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은 달랐다. 세계 혁명 전략에 있어서 소련은 유럽 -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국가와 좌파정당들이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서유럽 - 을 중심으로 사고했고 중국은 반제 반봉건 투쟁이 여전히 진행되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사고하였다. 동남아시아는 중국의 앞마당이라는 것이 중국의 기본 생각으로 (국민당 계열, 공산당 계열로 나누어지던) 화교들과의 관계 통해서 실제로 간접적 간섭도 가능했음. 베트남은 다종족 국가다. 베트남의 보트 피플은 대부분 중국 화교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에 의한 대량 학살이 일어날 때 ‘좌파 = 중국인 화교’였다.
(*참조. 정호영, 참세상 2014. 7. 16 “위도도, 지배계급엔 차선, 민중에겐 차악”인도네시아 대선, 조코 위도도는 민중의 희망인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79411)

소련은 유럽을 중심으로 사고하면서 평화공존을 주장했지만 식민지들에 대한 지원은 중국보다는 소련이 많았다.

중소 분쟁으로 벌어진 틈 사이에서 비동맹 운동은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족지도자들이 어부지리를 얻어가는 방향으로 퇴색되어 갔다.

스탈린 사후 30년 넘게 지속된 중소 분쟁은 중소 논쟁이라는 이데올로기 대립과 국익을 둘러싼 대립은 분리될 수 없다. 중소 논쟁은 각국 운동사에서 반복변형 생산되면서 1991년 소련해체까지 갔고 소련 해체 이후에도 중소 논쟁의 핵심논의들 중 하나인 토착자본가와의 관계 설정 논쟁은 계속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비판적 지지론,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민주대연합)

이번 주례 토론회에서는 이에 대한 검토를 위한 가장 기초작업으로서 연대별로 중소분쟁사를 추적하여 중소논쟁이 분쟁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토론할 것이다.

중소분쟁사 연구에서 대만 문제가 중소 분쟁이 실제로 시작하게 되는 계기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가설로서 제안하니 이에 대한 다른 분들의 적극적인 토론을 바란다.

1. 중소 논쟁 주요 대립 요약

스탈린주의를 버린 소련 vs 스탈린주의를 모택동 사상으로 고수하는 중국

<핵 시대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
소련 - 핵전쟁은 세계를 파멸시킨다. 국제 정세가 변하여 전쟁은 더 이상 불가피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대국 간의 군축과 평화 투쟁으로 전쟁을 피하는 것은 가능해졌다.
중국 - 역사를 결정하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인민이다. 전쟁을 방어하는 것은 인민의 반 제국주의 투쟁이고, 군축으로 평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평화 공존에 대하여> - 핵무기 시대에 평화와 전쟁에 대한 사고 – 미.소에 의한 공동관리 vs 제국주의와의 전쟁(민족해방)

소련 - 현대는 체제 간에 평화 공존, 평화적 경쟁이냐, 파멸적 전쟁이냐, 둘 중에 하나이다.
중 국 - 체제 간 평화 공존은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억압국과 피억압국 및 계급 관계로까지 범위를 넓혀야 한다.

<혁명의 평화적 이행에 대하여> - 사회주의로 이행 - 평화적 이행 vs 민족해방 + 계급투쟁
소련 - 사회주의가 성장하여 평화 공존이 유지되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인 이행 가능성은 많다.
중국 - 혁명의 이행은 그 나라의 국가 사정에 따라 다르다. 평화 이행이 전략 원칙과 통합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모순은 무엇인가>
소련 - 두 개 진영의 대립이 주된 모순이다.
중국 – 체제 . 계급투쟁,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제국주의 상호간이라는 4 개의 모순이 있고,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주된 모순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에 대하여>
무엇이 사회주의인가 - 전 인민의 국가 vs 사회주의 내 계급투쟁
소련 - 소련에서는 59년에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전 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계급투쟁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모택동은 <모험주의자>, <교조주의자>
중국 - 공산주의에 도달하는 전 기간을 통해서, 계급 및 계급투쟁은 존재한다. 흐루시초프 지도부는 소련의 부르주와 특권 계층의 대표이다. 소련 지도부는 <수정주의 집단>, <부르주아 특권층>이다. 문화대혁명은 소련에 대한 반대운동이기도 했다.

<국익을 둘러싼 대립>
1) 영토, 국경, 민족 대립
2) 사회주의 국가들 의 관계(1968년 체코 이후)

2. 처음에는 이념이 국익을 극복할 상황이 아니었고 이후에는 국익 위주로 흘러갔다

러시아 10월 혁명은 혁명의 시작이었지 완성이 아니었다. 10월 혁명 이후 5년간의 내전을 통해 소련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내전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은 시작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외치기에는 자신을 돌보기에도 버거운 상태로 사회주의 건설은 시작되었다.

1920년대 소련은 지역 공산당 형성 보다는 민족주의 부르주아지에 의해 시작된 반식민 운동과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국민당이 일본을 막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갓 생긴 공산당을 지원하는 것보다 나았다.)

1930년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서 제국주의 세력과 유대할 필요 때문에 반식민지 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꺼려했다.

소련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독소 간 우호협정 기간 동안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고 아프리카 반식민운동을 지원하였으나 독일의 침략을 받고 서방 제국주의국가들과 연대할 필요성이 생기자 반제국주의적인 반식민운동을 지원하기를 거부했다.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국가들은 민족주의에 매몰되었다. 1977년 아프리카의 사회주의 국가인 이디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전쟁인 오가덴 전쟁.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시아드 바레 정권에게는 세계 사회주의 이념 보다는 소말리아 족의 통합과 실지 회복이 중요했다.

중소 분쟁이 발생하자 이해관계에 따라서 중국과 소련 사이를 오가면서 중소 분쟁을 국제적 수준으로 확대해 나갔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 시기 중국의 군사지원을 받았으나 중월전쟁을 치름) 중국은 중미 수교 이후 친소 국가에 대해서는 미국과 같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함(중동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였던 남예멘을 지지하지 않고 북예멘 지지) 인도는 전쟁을 치른 중국은 적대국가였지만 친소로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비동맹을 명목으로 소련, 미국 양측으로 원조와 지원을 받음.

나치가 소련에 패배하여, 2차 대전이 끝나자 서유럽에서는 전쟁 시기 지하 운동,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던 각국 공산당은 ‘스탈린’을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내세우면서 각국의 제1야당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러나 각국 공산당은 후르시초프 노선에 따라 의회 정치에 매몰되자 (스탈린이 부재한 상태에서) ‘스탈린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계속 위축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리스 공산당 정도가 현재 전투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

‘스탈린주의’라는 개념은 쓰는 사람들마다 너무나 작의적으로 쓰인다. 나치와 볼세비키를 동일하게 보는 입장을 제외하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맑스레닌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스탈린주의가 있다. 나치를 물리치고 2차 대전을 종료시킨 스탈린 생전의 시기의 스탈린주의이다. 2차 대전 이후 서구에서 좌파 정당들이 제1 야당이 될 수 있었던 근거였다. 2) 후르시초프가 제기한 노선을 따라서 투쟁을 제도권 안에서의 한계에 머물게 했던 좌파정당들을 비판하는 용어로서의 사용하는 스탈린주의이다. 서구 좌파정당들이 1)에서 2)로 변화해왔기에 1)의 성과도 부정해버리는데 쓰인다. 3) 모택동이 평가했듯이 공7 과3으로 논의되는 스탈린주의이다. 이 3가지는 구분되지 않고 자신이 보는 입장에 의해서 나머지는 무시해버린다. 중소논쟁의 이면에는 스탈린주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중국, 소련, 그리고 논쟁에 참가한 모든 이들의 각기 다른 입장이 있다.

3. 연표

가. 중소논쟁의 씨앗들

1917 11월 볼세비키 정권 1차 대전 휴전 협정 요구/러시안 내전
1918 2월. 3 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폴란드, 발트해, 핀란드 잃음
11월 1차 대전 종결
1919 3월 코민테른 1차 대회 레닌 [식민지, 민족 문제에 대한 테제]
1919 7 월 15일 카라칸 선언(Karakhan Manifesto) : 제정 러시아 시대에 중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폐지하고 중국에서 확보하였던 모든 권익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1920 7월 – 8월 코민테른 2차 대회 시기 "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21개 조항 - 17조.. “코민테른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각 당은 모두” “OOO(국가명) 공산당”이라고 명명. “이름의 문제는” “단순히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각 국의 공산당들이 스스로를 “전 세계의 유일한 공산당”의 “일부분”임을 인정한다는 “본질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 문제”
1921 3월 독일 노동자 봉기 실패
6~7월 코민테른 3차 대회 – 직접적 정권탈취보다는 일상적 투쟁을 통한 대중획득을 위해 ‘대중 속으로’라는 표어로 상징되는 ‘통일전선전술’을 채택
7월 중국 공산당 창당
1922 러시아 내전 종결
11~12월 코민테른 4차 대회 파시즘에 맞서는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전술에 의한 노동자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제시했다
1923 1월 손문 - 요페 공동선언 ->이 해에 장개석은 소련으로 군사훈련을 받으러 감 10월 코민테른 5차 대회. 독일의 작센주와 튀링겐주에서 수립되었던 사민당과 공산당의 연립노동자 정권이 실패로 끝난 경험을 통해 통일전선에서도 공산당은 혁명성을 지키고 지도자간의 위로부터의 통일뿐만 아니라 노동자간의 아래로부터의 통일도 병행할 것을 강조했다.
1924 1월 1차 국공 합작 - 공산당원은 국민당에 가입 시작
5 월 30일 중소협정
1927 상하이 쿠데타 - 국민당의 공산당 학살 (1933년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1928 7-9월 코민테른 6차 대회 세계자본주의체제의 4대 모순으로서 1)제국주의 국가에서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간의 모순 2) 제국주의와 식민지간의 모순, 3) 제국주의국가간의 모순 4) 제국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간의 모순. 식민지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노농동맹하에 토착 부르주아지 견인
1935 7월-8월 코민테른 7차 대회 [반파쇼투쟁에 관한 결의] - 계급투쟁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1936 10월 중국 대장정 성공 섬서성 도착
12월 시안 사건-> 2차 국공합작의 시작
1939 3월 2차 대전 반발 - 핀란드의 독일군 진주
8월 23일 독소불가침 조약
1940년 모택동 신민주의론 – 민족해방혁명론의 중국적 적용
1941 6월 독일 소련 침입
1942 중국 정풍운동 3년간 (친소 계열을 당 지도부에서 배제)
5월 연안 문예 강화
1943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 항복. 2차 대전 시 16개국 연합군의 사망자 총수가 1천7백만 명인데 이 중 소련의 전사자 수가 1천4백만 명이었다. 소련에서 군인 외 죽은 민간인들까지 계산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당시 조선의 인구는 2천6백만 명이었다)
6월 코민테른의 해체
1945 9월 2차 대전 종료
1946 12월 - 1954. 8월 1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독립전쟁)
1947 코민포름 성립
1948 6월 코민포름 유고 제명 - 미국 공개적 공격, 그리스 내전 지원 등
인도 공산당 BTR 노선 - 러시아 혁명 방식을 지지하면서 철도 파업 시도 실패
1949 쥬코프 [2차대전 이후의 식민지, 민족문제] - 토착 부르주아지 배격. 인도 네루는 미영에 봉사하는 교활한 노예, 인도의 군주와 토지소유자의 동맹, 진보적 세력에 대한 피 묻은 파괴자로 비판함
1949 10월 1일 - 중국 건국일
1950 중국과 러시아의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 - 소련 원조 시작
인도 공산당 안드라 노선 - 중국 혁명 방식을 지지하면서 무장봉기
1950-1951 중국 티벳 합병
1951 인도 공산당의 극좌노선 두 번으로 89,000명의 당원이 10,000명으로 줄어들었음. 억압이
심하던 식민지 시절에도 당원이 늘은 것 감안하면 대중이 지지하지 않았던 노선이었음.
스탈린의 권고는 소련 방식, 중국 방식 벗어나 인도의 길 개척하라. 인도 공산당은 의회 정당으로 변신 시작
1953 3월 스탈린 사망

나. 중소분쟁의 본격화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중소 분쟁은 1958년 중국의 대만 금문도, 마조도 포격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중소 분쟁은 중소 논쟁 문헌들을 펴서 누가 옳니 안 옳니 하는 분석으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1980년 브레즈네프가 중국과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한 것은 ‘2개의 중국론’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중국에게는 대만 문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이다.

1954 6월 주은래 수상과 인도의 네루 수상이 영토와 주권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평등 호혜, 그리고 평화 공존을 양국 간의 원칙으로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른바 평화 5 원칙 : 비동맹 운동.
1955 4월 인도네시아 반둥 아프리카-아시아 회의
1955 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전) - 1973년 파리평화협정
1956 4월 코민포름 해산
4월 모택동 10대 관계에 대하여 - 스탈린 공과 사 7할. 3할
(1)공업과 농업 사이 및 중공업과 경공업 사이의 관계 (2)해안 지역의 산업과 내륙 지방의 산업 사이의 관계 (3)경제 건설과 국토 방위 사이의 관계 (4)국가, 생산 단위들 및 개인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 (5)중앙과 지방과의 관계 (6)한족의 민족주의와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와의 관계 (7)당과 비(비)당과의 관계 (8)혁명가와 반혁명가 사이의 관계 (9)옳음과 그름과의 관계 (10)중국과 외국과의 관계
10 월 헝가리 반소 폭동
20차 CPSU 당대회 - 2가지 민족 해방의 길
1) 인민민주주의 국가- 노동자 계급 지도하에서 정치 .경제적 독립을 한꺼번에 쟁취
2) 민족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국가-정치적 독립만
흐루시초프의 평화정책 =>평화 공존, 평화경쟁, 평화 이행
1957 11월 모스크바 선언(The Moscow Declaration) : 12개국 공산당 회의 - 사회주의로의 평화이행(미 제국주의 핵 사용하면 인류가 멸망)
인도 케랄라에서 선거를 통한 공산당 수립후 강제 해산됨
1958 중국 5번째 핵개발 성공
8월 흐루시초프와 마리노꼬프스끼 국방상이 북경으로 가서 중국에게 공동방위체제를 제안. 중국이 연합 함대를 만들고, 소련이 도와주는 것으로 하여 8월 3일에 양국이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8월 25일 타이완의 위기가 고조되자 중국군은 소련과 사전 합의도 없이 25일 대만이 방비하고 있던 복건도 근처의 금문도(金門島)와 마조도(馬祖島)를 포격하고, 미국은 제7함대를 출동시킴. 흐루시초프는 크게 당황해서 북경으로 달려가, 소련과 사전 협의도 없이 발포한 일에 대해서 우선 중국을 문책했다. 중국을 불신하고, 중국 해안에 중소 연합 함대를 만들고, 여순, 대련을 소련의 기지로 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중소 분쟁의 실질적인 시작)
1959 1월 25일 소련공산당의 제 21차 전당대회 결의문에서 “세계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이전, 세계의 일부에서 자본주의가 계속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도, 인류사회에서 세계전쟁을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라는 흐루시초프의 주장을 중국은 반박하였다.
6월 20일 소련이 ‘국방 신기술에 대한 협정’을 돌연히 파기하고, ‘중국에 원폭의 모형과 기술 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7월 16일 소련정부는 중국에서 소련 기술고문단을 철수할 것을 통보하였다
1960 11월 (중소 타협 하에) 모스크바 성명(Moscow statement) -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 18회 공산주의자 및 노동당대회에서 중국 덩샤오핑 총서기가 소련의 평화공존을 비난하였다. 중국과 베트남이 협력하여 소련지도자들의 양보를 얻어내고 소련으로부터 제3세계 혁명투쟁 지원을 이끌어냈다. 회의 마지막에 ‘모스크바성명’을 발표하여 평화유지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고 피압박인민들의 식민주의 혁명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혁명 역량을 강화하고 각국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군사적 방법과 비군사적 방법을 적절히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12월 20일 남 베트남해방민족전선 결성
-소련에서는 평화공존 모색하고 있었기에 전쟁 원하지 않았고 중국은 “베트남의 분할은 단기간 내에 해결되기보다는 10년 혹은 100년의 시간까지도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문제” 라는 견해를 밝혔는데 베트남이 완충지대가 되기를 원했던 것
1961 1월 흐루시초프는 연설 중 세계대전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보편적 민족해방전쟁은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9월 1일, 베오그라드에서 제1회 비동맹 제국 수뇌회의 개최
10월 제22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중소간의 갈등 확대 : 주은래는 유고슬라비아를 비난하고 소련은 중국에 합류한 알바니아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베트남은 중소 갈등에 대해서 입장 표명하지 않음
1962 10월 중국-인도 전쟁 한 달 만에 정전 선언
(인도-미얀마-티벳-부탄 국경이 수렴하는 동부지역에서 영토이득을 포기했지만 잠무-카슈미르의 서부 지역에서는 점령한 영토를 유지)
11 월 미국의 대쿠바 해상 봉쇄의 공식적인 종료
12 월 중국 몽고와의 국경 확정
1963-1964 주은래 등 아프리카 10개국 방문
1963 4월 레두안이 무력 통한 평화 언급, 류사오치 베트남 방문
6월 14일 중국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에 대한 제안’이라는 반론을 공표하며 소련과의 전면적인 이념투쟁을 전개
8월 북베트남 “소련 이외의 사회주의 국가도 자위의 수단들은 보유해야만 한다”는 것을 근거로 미국과 소련의 부분적 핵실험 규제협정 조인을 반대하였다.
9월 중국은 우름치(Ouroumtchi)와 쿨자(Kouldja)에 설치된 소련영사관을 폐쇄시키기까지 이르렀다
9월 16일 말레이시아연방 성립
인민일보 사설 – 인도 공산당 당게가 인도를 인민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것 비판
1963.7월 ~ 64.7월 중소논쟁 - <홍기>에 레닌주의의 깃발을 들어라- 인류 운명 결정하는 것은 기술(핵)이 아니라 대중이다. 외 중국 측 9평 논문
1964 1월 수카르노 유엔 탈퇴. 중국은 유엔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조직으로서 CONEFO(Conference of New Emerging Forces)를 염두에 두고 베트남의 참가를 원하였으나 베트남은 이를 거부하였다.(중국 신중간지대론)
8월 2일 베트남 통킹만 사건
1965 이상숙. 2008, 중소분쟁 시기 북한과 북베트남의 자주 외교 비교, 통일정책연구 제17권 2호, pp.53-82
2월 소련 코시긴 외상 하노이 방문 원조 약속
4월 3일 소련은 중국 정부에 보낸 비밀서한에서 베트남 원조에 관한 중국, 소련, 북베트남의 3자회담을 제안하였다.
4월8일 중국은 이를 거절하였고 베트남 공산당과의 단독 회담을 가지고 중국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한 협정을 맺었다. 북베트남 지도자들은 중국의 파병과는 별개로 소련의 항공기를 비롯한 안보물자의 지원과 소련군의 파병 역시 필요했다. 이 때문에 2주 후 4천명의 소련군이 중국을 통과할 것을 중국측에 요청함과 동시에 소련 공군기의 중국 남서부 비행장 사용 및 중국 영공 통과권 등을 요구하였다.
6월 1일 베트남 리칭 부총리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대베트남 경제기술원조협정’을 체결했다.
6월 9일 중국은 베트남에 부대를 파병했다. 참전 부대의 규모는 총 32만 여명에 이름
(평균 매년 13만에서 14만여 명, 1967년에는 최고 17만 명에 달했다. 중국은 1965년에서 1973년까지 2만 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30만 병력의 군대로써 북베트남을 원조했다. 대규모의 물자지원도 병행하였는데, 전투기 170대, 군함 140척, 탱크 500대, 기차 1만 6천량, 화포 3만 7천문, 각종 총기 216점, 각종 포탄총 12억 8천만 발 등이다. 중국의 물자지원 총가치는 당시 국제시장 가격으로 계산하면, 2백억 미국 달러 정도이고, 그 중 군사물자지원이 42억 위안,2백만 명에 대한 장비였다.)
11월 11일 중국은 소련의 제의를 반박하였다.
(소련은 SAM-2 미사일, 항공기 감시체제, MiG-21 전투기 등의 고가 무기 제공했다.)

*9월 임표 – 인민전쟁의 승리여 영원하라(Lin piao - Long Live the Victory of People’s War!)

1966 5월 25일 문화대혁명의 시작 : 베이징 대학의 젊은 철학과 여성 당서기 네위안쯔는 대학당국과 다른 교수들이 우파, 또는 반당(反黨)분자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며칠 후 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적으로 회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것을 "중국의 첫 번째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라고 불렀다. (~1976년 12월)

1967 3월 EMS 남부디리파드와 인도공산당 맑스주의(CPIM) 케랄라 선거에서 집권.
5월 인도 낙살라이트 봉기
(비슷한 시기 공산당 정권의 제도권의 성공적인 진입과 탈당파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은 제도권 공산당과 비제도권 공산세력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1968 5월 프랑스 학생 폭동. 인민전선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프랑스 공산당 vs. 마오 어록 든 학생들. 완전고용에 가까웠던 당시의 유럽 청년들로서는 완전고용사회인 소련이 부러울 것 없었고 친소 제도권 공산당은 지루한 속물이었다. 중국의 홍위병들에게 더 연대감을 느끼었다. 이후 68세대의 분노에 가득차 있던 진보적 정신들은 자포자기의 퇴보 과정으로 간다. (예. 베르톨리치 감독의 <1900년(1976년)> -> <몽상가들(2003년)> )
8월 20일 체코에 소련이군 진주.
주은래 “소련 변절자들의 집단은 사회제국주의, 사회파시즘과 동류이다”
11월 브레즈네프 독트린 :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공산주의 국가를 자본주의로 바꾸려고 한다면, 그 해당 국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진영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는 내용이다. (브레즈네프의 제한주권론)
1968~1972 중국 국방비는 전체에서 20% 차지. 소련 국경 쪽에 가장 많이 배치
1969 3월 중소국경 분쟁. 우수리 강의 전바오 섬(珍寶島, 러시아 명: 다만스키 섬)에서 군사 충돌
4월 9차 당 대회에서 임표 국방상(당 부주석)은 모택동의 유일한 후계자
(문화대혁명에서 인민해방군이 정치에 개입. 소련을 의식)
6월 닉슨 독트린 닉슨 독트린, 위키백과.

1)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2)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 여러 나라들)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3)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각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4) 아시아의 각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여러 나라 상호 원조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5) 아시아의 각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9월 호치민 사망
1970 중국, 파키스탄을 통한 대미 교섭
1971 4월 중국, 미국의 핑퐁외교
9월 임표의 모택동 암살 시도, 소련 망명 중 비행기 사고 사망
10월 중국 UN에 상임이사국 됨 - 중화민국이 보유하던 상임이사국 의석 승계
1972 2월 닉슨 방중 – 중국 측 입장 “ 닉슨 초청은 소련 수정주의. 사회제국주의를 고립시키는 중요한 전략 배치 ... 소련 수정주의는 항상 중국에 대한 핵 공격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만약 미국 제국주의가 소련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면 그들은 한층 흥분하게 될 것"

2월 27일 미국, 중국 상하이 선언 - 미국은 중국을 정식 승인, 중국은 미국을 반소동맹 대상으로 (와카마쓰 고지 감독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 - 아사마 신장 사건. 무장한 채 1명의 인질을 잡고 경찰과 열흘 동안 대치한 사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대치가 끝나자 방송에서 중미 수교 뉴스가 나온다.)

이집트가 소련 군대 내쫓아내고 미국 진영에 합류하자 소련은 아프리카 뿔 지역에 공을
들이기 시작 - 수에즈 운하를 통해 지중해로 연결되는 홍해는 서구 국가들이 사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이 이동하는 중요한 통로다. 예멘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광대한 국경을 공 유하며, 아덴 만 입구로 삐죽이 튀어나온 소말리아의 전략적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1973 솔제니친의 발언 – 제1차 대전에서 러시아는 750만 명을 잃고, 제2차 대전에서는 2천만 명을 잃었지만, 중국과의 전쟁은 6천만명 이상의 희생을 치를 것이다 (중소간의 긴장 중소 분쟁이 전쟁으로 이어질 지 모른다는 공포를 보여주는 발언)
1974 5월 유엔자원특별총회(資源特別總會) – 등소평 제 3세계 개념 – 전후의 함께 존재했던 사회주의 진영은 사회제국주의 소련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여, 세계를 동서가 아닌 남과 북의 축으로 나눈 ‘3 세계론’을 개진"
1975 8월 헬싱키 협정 -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 미국·캐나다가 이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의 취지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형성된 유럽의 국경선을 상호 인정하며, 협정에 조인한 35개국의 나라들이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경제적·과학적·인류공동체적 영역 등에서 서로 협력할 것을 촉구
1976 1월 주은래 사망
9월 마오 사망
10월 문화대혁명 종결
1977 6월 오가덴 전쟁. 소말리아가 이디오피아 공격(양 국가 모두 소련 주둔하고 있었음). 미국은 소말리아 지원, 소련은 이디오피아 지원
12월 당의 11기 3중전회中 화국봉 당 주석, 등소평 부주석. 진운 부주석,호요방 중앙 비서장의 신체제 “모든 활동의 중점을 4 가지 근대화로 이동할 것"

인도 웨스트 벵갈에서 공산당 정권 당선, 이후 30여년간 선거를 통한 장기집권
1978 오가덴 전쟁 종료 – 팍스 소비에티카 붕괴
1979 1월 1일 중미 국교 수교
2월 중월전쟁 (3차 인도 차이나 전쟁, 베트남은 중미 수교를 비판, 1989년 베트남 캄보디아 철군_ 평화협정)
4월 중소동맹조약 연장 중국 측이 단념 - 베트남 측 철군 요청
9월 소련 아프가니스탄 카불 진입 -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소련 남부의 이슬람 지역에 옮겨붙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 미국은 소련의 힘을 약화시키는 계기를 만들기 원했음.
1981 중국공산당 제1 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결의문인 [건국 이래 黨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당 중앙의 결의] - 중국에서의 모택동 사상의 봉인.

“19.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계속된 「문화대혁명」은 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어야 했던 가장 심각한 좌절과 가장 큰 손실을 초래했다. 이것은 모택동 동지에 의해 시작되고 지도되었다. … 모택동 동지가 r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면서 제기한 그릇된 관점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일반적 체계와 중국혁명의 구체적 현실을 결합시킨 모택동 사상의 체계에서 분명히 이탈하는 것이었다. 이 관점들은 철저하게 모택동 사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1980 3월 24일 브레즈네프의 따쉬겐트 연설 : 중국과 전제조건 없이 관계개선을 위한 협상 용의가 있음을 강조하고 소위 '2개의 중국론'을 지지하지 않음을 표명하였다.
4월 중국은 일본의 안보비 비중이 2%가 되어도 좋다고 함. 미일안보조약 시인론 대두됨

1982 9월 중국의 12차 당 대회는 3대 장애 - 중소 국경과 중몽 국경의 소련 이군.
베트남의 친중 캄보디아 침략에 대한 소련의 원조,
중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소련 점령비판
1985 3월 고르바쵸프 정권 출범
4월 페레스트로이카 선언
1986 2월 27차 당대회 – “소련 또한 발달해 가고 있는 사회주의이다”, 브레즈네프 시기의 “소련은 이미 발전한 사회주의다” 라는 명제를 배격함
7월 고르바쵸프의 블라지보스또끄 연설 -미국의 '참여가 없이는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형태의 태평양 지역의 안전과 협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87 2월 중국과 소련 국경 협상을 시작
1988 8월 캄보디아 문제를 토의한 해.
1989 2월 소련, 아프가니스탄 철수 결정.
소련, 몽골 철수
6월 천안문 사태
9월 베트남 캄보디아 철수
12월 미 소 정상 말타에서 냉전 종식 선언. 이후 냉전에 따른 양 진영의 원조 중단됨
동구 역이행 시작
1991 5월 16일 중소 국경협정. 강동육십사둔을 소련의 영토로 인정하고 전바오 섬 등 우수리 강의 하중도(河中島) 대부분을 중국 영토로 확정
12월 소련 해체
1996 앙골라에서 영공, 미사일 작전권 체계 지녔던 러시아 철수하자 경제, 국방 문제 발생해 기아 상태
2005 아시아・아프리카 신전략파트너십(New Asian-African Strategic Partnership)-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 공동의장, 아시아 54개국, 아프리카 52개국, 팔레스타인 연대 선언
2015 4월 19일 반둥회의 60년 기념회의 – 인도네시아. 32개국 최고지도자, 77개국 부통령 부총리

4. 과거의 진정한 상(像)

중소분쟁을 추적해본 것은 지워져 버린 역사에 대한 “기억”을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가진 역사에 대한 기억은 서구의 시각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판과 자기반성이 있었다. 역사를 서구의 시각으로 보는 한계의 극복은 아시아의 시각으로 보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들에서 “아시아”를 아시아 각국의 과거부터 내려오고 있는 어떤 문화적 공통점에 기반을 둔 무엇인가로 상정하고 이를 찾고자 하고 있다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동양은 중동이고 서발턴 이론의 동양은 인도다. 그럼 왕후이의 동양은 동아시아다. 유교? 트랜스 시스템 사회? 어떤 지역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억압자들에게는 지역을 떠난 “과거의 진정한 상”도 중요하지 않을까?

일본의 좌파는 우치게바(내부폭력)의 이미지로, 중국의 좌파는 문화대혁명의 유교 사당을 파괴하는 노홍위병의 이미지로, 중소분쟁/중소논쟁은 이념에 미친 공산권의 싸움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비합리성’과 ‘광기’로 가득 찬 좌파에 대한 이미지이다. 이런 틀 내에서는 ‘광기’에 불타는 좌파는 말살하면 된다는 즉각적인 반응만 필요하다.

아시아의 시각으로 아시아를 보자는 주장들에서 언급되는 “아시아”를 “지역”만이 아니라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과거의 진정한 상”으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과거의 진정한 상(像)은 휙 스쳐 지나가 버린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인식되어지는 찰나에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리는, 마치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으로서만 과거를 붙잡을 수 있을 뿐이다. <진리는 우리들로부터 달아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 - . 고트프리트 켈러에서 연원하는 바로 이 말은 역사적 유물론을 관통하는 역사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에 인식되지 못했던 모든 과거의 상은 언제든지 현재와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릴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5

마지막으로 아까 말했던 발터 벤야민을 다시 꺼내서 강조점을 달리 하여 읽어보자.

마르크스에 의해 훈련을 받은 역사가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계급투쟁은 조야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싸움이다.
이러한 싸움 없이는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계급투쟁 속에서 승리자의 손에 굴러 떨어진 전리품의 이미지와는 다른 양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신뢰, 용기, 유우머, 기지, 불굴성으로서 이러한 투쟁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또 지나가 버린 머나먼 과거의 시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덕목들은, 지배자에게 굴러 떨어진 일체의 승리에 언제나 새로이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
마치 꽃들이 해를 향하듯, 과거 또한 알 수 없는 종류의 신비스러운 향일성(向日性)에 힘입어, 바야흐로 역사의 하늘에 떠오르는 바로 그 해를 향하려고 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모름지기 모든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이러한 사소한 변화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 테제 4 (강조 – 발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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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은 실명확인시스템 설치를 거부할 것입니다. 제 19대 대선 운동기간(2017.04.17~05.08)중에 진보네트워크센터(http://www.jinbo.net)에서 제공하는 덧글 게시판을 제공합니다. 아래 비실명 덧글 쓰기를 통해 의견을 남겨주시거나, 아래 소셜계정(트위터,페이스북 등)으로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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