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서, '혐오'와 협의해 집회 자유 침해하나

"민감한 사안"이라며 퀴어 퍼레이드만 집회 신고 방식 바꿔

집회신고 대기 1순위는 보수기독교 단체에...성소수자들, 항의 노숙 중

  23일 남대문서 앞 집회 신고 대기 장소에서 노숙 중인 성소수자 단체 회원들(가운데에서 오른쪽)과 보수 기독교 단체 회원(왼쪽).

최근 서울 남대문경찰서(아래 남대문서) 앞은 집회 신고를 위해 밤낮으로 대기하는 사람들로 부산하다. 6월 28일로 예정된 퀴어문화축제의 '퀴어 퍼레이드'(자긍심 행진) 때문인데, 이를 진행하려는 이들과 이에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 쪽에서 집회 신고를 먼저 내기 위해 며칠째 대기 중인 탓이다.

이는 집회신고를 두고 종종 벌어지는 풍경이기도 한데, 남대문서 앞 풍경은 다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집회 신고를 하기 위해 현재 대기 중인 이들은 기존 집회 신고 가능 시간보다 일주일 먼저, 남대문서가 정한 '대기장소'에서 숙식까지 해가며 줄을 서고 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중립’ 내세운 남대문서, 기독교 단체와 협의로 집회신고 변경

이번 상황은 서울 남대문서가 보수 기독교 단체의 압력에 밀려 집회신고 방식을 임의로 바꾼 데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16회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아래 조직위)는 원래 6월 13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부근에서 퀴어 퍼레이드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지난 13일 혜화경찰서에서 대기하던 보수 기독교 단체에서 먼저 행진 구역에 집회 신고를 낸 상태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직위에 의하면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5월 내내 퀴어문화축제를 막고자 신촌, 대학로, 서울시청, 청계광장 등 서울 시내 곳곳에 집회 신고를 해왔다. 집회신고를 선점하지 못하면 '맞불 집회'로 대응했다. 나라사랑&자녀사랑운동본부 등은 오는 6월 9일 퀴어문화축제 개막식이 열릴 서울시청광장 부근에 집회 신고를 내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맞불 집회를 열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이에 조직위는 퀴어 퍼레이드 일정을 6월 28일로 미루고 장소도 서울시청 부근으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이 구역을 담당하는 남대문서에 집회 신고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대문서가 이례적인 집회 신고 지침을 제시해 이들을 당황시켰다.

원래 남대문서에서는 집회 신고를 예정 날짜에서 720시간, 30일 이내에 받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6월 28일자 퀴어 퍼레이드에 대한 집회 신고는 5월 29일 자정부터 할 수 있다. 하지만 남대문서는 퀴어 퍼레이드에 한해 집회 신고 지침을 임의로 바꿔 공지했다. 5월 21일부터 집회 신고자들을 '대기장소'에서 대기할 수 있게 하고, 29일에 선착순으로 신고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남대문서의 이런 지침 때문에 퀴어문화축제 쪽과 보수기독교 단체 쪽 모두 21일부터 남대문서가 정한 출입구 경사로 쪽 '대기장소'에서 숙식하며 줄을 서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남대문서 정보과 관계자는 “28일 자 행사가 동성애 단체와 기독교 단체가 충돌하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경찰에서도 중립을 지키려고 순번대로 집회 신고를 하도록 했다”라고 해명했다.

문제는 남대문서의 집회 신고 절차 변경의 배경에는 보수 기독교 단체의 압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현재 6월 28일자 집회신고 대기 1순위는 보수 기독교 단체 쪽이다.

지난 11일 한국교회연합,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등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남대문서에 퀴어문화축제 집회 신고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 같은 압력에 의해 남대문서는 보수 기독교 단체들과 협의 과정을 밟고, 집회 신고 방식을 변경한 뒤 21일 홈페이지를 통해 이를 공지했다. 결국 남대문서와 협의를 진행한 보수 기독교단체 쪽에서 21일 집회 신고 대기 1순위를 선점하게 됐다는 것이 조직위의 설명이다.

조직위는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21일부터 성소수자들을 중심으로 남대문서 앞에서 노숙을 진행하며 ‘남대문서 치사해’ 치킨·사이다 먹기, ‘남대문서 짜증 나’ 짜장면 먹기, 무지개 줄서기 퍼포먼스 등을 통해 남대문서의 부당함을 알려왔다. SNS를 통해 소식을 접한 일부 시민, 외국인들이 조직위의 행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조직위는 27일 남대문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남대문서에 졸속 집회신고 방식 변경 철회와 안전한 퀴어문화축제 개최를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조직위, “안전한 퀴어문화축제 위해 경찰이 혐오 집회 막아야”

27일 조직위는 남대문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남대문서에 졸속인 집회 신고 방식 변경을 철회하고, 안전한 퀴어문화축제 개최를 위해 보수 기독교 단체의 혐오 집회를 막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러한 조직위의 행동에 100여 개의 장애·인권·여성·시민사회단체 등이 지지연명을 보내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조직위는 “경찰은 중립과 순서를 운운하면서 안전한 퀴어문화축제를 위한 행사 보호의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며 “이러한 경찰의 태도는 중립이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혐오 폭력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규탄했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남대문서에서 퀴어문화축제를 막으려는 혐오 세력의 집회를 방조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것”이라며 “국제적인 인권 기준에서는 전쟁, 폭력, 혐오를 조장하는 행동을 금지하고 있다. 권리를 제약하고 혐오하는 것은 아무리 인권을 가장해도 인권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서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수자인권위원회 위원장은 “남대문서에서 21일부터 지금까지 집회신고자를 줄 세우고 노숙을 강요하는 것은 인권 침해며, 퀴어문화축제를 분쇄하려는 자들과 공모해 집회 신고 절차를 세운 것은 부당하다”라고 비판했다.

장 위원장은 “작년에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퀴어문화축제의 평화적인 행진을 집단적인 위력으로 저지하고 욕설, 재물 손괴 등 폭력 행위를 저질렀다”라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는 폭행, 협박, 손괴, 방화 등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위협을 가할 것이 명백한 시위에 대해서는 금지 통보하게 되어 있다. 이번 퀴어문화축제를 방해하려는 시도에 대해 경찰은 평화로운 행사 개최를 보장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조직위는 남대문서장 면담요청서와 이번 집회신고 변경 건에 대한 시정 요구서를 남대문서 민원실에 제출하고, 서장의 면담을 촉구했다. 그러나 남대문서 측은 서장이 부재중이라는 이유로 면담을 거부했고, 경찰서 안에서 면담을 요구하던 조직위 대표단을 밖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이에 조직위는 집회 신고 예정 날짜인 29일까지 노숙을 진행하는 한편, 남대문서의 면담 거부에 대해서도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로 16회를 맞은 퀴어문화축제는 오는 6월 9일 서울시청광장에서 개막한 뒤, 퀴어 퍼레이드, 공식 파티, 퀴어영화제 등을 이어 진행할 예정이다. '사랑하라, 저항하라, 퀴어 레볼루션!'이 올해 축제의 슬로건이다.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 혐오에 이용하지 맙시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기자회견 참가자.

  기자회견을 마친 조직위는 남대문서에 서장 면담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사진은 경찰서 정문을 막고 있는 경찰과 면담을 요구하는 참가자들이 대치하는 모습.
덧붙이는 말

갈홍식 기자는 비마이너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비마이너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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