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셈블리’도 외면한, 장애인의 ‘을(乙) 이하의 노동’

‘노동운동 밖의 노동’을 부르짖는 이들에게 전하고픈 호소

해고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해 지난주부터 시작한 KBS 드라마 「어셈블리」는 오늘날 노동현실을 담은 장면들이 여럿 등장한다. 특히 지난 1회 방송분의 포장마차 씬은 노동자들의 세대 간 갈등의 한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준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대법원까지 간 복직소송에서 끝내 패소한 후 홀로 포장마차를 찾은 조선소 해고노동자 진상필(정재영 분)은 우연히 시험 낙방에 좌절해 술을 마시던 김규환(택연 분)과 그의 친구들 일행과 시비가 붙는다. 철없는 젊은이들이 해고로 인한 고통을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한 상필은 “니가 해고가 뭔지 알어? 그게 얼마나 엿 같은 건지 알어 이 자식아!”라며 분노한다. 그러나 이에 답하는 규환의 한 마디에 멱살을 잡던 양쪽의 주먹은 맥없이 풀리고 만다.

“해고가 뭔지 가르쳐 줘요? 해고 그거, 우리 같은 놈들 소원입니다.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그 빌어먹을 해고, 그거 당하는 게 소원이라구요. 알겠어요?”

  KBS 드라마 「어셈블리」의 한 장면.

이 장면은 아마도 「어셈블리」의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한국 노동 현실의 주된 갈등 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일 테다. IMF 이후 불어 닥친 정리해고의 칼바람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스위트홈’이라는, 한 때는 실현가능성이 꽤 높아보였던 로망을 빼앗아가 버렸다. 상필은 그 조각난 꿈의 파편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중장년-정규직 노동자들의 초상화다. 반면 규환은 애초에 해고조차 당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해고가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청년세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낮에는 경찰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는 ‘알바생’이라는 규환의 일상은 그에게 ‘노동하고 있지만 노동자는 아닌’ 모순된 정체성을 강요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노동운동은 주로 상필과 같은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 특히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면 규환과 같은 청년 세대의 ‘새로운’ 노동 문제는, 근래 청년 조직들의 열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노동운동의 핵심 사안은 아니다.

우연찮게도, 최근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조성주 후보는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신의 출마선언문에 담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2세대 진보정치’를 내세우며, 그동안 외면당해 왔던 청년세대의 노동, 즉 ‘노동운동 밖의 노동’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성주 후보가 비록 낙선하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가 제기한 ‘2세대 진보정치’, ‘노동운동 밖의 노동’이라는 논제는, 이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 앞으로 노동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토론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정도 논의로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일상이 된 해고’, 그리고 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고 있는 ‘세대 간 갈등’을 중심에 둔 노동에 대한 지금의 논의는 이 땅의 노동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이 논의에서조차 배제되고 있는 주체들은 없는가?

그나마 드라마 속 상필과 규환은 그 구체적 형태가 어떻든 모두 근대적 고용관계(갑-을 관계)를 확보하기 위한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둘은 형식적으로는 모두 자의로 노동시장에 뛰어든 것이며, 고용계약이 맺어지는 시점에는 어쨌든 법적으로는 ‘자유로운 주체’다. 따라서, (생존의 위협을 무릅쓸 용기만 있다면) 일을 그만두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본인의 자유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노동의 형태는 이 둘 뿐인가? 다시 말해, 자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동에 내던져지고,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노동으로부터 철수 할 수 있는 자유조차 부여되지 않는 ‘전근대적’ 노동은 없느냐는 말이다.

우선, 아래 대구지역의 한 장애인 보호작업장이 인터넷에 올린 홍보 문구부터 살펴보자.

“장애인분들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시간당 최저임금의 50%를 지급하는 등 보호작업장 중 최고의 임금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최저임금의 절반만 지급한다는 사실을 마치 자랑처럼 늘어놓고 있다. 게다가 이게 보호작업장 중 최고의 임금이라며 굉장히 떳떳해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013년 기준으로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의 월평균임금은 22만3천 원으로, 같은 해 1인 가구 최저생계비(57만2천 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런 실태의 원인은 바로 최저임금법 제7조의 ‘최저임금 적용 제외’ 조항 때문이다. 이 조항은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자’나 ‘그 밖에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서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만 받으면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이미 지난해 한국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에 대한 최종 견해’를 통해 장애인을 최저임금 적용 제외 대상으로 둔 위 조항과 보호작업장의 노동구조를 개선할 것을 권고한 바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그러는 와중에 수많은 장애인들이 최저임금도 못 받는 무권리 상태의 ‘비-노동자’로 분류되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조건이 맘에 들지 않으면, 다른 노동자들처럼 자유의지로 그만두면 될 것 아니냐고. 그러나 오늘날 장애인에게, 특히 보호작업장 종사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발달장애인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고려할 때, 이는 무척 허황된 말이다. 발달장애인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직업세계로 뛰어드는 도전의 시기이기보다, 가정과 지역사회 어디에서도 책임지지 않아 수용시설로 갈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운명의 시간일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보호작업장에라도 다니는 것은 어쩌면 발달장애인에겐 ‘상위층’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호작업장의 ‘보호’ 울타리에도 들어가지 못한 많은 장애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에겐 아직 그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대신 때때로 전해지는 언론 보도를 통해 매우 단편적인 실상만을 접할 뿐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식당에서 지적장애인이 14년 동안 ‘밥집노예’로 살아왔다거나, 경기도의 한 ‘개 사육장’에서 지적장애인이 하루 19시간 강제노동을 하고도 임금을 한 푼도 못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한, 우리는 국내 뿐 아니라 외신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던 신안 염전노예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신안 염전노예 사건은 국내뿐 아니라 외신들까지 놀라게 한 충격적인 인권침해 사건이었다. (사진 : 2015년 1월 미국 CBS 뉴스 화면 갈무리)

차라리 인신매매라 불리는 게 더 적절할 법한 이 ‘현대판 노예노동’ 사건들은, 장애인이 ‘보호’라는 미명하에 노동현장에서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는 현실을 방치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들의 노동은 언제나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과 ‘봉사’를 받는 객체였고, 기껏해야 직업재활 과정을 밟는 영원한 ‘실습생’일 뿐이었다. 이 속에서 장애인의 위치는 갑-을 관계에서조차 배제된 ‘을(乙) 이하의 인간’일 따름이다. 게다가 대한민국 법이 손쉽게 ‘의사무능력자’로 낙인찍고는 하는 이들 ‘을 이하의 인간’에겐 근대적 의미의 노동계약 자유 같은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많은 이들이 한국 사회 노동의 모순을 ‘세대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성주 후보의 ‘2세대 진보정치(-노동운동)’가 주목받았던 이유도 이런 분위기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1세대’ 노동의 모순이 드러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던 무권리 상태 속의 장애인 노동은 대체 무엇이라 불려야 할까? ‘마이너스 1세대 노동’이라 불러야 하나? 이런 ‘마이너스 1세대 노동’의 현장인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비율은 15세 이상 취업 지적장애인의 19.6%, 자폐성장애인의 40.3%에 달한다.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은 더 나은 일자리를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앞서 말했듯, 보호작업장에라도 다니는 사람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런 문제들은 항상 시사프로그램의 끔찍한 가십거리로만 다뤄지는 것일까? 진보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왜 한번도 ‘노동’ 사안으로 다뤄지지 않은 것일까? 상필과 규환이 드라마 속에서나마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고 호소하고 있는 동안, 무대 밖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장애인들은 엑스트라도 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진보정치가 진정 닫혀있는 광장의 문을 열고 ‘노동운동 밖의 노동’을 말하고자 한다면, 권리 담론 밖으로 내몰려 있던 장애인의 노동에 대해서도 이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닐까.
덧붙이는 말

하금철 기자는 비마이너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비마이너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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