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 ‘조정권고안’ 최초로 나와

‘공익법인 설립’ 비롯해 보상 절차, 재발방지대책, 사과 방식 등 담겨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원회)가 23일 조정권고안을 발표했다. 조정위원회가 구성된 지 약 9개월 만이다.

조정권고안에는 ‘공익법인 설립’과 ‘보상 기준 및 절차’, ‘재발방지대책’, ‘사과 내용 및 방식’ 등의 내용이 담겼다. 삼성전자와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 그리고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등 3자는 조정권고안 분석 작업 후 각각 입장을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 등 기부로 ‘공익법인’ 설립...12개 질환 관련 보상 기준 제시

조정위원회는 이날 오후 3시, 서대문 법무법인 지평 회의실에서 삼성전자-가족대책위-반올림 3자가 참여한 가운데 조정권고안을 발표했다. 조정위원장인 김지형 전 대법관은 삼성 전자산업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재발방지 대책을 수행하는 ‘공익법인’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삼성전자가 약 1천 억 원의 기부금을 부담하고, 한국반도체산업협회도 소정을 기부해 공익법인을 설립하자는 취지다. 공익법인은 향후 조정 권고안의 실행 주체가 된다.


공익법인의 발기인은 법률, 환경, 시민사회 단체 등 7곳(대한변호사협회, 한국법학교수회, 경실련, 참여연대, 산업보건학회, 한국안전학회, 대한직업환경의학회)에서 1명씩 추천받아 위촉하게 된다. 발기인은 공익법인 설립 후 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를 구성하게 된다. 삼성전자와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기부한 기금 중 약 70%는 피해자 및 유족 보상금으로, 나머지 30%가량은 공익법인 운영자금 및 공익사업 자금으로 사용된다.

피해자들이 요구해 왔던 ‘사과-보상-재발방지대책’과 관련한 세부 권고안도 나왔다. 우선 보상대상자는 삼성전자 반도체, LCD 사업장에서 2011년 1월 1일 이전에 종사한 노동자 중 최소 1년 이상 근무한 이들로 제한을 뒀다. 최대잠복기는 질환에 따라 최소 1년에서 14년까지로 한정했다. 질환의 범위는 업무연관성이 의심되는 12개의 질환(백혈병, 림프종, 다발성골수종, 골수이형성증, 재생불량성빈혈, 유방암, 뇌종양, 생식질환, 차세대질환, 희귀질환, 희귀암, 난소암)으로 규정했다.

12개의 질환은 업무관련성의 개연성 정도와 산업재해 인정 및 법원 판결 등에 따라 1군~3군까지로 구분된다. 1~3군에 따라 피해자 및 유족 보상금에 차등을 뒀다. 보상대상자로 선정되면 치료비(기왕 치료비 및 향후 치료비)가 지급되며, 업무연관성 의심 정도에 따라 추가 보전액, 유족 보상금 등이 지급된다. 1차로 오는 12월 31일까지 보상을 신청하며 공익법인의 심사를 거쳐 보상금이 지급된다. 2016년 1월 1일 이후 발병자도 공익법인이 연차적으로 보상대상자를 판정해 보상금을 지급하게 된다.

재발방지대책으로는 공익법인이 선정, 위촉한 3인 이상의 옴부즈만 시스템을 가동할 것을 제안했다. 환경, 안전, 보건관리 분야 등에서 선정된 3인 이상의 전문가들이 삼성 사업장 내 산업안전보건관리 현황 등에 대한 종합진단을 실시하겠다는 취지다. 매년 정기적으로 삼성전자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아 시정 권고, 의견 제시 등의 보고서를 작성해 공개하는 방식이다. 아울러 조정위원회는 삼성전자 내부 재해관리 시스템을 강화하고, 공익법인 차원의 예방대책사업도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공익법인 차원의 예방대책 사업은 △화학물질 관련 산업보건 안전기준에 관한 입법개선안 마련, 연구보고서 발간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정보공개와 영업비밀 관리를 위한 구체적인 규정의 제정 등이다.

사과-재발방지 대책도 담겨...반올림-삼성전자-가족대책위 권고안 수용 여부는 미지수

조정위원회는 사과와 관련해, 우선 삼성전자-가족대책위-반올림 차원의 ‘노동건강인권 선언’을 제안했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교섭 당사자 모두와 조정당사자가 사회를 대표해 공동으로 노동건강인권선언을 하는 방안을 제안한다”며 “이 선언은 노동을 제공하는 모든 사람의 건강한 삶을 지키는 것이 노사 모두 지켜내야 할 가치임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기자회견 방식으로 △반도체 등 사업장에 내재한 건강유해인자로 인한 위험에 대해 충분한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점 △피해자들의 불행에 대해 진지한 배려와 조속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나머지 이들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낳은 점 등을 인정하고 노동자 및 가족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의 뜻을 표시할 것을 권고했다. 또한 공익법인을 통해 보상대상자로 선정된 사람들에게는 삼성전자 대표이사 명의로 된 서신 형식의 사과문을 개별적으로 전달하도록 했다.

조정권고안이 처음으로 발표됐지만, 교섭당사자들이 원만하게 합의에 이르게 될지는 미지수다. 보상대상자 기준에 의해 대상자에서 제외되는 피해자들이 존재하는지 여부 등도 따져봐야 한다. 실제로 지난 2012년 6월 2일 사망한 고 윤슬기 씨의 경우 재직 5개월 만에 중증재생불량성 빈혈을 얻었고, 13년의 투병생활 끝에 사망했다. 그녀는 1999년 삼성전자 천안 LCD공장에 입사해 액정을 절단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조정권고안에서는 보상대상자의 최소 근무기간을 1년으로 제한해 놨다. 피해자 및 유족들도 조정권고안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끝난 뒤에야 입장발표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조정권고안 발표 직후, 정애정 가족대책위 간사는 “세부적으로 권고안이 나왔다. 부정적인 느낌은 없었다”며 “향후 가족대책위와 구체적으로 협의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반올림도 약식 브리핑을 통해 구체적으로 검토 후 입장을 밝히겠다는 뜻을 전했다. 공유정옥 활동가는 “우선 3가지 의제와 관련한 내용이 상세하게 종합적으로 담겼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며 “3가지 의제가 얼마나 균형 있게 반영이 됐는지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겠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가 조정권고안을 그대로 수용할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권고안 발표 직후, 백수현 상무 등 삼성전자 측은 코멘트를 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자리를 떠났다. 다만 이후 입장문을 통해 “권고안 내용 중에는 회사가 여러 차례 걸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이 있어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난색을 표했다. 조정권고안 발표 시점부터 삼성-가족대책위-반올림 3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권고안이 최종 수용된다. 이의가 있는 경우는 조정위원회에 이를 제기하고, 향후 후속 조정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조정절차가 끝날 경우, 조정당사자 전원은 합의서를 작성하게 된다.

조정위원회가 처음으로 조정권고안을 발표한 23일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설비엔지니어로 일하다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민웅 씨의 10주기이자, 삼성 LCD 탕정공장에서 설비엔지니어로 일하다 2009년 종격동 암으로 사망한 고 연제욱 씨의 기일이기도 하다. 올해 3월까지 반올림에 제보된 반도체 및 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는 127명에 달한다.
태그

삼성전자 , 직업병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윤지연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