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아는 것과 기록하는 것

[기획특집]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7)

역사와 역사 서술

한국사회는 지금도 역사 교과서 문제로 싸우고 있다. 사회 내부의 세력끼리도 갈등하고 과거사로 얽힌 다른 나라들과도 다투고 있다. 명분과 자존심만의 문제라면 싸움이 이처럼 오래가고 격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 서술을 놓고 벌이는 정치투쟁이다. 역사 서술 자체가 현재의 역사적 과정 속에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역사 서술은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역사 서술은 역사적 실천 과정에서 핵심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역사 서술에 대해 독일 역사학자 랑케처럼 역사가는 오직 사실만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또 역사 서술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취사선택,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해석, 전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들 때문에 애초에 주관적임을 인정하자는 견해도 있다. 마르크스주의도 이 문제를 중요시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피착취, 피억압 대중 관점에서의 역사 서술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거의 모든 역사 서술은 지배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역사 서술의 대상도 지배계급이었고 서술의 주체 또한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다. 왕조사처럼 영웅의 역사, 승자의 역사만 있고 패자의 역사는 찾기 힘들다.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을 역사책에 서술하기 시작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공로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정치적 실천이다. 그 실천의 효과는 어떤 것일까?

단절 없는 계승은 없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 서술과 역사의 관계를 성찰했다. 그는 역사 서술에는 승자의 역사와 패자의 역사 두 가지가 있다고 보고 마르크스주의가 열어준 패자의 역사 서술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물었다. 승자의 역사 서술은 모든 과거를 기록하지는 않는다. 승자의 잔인한 폭력의 역사, 타락 행위의 역사, 가혹한 지배의 역사와 무엇보다 패자의 저항의 역사는 흔히 묻혀진다. 기계적 형평성이 없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승자의 역사만 쓰는 것은, 벤야민이 보기에는, 현재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존 사회를 단절 없이 계승하게 만드는 것이 승자의 역사 서술의 역할이다.

벤야민은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벌어진 제2인터내셔널에서의 개량(수정)주의 노선과 혁명주의 노선 사이의 대립을 역사철학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단절 없는 계승을 거부한다. 기존 사회의 근본 틀은 유지하되, 부분적인 변화로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개량이라면 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혁명주의 노선의 관점에 서 있던 그는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의 한계를 역사철학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베른슈타인은 근대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 즉 이념적으로는 자유주의 사회의 온전한 계승이 사회주의라고 보았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는 전혀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 현재의 개선된 연장이다. 벤야민은 수정주의자들의 시간 관념은 공허하고 균질적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고 현재와 같은 것이 단조롭게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미래는 현재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고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유지된다. 수정주의자들이 혁명을 거부하는 사상적 원인을 그들의 역사철학에서 찾은 것이다. 역사를 균질적이고 공허하고 단조로운 과정으로 보면 완전히 새롭고 다른, 그래서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연속을 끊어버리는 역사적 사건인 혁명을 생각할 수 없다. 진보를 지향하지만 새로울 것은 없는 이런 역사관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역사는 늘 새롭다

혁명은 정치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사건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의미와 가능성을 역사철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은 그의 사상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인간의 주체적 실천이나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들과는 상관없이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원인에 의해 모든 일어날 일이 정해지는 경제결정론, 환원론이라고 말이다. 또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라는 역사의 목적을 전제하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예정된 과정으로만 본다는 앞서의 것과는 정반대의 비판도 줄기차게 제기 되어왔다.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는 ‘과거에는 없었고 또 미래에도 없을 어떤 것으로써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현재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미래가 항상 새로운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역사는 새로움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의미가 있다. 역사에서의 새로움은 그리 오래된 사고방식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고대사회의 거의 모든 문명에서 윤회를 생각했다. 역사를 바라보는 이런 관점을 순환적 역사관이라 부른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모두 과거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농경에 의지해 살던 시대의 세계관이라면 이해가 된다.

한 번만이 아니라 수없이 영겁의 세월동안 반복되는, 동일한 것이 무한히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서의 역사가 인간에게는 오히려 마음 편한 것일 수도 있다. 새로움은 익숙한 것의 영원한 소멸을 의미한다. 익숙하게 알던 것이 영원히 사라질 때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상실감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별 즉 네가 내 곁에 없는 새로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다음 생이든, 하늘에서든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이 말처럼 같은 것이 무한히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은 새로움이 주는 두려움에 대한 오래된 위로의 방식이다.

역사에서의 새로움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진 것은 기독교의 영향이다. 순환적 역사관과 대비되는 직선적 역사관이 유대-기독교의 전통에서 나왔다. 순환은 출발점과 도착점이 같다. 아무리 오래, 멀리 가도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직선은 출발점과 가장 먼 곳이 도착점이 된다. 공간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시간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완전한 새로움이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창조의 날로부터 최후 심판/구원의 날까지 이르는 하나의 선과 같은 과정이다. 우리 인간이 세속으로부터 구원받아 더 높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심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구원에 앞서 아마겟돈처럼 인류가 멸망할 정도의 끔찍한 고통,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완전한 새로움은 기존의 것과 고통스럽게 흔히 폭력적으로 단절하는 과정을 통해 주어진다.

근대의 진보적 역사관

근대에 와서 기독교적 역사관이 신학적, 종교적, 초월적 요소를 떨쳐버리고 세속화한 것이 계몽주의자들의 진보적 역사관이다. 근대의 진보적 역사관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근대인들이 생각한 역사는 과거에서 미래로 하나의 경로로만 전개된다. 이것을 단선적 역사라고 한다. 두 번째로, 미래로의 단선적 전개에 가치 평가를 더한다. 미래로 갈수록,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좋은 세상이 온다. 이것이 “진보”의 의미다. 세 번째, 역사는 앞으로만 가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뒤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나선처럼 결국은 앞으로 가게 되어 있다. 직선이든 나선을 그리든 결국 앞을 향해서 나아간다. 돌이킬 수 없다. 역사의 앞과 뒤, 더 나은 미래와 후진적 과거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역사의 목적이라 부른다. 근대인들이 원했던 역사의 목적이자 진보의 잣대는 경제적 부의 증대와 자유의 확대다.

마르크스는 근대의 아들이었다. 19세기 유럽인으로서 마르크스 역시 생산력의 증대와 인간의 정치적 자유의 확대가 진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는 근대의 과제를 더 근본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반항을 결심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결국은 진보의 족쇄가 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근대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단조롭고 지루한 역사의 연속을 넘어서는 새로움이 진정한 진보를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그의 역사관이 도덕적 가치나 초월적 존재를 근거로 주장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역사란 이래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실제의 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근거한 점이다. 이런 접근법을 유물론적 역사관이라 불렀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은 유물론적 역사관과 관념론적 역사관을 비교하고 구별하는 데서 출발한다.

유물론적 역사관

유물론적 역사관은 역사를 바깥의 어떤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역사 자체에만 주목하는 방식이다. 역사적 과정들의 원인, 역사의 궁극적 귀결/목적이 역사 밖에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이 관념론적 역사관이다. 기독교에서처럼 구원/심판의 날이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거나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관념론적 역사관의 특징이다.

관념론적 역사관 중에서도 역사의 끝에 도달해야 할 지점이 앞서 존재하고 역사는 그 곳으로 가까이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목적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역사 전개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미래가 현재를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다. 역사의 원인과 목적 둘 다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는 별개로 역사 밖에 있게 된다. 결국 두 개의 세상을 전제한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현실의 과정만이 있다고 보고 이 과정 바깥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을 부정한다.

이런 식의 목적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역사관이 기독교, 관념론 철학의 역사관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기계론적 역사관이 있다. 이 입장도 큰 틀에서 유물론적 역사관이다. 이 관점은 세계를 생명과 활력이 없는 물체들로 본다. 역사적 변화 즉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힘이 가해져야 한다. 역사적 사건들은 그 이전에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결과다. 그리고 현재의 사건들은 다시 미래에 발생할 사건의 원인이 된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의 연쇄는 철의 법칙처럼 견고한 것이다.

목적론이 정해진 미래가 원인이 되어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기계론적 관점은 과거가 원인이 되어 역사를 미래로 밀고 나간다. 같은 유물론적 관점이라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역사관은 기계론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해방을 위한 실천의 철학이지만 기계론적 역사관은 역사적 주체의 능동적 실천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도식적 역사관의 실패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은 목적론적이라는 비판과 기계론적, 결정론적이라는 상반된 비판을 동시에 받아왔다.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꾸는 유사종교, 원시 기독교의 근대적 변형이라는 오래된 비판과 기계적 필연성으로 역사를 설명하기 때문에 열린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는 비판이 한 사상에 동시에 가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더 나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현실이라는 하나의 지평 안에서 통일하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간은 어느 정도는 객관적 조건의 지배를 받지만 어느 정도는 자유롭다. 또 우리는 필연적 법칙을 인식함으로써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인식론 부분을 참조할 것). 둘 중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이 비현실적임을 앞에서 여러 번 살펴보았다.

마르크스가 19세기 유럽의 백인 남성이었기에 가졌던 역사철학적 한계 가운데 그 이후의 계승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공격받고 수정되었던 것은 역사 발전의 과정에 대한 생각이다. 유물론적 역사관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은 역사 발전의 5단계 이론이다. 그리고 이 발전 단계들이 모든 인간 사회에 같은 순서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생각은 현실의 역사에서는 결코 입증되지 않는다. 또한 이런 도식적 역사관을 고집한 공산주의자들은 운동의 실패와 자신들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기도 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부터 마오이즘과 그 극단적 변형인 크메르 루즈까지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과제는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회들에서 같은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이었고 이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겨진 숙제다.

역사를 새롭게 하는 힘

인간의 지평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환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 뒤에 도래하는 지금의 세상, 자본주의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회를 부르는 명칭이 공산주의다. 유물론적 역사관이 설명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생시키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이다. 목적론적 역사관은 목적이 현재를 미래의 방향으로 이끌어 당기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세상이 변화한다고 기계론자들은 과거에서 주어진 힘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사건을 일으키고 현재는 다시 미래의 원인이 되는 인과적 과정을 제시하지만 힘은 결국 과정의 외부에서 주어져야 한다. 앞서 얘기한 수정주의자들의 역사관이 기계론적 관점이다. 두 관점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다. 수정주의자들이 현재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혁명을 거부한 것은 현재는 미래로 이어지는 끈이기 때문이다.

미래로 갈수록 더 좋은 세상이 되지만 이때의 미래는 현재의 연속이고 현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현재의 연장에서 미래만을 바라보는 역사관은 패자의 역사라는 구질구질한 과거 따위는 잊어버리자고 말한다. 이 관점은 실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아주 흡족하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것이다. 현재가 더 이상 이대로여서는 안 되며 미래에는 지금과는 다른 날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끈을 끊어버리려 할 것이다. 그 힘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패자의 과거가 역사의 동력

마르크스주의는 과거에 그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 승자의 과거가 아닌, 패자의 과거. 피억압 민중의 과거가 역사의 동력이 된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은 역사를 굴러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태를 보면 스스로를 지킬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에게, 더구나 그들의 과거에 어떤 힘이 있다는 걸까? 벤야민은 “혁명은 과거를 향한 호랑이의 도약 같은” 것이라고 했다. 호랑이가 풀숲 사이에 몸을 낮추고 숨어 있을 때, 호랑이의 온 몸의 근육은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다. 그리고 먹이를 잡을 때라고 판단되면 한 번에 힘을 모아 사냥감을 향해 도약한다. 패자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역사의 운동에 개입하는 행위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역사 철학으로서는 많이 부족하다. 역사가 전개되는 객관적 조건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 실천은 항상 객관적 조건 속에서만 일어난다. 이 둘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진짜 역사를 움직이는지를 마지막 회에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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