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에게 사형선고…연금공단 근로능력평가 '규탄'

근로능력평가·장애등급심사 결과 수급권 박탈 위협 높아져

국민기초생활보장법(아래 기초법)에는 생계급여를 받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근로능력이 있는 경우에는 일하는 것을 조건으로 급여를 받는 ‘조건부 수급’ 조항이 존재한다. ‘일을 통한 탈빈곤과 자활’을 촉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최근 이 제도가 몸이 아파 일하는 게 불가능한 사람들에게까지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내리면서 사실상 강제노동으로 내몰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장애·빈민단체들은 이 문제의 핵심 원인이 국민연금공단이 실시하고 있는 불합리한 근로능력평가에 있다고 지적한다.

빈곤문제해결을위한민생보위(아래 민생보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공동행동 등 장애·빈민단체는 6일 서울 광진구의 국민연금공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불합리한 근로능력평가 제도를 개선할 것을 촉구했다.

  불합리한 근로능력평가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는 참가자들.

현재의 근로능력평가제도의 문제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바로 1년 전, 조건부 수급자였던 故 최인기 씨의 사망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다. 좌석버스 운전기사로 일하던 최 씨는 2005년 흉부대동맥류 진단을 받고 두 차례에 걸쳐 대동맥을 인공혈관으로 치환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2008년부터 기초생활수급을 받게 되었다.

그는 오래 걷지도 못하고 계단을 조금만 올라도 숨이 찰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10년 가까이 일하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비가 유일한 소득이었다. 그러나 그는 2010년 근로능력평가 사업이 국민연금공단으로 위탁된 이후 근로능력평가를 받으라는 통보를 자주 받게 되었다. 수원시 권선구청과 주민센터는 6개월마다 근로능력평가용 진단서를 떼올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2014년 1월, 최 씨는 결국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게 된다. 일반수급자에서 ‘조건부 수급자’가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지난해 2월부터 아파트 지하주차장 청소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일을 하게 되자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했다. 결국 지난해 5월 일하던 중 최 씨는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 이식받은 혈관 주변으로 감염이 퍼져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태까지 가면서 그는 결국 2014년 8월 28일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권선구청은 최 씨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의 아내 곽혜숙 씨에게 전화해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공무원들의 말에 분개한 곽 씨가 “병원에 직접 와서 보라” 따졌고, 그때야 권선구청은 최 씨를 일반수급자로 전환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막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곽 씨는 왜 남편에게 ‘근로능력 있음’ 판정이 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해 9월 국민연금공단에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공단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기자회견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한 곽 씨는 “며칠 후면 남편의 1주기다. 하지만 여태껏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도 속 시원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모두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모른다’는 말뿐이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한 참가자가 몸이 아픈 수급자에게도 일할 것만을 강요하는 국민연금공단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모인 단체들은 이런 일이 단지 故 최인기 씨만의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특히 근로능력평가를 더욱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하겠다는 명목으로 이 업무를 국민연금공단이 가져간 2010년 이후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연금공단으로 업무가 이관되기 전 5%대에 불과했던 ‘근로능력 있음’ 판정 비율은 2014년에는 14.2%로 3배 가까이 급증했다. 또한 근로능력평가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장애등급심사의 경우도 2009년에 ‘등급 외’ 판정은 2.5%에 불과했지만 연금공단이 판정업무를 시작한 2011년과 2014년엔 각각 17.3%와 16.9%로 급증했다. 장애 1~4급 판정을 받으면 ‘근로능력 없음’으로 인정돼 일반수급자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반드시 근로능력평가를 거쳐야 한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박영아 변호사는 “국민연금공단 내에서 누가, 어떻게 심사했는지 구체적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고 정보공개도 안 되는 것이 문제”라며 “재심신청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지만, 처음에 ‘근로능력 있음’ 판정이 어떻게 나왔는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은 상황에선 당사자는 반론을 펼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지금의 제도가 자활사업의 애초 취지와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초법에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는 자활사업 참여를 조건으로 생계급여를 실시하고, 이때 자활지원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나와 있다”며 “그러나 지금 시행되고 있는 근로빈곤층 취업우선 지원사업은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으면 무조건 일을 하도록 떠밀고, 나중에 취업이 어려워지면 그때야 자활지원계획을 수립하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김대희 인도주의실천을위한의사협의회 사무국장은 “연금공단은 수급자의 진단서, 의무기록만 보고 장애등급과 근로능력 유무를 판단한다.”며 “그러나 의무기록에는 오래된 환자의 장기간 상태 변화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이것만으로 근로능력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최근 근로능력평가로 인해 수급탈락 위기에 놓인 이들이 직접 나와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지체장애 5급의 장순호 씨는 2012년부터 기초생활수급자로 급여를 받아왔다. 그는 허리가 아프고 당뇨 합병증 등이 있어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공단은 계속해서 ‘일을 하라’고 요구했다. 자활사업이나 취업을 하지 않을 경우 ‘조건 불이행’이라는 이름으로 수급권을 박탈당하기 때문에 아파도 참고 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수년간 노숙생활을 해 왔던 주영복 씨는 홈리스행동의 지원으로 올해 초부터 수급자가 되었다. 오랫동안 염전, 김양식장, 새우잡이배 등에서 고된 일을 했지만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학교에 다닌 적도 없어 글을 읽고 쓰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해야만 수급을 받을 수 있는 ‘조건부 수급자’였다.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의 권유로 지적장애 검사를 받고 장애등급을 신청했지만, 연금공단은 ‘지적잠재력이 경계선 수준까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며 ‘등급 외’ 판정을 내렸다. 자활 상담을 했던 공무원도 취업이 어려울 것 같다고 했지만, 연금공단은 이런 정황들을 모두 무시하고 그를 일터로 내몬 것이다.

  박사라 홈리스행동 활동가(왼쪽)가 근로능력평가 피해자 주영복 씨(오른쪽)의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민생보위는 “비장애인의 신체를 기준으로 손실을 측정하는 반인권적 장애등급제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강제근로를 종용하고 수급권 박탈의 위협을 가하는 근로능력평가는 근본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면서 “우선 연금공단은 사망자와 피해자들 앞에 정중히 사죄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기자회견 후 연금공단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이러한 내용을 전달했다. 공단 측은 오는 13일까지 이에 대한 답변을 주기로 했다.

  근로능력평가와 장애등급심사에 의해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참가자들.
덧붙이는 말

하금철 기자는 비마이너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비마이너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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