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는 왜 노사정위를 불신할까?...17년간의 흑역사

‘사회적 합의’라는 허울...깊고 선명한 배신의 역사

정부가 한국노총을 향해 최후통첩을 했다. 26일까지 노사정위에 복귀하지 않을 시 정부 주도로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경고다. 한국노총 산하 노조들은 ‘협박’이라며 반발했지만 정부의 강공책에 내부는 여전히 속앓이를 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지난 1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노사정위 복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국노총 산하 노조인 금속노련, 공공연맹 등이 이에 반발해 회의장을 점거하며 회의가 무산됐다. 정부, 여당은 한국노총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이관섭 산업부 차장은 한국노총이 ‘찬물을 끼얹었다’고 비난했고,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한국노총의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기득권 지키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노총은 오는 26일, 무산됐던 중앙집행위원회를 다시 개최해 노사정위 복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내부 반발과 정부의 압박 사이에서 난감한 처지에 놓인 셈이다.

노사정위는 ‘사회적 합의’를 대전제로 하고 있는 기구다. 노동계와 재계, 정부가 모여 대화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자는 취지다. 그럴듯해 보이는 취지와 목적이 있는 기구지만, 노사정위는 매번 시끄러운 잡음을 만들어내곤 했다. 민주노총은 무려 16년 넘게 노사정위 불참을 고수하고 있고, 한국노총도 노사정위 참여 여부로 내홍을 겪곤 한다. 심지어 노사정위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노노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왜 노동계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기구에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의 노사정위, 17년 동안 변치 않는 흑역사

1998년 1월 15일 공식 발족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는 17년의 역사를 가진 기구다. 김대중 정부 시절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양대노총과 정부, 재계는 국민적 합의를 위한 노사정위 구성에 합의했다. 그해 2월, 노사정위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잠정합의 이후, 노동계는 극도의 혼란과 내부 갈등에 휩싸였다. 노사정위의 협약은 정리해고와 근로자 파견을 합법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결국 노동계가 정리해고 및 파견제를 받아들인 셈이 됐고, 이후 비정규직 및 정리해고가 확산되며 불안정 노동이 심화됐다. 당시 합의로 민주노총은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내홍을 앓았고,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사정위 불참을 결정했다.

2000년도에는 노사정위가 근로시간단축 및 주5일제 합의를 위한 대화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노사정위가 내놓은 주5일제 관련 공익위원안은 초과노동한도 확대 및 할증률 인하 등 노동조건 후퇴를 뼈대로 하고 있었다. 한국노총은 노사정위 불참과 복귀를 반복하며 삐걱거렸고, 결국 노사정위는 주5일제 관련 합의에 실패했다. 이후 정부는 공익위원안을 토대로 친 사용자적인 법안을 제출하며 ‘일방강행’에 나서기도 했다.

2006년 9월에는 노사정 대표자들이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인 ‘노사관계 로드맵’에 합의했다. 핵심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을 3년간 유예하고, 전임자 급여지급 금지를 같은 기간까지 허용키로 하는 ‘복수노조-전임자 임금’ 맞바꾸기 전략이었다. 특히 필수공익사업을 확대하고, 쟁의행위 기간 중 필수공익사업의 필수유지업무 수행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필수공익사업에 대체근로를 허용하는 등의 쟁의행위를 무력화할 수 있는 법개정 내용도 들어 있었다.

2010년에는 노사정위가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장시간근로관행 개선과 근로문화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는 단시간 일자리 및 임금피크제 등을 전제로 하고 있어 반발이 일었다. 또한 노사정위는 당시 민간고용서비스 활성화를 위한 합의를 통해 구인기업에 대한 직업소개요금 자율화 등의 규제완화와 구인구직-직업정보제공-파견-직업훈련 등을 겸업하는 ‘종합인재서비스’ 발전 계획으로 민간위탁의 확대를 꾀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노사정위 산하기구인 ‘노동시장선진화위원회’가 ‘사내하도급 근로자의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사내하도급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상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사용주의 책임을 축소하고, 법적으로 명시된 원청의 사내하도급 노동자 지휘명령 금지를 ‘노력사항’으로 명시해 노동계의 비판을 받았다.

박근혜 정권은 지난해부터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강공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노사정위는 지난해 12월 정부가 발표한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원칙과 방향에 대한 노사정합의를 선언했다. 하지만 노사정위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필요한 분야별 세부과제와 관련해서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노동시장 구조개혁 추진 계획에 해고요건 완화와 임금피크제, 임금체계 개편, 비정규직 파견 확대 및 기간연장 등 노동조건 후퇴 조항이 대거 포함돼 있는 까닭이다. 한국노총은 불참을 선언했고 노사정위는 4개월 째 공백상태를 맞고 있다. 민주노총은 4월과 7월, 두 차례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 총파업을 벌였다.

후퇴와 양보만을 강요하는 사회적 합의...깊고 선명한 배신의 역사

안타깝게도 노사정위는 탄생 초기부터 사회적 합의기구라는 신뢰를 잃어버린 듯하다. 일각에서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 불참을 고수하고 있는 것을 두고 무책임한 투쟁일변도의 방침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노사정위의 배신의 역사는 그만큼 깊고 선명했다. 사실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제안한 것도 민주노총이었다. 대선 직후 김대중 정권인수위는 민주노총의 제안을 받아들여 노사정위를 구성키로 했고, 98년에 1기 노사정위가 공식 출범했다.

민주노총은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잠정합의했지만, 정리해고제와 파견제를 받아들인 합의안이라 논란이 불거졌다. 결국 1기 지도부는 총사퇴했고, 대의원대회에서는 사회협약을 최종 부결시켰다. 사회협약에는 정리해고제, 파견제 같은 노동악법도 포함됐지만 실업자의 초기업단위노조 가입자격 인정, 교원 노동조합 허용 등 노동계가 요구해왔던 합의도 존재했다. 하지만 사회협약 이후, 정리해고와 파견법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실업자의 초기업단위노조 가입자격 인정과 전교조 합법화 등의 합의안은 백지화되거나 유예됐다.

그렇다고 민주노총이 바로 노사정위 불참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98년 6월 3일, 2기 노사정위가 출범하면서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사회적 대화에 뛰어들었다. 민주노총은 6월 10일 예고했던 총파업을 철회했고,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사정위를 전술적으로 활용하자며 노사정위 참여를 결정했다. 하지만 정부가 퇴출기업 및 퇴출은행, 공기업 민영화 계획안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면서 양대노총은 노사정위 불참과 복귀를 이어갔고, 급기야 정부가 만도기계에 공권력을 투입하며 갈등을 악화시켰다.

노동계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노사정위 합의사항은 번번이 거부됐고 노동탄압이 이어졌다. 당시 노사정위는 구속자 석방, 사면 복권에 합의했지만, 구속자 숫자는 김영삼 정부에 6배에 달했다. 부패방지법 제정 합의도 이행되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기구’는 일찌감치 신뢰를 잃어버렸고, 노사정의 합의문은 헌신짝이 됐다. 결국 1999년 2월 24일,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 탈퇴를 결정하게 된다.

한국노총의 경우 노사정위의 불참과 복귀를 반복하며 노사정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 ‘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 2006년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 2009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 2010년 ‘장시간 근로관행 개선과 근로문화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합의문’ 등을 비롯해 지난해 ‘노동시장 구조개선의 원칙 및 방향과 관련한 합의안’ 까지 매번 불참과 탈퇴, 복귀를 오락가락하며 합의안을 만들어냈다.

민주노총은 이를 야합이라 비판했고, 노노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2006년 이용득 당시 한국노총 위원장은 ‘노사관계 로드맵’ 합의를 마친 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한국노총은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서 ‘폭력집단 민주노총 해제하라’, ‘양아치집단 민주노총 자폭하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규탄집회을 벌이며 사무실 진입을 시도하는 웃지 못 할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노사정위로 인해 노동계의 혼란과 노-노 갈등이 이어졌지만, 노사정위는 여러 합의를 거치며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사협조주의 노동운동 재편을 공고히 하고 있다. 노동계의 양보와 후퇴를 전제로 하는 노사정위의 ‘사회적 합의’는 올해 또 한 번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 확대, 임금피크제 등의 희생을 얻어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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