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시각 다른분석

3·8 세계여성의날, 여성운동의 현황과 과제

피플파워  / 2007년03월14일 21시33분

하주영/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세계적으로 이 날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기 시작한지 벌써 99년째가 되는데요, 한국에서도 여성의 날을 맞이해서 여성단체들은 많은 행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지속해서 여성의 날 행사의 규모가 커지고 있는데, 이는 여성운동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 운동의 현황과 쟁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3월 4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영상으로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
도입영상: 3‘38“
==================================================================
하주영/ 오늘 함께 얘기 나눌 분은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정지영 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정지영/ 안녕하세요


하주영/ 매년 3월 8일은 세계여성의날로 기념하고 있는데요, 올해가 99주년이라면 역사가 상당히 깊은 기념일입니다. 특별히 이날이 여성의 날로 지정된 이유가 있습니까?

정지영/ ‘여성의 날’의 기원은 1908년 미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은 12시간에서 14시간 정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남성 노동자 임금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하에서 착취당하고 있었고, 이를 바꾸기 위한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다른 한 축으로 당시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한 여성노동자들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투쟁도 있었습니다. 이때 투표권은 단지 투표에 참여할 권리 자체라기보다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 더 혹독하게 착취당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만 투표권이 없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바꾸면서 여성노동자들을 자각시키고 조직하는 계기로 인식되었습니다. 물론 여성노동자들이 조직될수록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는 것도 가까워진다는 의식도 있었지요. 이후 독일 사회주의자 클라라 제트킨은 1910년 2차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에서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조직하자고 제안했고, 1911년 3월 19일 첫 번째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 투쟁이 조직되었습니다. 1913년에 그 날짜는 3월 8일로 옮겨졌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죠. 그 이후 많은 국가들이 여성들의 참정권을 인정했는데요, 이것은 사회주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여성들의 투표권 요구를 순치하여 투쟁을 봉쇄하고 사회를 안정화하려는 국가의 조치였죠. 따라서 투표권 요구가 수용된 후에도 여성노동자의 날은 여성노동자의 권리와 해방을 위한 투쟁의 날로 지속되었고,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주영/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3/8 여성의 날을 맞이해서 많은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진행되고 있는 행사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정지영/ 우선 가칭 공공서비스 시장화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 전여농, 민주노총 서울본부, 학생 기획단 등이 주최하는 “여성 빈곤심화, 저임금불안정노동 확산하는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정책’ 규탄 기자회견”가 있었습니다. 이 기자회견은 현재 정부가 여성들의 일자리 확충과 빈곤 해소의 방안이자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대책으로 선전하고 있는 사회서비스 일자리 정책이 사실 여성들을 불안정한 서비스 노동자로 활용하고, 가사, 간병, 육아와 같은 재생산 노동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그대로 두거나 강화하는 정책이라는 점을 비판하고, 이에 맞선 투쟁을 제기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또 오전에는 민주노총 서울본부 주최로 “여성노동권 모성권 쟁취! 여성의 빈곤, 저임금, 비정규 확산에 맞선 서울지역 결의대회”가 진행되었고, 오후 2시에는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전여농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여성대회가 열렸습니다.

하주영/ 여성의 날 행사는 해가 갈수록 더욱 규모가 커지는 듯 합니다. 여성운동이 그만큼 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 은데요, 한국 여성운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정지영/ ‘한국 여성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참 모호한 것 같습니다만, 우선 말해둬야 할 것은 한국에서 여성운동이 그 출발과 성장, 침체라는 역사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된 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현재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여성운동이 참조할만한 여성대중운동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한국 여성운동의 출발을 말할 때 어떤 운동이나 단체를 기준으로 삼아야할 지 난감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전제로 한국에서 여성해방을 표방한 단체들의 출현 시기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제시대에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을 동시에 사고했던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만, 그들의 운동과 활동이 한국전쟁이나 분단과 같은 상황에서 명맥을 유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분단 이후 정부 주도 하에 부인회 같은 관변 여성단체들이 생겨났죠. 1980년대 들어서면서 기존의 관변 여성단체들을 ‘보수적’이라 규정하고 스스로 ‘진보적’이라 명명했던 여성단체들이 생겨납니다. ‘여성해방’이라는 목표와 이념을 내건 여성단체들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죠. 대표적으로 1983년 설립된 <여성평우회>와 <여성의 전화> 등을 들 수 있어요. 이후 스스로 진보적 여성운동을 표방했던 단체들은 여성억압의 본질과 여성해방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을 벌였고, 또 많은 여성들의 생존권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진보적 여성운동 단체들은 기층여성 중심성과 민주화 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라는 방향을 내세운 <한국여성단체연합>, 즉 여연을 결성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여연은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의 대표성을 자임해오고 있습니다.

하주영/ 87년 민주화 항쟁은 전체 사회운동뿐 아니라 여성 운동에도 큰 변화를 주었을 것 같은데요, 87년을 전후로 여성 운동의 변화는 무엇이 있습니까?

정지영/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87 항쟁 이후에 이루어진 한국사회 변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라는 문제를 간략하게라도 언급해야 할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실질적 민주화를 구분하고 87항쟁 이후 한국사회에 형식적 민주화가 안착되었다고 평가를 합니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결과를 두고 하는 얘기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87년 항쟁의 정치적 성과는 선거를 통해 노태우 군사 정권이 재등장하면서 소실됐고, 이후 90년 민자당 합당을 통한 보수대연합의 결성, 93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로 변질되었습니다. 사실 군사 정권의 퇴장과 문민 정권의 등장이라는 변화는 민주화의 진전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위한 정치적 조건입니다.
그런데 여연은 87년 이후의 변화를 불완전하고 왜곡된 상황이긴 하나 자율적인 시민사회 영역이 구축된 상황으로 인식하면서 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국가를 여성운동의 파트너로 사고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에 따라 여성의 이해를 반영한 법, 제도를 여성정책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그 당시 가족법, 남녀고용평등법, 모자복지법과 같은 법의 제, 개정 운동을 들 수 있는데요, 여연은 이런 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고 일정한 성과를 얻게 되었어요. 그 이후 여연은 여성운동의 제도화, 대중화, 독자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런 방향을 더욱 강화합니다. 1990년대 초반 여성민우회, 여성의 전화 같은 여연 소속 단체들이 국가와 새롭게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고, 운동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배가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여성운동이 여성대중의 직접적인 투쟁이나 운동을 조직하기보다는 그들의 이해나 요구를 대변하여 법제도화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와 과제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죠.

하주영/ 한국에서 여성운동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여성가족부 같은 정부 부처의 여러 정책 때문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성운동의 일정 성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정지영/ 여성가족부, 그 이전의 여성부 탄생 자체가 지금까지 여연을 위시한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이 해왔던 활동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연이 여성 정책의 제도화와 확대를 꾸준히 추구해왔는데, 여성부야말로 여성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전담하는 부서가 정부 내에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여성부 탄생이나 여성정책의 확대라는 게 꼭 여성운동의 요구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여성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 탄생했는데요, 이때부터 일관되게 추진된 여성정책의 방향은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었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추진되면서 여성들의 이중부담이 너무나 커진 상황에서 이를 관리하고, 여성인력을 활용하고자 이런 정책 방향이 제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의 여성 정책은 '재생산의 일차적 책임자이자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초점을 둬왔죠. 최근에는 저출산, 고령화 위기 담론 하에서 여성의 출산에 대한 의무와 노인부양, 출산과 같은 새로운 쟁점이 추가되었습니다만, 이 또한 가족 내에서 일차적인 가사 담당자라는 여성의 지위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보육이나 노인 부양의 부담을 정부의 지원을 통해 시장화하는 방식으로 사회화하고, 이런 보육, 간병, 가사 등을 다시 여성들이 취업할 수 있는 저임금의 유연한 일자리로 둔갑시키면서 악순환을 지속시키는 정책일 뿐입니다. 이는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출혈판매를 지속하기 위해 다른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활용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이런 여성정책을 과연 여성들을 위한 성과로 볼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죠.

하주영/ 일정한 사회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책변화를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의 한계와 그 효과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정지영/ 무엇보다 여성운동의 자율성을 많이 훼손당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국가의 정책변화를 중심에 두는 것은 여성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국가의 능력에 기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들의 자기조직화나 운동이 국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나 동원력 정도로 사고될 위험이 큰 것이죠.
게다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정책이란 여성들의 이중 부담은 건드리지 않은 채, 오히려 강화하면서 여성들을 저임금의 유연한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것에 그 초점이 놓여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의 여성 정책 중 어떤 것은 여성에게 유리하고, 어떤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정책을 바꿔야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죠. 정책상에서 일정한 변화야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변화가 여성들이 처한 위기나 어려운 현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여성정책이 확장되고 여성부 수립되고 했지만, 여성들의 현실에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저출산 문제라든지 빈곤의 여성화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쟁점이 되고 있다는 것은 여성들의 위기가 더 가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럼에도 여성정책이 여성들을 위해 무언가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식의 관념은 오히려 그런 위기를 관리하거나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고, 여성운동은 이런 관리나 은폐의 역할을 스스로 자임하는 꼴이 되는 것이죠.

하주영/ 이른바 주류적 여성운동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한국의 문제만으로 국한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 운동의 왜곡이라는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정지영/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여성들조차 여성운동을 해방의 전망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여성정책이 대다수 여성이 겪는 고통과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하는 데, 이런 정책을 형성하는 데 몰두하거나 그를 위해 여성 정치인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식의 여성운동이 전혀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나와는 다른 여성, 잘 사는 여성들의 배부른 소리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죠. 그리고 이런 인식은 페미니즘이나 여성운동을 대중적인 분노나 공격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여성정책이 수립, 실행되고 여성정치인들이 늘어나고 하는 등의 모습은 대중들로 하여금 여성들의 삶이 나아졌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렇게 나아졌으면 됐지, 안 그래도 다들 어려운데, 계속 여성의 권리나 요구를 말하는 게 너무 심하다는 거죠. 작년에 있었던 된장녀 논쟁에서도 페미니즘이나 여성운동에 대한 대중적인 반감, 거부감을 읽을 수 있었어요. 페미니즘이나 여성운동이 전혀 쓸모없는 무엇, 한심한 무엇으로 치부되는 거잖아요. 이런 면에서 현재 여성운동은 진퇴양난에 처해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여성들을 여성운동을 통한 해방의 전망으로 조직하지도 못하고, 대중적으로도 여성의 권리, 여성의 운동이 사회를 바꾸는 보편적인 운동이 아니라 여성만을 위한 특수한 무엇으로 인식되면서 공격받고 있으니까요. 이를 바꿔나가지 않으면, 여성운동은 발붙일 곳조차 없어질 지도 모르죠.

하주영/ 이런 왜곡에도 불구하고 여성운동의 쟁점들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의 쟁점들을 세계적으로도 여전한 것 같은데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정지영/ 물론 여성의 현실이 바뀌거나 여성에 대한 억압이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성운동은 계속해서 쟁점들을 제기할 수밖에 없죠. 최근에는 이라크 전쟁을 비롯하여 부시 정부가 행하는 전쟁들이나 군사세계화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가중시킨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부시 정부가 대테러 전쟁의 명분 중 하나로 내세우는 것이 이슬람 율법에서 여성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통제와 폭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입니다.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을 살해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전쟁이나 군사세계화가 양산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가 하나의 쟁점이구요, 최근 또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세계사회포럼과 같이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운동들 내부에서 여성운동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점입니다. 여성운동은 대안세계화 운동 내에서 여성의 관점, 여성의 권리가 없이는 다른 세계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대안세계화 운동이 여성권의 쟁취를 자신의 중요한 과제로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죠. 더불어 이 말은 여성운동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양산하는 빈곤과 폭력에 맞서 대안적인 세계를 이루는 데 중요한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주영/여성노동계의 5대 요구안 관련 영상 보고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
영상: 4‘33“
==================================================================

하주영/ 한국에서 여성과 관련한 뜨거운 이슈는 바로 저출산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데요,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 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정지영/ 사실 출산이라는 건 여성에게 고유한 권리인데, 한국에서는 한 번도 이 문제가 여성운동의 의제나 여성의 권리로 제기된 적이 없었어요.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여성운동의 핵심 쟁점 중에 하나로 낙태권이 제기되고,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들이 형성되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죠. 이는 1960, 70년대 국가의 강력한 출산 통제 정책 하에서 낙태가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던 것에 기인합니다. 즉 여성의 출산이나 재생산에 대한 통제의 문제가 여성의 권리로 제기되었다기보다는 언제나 국가의 인구정책 차원에서 고려되었다는 것이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출산율이 낮아지자 즉각 여성의 출산 의무가 강요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인구정책에 따른 출산 억제 또는 장려 정책이 결코 여성의 이해나 요구를 반영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여성에게 출산의 의무나 출산의 포기를 강요할 뿐이죠. 최근 저출산이 이슈가 되고, 이런 저출산이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이중부담이 워낙 커진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저출산 대책은 정부가 보육을 약간 책임져줄 테니 여성들은 일도 하고 아이도 낳으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출산의 의무만을 강요하는 것이죠.

하주영/ 이 저출산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일하는 여성에 대한 주제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현재 정부에서는 여성 일자리 창출을 중요한 국가 정책으로 얘기하고 있는데요, 여성 운동을 사회적 주체로 인정하는 흐름으로 볼 수 있지 않나요?

정지영/ 여연을 중심으로 한 주류 여성운동은 이미 국가가 수립하는 사회정책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여연은 <저출산・고령화 대책연석회의>에 참여하고 있죠. 문제는 사회적 주체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겠죠. 사실 정부가 말하는 여성 일자리 창출 정책은 경제의 금융화가 심화됨에 따라 팽창하는 서비스 부문에 활용할 수 있는 유연한 여성노동력에 대한 요구와 맞물려 있습니다. ‘보육의 공공성, 여성고용 확대와 적극적 고용개선 조치, 일ㆍ가정 양립 지원’과 같은 번지르르한 말들이 정부의 정책을 채우고 있는데요, 이런 것들은 곧바로 여성에게 적합한 탄력근로제 도입, 파트타임 일자리 확산 등 ‘다양한 근로시간제’를 빙자한 비정규직의 전면화 계획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죠. 지난 해 11월 국회에서 비정규직법안이 통과된 이후 이런 상황은 더욱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요. 한 측에서 대체가 용이한 단순 업무의 경우에는 조기 계약해지와 재계약 불가 통보가 줄을 잇고, 다른 한 측에서는 우리은행이나 이마트의 직군분리제처럼 비정규직 업무를 별도 직군으로 분리하여 임금과 인사관리에서의 변화를 꾀하고 있죠. 이런 움직임들은 이후 진행될 노동유연화의 다음 단계를 예고하는데, 그중 한 가지가 여성들의 출산, 육아 등을 고려하여 근로시간을 신축화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확산을 의미합니다. 결국 정부가 여성운동을 사회협약이나 대화의 주체로 인정하는 이유가 있는 셈이죠.

하주영/ 빈곤화의 문제는 여성의 삶 전반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한데요,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여성운동의 방향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지영/ 빈곤화, 빈곤의 여성화 문제가 여성운동 내에서도 화두인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것이 애초에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의 생존을 담보로 전가하는 것인 만큼, 빈곤이 심화되는 경향을 동반하는 건 당연하죠.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투쟁이 없다면 이를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올해 여연과 한여노협은 빈곤의 여성화 해소를 주요 과제로 상정하고 SBS에서 10억 기금을 받아서 한부모 여성 지원 사업을 시작했어요. 이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수도권 지역의 한부모 여성가장들에게 서비스 쿠폰을 지원하여 육아, 가사, 간병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과 연결해주는 것인데요, 사회서비스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와 지위를 더욱 위협하고 사회서비스의 시장화를 부추기는 정부 정책과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해요. 사실 서비스 쿠폰을 지원하는 제도는 서비스 수요자의 선택권 확대라는 미명 하에 추진되고 있지만, 수요자 개개인, 대다수가 여성이겠죠, 개개인의 책임을 전제로 한 정부나 기업의 보조이고, 재생산 노동에 대한 사회의 집단적 책임이라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죠. 게다가 이런 제도는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지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루에 3시간만 보육교사가 필요하면 3시간어치의 쿠폰을 정부에서 발급받아 돌보미 사업을 하는 업체에 3시간짜리 보육노동자 파견을 요청하는 방식이거든요.
빈곤 여성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이런 사업을 여성운동이 나서서 맡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오히려 빈곤 문제를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하는 거죠. 결국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것이 지금 당장은 거창하게 무엇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빈곤의 원인이 신자유주의 자체에 있고 이를 뛰어넘는 다른 세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호소하고 조직하는 것일지라도 이런 방향을 명확히 하면서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하주영/ 앞으로 넘어서야할 한국 여성운동의 과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 정리 부탁드립니다.

정지영/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이에 저항하는 여성운동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가 활용하는 여성의 이미지나 여성 인력의 문제를 여성의 기회라고 착각하는 건 큰 문제입니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여성운동은 계속해서 신자유주의 개혁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하게 되겠죠. 따라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고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연히도 이 운동은 여성 노동자, 여성 농민 등이 주체로 나서는 대중운동이 되어야 하겠죠. 더불어 새롭게 형성될 여성운동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운동, 노동운동과 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하주영/ 네, 오늘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정지영 님과 여성운동의 현황과 쟁점에 대해 얘기 나눠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지영/ 감사합니다.

하주영/ 앞에서 보신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올 해 여성의 날 기념 행사는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여하고 여성 노동자의 요구를 알리는 퍼포먼스 등의 축하행사는 여성들만의 축제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 속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불안감을 떨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한 때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08년 3월 8일 여성의 노동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싸웠던 여성노동자들의 정신을 기념하고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세계여성의 날’이 ‘강당’에서 벗어나 다시 여성들의 연대와 투쟁의 힘을 확인하고 다시 싸움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참새회원이라면 누구나 참세상 편집국이 생산한 모든 콘텐츠에 태그를 달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단어, 또는 내용중 중요한 단어들을 골라서 붙여주세요.
태그: 세계여성의 날
태그를 한개 입력할 때마다 엔터키를 누르면 새로운 입력창이 나옵니다.

트랙백 주소 http://www.newscham.net/news/trackback.php?board=power_news&nid=39482[클립보드복사]

민중언론 참세상의 재도약에 힘을 보태주세요

덧글 쓰기

민중언론 참세상은 현행 공직선거법 82조에 의거한 인터넷 선거실명제가 사전 검열 및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므로 반대합니다. 이에 따라 참세상은 대통령선거운동기간(2007.11.27 ~ 12.18)과 총선기간(2008.3.31 - 4.9) 중 덧글게시판을 임시 폐쇄하고 진보네트워크센터의 토론게시판의 덧글을 보여드렸습니다.
선거운동기간이 종료되었으므로 기존 참세상의 덧글게시판 운연을 재개하며, 선거운동기간 중 덧글은 '진보넷 토론게시판 덧글보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 선거실명제 폐지 공동대책위원회  ->참세상 선거법 위반 과태료 모금 웹사이트

잘 읽으셨으면 한마디 남겨주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