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토론회, "노풍 어디서 왔는지보다 무엇을 담을지가 더 중요"

한국사회 지각변동, 노무현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리 = 윤재설 dllp21@kdlpnews.org
지난 9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는 참여사회연구소 주최로 ‘한국사회 지각변동, 노무현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렸다. 총 3부에 걸쳐 5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노무현 현상’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 열띤 토론 속에서 전개됐다. 다음은 발제와 토론요약.

l 1부│노무현 현상에 대한 정치학적 분석
-손혁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2000년 4.13 총선과정에서 나타난 낙천·낙선운동은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낙천·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정치에 대해 실망하던 국민의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는 노무현 현상으로 나타났다.

노무현의 ‘일관된 소신과 원칙의 정치’가 새로운 정치의 상징으로 국민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노무현 지지로 옮겨갈 수 있지 않았을까.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노무현 바람을 불러일으킨 정치적 요인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 후보 선출에 참여하도록 한 국민참여경선제 도입이라는 정치제도적 요인과 정치개혁이 지지부진했고, 국민의 정치불신이 매우 크다는 점, 시민사회 안에 정치의 변화를 요구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적극적인 정치 행위까지 할 수 있는 합리적 개혁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 점, 야당의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여당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과 지역구도에만 기대고 있을 뿐 희망과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자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 등의 정치환경적 요인의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정치가 여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정권교체가 이뤄졌어도 국정운영방식이 크게 바뀌지 않았고 △개혁과 국정운영이 제도화되지 못했으며 △대안세력으로서의 야당이 제 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낡고 썩은 정치에 실망하고 좌절했던 국민이 새로운 기대를 노무현 후보에게 걸어볼 수 있게 된 것은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 지역갈등 등 한국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려움을 피해가지 않고 기꺼이 맞선 노무현의 일관된 정치 역정 때문이었다.

노무현 바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다. 노사모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정치인 팬클럽이다.

‘노무현 바람이 왜 불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풍이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이다. 대선까지 남은 7개월 동안,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노무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지역을 염두에 둔 정계개편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최근 김영삼 전대통령 방문 등의 행보에는 우려가 든다.

지정토론자로 나온 정상호 박사(경제사회정책e아카데미, 정치학)는 “386세대의 욕구가 정당운동으로 표출되지 않고 기존정당의 친개혁적 후보에 대한 지지로 우회했다”며 노무현 현상의 향후 변수로 △노무현 개인의 지지기반과 민주당의 조직기반이 일치하지 않는 점 △정책적 프로그램이 정교하지 않고 변화된 신자유주의와 사민주의 전략 등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있는 점 △최근의 부패문제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조현연 민주노동당 정책위 부위원장(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정치학)은 “노무현 후보가 본선에서 민주당의 기본노선으로부터 일탈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며 “이번 대선에서 시민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 경향을 어떻게 깰 것인지와 진보진영이 얼마나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는 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손혁재 박사는 “진보정당과 시민운동이 이번 선거에서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지만 손해를 본다고 해서 경계를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l 2부│노무현 현상의 사회문화적 분석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


1970년대를 지나며 경제적 기반을 크게 확충한 한국 사회는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새로운 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1990년대가 되자 한국의 일인당 GNP는 7천달러를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OECD 국가들의 일원이 된다. 20년 사이에 한국 사회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변화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의 문화적 핵심은 ‘다양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독재체제는 사라졌지만 사대 벌족의 지배는 ‘패거리 정치’를 통해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이른바 한국 사회의 ‘주류’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지배구조에서 상층을 차지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노풍’은 이러한 ‘주류’에 맞선 ‘비주류’의 도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비주류’의 도전으로서 ‘다양화’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더욱 다양한 욕망을 더욱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낡은 지배구조의 변화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예컨대 사상과 표현의 독점이라는 비합리적 상황의 종식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문화적 합리화의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노풍’은 이 사회의 ‘다양화’가 낳은 ‘문화적 합리화’의 한 산물이다.

‘노풍’은 구조뿐만 아니라 주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문화적 사건이다. ‘노풍’에는 제도정치의 합리적 개혁과 이에 바탕을 둔 진보정치의 전진에 대한 기성세대의 기대가 담겨 있다.

‘노풍’의 확산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인터넷이다. <조선일보>가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진실을 쉽고 빠르게 알 수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초고속 인터넷통신망’을 갖추고 있는 나라이다. ‘인터넷 효과’는 이 나라에서 이미 일상적 현상이 됐다. ‘노풍’은 그 중요한 사회적 결과들 중의 하나이다.

정치개혁은 단순히 제도정치 안의 개혁만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진보정치의 활성화를 통해 제도정치의 틀 자체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노풍’은 이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무엇보다 강조하는 진보정치에게 ‘노풍’은 분명히 자극적인 참조대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노풍’은 제도정치의 틀 자체가 바뀔 문화적 기반이 이 사회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지정토론자로 나온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인터넷이 매도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지만 끊임없이 이벤트를 만들어내고 소비해야 하는 또 다른 함정이 있음을 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대선전망과 관련 “최종에서는 박빙의 결과로 갈 것”으로 내다봤다.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고 말해 좌중에 웃음을 터뜨린 명계남 노사모 대표(영화배우)는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며 “노무현 후보가 (좌우) 양쪽 진영에서 공격을 받기 때문에 그를 지키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l 3부│노무현 돌풍과 진보-보수 대립 구도
-정영태 인하대 교수(정치학)


노무현 후보의 이념적 성향과 정책적 입장은 어떤 것인가. 사회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기본 골격으로 하되 사회통합을 보장하기 위해서 사회복지제도의 확충, 사회협약기구의 확대, 철도·전력산업의 민영화 재검토, 주5일근무제 도입,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동등 대우 원칙 확립, 스웨덴식의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 도입 등을 내세우고 있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한국경제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질서 유지를 주장하고 있으며, 대미관계에 있어서도 한미간 상호평등의 원칙을 전제로 한 주한미군의 유지를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노무현 후보의 이념적 성향은 결코 반자본주의적이거나 반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친자본주의적이고 친미적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 후보의 이념적·정책적 입장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에 다가 갈수록 김대중 대통령의 그것에 근접해 갔고, 앞으로도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보수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순수 영미식 신자유주의, 전통적인 한미관계, 합리적인 반공주의에 근접해 가고 있다.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는 주로 이미지나 인상과 같은 감성적인 요인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돌풍의 주 근원은 노무현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책공약이라기보다는 ‘이미지나 인상’ 등과 같은 감성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기반은 대단히 유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회창 후보든 노무현 후보든 일반국민들이 각각을 지지한 것은 정책이나 이념적 성향보다는 이미지나 인상, 또는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진보-보수의 대결구도가 형성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로 대표되는 온건개혁과 이회창 후보 또는 이부영 후보로 대표되는 온건보수간의 보혁구도가 형성될 가능성은 없지 않다.

토론자로 나온 조원희 국민대 교수(경제학)는 “김대중 정부는 좌우익 대립을 시장 중심의 우파적 개혁으로 해소하려 했다”며 “최근의 각종 ‘게이트’ 사건은 한국적 시장개혁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현재로서는 진보-보수의 대립구도 형성은 어렵다”고 말했다.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국장은 노무현 후보의 ‘말바꾸기’ 사례를 제시하고 “노무현 후보가 재벌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확실하다”며 “이념과 정책을 얘기하지 않으면서 이미지 정치에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정치에서는 ‘풍’(風)과 ‘세’(勢)가 중요하다”고 지적한 김동춘 참여사회연구소장(성공회대, 사회학)은 “돈에 의한 보스가 아닌 점, 보수언론을 정면돌파하고 있는 점과 노사모의 존재에서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더라도 정치를 한 단계 높인 것은 사실”이라며 “이제 우리 사회를 왼쪽으로 옮겨 진보-보수 지형으로 만드는 것이 합당하다”고 덧붙였다.
[ 87호] 5.13 ~ 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