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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키보다 더 크게 자란 왕고들빼기는 그 큰 키에 견주어 꽃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흰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니고 빛바랜 듯한 누런 꽃 색깔 때문인 것 같다. 왕고들빼기 밑에 자란 같은 국화과에 속하는 연보라색 쑥부쟁이가 오히려 더 도드라져 보인다. 고마리며 배초향 따위도 흰색 , 분홍색, 보라색으로 꽃단장을 했다.
꽃들은 저마다 마치 나 좀 보란 듯 어여쁜 색을 뽐내고 있다. 왕고들빼기에 앉아 있는 좀잠자리도 꽁지가 점점 붉어져 가고 있다. 암컷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혼인 색을 띄는 것이다. 그런데 왕고들빼기 꽃은 왜 저다지 수수할까?
왕고들빼기는 꽃보다는 잎에 더 정성을 많이 들인 듯하다. 왕고들빼기 잎은 정말 독특하다. 보면 볼수록 왜 저런 잎을 갖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효율성'만 따지는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중세의 신비한 칼 모양을 떠오르게 하는 잎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환상에 빠지고 만다. 뒷골목 콘크리트 틈에서 정말 굵직한 잎을 비쭉비쭉 내밀고 있는 왕고들빼기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면 저 누르스름한 꽃 색깔도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왕고들빼기는 유럽이나 북미에서 얼마 전 귀화해온 풀 같다. 그러나 왕고들빼기는 쑥이나, 환삼덩굴, 강아지풀, 바랭이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자라온 풀이다. 옛날에는 김치도 담고 나물로도 먹었던 풀이다. 요즘도 가끔 쌈 거리를 늘어놓은 데서 보게 된다. 그런데서 굳이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왕고들빼기는 어디서나 흔히 자라고 또 봄부터 가을까지 언제나 뜯어먹을 수 있다.
왕고들빼기가 자라던 숲 언저리 텃밭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자체들은 이런 땅을 주민한테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서 그 뜻도 잘 알 수 없는 '근린공원'으로 바꾸고 있다. 이런 공원에는 이미 귀족이 되어버린 야생화들만이 가꾸어진다. 강아지풀, 바랭이, 왕고들빼기는 자라기 힘들다.
한쪽에선 멀쩡한 숲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싹 파헤쳐 버리는데 다른 쪽에서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숲을 만든다고 난리다. 숲을 만드는 것도 꼭 숲을 파헤치는 것 마냥 개발하듯이 한다. 저들은 정말 저렇게 밖에 할 줄 모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