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광복절 직후 교회를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급증하던 당시, 엄마에게도 코로나19가 찾아왔다. 활동가로서 나름 코로나19 관련 현황에 관심을 가지고 대응도 함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가족의 일이 되고 나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확진자가 한창 급증하던 때라 방역당국과 지역 주민센터, 보건소 등에서도 혼란이 컸다. 엄마는 확진 결과를 통보받고 이틀째 밤이 돼서야 다른 여덟 명의 환자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은평의 생활치료센터로 이동했다. 하지만 생활치료센터 입구에서 병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음 날 다른 생활치료센터로 가야 했다. 동생은 다행히 검사 결과 감염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지만 자가격리자를 위한 담당 공무원 배정과 물품 제공은 거의 일주일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엄마가 다니던 작은 교회는 뉴스거리가 돼 연일 누군가의 식탁 위에 올랐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 혹시 누군가가 정리해 둔 내용이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제대로 정리된 내용은 찾을 수 없어 페이스북에 도움을 요청했다.
비난과 불안은 가짜뉴스를 만들 뿐
페이스북에 도움을 요청하고 주변에 엄마의 코로나19 확진 소식을 알렸을 때 가장 구체적인 도움을 준 이들은 앞서 유사한 경험을 했던 지인들이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에 참여하시는 쌔미 님도 그중 한 분이다. 사랑교회를 다니던 쌔미 님의 어머니는 코로나19에 감염되면서 일터에서 권고사직까지 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보육교사로 성실히 일하던 어머니가 확진 환자가 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학부모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써서 우리까지 피해를 보게 된 것을 책임질 거냐”고 항의해 어린이집이 사직을 권고한 것이었다. 쌔미 님은 이 경험을 공개편지 형태로 <한겨레>에 공유했고 ‘차별금지법은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믿었던 부모님이 이 일을 계기로 생각을 바꾸게 됐다고 전했다.
사실 쌔미 님이 먼저 어머님의 경험을 공유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원망에 먼저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전광훈 목사를 비롯해 소위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개신교인들에 대한 분노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던 시기였고, 그 한복판에서 엄마도 감염됐기 때문이다. 엄마가 직접 집회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교회를 다니던 몇 분이 참석했고, 마침 그 교회가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기 직전에 그들이 교회에 참석하면서 감염이 확산됐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는 분노의 감정이 먼저 튀어 올랐다. ‘그러게 왜 조금이라도 일찍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지 않고’, ‘왜 굳이 그런 분들이 있는 교회를 다니셔서’ 결국 이런 상황을 맞이하는지 화가 났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코로나19가 확산되는 동안 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혐오와 비난의 말들은 어디로든 향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를 둘러싼 두려움과 불안의 실체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아닌 서로를 향한 감시와 비난이 됐다.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건강에 대한 걱정에 앞서 덜컥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민폐부터 걱정한 사람들은 가짜뉴스를 믿고 도망을 다니거나 혼자 해결해 보겠다고 엉뚱한 약을 찾아다녔다. “정부가 우리를 탄압하려고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퍼트렸다”는 전광훈의 기가 막힌 음모론도 오히려 이런 인식을 적극 활용하며 ‘태극기 집회’ 참가자에게 확산됐다. 5월 연휴 이후 이태원을 중심으로 성소수자 확진 환자의 수가 증가했을 때 혐오와 낙인의 문제를 이야기했던 나는, ‘보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집단을 한 데 묶어 똑같은 방식의 비난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했다.
결국 비난은 낙인을 재생산하고 불안을 확산시킬 뿐이다. 그러나 위로와 연대는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든다. 원망과 불안이 앞섰던 내 마음이 무색하게 엄마의 확진 소식을 들은 친구들과 지인들은 어떤 평가나 비난도 없이 많은 도움과 위로의 마음을 전해주었고, 그 경험은 엄마의 마음과 일상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엄마의 그림일기, 새로운 친구들
엄마가 심각한 증상 없이 무사히 생활치료센터에서 퇴원해 추가 자가격리 기간을 보내고 계실 즈음, 동생은 엄마에게 그림일기를 시작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엄마는 작은 스케치북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며 짧은 몇 문장으로 하루하루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추석 연휴 때 우리의 응원에 용기를 내 인스타그램에도 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확진 소식으로 페이스북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알게 됐던 내 친구들이 엄마의 그림일기에 하트를 누르고 “시장에서 오징어를 얄밉게 팔았다”는 엄마의 일기에 “어머 정말 얄미워요”라는 댓글을 남긴다.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엄마의 일상에 새로운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가짜뉴스 알고리즘으로 채워지던 유튜브를 대신해 새로운 친구들이 엄마의 일상 한편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온라인에서 막연히 쏟아지던 비난으로 위축되는 대신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특정 집단을 향한 낙인과 차별, HIV/AIDS 감염인들이 일상처럼 듣던 “내가 낸 세금으로 저런 사람들 치료해주지 말라”는 말들이 이제 코로나19 확진 환자들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감염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으며, 아픈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하고, 공공의료 체계로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 혐오와 비난이 아닌 권리의 보장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원칙은 오랜 시간 감염인들이 투쟁을 통해 증명해 온 역사다.
코로나19가 누구에게나 언제든 다가올 수 있었던 2020년 한 해를 지나며, 이제 비난과 낙인보다는 서로의 삶의 조건을 살필 수 있는 연대, 함께 차별을 인식하고 바꿔보자는 제안이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변화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엄마의 그림일기처럼, 더 많은 사람들의 일기에도 새로운 하트가 쌓여갈 것이다.